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9화 (9/230)

제9화. 성화를 향하여 (5)

고오오오

거대한 구멍이 굉음을 내며 블랙홀처럼 하늘을 빨아들였다.

부서진 바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꺄아아악!"

"끄아아악!"

수천 마리 괴조들이 비명을 질렀다.

회오리를 그리는 그들의 비행은 광기로 가득 찬 춤사위 같았다.

굉음과 비명이 섞인 미칠 듯한 소음에 상원은 귀를 막았다.

'젠장, 빨리 나가야겠는데.'

상원은 눈가리개를 단단히 쥐었다.

그때였다.

“기이이이.“

기계음이 들렸고,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상원은 위를 보았다.

그의 앞에 커다란 기계가 떠 있었다.

지름 3m 정도의 동그란 몸체에 수십 개의 촉수가 뻗어나와 있는 모양새가 문어 같았다.

몸체에 달린 수많은 눈들이 노란 빛을 쏘았다.

<끝없는 지하>를 떠돌며 불청객을 찢어 죽이는 기계, 이들이 3급 마물 <경계 감시자>다.

'벌써 이놈들이 나온다고?‘

지하 괴조나 마녀와는 한 급수 차이지만, 격의 차이는 현저하다.

시험에 등장하는 건 스무 번째에 가까워서다.

'돌아가려면 눈가리개를 매야 하는데.'

하지만 경계 감시자를 코앞에 두고 그런 여유로운 짓을 한다는 건 나 죽여줍쇼 하는 꼴이었다.

'이놈부터 빨리 해치워야 하나.'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해치우는 건 어렵지 않다.

경계 감시자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몸 곳곳에서 볼록렌즈로 살을 지지는 느낌이 났다.

'젠장!‘

경계 감시자가 상원을 조준한 것이다.

상원은 빠르게 몸을 날렸다.

쿠르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금 전까지 상원이 있던 바위가 절단이 났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벌집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 몸이라면 죽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까지 시험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기이이이이.”

경계 감시자 여섯 마리가 꾸물거리머 상원을 향해 헤엄쳐 왔다.

'3급 마물이 일곱 마리? 젠장 살벌하네.'

상원은 마른 침을 삼키고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착지할 만한 바위가 있었다.

“기이이이이.”

경계 감시자들의 눈에 노란 빛무리가 맺혔다.

경계 감시자의 광선이 충전중이라는 뜻이었다.

상원은 아래 있는 바위와 경계 감시자를 번갈아 보았다.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너무 빨라도 늦어도 안된다.’

정확한 타이밍에 움직여야 했다.

지이잉

경계 감시자들이 새하얀 광선을 내뿜었다.

'지금이다.'

그 찰나, 상원은 봐 두었던 바위로 뛰어내렸다.

광선이 간발의 차로 상원을 비켜갔다.

쩡!

격렬한 폭발음이 울렸다.

방금 전까지 상원이 있던 바위가 수십 조각 돌덩이로 쪼개졌다.

작은 조각들이 바닥의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이이이?”

경계 감시자들이 우왕좌왕하는 게 보였다.

분명히 있어야 할, 피떡이 된 시체가 없었으니까.

‘지금이라면 눈가리개를 묶고 도망칠 수 있다.’

상원은 눈가리개를 두 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그때였다.

쾅!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에 상원은 고개를 돌렸다.

성당 쪽이었다.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거대한 뱀 꼬리가 성당 지붕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그오오오!

이번에는 공장이었다.

공장이 내뿜던 빛줄기들이 깜빡였다.

고뇌에 가득 찬 포효가 쩌렁쩌렁 울렸다.

"끼아아아악!"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괴조들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구멍이 내뿜는 굉음도 거세지고 있었다.

상원은 아래를 보았다.

시험 최후반부에나 가야 만날 수 있는 마물들이 회오리를 치며 날고 있었다.

후반부의 수험자들도 한 끼 식사 정도로 여기는 6급 마물 <일식 사자>들.

강하기로는 승천 시험을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7급 마물 <암흑용>들.

그리고 그 모든 마물들을 굽어 살피는 자가 구멍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그 존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미치거나 죽을 수 있는 존재.

새하늘 시험대를 떠받치는 다섯 마신들 중 하나.

<끝없는 지하>의 주인, <지하의 수호자>.

