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0화 (10/230)

제10화. 성역 (1)

"윽! 이게 뭐야."

질린 목소리가 상원의 감탄을 끊었다.

복도에 시체가 즐비했다.

어떤 남자는 가슴팍이 넝마가 되어 있었고 어떤 여자의 얼굴은 고통에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우우욱."

상원의 뒤에서 여자 하나가 구토를 했다..

서울역도 광화문처, 세계 인구가 10%로 줄 때까지 이어지는 습격을 받았을 것이다.

복도에 즐비한 시신들은 그 결과였다.

"서울역은 안전하다더니...."

창훈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럴 수밖에.’

갖은 고난을 헤치고 성화를 찾아왔더니만 정작 성화가 있는 서울역은 온통 시체 투성이니.

"일단 갑시다. 성화는 지상에 있을 거에요."

상원이 앞장서 걸었다.

창훈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시체를 밟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하며 그 뒤를 따랐다.

질척한 피가 상원의 발에 달라붙었다.

"아악! 아아악!"

시체를 밟고 넘어진 중년 남자가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아빠, 무서워요. 집에 가자."

혜경이 울면서 창훈에게 매달렸다.

그렇게, 사람들은 피비린내와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한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저 멀리 에스컬레이터가 보였다.

밝은 햇살이 에스컬레이터를 비추고 있었다.

위잉.

정적 속에 기계음이 울렸다.

“에스컬레이터는 잘만 움직이네요.”

창훈이 말했다.

상원은 에스컬레이터에 탔다.

서울역 플랫폼에 내렸을 때 느꼈던 온기는 에스컬레이터가 올라갈수록 강해졌다.

마침내 서울역 지상에 다다랐을 때, 상원은 한겨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온기가 온 몸을 감싸는 걸 느꼈다.

"저게 성화인가?"

"세상에, 엄청 크네요."

지상에 올라온 사람들이 서울역 동편 광장을 바라보고 말했다.

과연, 서울역 동편 광장 한가운데 거대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분홍색 불꽃은 한낮이었는데도 선명했고, 땔감이 없었는데도 맹렬했다.

빛 기둥이 지상의 불꽃으로부터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에서도 보았던 빛줄기였다.

"엄청나네요."

창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무슨 건물만 한 것 같은데."

사람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있네요?"

어느새 상원 옆에 온 진아가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불꽃 주위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광화문 광장 말고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제 저들과 함께 다음 시험을 헤쳐 나가야 한다.’

"에헤헤헤!"

혜경이 소리를 지르며 불꽃을 향해 달려갔다.

"여보, 그러다 넘어지겠다. 조심해!"

창훈이 혜경을 따라갔다.

상원은 창훈이 그렇게 밝은 표정을 하는 걸 본 일이 없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진아가 물었다.

"시험은 끝난 거나 다름없어요. 일단 좀 쉽시다."

진아의 말에 대답한 상원이 근처의 벤치에 주저앉았다.

상원은 서울역의 거대한 역사(驛舍)와 마트, 그리고 서울역을 둘러싼 마천루들을 살펴보았다.

그 마천루 위에 사마에트가 있었다.

예의 그 표정 없는 얼굴을 한 채로.

"당신."

상원이 중얼거렸다.

"거기서 내려다보면서, 당신은 어떤 기분이지?"

상원은 사마에트의 눈을 바라보았다.

칠십억 개의 고통과 죽음을 하나 하나 굽어보는 그 존재는 어떤 생각과 기분으로 살아갈까.

인간이라면 미쳐버렸을 것이다.

인간의 범주는 아득하게 초월했으니 끝까지 바라보는 것일 테고.

"과연, 승천자야. 잘나셨어."

상원이 피식 웃었다.

그녀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낀 건 기분 탓일 것이다.

‘성화까지 왔으니, 이제 두 번째 시험은 끝났다. 일단은 좀 쉬자.’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화의 온기를 받으며 상원은 깊은 잠이 들었다.

* * *

"나무의 자식들아."

천둥 같은 목소리가 상원을 깨웠다.

벤치에서 튕기듯 일어난 상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열차들이 도착한 것인지, 잠들기 전보다 사람이 늘었다.

수백은 될 것 같은 사람들, 아이도 노인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청장년이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두 번째 시험이 끝났다.“

[두 번째 시험 <성화>를 통과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세지와 함께 시험의 표식이 두 번 점멸했다.

시험이 끝났음을 정식으로 알리는 신호였다.

그 말인 즉 승천자들의 선택지에 오를 1푼이 정해졌다는 뜻이다.

동시에, 전 인류의 99%가 명을 달리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축하한다."

사마에트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는 살아남은 1푼이다."

그녀의 말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1푼이면... 1%지? 전 세계에 살아남은 사람이 7천만?"

"99%가 죽었다고? 하룻밤 사이에? 말도 안 돼."

경악이 군중을 덮쳤다.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70억 가까운 사람들이 몰살당했다.

핵전쟁도 아니고 운석 충돌도 아니고, 마물 습격이란 소설 같은 일 때문에.

"아이고, 우리 아들. 우리 아들은 잘 있나?"

아줌마가 전화기를 붙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소용없는 일이다’.

통신망은 모조리 망가져 버렸으니 전화가 될 리가 없다.

그리고 아들 걱정 할 시간에 본인 목숨 보존할 궁리를 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이제 선택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목욕재계하고 선택의 시간을 기다리도록 해라."

사마에트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머리 위에 거대한 구멍이 나타났다.

집행자의 거체가 구멍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목욕을 하라고?"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알쏭달쏭한 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사마에트는 비유와 상징으로 말한다는 걸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학습했다.

목욕재계도 단순히 몸을 씻으라는 말은 아닐 테다.

