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어?”
강의실 앞 복도를 걷던 두 사람을 붙잡은 건 과대표였다. 옆에는 처음 보는 남학생과 함께였는데, 같은 과 후배이긴 했지만 당연히 그의 이름을 알 리 없는 언유는 그저 과대표와 낯선 학생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데록데록 굴렸다.
과대표와는 엠티 때 얘기해본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엔 처음이었다. 엠티에서야 같이 술도 마셨다지만 애초에 학년이 다르다 보니 겹치는 수업도 적었고, 간혹 단과대에서 마주친다 하더라도 인사를 나눌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니어서 서로 그냥 지나쳤다.
정확히는 언유가 언제나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치듯 걸어가서 과대표가 말을 걸 타이밍을 놓쳤던 거지만, 언유는 알지 못했다. 언유와 학교에서 대화를 나누는 건 현재로 한정돼 있었고, 이건 언유에게 불문율과도 같았다.
“왜 안 말해줘요? 비밀이에요?”
“…….”
그래서 이렇게 말을 걸면 곤란했다. 고갯짓으로 답할 수 없다면 특히. 언유는 난처한 기색으로 현재만 자꾸 훔쳐봤다. 누가 답해도 상관없는 질문인 것 같은데, 둘 다 현재가 아닌 저만 쳐다보고 말을 하자 당황스러웠다. 내가 대답을 해야 하나? 하지만……. 언유의 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지금 현재는 현재대로 상당히 기분이 이상했다. 아닌 척했지만 언유보다 속이 더 복잡했다.
이언유는 원래도 눈길을 끄는 존재였다. 생긴 것부터 저렇게 생겼으니 당연했다. 워낙에 혼자서만 지내고 어딘가 특이한 사람으로 인식이 박혀 다른 사람들이 섣불리 말을 걸지 못했을 뿐, 이언유를 모르는 사람은 과에 없었다. 물론 본인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그런 이언유에게 사람들이 슬금슬금 접근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같이 다니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부쩍 말을 거는 사람이 늘었다. 어떻게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적어도 현재가 느끼기엔 그랬다.
현재와 친하게 지내는 언유를 보자 그들은 은연중에 저들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없어진 것처럼 굴었다. 현재로선 별 같잖은 것들까지 득달같이 달려들어 친하게 군다 싶었다. 그리고 왜 저가 이런 유치한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지금도 태연하게 말을 거는 두 사람이 은근한 눈길로 언유를 살펴보는 것에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사실, 현재는 형이 언유를 너무 꽉 잡고 구속하고 있는 것 같아 적당히 풀어주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 사이에 끼어든 이상, 간섭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형이 금지했던 것들을 하나씩 깨부쉈다. 함부로 남성기를 만지지 말라고 교육받은 언유에게 굳이 행위 때마다 앞을 만지고 빨아대던 게 시작이었다. 앞을 빨아주며 뒷구멍을 쑤셔주면 얼마나 좋아하는데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 외에도 형은 언유가 집밖에서 뭘 먹는 것도 안 된다고 했지만, 현재는 저가 보고 있으면 괜찮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것과 친목도모는 결이 달랐다. 굳이 이언유에게 친한 사람이 생겨야 하는가? 누군가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서 불쾌한가 보다. 현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직까지 제 눈치를 보는 언유를 내려다보던 현재가 운을 떼려는데, 이번에는 과대표 옆에 있던 이정민이 언유에게 말을 걸었다.
“안 말해주니까 더 궁금하잖아요. 언유 형?”
……저 새끼는 유독 저런단 말이야. 일부러 대화를 차단한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지나가기만 하면 노골적으로 이쪽을 바라봐서 언유의 어깨를 감싸고 모른 척 빠른 걸음으로 피해버린 게 이미 여러 번이었다. 그가 저보다 학년이 높아 함부로 굴지 않았지만, 유달리 짜증 나는 새끼인 건 사실이었다.
그 때, 누군가 셔츠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현재가 생각에 빠진 사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난처해하던 언유가 급기야 현재의 옷을 검지와 엄지로 잡아당긴 것이었다.
“…….”
“…….”
