제12화. 성역 (3)
"나무의 자식들아."
수천 수만 날것들의 퍼득거림, 그 소음 속에서도 사마에트의 음성은 또렷하게 들렸다.
서울역의 동쪽, 높은 건물들 위로 사마에트가 강림하고 있었다.
산맥처럼 거대한 몸, 그 아래 있는 빌딩들이 성냥갑처럼 자그맣게 보였다.
"아이고 이번엔 또 뭘 하려고."
"에이 썅. 좀 쉬려고 했더니만."
사람들이 사마에트를 보며 욕을 뱉었다.
이제는 이 상황에 익숙해져서인지, 사람들은 사마에트를 두려워하지 않고 짜증을 냈다.
'그 반응들... 얼마나 가나 봅시다.'
사람들을 보며 상원이 생각했다.
사마에트의 몸 주변에 작은 점들이 날고 있었다
그 수가 수천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저게... 다 새들인 거죠?"
진아가 입을 떡 벌렸다.
사마에트의 주변을 날던 날것들이 서울역쪽으로 날아왔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아드는 날것들의 기세가 대단했다.
"새 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박쥐도 있는 것 같고... 저건, 뱀, 뱀... 입니까?"
매, 독수리, 공작, 기러기, 참새, 까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꿈틀거리는 거대한 형체.
뱀 맞다.
깃털 달린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날고 있는 뱀도 있었다.
<승천계시록>은 이렇게 말한다.
[시험에 임한 자들에게 하늘 위 옥좌 곁에 계신 분들이 사자를 보내시매, 날것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오니 그 기세가 노도같고 그 소리가 우레같더라.]
'날것들이라길래 새일줄 알았지 저런 것들이 있을 줄은 알았나?'
상원이 날것들을 보며 생각했다.
날개달린 뱀뿐만 아니라 웬만한 새보다 거대한 딱정벌레에다가.
"페가수스...?"
문혁이 말했다.
과연, 그가 보는 곳엔 은색 털을 눈부시게 휘날리며 날아오는 말이 있었다.
메두사의 피에서 태어난 천마, 페가수스였다.
저들 하나하나가 승천자들의 사자다.
두 번째 시험이 끝날 때까지 수험자들을 지켜본 승천자들이 이제 자기들의 사자를 보내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승천자와 수험자 사이의 <수호계약>을.
상원은 오른손을 보며, <기계장치의 신>을 처음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뒤에 청소부를 달고 다니는 승천자를.
'제거 대상인 주제에 <권좌>에 오르겠다니... 허 참.'
실험실에서 들었던, 뼛속까지 전율하게 만드는 거대한 포효.
그건 새하늘 주인이 보낸 '청소부'의 울음소리였다.
기계장치의 신의 말마따나, 걸리면 승천자 할애비라도 뼈도 못 추린다.
그런 주제에, 수호계약 같은 건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수호계약은 쌍방계약이며, 계약 당사자인 승천자에게도 의무가 생기니까.
그런 이유로, 설령 상원이 <불신자>가 아니었더라도 <기계장치의 신>과는 수호계약을 맺지 못했을 것이다.
여하튼.
날것들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제 그들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서울역의 상공을 돌고 있었다.
성화에서 하늘로 뻗어나가는 부홍색 빛기둥을 중심으로, 날것들의 궤적이 고리를 그렸다.
서울역의 사람들은 멍청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날아오지는 않고 맴돌고만 있지?"
누군가 말했다.
그때, 날것들 무리에서 새 하나가 빠져나왔다.
온 몸이 새하얀 비둘기였다.
주변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비둘기는 곧장 상원에게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상원은 알고 있었다.
저 비둘기가 향하는 곳은 따로 있다는 걸.
사뿐사뿐, 비둘기는 상원을 지나쳤다.
"어?"
비둘기가 앉은 곳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앞으로 내민 진아의 손바닥 위였다.
"구구."
비둘기가 맑게 울었다.
도심을 떠도는 우중충한 닭둘기들과는 달랐다.
