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성역 (2)
"뭐냐 넌?"
나이프를 든 사내가 코를 슥 비비고 물었다.
'저 놈 이름이 뭐더라? 그래 김만웅, 김만웅이었다.'
기억나는 얼굴이었다.
상원이 수도 없이 맞닥뜨렸던 잡배들은 별다른 인상마저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 많은 얼굴들 중 김만웅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에 남았다.
김만웅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강상중의 수하이기 때문이다.
'강상중.'
오랜만에 떠올리는 이름이었다.
승천 시험에서 수험자의 적은 마물 뿐만이 아니다.
수험자들끼리도 칼을 겨누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들의 수호신이, 그리고 승천 시험이 피를 원하기 때문에.
서울의 수험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잔악한 여섯은 계시록에 이른 대로 <서울 육마귀>라 불렸다.
서울 육마귀 중 하나인 강상중은, 상원과는 지독하게 얽혔었다.
강상중 때문에 넘어야 했던 수많은 생사의 고비들, 그걸 생각하니 절로 이가 갈렸다.
'열세 번째 시험에선 진짜로 죽을 뻔 했었지.‘
열네번째 시험에 있는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선 강상중을 제거해야 했다.
그 강상중의 졸개 중 하나가 김만웅이었다.
강상중이 꾸민 일엔 언제나 김만웅이 얽혀 있었다.
'여기서 저 놈을 제대로 잡으면, 강상중을 낚을 수 있다.'
지금쯤 신림역에 있을 강상중은 주도면밀하기로는 짝이 없는 인물이라 좀처럼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김만웅에게 자신을 각인시켜서 나중에 그 고용주인 강상중까지 끌어내는 게 상원의 계산이었다.
'저 놈을 어떻게 손봐줘야 나중에 강상중을 만났을 때 내 이름을 쪼르르 일러바칠까?'
김만웅에게 다가가며, 상원은 어깨를 풀었다.
"멈추시죠."
그때 한창훈과 김만웅 사이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뿔테 안경에 짧은 머리, 구릿빛 피부.
'아까 그 군인이네.'
어색한 말투로 제례가 어쩌고 하던 군인이었다.
피에 젖어 엉망이 된 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는데, 얇은 티 아래 균형 잡힌 근육이 도드라졌다.
"이건 뭐야 또?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같이 진짜."
김만웅이 그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군인은 키가 크 편인 김만웅보다 커서 김만웅은 그를 올려다 보아야 했다.
예리한 나이프가 자신을 겨누고 있음에도 군인은 당당하게 서 있었다.
"우리 젊은 친구가 칼이 안 무섭나 보네?"
김만웅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칼을 들지 않은 손을 휘휘 저었다.
칼을 들이댄 만웅이 군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군인이 딱딱하게 말했다.
"뭐가 거기까지야?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이런 거 해야지?"
만웅의 말에 뒤에 선 덩치들이 킬킬대고 웃었다.
만웅이 칼을 휘휘 휘두르며 군인에게 다가갔다.
"분명 경고했다."
그 다음 순간, 군인의 옆차기가 만웅의 울대에 직격했다.
'오호!'
격투기를 오랜 시간 수련한 상원의 눈에도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발차기였다.
보통 사람들의 눈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끄... 끄억!"
만웅이 게거품을 물며 앞으로 쓰러졌다.
"다음은? 너냐?"
만웅을 쓰러뜨린 군인이 덩치들을 보며 말했다.
무리의 선두에 선 행동대장을 일격에 쓰러뜨렸다.
졸개들은 겁을 먹고 물러날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잘 싸우고 판단도 좋다만, 운은 없구나.'
상원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X발."
만웅의 부하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군인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퍽!
군인의 재빠른 펀치가 달려들던 놈의 인중에 박혔다.
"끄윽!"
만웅의 부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군인은 날렵하게 움직이며 몰리는 상황을 피했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게!"
그럴 수록 만웅의 부하들은 더 악착같이 들러붙었다.
