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암기 천재의 회귀
사업에 실패했고 아내는 자살했고 딸은 미쳐버렸다.
완전히 무너진 아버지는 실성한 딸과 어린 아들 상원을 데리고 <새하늘교>라는 사이비 종교 귀의했다.
종말이 머지않았는데, 그때가 되면 인간들은 <승천 시험>을 거쳐 승천한다는 것이 그들의 교리였다.
시험에 통과해 승천하면 모든 바람이 이루어지지만, 승천하지 못하면 소멸한다고 했다.
너무나도 단순한 교리.
그들은 승천 시험에 대비해 신도 모두가 같이 승천할 계획을 짰고, 상원이 계획의 중심에 있었다.
누나에게 깃들 수호신을 인도하는 게 상원의 역할이었고, 그걸 수행하기 위해 교리를 외워야 했다.
오십 페이지짜리 경전 32권과 3백 페이지짜리 노트 198권.
적은 분량이 아니었지만 상원은 모조리 외워버렸다.
타고난 암기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외우기만 했을 뿐 믿은 것은 아니었다.
상원은 그저 이 지루한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견디다 못한 상원은 새하늘교를 탈출했다.
상원이 탈출해서 집단 승천을 할 수 없게 된 새하늘교도들은 한 날 한시에 집단으로 자살해버렸다.
아버지도 누나를 죽이고 죽었다.
상원이 탈출하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누나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죄책감에 상원은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았다.
* * *
10년 후 크리스마스이브 날.
<승천 시험>은 시작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모습 그대로.
승천 시험이 현실이 된 건 상원에겐 축복이었다.
10년 전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모든 것들이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그동안 외웠던 경전과 노트들은 상원의 무기였다.
상원은 오로지 승천만을 목표로 전진했다.
하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모든 경전을 토씨하나 안 틀리고 암기하고 있었어도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개성>.
시험이 시작되면 주어진 고유한 특성인 개성에 따라서 능력을 얻게 된다.
수많은 신도들이 초능력을 얻었지만, 상원은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진 개성은 다름아닌 <불신자>였으므로.
불신자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상대의 스킬을 모두 무효화 시킬 수 있었으니까.
반면, 단점도 치명적이었다.
그 어떤 <승천자>와도 수호계약을 맺을 수 없었다.
<승천자>는 새하늘 시험의 신들이다.
이들과 계약을 맺어야 수험자는 비로소 초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불신자 상원은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승천 시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어떤 초능력도 없이, 상원은 능력치와 공략법만으로 50번째 시험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허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불신자 조상원은 50번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죽었다.
50번째 시험을 통과하려면 반드시 수호신의 신격을 나누어받아야 했으니까.
그 사실은 어떤 경전에도 어떤 노트에도 적혀있지 않았다.
* * *
화면이 꺼지듯 눈앞이 깜깜해졌다.
[승천 게임에서 탈락했습니다.]
온통 까만 공간에 파란 창이 뜨면서 시스템 메세지가 출력됐다.
'신격을 나눠받지 못하면 승천을 못한다고? 그런 얘긴 없었잖아!'
끄아아아악!
목구멍이 있었다면 피를 토하듯 절규했을 것이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가면서 결국 새하늘의 문턱에 왔는데, 수호신이 없어서 승천을 못한다니. 고작 그따위 이유로.’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해요. 누나 미안해. 이게... 이게 끝인가 봐.’
눈이 있었다면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을 것이다.
끝없는 절망이 상원을 삼켰다.
그때, 갑자기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녹색 시스템 창이.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접속률 0.0%]
서서히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이런 건 경전과 노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접속률 100%. 동기화를 완료했습니다. 시스템을 시작합니다.]
TV가 켜지듯 눈앞이 밝아졌다.
가장 처음 보인 건 수술실 조명등 같은 전등이었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원은 작은 방 가운데 있는 수술용 침대에 앉아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기계장치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큼한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슨...?"
그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흰 곱슬머리의 흑인 노인이었다.
하얀 가운은 기름때가 잔뜩 묻어 꾀죄죄했다.
"어, 일어났네?"
노인이 콜라캔을 홀짝이며 말했다.