앞에 선 두 사람이 눈을 껌뻑이며 쳐다보든 말든, 언유는 현재만을 간절하게 올려다봤다.
어떤 무리에 속하고, 그 안에서 지내본 경험이 거의 없어서인지 언유는 이런 쪽으로 둔했다. 저들이 이상하게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상하게 볼 거란 것까지 알지 못했다. 언유는 형이 가르쳐준 것 외에는 무관심했고, 따라서 세상의 상식에도 둔했다.
마치 세상에 의지할 곳은 저밖에 없다는 듯이 올려다보는 눈길에 묘한 충족감에 휩싸인 현재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뭐…….”
그와 동시에 언유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무게를 다 싣진 않아서 무겁지 않았지만, 충분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굵은 팔이 언유의 가슴 앞으로 내려왔다.
품에 쏙 들어오는 어깨를 한 팔로 껴안으며 제 머리로 언유의 머리를 툭 건드린 현재가 말을 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게 뭐야.”
과대표가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안 모양이다.
“언유 오빠는 아무랑도 안 친하고 말도 안 해서, 계속 그렇게 혼자 지내다 졸업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채현재랑 같이 다니기에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언유는 눈을 감았다 뜨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남들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현재가 했지만―도 했으니, 이제 가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재가 말을 보탰다.
“내가 선배 꼬셔서 친해졌어요.”
뺨과 귀가 간지러웠다. 현재가 일부러 제 얼굴을 언유의 귓가에 바짝 댄 탓이었다. 입바람에 당황한 언유가 어깨를 흠칫거리며 피하려는데, 어깨에 두른 팔이 꽉 잡곤 놓아주지 않았다.
“뭐? 진짜로?”
“진짜예요. 친해지고 싶어서 해달라는 거 다해주면서 친해졌어요.”
“그게 뭐야.”
현재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아닌 척 제 팔로 언유의 가슴을 건드렸다. 그러자 이번엔 언유의 등허리가 움찔했다. 다행히 신음이 새어나가진 않았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까 귀를 간지럽힌 것도, 지금도 고의라는 걸 이제야 깨달은 언유는 현재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흘겨봤다.
아직까지 유두는 퉁퉁 부어있었다. 일전에 언유가 형에게 뛰쳐나간 내막을 알게 된 채현재는 요즘 ‘계속 입에 물고 있으면 또 뭐가 나올지도 모른다’라며 언유의 가슴을 마음대로 희롱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심지어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가슴을 내주고 있어야 했다. 나중엔 젖꼭지가 아리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는데도 언유는 옷자락을 입에 물고 있느라 항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현재가 하는 말을 이번에도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현재는 절반은 진짜인데, 하는 생각을 했다. 좆 달라고 할 때마다 박아주고 정액이고 오줌이고 다 싸준다. 보지도 빨아주고 자지도 빨아준다. 해달라는 건 다 해줬지, 뭐.
슬쩍 미소 지으며 현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더 이상 별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놓아달라는 뜻이었지만, 두 사람은 무시하는 건지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대뜸 점심을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오후 수업 없어도 어차피 점심은 먹을 거 아니야? 우리 같이 먹자.”
“죄송해요. 저희 어디 갈 데가 있어서. 누구 좀 만나기로 했거든요.”
물론 만날 사람은 없다. 작작 좀 하지, 생각하며 현재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남들이 보기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표정이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사실 현재는 여기서 남들한테 잘 보인다고 해서 좋을 게 없고, 개새끼로 보인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었다.
원래 현재는 부모의 인맥과 자본으로 미래를 살 예정이었기에 학교에서 좋은 연줄을 구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조차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관리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조금만 그렇게 보여도 그게 맞다고 착각한다. 현재를 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멋대로 제 구미에 맞는 상(象)을 마음속에 그리고 그것으로 상대방을 인식했다.
현재는 편하게 지낼 수 있다면 굳이 그걸 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적당히 맞춰줬다. 그러는 게 지내기 편하기도 했고 여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씨발. 현재는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한 번만 더 잡으면 참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다행히 더 이상 해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와 언유를 보내줬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상투적인 인사를 뒤로 하고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주차장으로 갔다.