구멍 속에서 꿈틀대는 그 모습은 수천 마리의 뱀 같기도 했고 새까만 머리칼 같기도 했다.

태양 표면에서 코로나가 솟구치듯 구멍으로부터 검은 불길이 간간이 솟구쳤다.

그렇게 꿈틀대는 어둠 한가운데서 노랗게 빛나는 거대한 눈이 보였다.

마신의 눈, 그것을 직시하면 영영 여기서 나갈 수 없게 된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상원은 재빨리 눈가리개로 눈을 가렸다.

수많은 괴물들의 포효 속에서 선명한 기계음이 들렸다.

경계 감시자들이 상원에게 다가오는 소리였다.

“후우.”

상원은 큰 숨을 들이쉬며 눈가리개를 매듭지었다.

새까만 어둠이 눈앞을 덮었다.

상원은 서울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첫 칸을 상상했다.

상원이 끝없는 지하에 빨려 들어왔던 그 곳을.

'어디냐!'

어둠 속에 하얗게 빛나는 차원문이 보였다.

상원은 재빨리 차원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몸이 차원문 속으로 쑥 빨려들어갔다.

경계 감시자들이 바위를 절단낸 것인지, 큰 폭발음과 함께 등에 강한 열기가 느껴졌다.

'나중에 봅시다, <지하의 수호자>.'

“오오오오오!”

긴 울음소리가 멀어졌다.

* * *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상원은 단단한 물체에 부딪혔다.

삐 하는 소음이 들렸다.

만일의 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상원은 한 쪽 무릎을 꿇고 웅크렸다.

상원은 감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온 몸을 누르던 압력도, 피부를 긁어대던 오한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상원씨, 상원씨?"

상원은 재빨리 안대를 풀었다.

한 남자가 상원에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누구지?’

상원은 머리를 흔들고 남자에게 집중했다.

창훈이었다.

"괜찮아요?"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훈이 쭈그려 앉아 상원의 팔을 자기 목에 둘렀다.

"괜찮습니다."

상원이 팔을 빼고 일어섰다.

"그런 구멍에 들어갔다 왔는데 괜찮을 리가 있나요."

창훈이 다시 팔을 목에 둘렀다.

체구가 상원보다 한참 작은데도 어쩐지 의지가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원씨, 그렇게 강한 사람인데도 이대로 죽어버리는구나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 오셨네요."

창훈이 말했다.

상원이 바랐던 대로, 차원문은 서울역행 지하철 첫 칸으로 연결되었다.

‘이렇게 한 번에 원하는 곳으로 나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행이다.’

상원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관실 쪽 벽에 사람들 속에 헤실헤실 웃는 혜경이 보였다.

그리고 상원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또 있었다.

"저...."

커다란 안경을 쓴 가녀린 여자, 윤진아였다.

"아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진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전에는 이런 인사 주고받는 사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상원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왼손을 진아에게 내밀었다.

진아는 의아한 얼굴로 상원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앞으로 잘 해 봅시다."

"네? 아, 네."

진아가 상원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아기처럼 작고 부드러웠다.

그때 지하철 안내방송이 들렸다.

"열차 서울역,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열차가 서서히 멈췄다.

열차 바깥 플랫폼의 기둥에 서울역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다다른 곳.

짐승과 어둠으로부터 자기들을 지켜줄 <성화>가 있는 곳.

"아, 도착했어! 서울역이에요!"

"세상에... 하느님."

긴장이 풀려서일까.

주저앉는 사람도 있었고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새하늘 시험이 시작된 지 고작 한나절.

그 사이 세계 인구의 99%가 죽었다.

시험은 시시각각으로 목숨을 조여 온다.

그 와중에 드디어 편히 쉴 곳을 찾은 것이다.

“문이 열립니다.”

열차 문이 열리고 수험자들이 기차 밖으로 뛰어 나갔다.

상원도 다른 수험자들과 함께 플랫폼에 발을 디뎠다.

시청역 플랫폼과는 달리 아늑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올라갑시다."

상원의 말에 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함께 계단을 올랐다.

* * *

<일곱 별의 왕관>을 얻기 위해서는 두 번째 시험에서 네 가지를 얻어야 했다.

어둠 속을 환히 볼 수 있게 해 주는 스킬 <동굴적 감각>.

<성성이의 털뭉치>를 만들 성성이의 시신 두 구.