"좀 움직일만 해?"
노인이 가운 안주머니에서 후레쉬를 꺼내 상원에게 비췄다.
눈부신 빛에 상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가렸다.
"오케이. 반응 좋고. 운동능력 한 번 보자고. 불신자 선생, 한 번 일어서 보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고 저건 무슨 말인가?
상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노인을 노려보았다.
"응, 뭐야?"
노인이 상원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댔다.
"아, 이거 뭔지 모르겠다 이거지? 좋아 좋아. 친절하게 설명해줄테니까 잘 들어."
짝, 노인이 손뼉을 쳤다.
"불신자 선생, 당신 뒈졌어."
잠깐의 정적.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상원이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32권의 경전과 198권의 노트, 그 어디에도 이런 상황은 없었다.
새하늘 시험의 사후세계 - 연옥에 이런 곳이 있었나?
아니면 새하늘 시험 자체가 끝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제가 승천한 겁니까?"
나직한 상원의 물음에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막판 못 깼으면서 승천은 무슨. 당신 뒈졌다니까."
노인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가 연옥..."
"연옥? 그건 아니고. 당신 연옥 가기 직전인 거 내가 잡아왔지."
'그런게 가능하다고?'
당황한 상원에게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나는 <기계장치의 신>이라고 해. 승천자지."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벌컥 벌컥, 노인이 콜라를 마셨다.
"저기 가서 거울 한 번 봐보지?"
노인이 손가락으로 방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커다란 전신거울이 있었다.
"이건...!"
거울 앞에 선 상원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울에 비친 건 근육질의 거한이었다.
선이 굵은 얼굴은 꽤 수려했다.
상원이 기억하는 자기 모습 - 왜소하고 음침한 불신자는 거기에 없었다.
"이게 뭡니까?"
상원이 노인에게 물었다.
"내가 자네 잡아다가 거기에 넣었어. 그건 내 평생의 노력이 담긴 역작이지."
노인이 다 마신 콜라캔을 던졌다.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간 콜라캔이 땡그랑 소리를 냈다.
"그거요?"
"그 몸. 그거 쩌는 물건이야. <권좌>에 오르려고 직접 만들었지."
상원의 눈이 커졌다.
권좌, 그건 승천자의 정점이다.
승천자들 사이에도 위계가 있다.
영령에서부터 신령, 주신, 그리고 그 끝에 있는 단 하나의 자리가 <권좌>다.
승천자가 자기 격을 올리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자기가 수호한 화신(化身)이 새하늘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는 것.
그런데-
"저는 수호계약을 할 수 없습니다만."
"알지 그 정도는. 그래서 내가 자네 잡아다가 거기 넣어놓은 거 아냐. 아 일단 이거부터 입어."
노인이 상원에게 옷을 던졌다.
상원은 헐렁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
"자 들어봐. 이제부터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하나하나 설명해줄 테니...."
노인이 상원에게 다가왔다.
노인의 키는 상원의 명치 정도여서, 고개를 잔뜩 꺾어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됐다.
"자 우선 이거."
노인이 주섬주섬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열쇠였다.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의 황금색 열쇠.
그때, 천지를 찢는 듯한 포효가 들려왔다.
지진이 난 듯 온 방이 흔들렸고, 플라스크 속에 든 약품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불을 냈다.
상원의 얼굴이 굳었다.
"<청소부>...!"
"잘 아네."
노인의 얼굴은 덤덤했다.
청소부는 새하늘 시험의 규칙을 어긴 승천자를 단죄하는 존재였다.
보아하니 청소부의 목표는 이 앞의 노인, <기계장치의 신>인 것 같았고.
상원은 상황을 이해했다.
눈앞의 승천자는 규칙 밖에 있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컨대 연옥에 갈 수험자를 훔쳐 다른 몸속에 박아 넣는다던가 하는.
"젠장, 튀어야되겠네. 자, 불신자 선생. 시작하자고. 자네도 하고 싶잖아, 승천."
승천, 그 말에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승천을 할 수 없습니다. 수호신이 없어서.”
“야 일단 이것부터 하고! 급하다!”