가는 내내 현재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현재가 화난 것 같아 보여 언유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저러다가 말겠지, 싶었다. 현재는 저보다 어리니까 기분이 들쑥날쑥할 수도 있다.
차에 타고 시동을 걸 때까지도 별말이 없던 현재가 문득 중얼거렸다.
“사실은 선배가 나 꼬신 건데.”
“뭐?”
“그게 맞잖아요. 나는 그럴 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보지 검사해달라고 하고.”
“조, 조용히 해.”
차 안에 둘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 언유가 괜스레 주변을 둘러봤다. 언제나처럼 놀리는 건 줄 알았는데 현재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한테는 그러면 안 돼요. 알죠?”
“…….”
“나 말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술에 취해 있었고, 죽을 때까지 그럴 일 없을 거라 변명하려다가 언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현재가 제 몫을 뺏기기 싫어하는 초등학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현재는 가벼운 투로 말했지만 꽤나 진심처럼 보였다.
언유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고개만 끄덕였다. 대답을 받고 나서야 현재는 안전벨트를 맸다. 그리고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나 없을 때, 학교에서 누가 말 건 적 있어요?”
“그런 건 왜 물어?”
“빨리요.”
현재의 재촉에 언유는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없…… 아, 있다.”
기어를 바꾸고 핸들을 잡은 현재가 옆을 돌아봤다.
“누구?”
“이름은 모르겠는데, 그, 엠티 때 본 애였어.”
언유가 아는 사람이라곤 엠티 때 본 적 있는 과 학생들과 현재가 다였다. 학교를 다니며 남들과 말 섞을 일이 없으니 당연했다. 물론 그때 한 번 봤다고 살갑게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지만, 언유가 거기에 대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장 출발할 것처럼 굴던 현재가 가만히 있자 언유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출발 안 해?”
“남자? 여자?”
하지만 현재는 제 할 말만 할 뿐이었다. 언유는 흐릿한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어…… 남자애였던 거 같아.”
“오른쪽에 앉았던?”
그랬나. 가물가물해 거기까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엠티가 너무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날 엠티 장소에 현재가 찾아온 것 때문에 다른 일은 죄다 잊어버린 듯했다.
너무 강렬한 기억이 하나 생기면 나머지는 흐릿해지지 않던가. 그것처럼 채현재 하나만으로 엠티에서 무얼 했고 누구를 만났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거의 다 까먹고 말았다.
그런 언유의 이야기를 듣자 현재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제야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 현재가 또다시 물었다.
“그래서 대답했어요?”
“아직도 그 얘기야?”
“그래서 했어요?”
“안 했어.”
언유는 자꾸 물고 늘어지는 현재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이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물어보는 대로 대답해준 언유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 현재는 핸들을 돌리며 흠, 하는 목울림 소리를 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언유가 말을 걸어도 단답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잠시 뒤 차가 현재의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현재가 불쑥 말했다.
“인사 정도는 받아줘요.”
“응?”
안전벨트를 풀며 언유가 되물었다.
언유는 몰랐지만 오는 내내 현재의 속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여 종잡을 데 없는 곳까지 흘러갔다. 그러다 나온 결론은 ‘쟤네 형 새끼처럼 굴지 말자’였다.
얼마나 심하냐면, 밖에서는 사람을 붙여놓았고, 집 안에는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 빌어먹을 새끼는 마음만 먹으면 언유의 일거수 일투족을 볼 수 있었다. 오직 언유가 제 옆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구속하고 속박할 거면, 내가 그 새끼랑 다를 게 뭐지? 남이랑 말도 못 섞게 하는 꼴이 남자가 하는 짓거리와 다를 게 없다. 급기야 제 행동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언유의 숨통을 조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현재는 굉장히 심란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점심을 같이 먹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남자와 나눠 가지느라 늘 부족한 이언유인데, 아무 상관도 없는 그들에게까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뭐……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는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인사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
“뭐, 설마 선배네 형이 그것 가지고 지랄하겠어요?”
그제야 언유는 깨달았다. 아까 하던 이야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러지……. 언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 말든 현재는 차에서 내리면서까지 말을 이었다.
