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성화를 향하여 (1)
이매의 시신은 검은 재가 되어 사라져갔다.
마치 지루하고 피곤한 작업을 끝냈다는 듯. 샛노란 눈에 반사된 상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끼에엑-.”
제단을 둘러싸고 있던 새타니와 그슨대들도 하나 둘 재가 되어 지옥으로 돌아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마귀들로 들끓던 공동엔 상원만이 남아 있었다.
제단을 둘러싼 수십 개의 창백한 보라색 불빛이 커다란 어둠 가운데서 흔들렸다.
물끄러미, 상원은 촛불을 바라보았다.
‘새하늘 시험의 시작점에 돌아왔다.’
진짜로 회귀한 것인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새타니의 살점, 뜨뜻하고 끈적거리는 피, 죽어가는 수험자들의 비명과 통곡, 마귀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유황 냄새는 선명하고 생생했다.
‘완전최면 같은 게 아닐까?’
그럴 리가 없다.
<불신자>에겐 그 어떤 스킬도 통하지 않으니까.
상원의 눈에 비친 촛불이 아득해졌다.
50번째 시험까지, 고통과 고뇌로 가득찬 그 길을 오로지 승천해서 속죄하기 위해 걸었다.
그래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었는데도, 승천을 할 수 없었다.
수호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일곱 별의 왕관>을 얻어야 했다.
그래야만 승천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 50번째 시험까지, 상원은 겪은 세계를 살아갈 것이다.
회귀 전 저질렀던 잘못과 오류를 수정하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곱 별의 왕관>을 향해 다가갈 것이다.
'그 아픔들도 또다시 겪어야 하겠지.'
"후우우우우."
게워내듯 상원이 한숨을 뱉었다.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
당장 첫 번째 별을 얻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각오를 다지며 상원이 제단 앞에 섰다.
네모진 돌 위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제물의 이마에 상원이 손을 올렸다.
상원은 찢어질 듯 부릅뜬 시신의 두 눈을 감겼다.
그와 함께 촛불들이 일제히 꺼졌고 덮쳐온 어둠 속에서 제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제단 한가운데서 기둥 같은 실루엣이 솟아올랐다.
그것이 상원의 눈높이에 닿을 만큼 솟았을 때 팟 하고 꼭대기에서 커다란 불빛이 나타났다.
어둠이 물러난 자리에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단을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양초가 사라졌다.
그 대신 제물의 배에서부터 뻗어나온 거대한 양초가 타고 있었다.
맹렬하게 이글거리는 보라색 불꽃은 촛불이라기보다는 횃불에 가까웠다.
'크다!'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으며 상원은 거대한 양초를 문질렀다.
양초의 옆면에는 피처럼 붉은색으로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이 정부서울청사의 보상, 귀물급 아이템 <20층의 흑마술 양초>다.
불을 붙이면 온갖 저주 스킬을 주변에 뿌리는 강력한 아이템이었다.
'의령수를 꺾으려면 이게 반드시 있어야 된다.‘
상원은 새로운 계획들을 곱씹으며 <20층의 흑마술 양초>를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집어넣었다.
* * *
숨은 시험을 끝내고 상원은 청사 밖으로 나왔다.
파란 밤하늘의 동쪽 끝에서 여명이 치밀어오고 있었다.
상원은 기지개를 켰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폐를 채웠다.
긴 밤이었는데도 피로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의 육체는 아무리 괴력과 용력을 쌓더라도 피로와 통증에 극히 취약하다.
그런 면에서 상원의 몸은 그 자체로 신기 급의 보구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몸속에 신기가 심어져 있기도 했고.
'있긴 있는데 내 맘대로 쓸 수는 없는 모양이지.'
상원은 <기계장치의 신>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열쇠 같은 것을 상원의 가슴에 박았었다.
‘아마도 승인 같은 것이 있어야 모래시계를 쓸 수 있는 것 같은데. 내 맘대로 쓸 수 없는 걸 무기로 취급할 순 없지.'