한 명 한 명은 군인보다 약했지만, 그들은 조직화된 움직임으로 군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군인은 백스텝을 밟으며 선전하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발이 눈에 띄게 느려졌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단련된 인간이라지만 훈련된 집단을 홀로 상대하긴 무리였다.
털썩
"이런...."
부지런히 움직이던 발이 꼬여, 군인은 털썩 주저앉았다.
"이 개새끼!"
만웅의 부하 하나가 그를 막 덮치려 하고 있었다.
'더 뒀다간 정말 무슨 일 나겠군.'
상원이 움직였다.
튼튼한 두 다리가 지면을 박찼다.
만웅의 부하들과 군인이 엉킨 현장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상대는 괴력도 용력도 없는 보통 인간.
주먹도 정강이도 필요 없었다.
그 속도 그대로, 상원은 그 드넓은 어깨를 만웅의 부하에게 박았다.
퉁
"크억!"
커다란 소리와 함께, 상원의 어깨에 부딪힌 사내가 몇 미터를 날아 땅에 쳐박혔다.
사람이 아니라 소형차에 부딪혀 날아간 것 같았다.
그 이질적인 광경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어? 어어?"
"뭐야 이거."
만웅의 부하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도저히 일반인의 범주에는 묶일 수 없는 껑충한 키와 단단한 몸.
거기서 나오는 위압감만 해도 무시무시했는데, 운동능력은 초인 수준이었다.
만웅의 수하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아이 씨."
만웅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이런 같잖은 새끼가... 어? 야 너네들 뭐해?"
만웅의 시선이 군인과 상원, 그리고 주춤거리는 부하들에게 차례로 닿았다.
“어... 어?”
상원을 올려다본 만웅의 얼굴이 굳었고 눈빛에 두려움이 감돌았다.
"에... 에이 X발! 너네들 쫄았냐? 명색이 상사파라는 섀끼들이 이래가지고서야, 하 나 참."
만웅이 자켓을 벗어 던지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굵은 팔뚝엔 용 문신이 꿈틀거렸다.
"뭐해 새끼들아! 다구리 쳐!"
"아... 에이 X발!"
"끄아아악!"
만웅의 날카로운 고함에 부하들이 악을 지르며 상원에게 달려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하는 짓은 똑같네. 아니, 원래 이런 놈들인 거구나.'
상원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제일 앞에서 달려드는 놈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살짝 밀었다.
"으억!"
아주 살짝, 그 동작에 피를 토하며 몇 미터를 날아갔다.
그 뒤에 서 있는 놈 이마에 딱밤 한 번.
빡!
"끄아악!"
두개골이 부서지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딱밤을 맞은 놈은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주먹을 쓴 것도 발을 쓴 것도 아니다.
어깨치기에 손바닥 밀기에 딱밤, 그 장난스런 동작에 덩치 큰 폭력배가 날아가고 혼절했다.
궤를 달리하는 폭력에 만웅의 부하들은 굳어버렸다.
"너 이 새끼! 뭐, 뭐야 너!"
만웅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상원이 그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김만웅이."
만웅이 흠칫 놀랐다.
"너 이 새끼... 어디서 보낸 거야? 팔성이냐? 득중이파야? 이런 썅."
상원이 만웅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만웅 앞에 도열해 있던 부하들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만웅이 주저앉았다.
쨍그렁
만웅이 놓친 나이프가 땅바닥에 떨어지며 쇳소리를 냈다.
"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내 뒤에 누가 있는 줄 알아!"
"알지."
상원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강상중이는 자기 이름 팔고 다니는 거 안좋아하지 않나?"
만웅의 눈이 커졌다.
"니가... 니가 그걸 어떻게?"
대답 대신, 상원은 만웅이 떨어뜨린 나이프를 주웠다.
"만웅아."
상원은 나이프를 무시무시한 기세로 내리 찍었다.
만웅의 손을 향해.
"으아아악!"