“아, 그래도 번호는 주지 말고.”
그리고 며칠 뒤, 언유가 불쑥 과자를 내밀었다.
“이거 어떡하지?”
“이게 뭔데? 어디서 났어요?”
현재는 과자 통을 들고 이리저리 둘러봤다. 레트로한 디자인의 박스가 인상적인 해외 과자였다. 이언유가 이런 걸 살 리는 없는데.
“걔가 줬어. 저번에 과대표랑 같이 있던 애. 안, 안 받으려고 했는데 다짜고짜 쥐여주고 가는 바람에…….”
역시나 받은 거구나. 현재의 표정이 순식간에 떫은 감이라도 씹은 것처럼 변했다.
“저번에 점심 같이 못 먹어서 아쉽다고 주던데, 어떡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거절한 건 이쪽인데 지가 주긴 왜 줘. 속이 훤히 보이는―그러나 이언유는 모르는―수작질에 현재가 혀를 찼다.
이래서 그 새끼가 꽁꽁 싸매고 있었구나. 현재가 침음을 흘렸다. 아닌 척하지만 현재는 언유의 형이 이해될 때가 종종 있었다. 사실은 자주에 가까운 횟수였다. 자꾸 다른 새끼들이 눈독을 들이니 집착할 수밖에.
현재는 손에 쥐고 있는 걸 당장 갖다버리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일단 학교를 빠져나간 뒤에 이걸 내다 버리기로 정했다.
그리고 오후 수업이 끝난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란히 단과대 계단에 다다랐을 때였다.
“언유 형!”
헤헤거리며 지나가는 이정민이 보였다. 친구들과 함께 있어 이쪽으로 오지 못하는 게 아쉬운 듯 그는 손을 크게 저으며 언유에게 인사했다.
언유는 힐끔 쳐다만 보고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현재도 미련 없이 언유를 따랐다. 단호한 모습에 아까보다는 기분이 조금 풀렸다. 물론 과자를 갖다버리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그러다 다시 기분이 더러워졌다. ……가만 생각해보니 저번에도 멋대로 이언유한테 형이라고 부르던데, 대체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지? 현재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무슨 배짱으로? 지가 뭔데? 나도 선배라고 부르는데?
현재는 학교 밖에 가서 버리겠다는 생각을 철회했다.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1층에 있는 쓰레기통에 과자를 냅다 던져넣고는 건물 밖으로 나가며 언유에게 말했다.
“제가 새로 사줄게요.”
“아아니. 괜찮아.”
언유는 진심으로 거절했다. 오히려 대신 처리해준 현재가 고마웠다. 현재가 아무리 설득력 있는 말을 하든 간에, 언유는 아직까지 바깥 음식을 먹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형이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부분은 언유에게 있어 마치 눈을 깜빡이고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있었다. 예외는 오직 현재였다. 현재와 함께 있을 때면 형의 말을 조금은 어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마 과자도 현재가 준 것이었다면 한두 개는 먹었을지도 모른다.
현재와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되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도 바깥 음식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현재의 집에서 섹스를 한 다음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배달 음식에 처음엔 머뭇거리며 거절했지만 현재가 억지로 입에다 떠먹여 주는 바람에 그냥 먹었었다.
“…….”
언유는 자신이 유독 현재가 하자고 하면, 그게 아무리 형이 금지한 일이라고 해도 해버린다는 걸 깨달았다. 왜일까, 유독 현재가 막무가내로 행동할 때가 많아서일까? 처음부터 비밀을 들켜서? 이유를 고민해봤지만 언유는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현재의 차에 탔다.
오늘은 현재와 함께 지내는 날이었다. 내일이랑 모레는 형이고, 그 다음엔 또 현재였다. 그러면 이번 주가 끝난다.
언유가 손가락으로 세어가며 날짜를 계산하는데 현재가 말을 걸었다. 졸업이 언제냐는 물음이었다. 어쩐지 현재는 요즘 뜬금없는 질문을 자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언유는 언제나처럼 물어보는 모든 것에 성의있게 대답했다.
“나 이번 학기 끝나면 졸업이야.”