그리고 지하 마녀의 스킬 <지하의 문>과 아이템 <지하를 꿰뚫는 눈가리개>.

<지하의 문>은 <끝없는 지하>와 현실을 잇는 차원문을 드나드는 스킬이다.

그리고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차원문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이 <지하를 꿰뚫는 눈가리개>다.

‘둘 다 얻었으니 끝없는 지하를 드나들 수는 있겠지. 하지만.’

‘계획이 틀어졌다.’

으득, 상원이 이를 갈았다.

본래 계획은 지하의 문과 눈가리개를 합쳐 순간이동 스킬처럼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신 <지하의 수호자>가 나타났기 때문에 지하의 문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었다.

'지하의 수호자가 직접 나타날 줄이야.'

<끝없는 지하>에서 시험을 진행할 대도 지하의 수호자가 직접 나타나지는 않았다.

'계획에 없던 손님이 나타났으니 얼굴 좀 보자는 건가.'

이제 끝없는 지하를 드나들 때마다 지하의 수호자가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지하의 문을 함부로 쓰다간 끝없는 지하에서 영영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하의 문>은 최후의 카드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치고. 어쨌든 이제 스킬을 쓸 수 있단 말이지?’

상원은 상태창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상원이 정신을 집중하자 시험의 표식이 파랗게 빛났다.

그와 함께 상원의 눈앞에 검은 글씨가 빼곡한 낡은 종이가 나타났다.

수천 번은 보았던 <상태창>이었다.

상태창을 보던 상원의 눈이 커졌다.

상태창의 내용이 기대와는 딴판이었기 때문이었다.

----------

조상원

수호신: 없음

신력: 괴력 0, 용력 0, 술력 0

특성: 불신자(개성)

스킬: 없음

----------

신력 물약을 먹은 적이 없으니 신력은 모두 0인 건 당연했다.

문제는 스킬이었다.

개성 <불신자>는 스킬을 무효화하지만 반작용도 어마어마하다.

어떤 스킬도 배울 수 없고 어떤 승천자와도 계약할 수 없는 게 그 반작용이었다.

50번째 시험까지 상원의 여정은 그야말로 개고생이었다.

‘이제 스킬 배웠다 했더니 스킬 창이 깨끗하다니!’

<동굴적 감각>이며 <지하의 문>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때였다.

표식의 색깔이 바뀌었다.

표색은 파란빛이 아니라 에메랄드빛을 뿜었다.

[의체 관리 시스템을 로딩합니다.]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와 함께 낯선 창이 떴다.

‘아 이거...! 회귀하고 나서 처음 눈떴을 때 봤던 창이랑 같은 거구나.’

종이에 검은 손글씨가 쓰인 상태창이 아닌, 검은 화면에 녹색 글씨가 쓰여 있었다.

----------

[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들만 표시됩니다.

레벨 1 (86%)

성능: 괴력 50, 용력 50, 술력 30

스킬: 마력 삼키기, 동굴적 감각, 지하의 문

----------

상원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회귀 전엔 본 적 없는 이 창은 의체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의체 레벨이 있다는 건... 이거 물약 같은 거 안 먹어도 강해진다는 건가? 뭐야 이거... 엄청나잖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능력치 합계 130, 이건 초특급 수호신의 화신들이 열 번째 시험이나 가야 얻을까 말까 한 수치였다.

회귀 전 이 시점에서 상원의 능력치가 괴력 3에 용력 2였으니 그야말로 현격한 격차였다.

‘게다가... 물약을 사먹거나 신앙을 바치지 않아도 스스로 강해진단 말이지? 그냥 사긴데?’

상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육체가 있다면, <일곱 별의 왕관> 얻는 거 꿈만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일곱 별의 왕관은 이정도로 사기적인 무기가 있어야 꿈이라도 꿀 수 있다는 얘기다.

모든 계획이 오차 없이 맞아 떨어지고 운까지 좋아야 할 것이다.

일곱 별의 왕관, 그것은 수호계약을 맺을 수 없는 상원이 승천할 수 있는 유일한 길.

10년 전 저지른 과오를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할 수밖에 없다.”

큰 숨을 쉬고, 상원이 발을 디뎠다.

<일곱 별의 왕관>, 그 찬란한 이름을 얻기 위한 묵직한 걸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