목청을 찢는 듯한 비명이 광장에 울려퍼졌다.
나이프는 만웅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박혔다.
나이프는 단단한 돌바닥을 시든 채소마냥 꿰뚫었다.
졸졸
만웅이 지린 오줌이 회색 돌바닥을 적셨다.
"이게 뭐냐, 신발 갈아 신어야 되게 생겼잖냐. 너 때문에."
상원의 날선 목소리가 흉흉했다.
상원이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커다래진 만웅의 눈동자에 상원의 얼굴이 비쳤다.
악귀같은 냉소를 머금은 얼굴이.
"오늘 겪은 이 수모, 똑똑히 기억해라. 기억해서, 반드시, 너네 회장, 강상중이한테 전해라."
상원이 만웅의 살찐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으으...."
만웅이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내 이름은 조상원이다."
상원이 등을 돌리며 내뱉었다.
"형님, 형님 괜찮으십니까?"
부하들이 외치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 * *
"이번에도 또 신세를 졌네요, 상원씨.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창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니오 그냥, 해야 할 일이라서 그랬을 뿐입니다."
상원이 냉정하게 말했다.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신경쓰지 마십시오."
짧게 대답한 상원이 혜경을 보았다.
혜경은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아 히죽대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아랫도리가 다 젖은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무슨 일이에요?"
뒤늦게 온 진아가 놀라며 말했다.
그녀도 말끔한 새 옷 차림이었다.
지하철에서 봤을 때는 꾀죄죄한 몰골이었는데, 씻고 새 옷을 입고 나니 나름 귀여운 인상이었다.
'낙원의 성화가 귀엽다고? 허 참, 별일이네.'
상원이 피식 웃었다.
"아 그냥, 일이 좀 있었습니다."
창훈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은수 엄마는 다시 씻겨야 할 것 같아요. 가자 여보."
"헤헤, 아빠, 나 과자 먹을래."
"아이고, 혜경아."
창훈이 어리광 부리는 혜경을 일으켜 세웠다.
'그나저나, 이런 일은 없었는데. 저 부부 때문인가.'
상원은 혜경의 얼굴을 보았다.
웬만해선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정신이 나가버린 채로 있다면, 김만웅 같은 잡배들이 눈독을 들이는 건 당연했다.
'회귀 전엔 이런 일은 없었다. 미래가 달라지고 있어. 이걸 빌미로 강상중을 낚을 수 있게 됐으니... 잘 된 일이긴 한 것 같다만.'
조상원, 그도 회귀자인 이상 언젠간 그가 알지 못하는 미래에 부딪혀야 한다.
하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변수라는 건가. 앞으로 주시해야겠군.‘
일곱 별의 왕관을 얻기 위한 계획의 큰 틀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에도 빈틈이 있으면 안된다.
’결코 쉽게 갈 수는 없다는 거지. 긴장을 풀면 안되겠다.‘
상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도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군인의 말이 상원의 생각을 끊었다.
"808특임단 백문혁 중위입니다."
단단하고 중후한 목소리.
상원은 문혁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온통 굳은살 투성이었다.
"조상원입니다."
'백문혁? 누구지? 이런 사람이 있었나?'
회귀 전에도 백문혁은 서울역에 있었을 테지만, 상원의 기억 속엔 없었다.
서울역까진 살아서 왔지만 곧 죽어버렸단 얘기.
'의협심이 상당한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은 초반에 죽기 딱 좋지.'
새하늘 시험은 그런 세계다.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부디, 오래 사시길."
"예?"
"아닙니다."
상원이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까악! 까악!
끼루룩!
울음소리였다.
높고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아이구 저게 다 뭐야? 샌가?"
"새다! 새에요!"
사람들이 하늘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상원과 문혁, 진아도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새까맸다.
퍼덕 퍼덕
날개짓 소리로 하늘을 삼키며, 수천 마리 새들이 서울역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선택의 시간."
상원이 내뱉듯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