광화문 광장 남쪽으로 향하는 상원의 머릿속에 일곱 별의 왕관을 얻기 위한 계획이 펼쳐졌다.
두 번째 시험은 광화문 광장 남쪽에서 시작할수록 유리하다.
남쪽으로 걸어 이순신 동상 오른쪽까지 왔을 때, 상원은 무언가에 부딪혀 튕겨져 나왔다.
'여기가 한계인가.'
상원은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투명한 쿠션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럼 이제 눈을 좀 붙여볼까.'
멸망한 세계에선 빈 차만큼 자기 좋은 곳도 드물다.
광화문 광장 근처엔 빈 차들이 널려 있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잘만한 차를 찾아 광장을 훑는데, 누군가 상원의 뒤에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뒤로는 그보다 조금 어린 여자.
여자는 싸늘하게 식은 아이의 시신을 안고 있었다.
바지를 적시고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채로.
'저 애... 이름이 은수라 했던가.'
엄마 품에 안긴 딸의 등에는, 어깨부터 허리까지 커다란 손톱 자국이 나 있었다.
"코인이... 좀, 있으실까요?"
남자가 상원에게 물었다.
'아, 그 사람이구나.'
<록시>에게 아내를 고쳐달라 했다가 코인이 없어 퇴짜 맞은 남자.
"아까 선생님이 천막 안에 들어갔다 나오시는 걸 봤습니다. 염치 없지만... 조금만 부탁드립니다."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상원은 부부를 바라보았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바늘구멍 지나가기인 게 승천 시험인데 가족까지 챙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 가족이 정신 나간 아내라면 더더욱.
살아남으려면 가족에 대한 미련 같은 건 버려야 한다.
그래서 상원은 더 냉랭하게 말했다.
"다 썼습니다."
"아...."
상원의 말에 남자가 무너졌다.
"아내 챙기지 말고, 코인 있으면 그쪽 목숨부터 건사해야...."
상원의 말이 끊어졌다.
실성한 엄마의 품에 안긴 시신.
그들을 보며 기억 저 편에 묻어둔 어떤 장면이 생각나서.
'왜 하필, 이렇게....'
이마에 손을 짚으며 상원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아, 아저씨. 잠깐만요."
상원이 빠르게 움직였다.
시체에서 옷을 찢어내 자동차 기름에다 적시는 상원의 솜씨가 능숙했다.
어느새 그럴싸한 횃대가 만들어졌다.
"아저씨, 불 있죠?"
"네? 아, 네."
상원은 횃대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슨...?"
"잘 들어요 아저씨. 다음 시험 시작되면 시청역 쪽으로 뛰어요. 다른 데 돌아보지 말고, 시청역으로 가서 1호선을 타요. 주변 사람들이 어떡하건 간에, 시청역이 무슨 꼴이건 간에요. 알겠죠? 이건 시청역에서 쓰면 됩니다."
상원의 말에 남자가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를 베풀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불쑥 상기된 오랜 기억이 눈에 밟혔다.
그래서 상원은 호의를 베풀었다.
횃대, 그리고 두 번째 시험의 생존법을.
"아, 정말 감사합니다."
"행운이 있길 바랍니다."
부부를 뒤로 하고 상원은 버려진 SUV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 * *
통성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예배당.
글자가 세로로 쓰인 낡고 두꺼운 책.
가부좌를 튼 남자.
엉망으로 어질러진 방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여자.
그리고.
"아, 또...."
"끝난 게 아니었어?"
웅성거리는 소리에 두서없이 이어지던 흐린 이미지들이 끊어졌다.
'꿈이라니. 여유가 좀 생겼다는 건가.'
한동안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잠에서 깬 상원이 피식 웃으며 몸을 풀었다.
근육을 풀고 당기면서, 상원은 산 같은 삼각근과 광활한 광배근, 단단하게 뻗은 대퇴사두근을 느꼈다.