"세계 각국의 사례를 보면, 보통 제례 전에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부정을 씻어낸다는 의미입니다만, 지금 뭘 하라는 건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안경 낀 청년이 말했다.

군복 차림에 머리는 짧았고 피부는 까무잡잡했다..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마에트의 말에 숨은 의미를 찾아보려는 건 지금까지의 패턴대로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틀렸다.’

"그러게요.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진아의 말에 상원이 대답했다.

"씻으러 갑시다."

상원이 툭 던지듯 말하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대형 마트가 있었다.

* * *

승천 시험의 세계는 시도 때도 없는 위협으로 가득 차 있다.

시시각각으로 목숨을 노리는 마물,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 살을 에는 추위 그리고 갈증과 허기.

수험자를 그런 환란으로부터 보호하는 게 새하늘 주인의 불꽃, <성화>다.

수호신의 보호를 받는다 해도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인 거 벼하지 않는다.

성화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음식의 독을 제거하고 상처를 낫게 하며 마물이 침입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 성화로 보호받는 영역을 <성역>이라 한다.

성역은 서울에만 해도 수백 개였는데, 서울역은 특별히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성역 안에 대형 마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정말. 라면이 이렇게 맛있는 줄은 몰랐네요."

진아 앞에 놓인 컵라면 그릇은 깨끗했다.

마트 한 구석의 식탁, 그 위엔 컵라면 그릇과 과자 몇 봉, 빈 음료수 병이 굴러다녔다.

모두 진아가 먹어치운 것들이었다.

"상원씨는 안 드세요?"

진아가 물었다.

그녀가 게걸스레 배을 채우는 동안, 상원은 가만히 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별로 고프지가 않네요."

"아...."

진아의 시선이 상원의 몸을 훑었다.

"저는 그런... 밤을 보내고 났더니 정말 배고프고 피곤해 죽겠는데, 상원씨는 쌩쌩하시네요. 저는 이렇게 작고 상원씨는 그렇게 큰데."

상원을 보는 진아의 눈동자가 깊었다.

"상원씨를 보면 참, 침착하신 것 같아요. 뭐랄까 마치... 한 발 비껴 서있는 것처럼?"

'윤진아가 원래 이리 말이 많았나.'

성스러운 불꽃으로 마물과 악인들을 태우던 낙원의 불꽃.

그 냉엄한 얼굴은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과 겹쳐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겠지. 시험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

상원이 살짝 웃었다.

"믿지 않으니까요."

"네?"

진아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깊게 생각할 건 아닙니다. 옆 건물에 가면 옷가게가 있을 거에요. 거기서 입으실 옷을 고르시고요. 그 건물 지하에 샤워실이 있습니다. 수건은 여기 있는 걸 챙기면 되겠네요."

상원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상원씨는 정말 친절한 분이신 것 같아요."

진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친절한 사람이라.'

냉혹한 사람이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었는데.

회귀는 많은 걸 바꾼 것 같았다.

상원의 몸부터, 어쩌면, 그의 인간성까지도.

"자, 가시죠. 저도 씻고 옷 갈아입고 해야겠네요. 이런 꼴로 우리 승천자님들을 만날 수는 없으니까."

배를 채운 두 남녀는 옷가게로 향했다.

* * *

상원은 몸을 씻고 새 옷을 입었다.

수많은 옷가게에 걸린 수천 벌 옷들 중 상원에게 맞는 옷은 없었다.

온 마트를 겨우 뒤져서야 맞는 옷을 찾았다.

차라리 회귀할 때 입고 있던 걸 빨아 입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상원은 건물을 나서 동편 광장으로 향했다.

성화 곁에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배불리 먹고 깨끗이 씻은 사람들.

그들의 차림새는 말끔했다.

벤치에 앉은 사람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화롭네.’

광장에 온통 빼곡한 시체만 아니었다면 세상이 멸망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신이 임하기에 좋은 풍경이었다.

'이제 선택이 시작되겠군.'

상원이 창백한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낮의 햇살이 쨍했다.

곧 사마에트가 나타나 선택의 시간을 선포할 것이다.

그들 중엔 <기계장치의 신>이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기다릴 수밖에.

그때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고함이 평화를 깨뜨렸다.

상원은 고함이 난 곳을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다른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창훈 부부와.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바닥에 웅크리고 부들부들 떠는 혜경 앞을 창훈이 막아서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있으면 죽을 거 뻔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호해 드린다고."

사내들 중 하나가 배를 내밀며 말했다.

사태는 간단했다.

인간사회의 규율은 모두 무너진 세계.

여자를 노리는 늑대들은 새하늘 시험대 어디에나 있다.

"내 아내는 내가 지킬 테니까! 그만 하세요."

소리치는 창훈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보였다.

"그만 하세요?"

사내가 품에서 나이프를 뽑았다.

나이프는 햇살을 받아 흉흉한 빛을 뿜었다.

"싫은데요."

사내들이 왁자하게 낄낄댔다.

"우리가 뭐, 나쁜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보호해 드린다고요."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잘못 끼어들었을 땐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늑대들을 말릴 경찰력 같은 게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모두가 아니까.

그 광경을 보며 상원은 생각했다.

'저놈들이 누구더라. 어디서 봤는데.'

나이프를 든 사내가 창훈에게 다가갔다.

"더 다가오지 마세요."

창훈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뭐? 어쩔 건데?"

'아, 생각났다.'

회귀 전 쌓은 수많은 기억들, 그 한 자락에 저 사내의 얼굴이 있었다.

그 얼굴을 떠올린 상원은 저 사태에 끼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야!"

상원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광장에 울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상원에게 꽂혔다.

"그만 해라."

상원이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대어를 낚을 기회다.‘

저 사내를 이용하면 두 번째 별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대상 중 하나를 제거할 수 있다.

상원이 날카롭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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