순백색 깃털은 눈부셨고 날씬한 자태는 우아했다.
비둘기를 바라보는 진아의 눈에 감격이 어렸다.
"아...."
곧이어, 진아의 오른손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또륵
맑은 눈물이 진아의 볼을 타고 흘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저 비둘기를 보낸 승천자, <낙원의 수문장>의 음성이 울리고 있을 것이다.
회귀 전 상원은 진아의 계약 장면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런 표정이었군.'
상원이 작게 웃었다.
곧이어 성화의 불꽃과 같은 눈부신 분홍 불꽃이 진아를 뒤덮었다.
불꽃 속에서도, 진아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했고, 옷은 실오라기 하나도 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하늘로 솟구쳤다.
그러기를 몇십 초,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당신을 경배하나이다."
진아가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진아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말했다.
"저게 선택인가? 저 여자가 선택받은 거야?"
"뭐야, 우리는?"
그 말과 동시에
까아악!
히히힝!
수천마리 동물들이 울부짖으며, 일제히 서울역을 향해 쏟아졌다.
까아아악!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상원과 문혁은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커다란 게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거지?'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하얀 새를 보며 상원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날개 끝에서 끝까지 족히 4m는 될 것 같았다.
가까이 날아오자 그 거대한 날개가 태양을 가려, 그림자가 상원과 문혁을 덮었다.
"꾸르르륵."
새가 날개를 접고 문혁 앞에 앉았다.
새를 향해 뻗는 문혁의 손에서 붉은 빛이 쏟아졌다.
'신천옹...? 잠깐, 그렇다면 백문혁의 수호신은.'
상원이 문혁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신천옹을 사자로 쓰는 승천자는 상원이 알기로 한 명 뿐이다.
<해안선의 귀신>, 그 끝빨 굉장한 승천자가 백문혁의 수호신이라고?
'그런데... 백문혁, 저 얼굴 기억에 없는데? <해안선의 귀신>의 화신이, 그것도 서울역에 있는데 몰랐다고?'
상원이 문혁을 보며 생각했다.
“메에에.”
그 다음 상원의 눈에 들어온 건 검은 염소였다.
보통 승천자들은 하늘과 땅을 잇는 사자인 날것들을 전령으로 삼지만, 어떤 승천자들은 그러지 않기도 했다.
혜경의 앞에 있는 검은 염소가그런 경우였다.
그 털가죽이 어찌나 새까만지 빛마저도 반사되지 않았지만, 눈만은 샛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헤헤, 안녕?"
혜경이 베실실 웃으며 염소를 쓰다듬었다.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염소는 가만히 혜경을 보고만 있었다.
다음 순간, 염소가 움직였다.
혜경 바로 앞까지 다가간 염소의 입에서 긴 혀가 튀어나왔다.
염소가 새까만 혀로 혜경의 목덜미를 핥았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지켜보는 사람들을 경악케 하기 충분했다.
상원으로서도, 마지막 시험까지 겪으면서도 그런 그로테스크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혜경이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그리고 염소가 두 다리로 섰다.
일어선 염소가 엎드린 혜경을 내려다보면서 이를 씩 드러내고 웃었다.
"저게... 저게 무슨....?"
경악한 창훈이 말을 더듬었다.
계약의 붉은 빛.
붉은 빛이 터져 나온 곳은, 혜경의 손바닥이 아닌 목이었다.
수호신의 인장이 혜경의 목에 박혀 있었다.
'허, 그래. 저 자가 화신을... 골랐단 말이지?'
상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검은 염소의 주인, 그 신칭(神稱)은 <검은 숲의 목자>.
새하늘 시험의 승천자들을 통틀어 그 능력은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지만, 그는 자기 화신을 고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화신이 되기 위한 조건이 지극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완전히 미쳐버린 자만이 화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도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사람이 두 번째 시험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다.
'아니야. 살아있을 수도 있는 거지. 확률이 아주 낮긴 하지만.'
그 사례가 지금 상원의 눈앞에 있다.
검은 염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고, 혜경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어... 여보."