잘 만들어진 육체였다.
차 밖으로 나와 간단하게 몸을 푼 상원은 남쪽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수십 번을 봤지만, 정말 볼 때마다... 무시무시하군.'
일곱 쌍의 박쥐 날개를 펼친, 숨막히게 아름다운 거인이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하늘 시험의 관리자, 섭리의 집행자 <사마에트>.
그녀가 나타났다는 건 새로운 시험이 시작된다는 뜻.
더 이상 절망할 기력마저 없는 사람들이 멍청하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끄으으으으으...!"
죽은 딸을 꼭 끌어안은 은수 엄마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은수 아빠는 상원에게 받은 횃대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집행자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나무의 자식들아."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벌거벗은 너희를 긍휼히 여기어 불을 내리니, 너희는 그 불의 곁에서 짐승과 환난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거라.”
[두 번째 시험 <성화>를 시작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꾸아악!"
"꾸아아악!"
시스템 메시지가 닫히자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또 뭐야...?"
"원숭이? 원숭인가?"
광화문 삼거리 끝자락에서 털 난 짐승들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승천계시록>은 이렇게 말한다.
[두 번째 시험이 선포되매 짐승들이 나타나니, 그 생김새가 원숭이와 같되 그 얼굴은 꼭 늑대와 같고 발톱이 호랑이같더라.]
새하늘의 벌판을 지배하는 짐승들, 그 중 하급 마물 <잔나비>들이었다.
이름과는 달리 덩치가 거의 오랑우탄만 한 맹수.
우람한 앞발 끝에 달린 날카로운 손톱이 흉흉했다.
갈 지(之)자로 딛는 괴이한 걸음으로 잔나비들이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불, 불이 있다면서?"
"뭐야, 그게 어디 있는데?"
잔나비들과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몇 미터 정도로 좁혀졌다.
"이... 이러면 되나."
남자 하나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며 잔나비에게 들이밀었다.
"꾸악...?"
남자 앞에 있던 잔나비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된 건가?"
"라이터, 라이터였어?"
라이터를 켠 남자가 안도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광경을 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횃대에 불을 붙이려는 은수 아빠를, 상원이 말렸다.
"꾸아아악!"
그 찰나, 잔나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힘에서는 인간을 아득히 넘어서는 거대한 유인원들.
날카로운 손톱은 철판도 찢는다.
"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남자는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수십의 잔나비들이 남자의 시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우어어어억!"
여자 하나가 그 광경을 보며 구토했다.
"라이터가 아니야?"
"불! 불을 줘!"
저 멀리서 자기들을 내려다보는 사마에트보다는 눈 앞의 잔나비들이 두려웠을까.
사람들이 하늘을 보며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
사마에트는 가면 같은 무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순간, 사마에트 앞쪽에서 붉고 굵은 빛줄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밤이 지났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게 짐승들로부터 자기 생명을 지켜줄 새하늘 주인의 불꽃이라는 걸.
빛줄기를 보며 멍해있던 사람들이, 일순간 빛줄기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빛줄기는 가까운 데서 솟아오른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사마에트 때문에 원근 감각이 어그러진 탓이었다.
빛줄기가 솟아오른 곳은 서울역, 거기까지 가는 길은 결코 짧지 않다.
'수험자 숫자를 더 줄이겠다는 거지. 많으면 고르기 귀찮으니까.'
상원이 빛줄기를 보며 몸을 풀었다.
"아저씨, 아까 들은 거 다 기억하죠?"
고개를 끄덕인 은수 아빠가 아내를 데리고 뛰었다.
'이 정도면 됐다. 운이 아주 좋다면, 서울역에 닿을 지도 모르지.'
상원이 멀어지는 은수 가족을 보면서 생각했다.
'시간 맞추려면, 나도 빨리 움직여야 되겠다.'
향후 계획을 점검하며, 상원도 빠르게 남쪽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