노인이 상원의 심장에 열쇠를 꽂았다.
그 동작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자 상원의 왼쪽 가슴 근육이 세로로 쪼개졌다.
그 안에는 눈부신 황금색 모래를 담은 모래시계가 있었다.
새로 받은 몸의 심장부에 박혀있는 것, 그건 상원이 너무나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신기(神器)급 아이템, <황금시대의 모래시계>.
충전한 만큼 시간을 거스를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 중 최고 등급인 '신기'가 전혀 아깝지 않은 물건.
'황금시대의 모래시계...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철컥, 모래시계가 뒤집어졌다.
"몸속에 신기급을 박아 놓다니, 대단하지 않아?"
노인이 낄낄 웃었다.
황금색 기운이 상원과 노인을 둘러싸고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설명해줘야 될 게 많은데 시간이 없다. 어쨌든 이 몸 가지고 잘 해봐."
소용돌이가 점점 거세졌다.
"내 상황 알겠지? 내가 대놓고 자네를 도와줄 수가 없어. 그래도 정 안되겠다 싶을 때 한 번씩은 찾아갈게."
노인이 기둥 같은 상원의 팔뚝을 두드렸다.
“잠깐만.”
상원이 급하게 노인을 불렀다.
“혹시 이거... 10년 전으로도 갈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돼. 이것도 승천 시험에 속한 물건이야. 시험 이전으론 못 가.”
노인의 대답은 단호했다.
"눈 떠 보면 첫 번째 시험일 거야. 제발 잘 해서, 나한테 <권좌>를 안겨달라고. <일곱 별의 왕관>! 그 몸 있으면 그거 얻을 수 있어!"
그 말을 남기고 노인은 파삭, 모래가 되어 금빛 기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망치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수호신이 없어도 신격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달성하기 불가능한 일곱 개의 업적을 달성하고 칭호 <일곱 별의 왕관>을 얻는 것.
회귀 전에도 그 존재는 알았지만, 상원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달성 불가능한 업적을, 그것도 일곱 개나 달성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불신자>로서, 승천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상원이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원래의 손과는 달리 두껍고 거대했으며 단단했다.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는다. 절대로.’
으득, 상원이 이를 갈았다.
점점 맹렬해지던 소용돌이가 한 순간 뚝 멎었다.
필름을 이어붙인 것처럼 풍경이 갑자기 바뀌었다.
인파로 가득찬 광장이었다.
새하늘 시험이 시작된 날, 서른두 살 크리스마스 이브의 광화문 삼거리.
상원은 거기에 있었다.
* * *
배에 툭 하고 무언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상원과 부딪힌 여자가 말했다.
"와 진짜 크다."
"그러게. 농구선순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머리가 상원의 허리춤에밖에 오지 않았다.
그제야 상원은 새로 받은 몸이 일반인이라 할 수 없는 거구인 걸 알았다.
하지만 상원이 놀란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회귀했다."
상원이 멍하게 말했다.
<황금시대의 모래시계>, 그걸 써서 회귀할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모래시계를 얻는 방법은 경전과 노트 그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걸 이렇게 얻어서 회귀하다니.
하지만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제 아포칼립스가 시작될 차례였으니까.
"후."
상원이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였다.
하늘이 한 순간 어두워지고, 계란 껍질에 금이 가듯 하늘 한가운데 금이 갔다.
그리고, 하늘을 부수고 일곱 장의 핏빛 날개를 단 여인이 강림했다.
그 체구가 어찌나 거대한지 마치 하늘을 모두 가릴 것처럼 보였다.
잠깐의 정적, 그 직후 거대한 패닉이 광장을 덮쳤다.
사람들이 마구 비명을 지르며 아무렇게나 내달렸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제야 상원은 믿을 수 있었다.
진짜 회귀했다는 걸.
"진짜였군."
32권의 경전과 198권의 노트로 된 승천 게임의 공략법이, 모조리 상원의 머릿속에 있었다.
게다가 한 차례 승천 게임을 플레이했던 경험까지.
꿀꺽, 상원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게 <일곱 별의 왕관>을 얻기 위한 암기 천재의 아포칼립스 2회차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