혜경이 말했다.
"여보! 정신이 들어?"
창훈이 혜경에게 외쳤다.
창훈을 바라보는 혜경의 눈이 맑았다.
"아... 오빠. 미안해. 좀 부끄러운 꼴을 많이 보였다."
혜경이 희미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아니야 혜경아. 정말, 고생 많이 했어."
혜경을 꼭 안은 창훈의 어깨가 흔들렸다.
"은수... 우리 은수."
딸의 이름을 부르며, 창훈은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어린 딸이 눈 앞에서 죽었는데, 창훈이라고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아내를 돌보느라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 은수 몫까지 열심히 살자."
혜경이 파리하게 웃으며 창훈의 등을 두드렸다.
그들을 보는 진아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다행이에요 정말. 창훈씨도 그동안 고생 참 많이 하셨는데"
"정신병이 저렇게 낫기도 하는군요. 계약의 영향입니까?"
은수 가족을 바라보던 진아와 문혁이 말했다.
"아니."
상원의 말에 진아와 문혁이 상원을 보았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혜경의 정신병은 고쳐진 게 아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그건 <검은 숲의 목자>가 수호계약에 따라 그녀의 광기를 잠시 거두었기 때문이다.
<검은 숲의 목자>의 화신이 앞으로 어떤 꼴을 겪게 되는지, 상원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왜나면, 새하늘교의 계획에선 상원의 누나인 상은이 <검은 숲의 목자>를 받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을 즐기는 게 나을 지도.'
부부를 바라보는 상원의 표정이 착찹했다.
* * *
광장 여기저기서 붉은 빛이 솟아올랐다.
상원은 계단에 앉아 물끄러미 광장을 바라보았다.
하늘엔 여전히 수많은 날것들이 맴돌았고, 그 너머에서 사마에트가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있었냐?"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기계장치의 신!'
상원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지만,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아래에 있다네 불신자 선생. 여기 좀 보겠어?"
벤치 아래쪽이었다.
상원은 발치를 내려다 보았다.
다람쥐 한 마리가 상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상원의 주먹 하나 될 정도의 조그만 덩치.
상원은 다람쥐가 보통 다람쥐가 아니란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다람쥐의 등에 커다란 태엽이 꽂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람쥐 등짝에 태엽이라니... 좀 악취미군요."
"네놈 박아 넣은 그 몸뚱아리부터가 악취미지! 빠하하하하!"
다람쥐가 깔깔대고 웃었다.
검은 염소의 웃음은 섬뜩하고 기괴했지만, 이 다람쥐의 웃음엔 어쩐지 정감이 갔다.
'저놈의 웃음소리는 참 적응이 안 된달 말야.'
상원의 얼굴이 굳었다.
"아이고 우리 불신자 선생 얼굴 굳은 거 보소. 얼굴 너무 굳히지 마라 그 비싼 얼굴에 주름지면 네깟 거 영혼 팔아도 변상 못한다잉."
"암요 그러시겠죠. 제가 죽을죄를 지었네요. 아이고 죽여주십쇼."
"네놈 죽여서 어디다 쓰게? 뽕 뽑을 때까지 부려먹어야지. 빠하하하! 불신자 선생, 그나저나 몸은 좀 어때?"
다람쥐의 물음에 상원은 몸을 내려다 보았다.
마물의 스킬을 배우는 데다가 그 심장엔 신기급 보구가 박혀 있고 스스로 강해지기까지 하는 육체.
"이거 도대체 어떻게 만든 겁니까?"
"잘."
"아이 씨.... 뭘 기대한 내가 바보지."
상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불신자 선생, 보니까 의체관리시스템에 접속한 기록도 있더만. 그럼 대충 생긴 거 알겠네?"
"그럼요. 그걸 봤으니까 이런 걸 물어보지."
"그래 그래. 그럼 그것도 궁금하겠지?"
다람쥐가 두 손을 자기 허리에 짚고 말했다.
"뭐가요?"
"그 의체, 어떻게 하면 강해지는지."
다람쥐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상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