“그렇구나.”
곧 졸업이니 다행이라고 현재는 차분히 생각했다. 안심이 됐다. 이 좆같은 꼴을 반년만 참으면 끝난다. 반년이라도 참을 수 있는 건 이언유가 제법 단호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인사를 씹고 계단을 내려가던 아까의 모습을 떠올리며 현재는 괜히 제 볼을 긁적였다. 스스로가 굉장히 유치하게 느껴졌다.
“졸업하고는 뭐 할 거예요?”
“응……?”
이번에도 맥락 없는 질문이었는데, 답하기가 어려웠다. 언유는 졸업하고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여태 해본 적 없었다. 무작정 대학교란 곳에 가고 싶어서 형을 졸랐고, 그게 다였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입학한 게 아니었다. 또 제 인생은 어차피 형이 모든 걸 정해주기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모르겠어.”
“그럼 나 취직할 때 맞춰서 같이 취직해요. 놀면 뭐 해, 돈 벌어야지.”
“글쎄, 난 잘 모르겠어.”
“나랑 같이 해.”
현재는 언유가 왜 저렇게 대답하는지 알면서, 저와 같이 하자고 굳이 한 번 더 강조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언유를 어떻게 제 옆에 묶어놓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무작정 남자를 졸랐던 걸 보면 은근히 막 나가는 기질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얌전히 있다가도 몇 년 뒤에 갑자기 취직이 하고 싶다고 덤빌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현재는 지금부터 밑밥을 깔아놓는 방법을 택했다.
제 속내야 어떻든, 이언유는 손해 보는 게 하나도 없었다. 둘 모두에게 이득이 확실하다고 현재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같이 일하면 자신은 옆에 두고 감시하기 편하니 좋고, 이언유는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어서 좋을 테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었다. 채현재는 늘 그렇듯이 제 좋을 대로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선배, 내일부터는 학교에서 남들이랑 말 안 하는 게 좋겠어.”
일전에 말했던 내용을 뒤집어엎으면서 현재가 뻔뻔하게도 말했다.
현재는 자신이 어떤 배려를 하든, 어차피 쓰레기라는 걸 알았다. 아닌 척해도 남자와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싶어 한다. 남자가 서슴없이 행한다면 현재는 하기 전에 몇 번 고민한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러니 구속하고 속박하고, 숨통 좀 조이면 어때. 어차피 나쁜 새끼인데. 남자와 마찬가지로 이언유를 묶어놓고 싶다 하더라도, 뭐 어떤가. 저가 그러고 싶다는데. 그럼 해야지.
“나 그러고 있는데?”
“더 그렇게 해. 누가 말 걸면 무시해, 아까처럼.”
“으응.”
그리고 저렇게 예쁜 게 눈 안에 없다면 걱정이 돼서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힐 게 분명했다. 언유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현재가 미소 지었다. 검은 속으로는 이언유를 가둬둘 방법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선배네 형은 집착이 미친놈 수준이잖아요. 그 새끼가 선배한테 감시하는 사람 안 붙여놨을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선배 좆이랑 보지 빨아주는 건 몰라도 선배가 밖에서 남들이랑 웃고 떠들면 형 새끼가 알게 될 거 아니야. 선배도 그럼 곤란하지?”
“……혀, 현재야. 밖에서 그런 말은 좀 하지 마. 알았으니까…….”
이언유에게 타인이란 형과 채현재가 끝이어야 했다. 이게 어긋나면 저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아마 남자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할 터였다. 그리고 솔직히,
‘내가 쟤네 형이었어 봐. 나 같은 새끼 보이는 순간 바로 죽였지.’
어쩌면 남자는 저를 죽일 걸 그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일찍이 없애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간에…….’
지금 이언유는 제 손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나눠 가지는 거든 뭐든 간에. 남자가 후회해봤자 늦은 일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남자처럼 되지 않겠다고, 후회할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잠시 생각에 빠진 현재를 깨운 건 언유였다.
“출발 안 해?”
“아, 해야지.”
그 목소리에 현재는 기어를 바꿨다. 약하게 엑셀을 밟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마치 순조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듯했다.
<120도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