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120도 (14/19)

#외전1. 120도

쪼르르……. 변기 안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언유는 떨리는 숨을 뱉었다. 하루 종일 참았던 터라 양이 많기도 많았다. 아랫배도 아팠고, 눠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형이 정해준 규칙은 꼭 지켜야 했기에 언유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형은 정 급하면 차라리 집에 오라고 했다. 학교 화장실에 가는 건 언유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언유의 몸이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라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언유는 형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언유는 변기 물을 내리고 손을 꼼꼼히 씻었다. 화장실을 나와서 교복을 벗고 바구니에 담긴 옷으로 갈아입었다. 형이 일하시는 분께 언질을 줘 준비한 것이었다. 언유는 형이 골라준 것만 입었다. 속옷은 당연하고 양말까지, 전부.

게다가 옷뿐만이 아니었다. 언유의 물건 중에도 형의 손길을 타지 않은 것이라곤 없었다. 하다못해 먹는 것까지 형이 결정했기에, 언유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것에는 형의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언유는 종종걸음으로 걸어 부엌에 갔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메마른 입 안을 적셨다. 오늘도 학교에서 한 번도 열지 않은 입 안이 텁지근했다. 차가운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방으로 들어갔다.

형이 퇴근하는 시간은 제멋대로다. 어떤 날은 저녁 시간에 맞춰 들어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새벽 늦게 들어오기도 했다. 간혹 집에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언유는 늘 방문을 열어뒀다. 형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비록 많은 대화는 나누지 않지만, 집에 형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천지 차이가 났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유는 기분이 나아졌다. 학교에선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한들 자신은 외톨이었지만 이 집에서만큼은 아니었다. 형이 있었으니까.

언유가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교과서를 보다, 형 생각을 하길 반복하며 한참 시간을 때웠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형!”

크게 외치며 언유는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서둘러 나가자 형이 막 구두를 벗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정장 위에 걸친 기다란 코트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형, 다녀오셨어요?”

“언유야.”

“오늘 날씨 춥죠…….”

괜히 길게 인사를 하며 언유가 주변을 얼쩡거렸다. 그런 언유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형이 물었다.

“아까 비서한테 전화를 했다던데.”

“아, 아저씨한테 형 언제 오는지 물어보려고…….”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아 물어보지도 못했다. 비서는 형이 하는 말을 전해줄 땐 연락이 잘 되다가, 언유가 무언가를 물으려고 전화를 걸면 도통 되지 않았다.

오늘도 언유는 용기를 짜내서 전화를 걸었었다. 아침에 학교를 가려는데, 큰 교실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기분을 느낄 걸 생각하니 괜히 기분도 우울하고 축 처졌다. 형이 오늘 집에 언제 올지라도 알면 나아질 것 같아 전화를 건 건데, 받지 않으니 물어보지 못했다.

별것도 아닌데 어린애처럼 굴었다는 생각에 언유는 좀 부끄러워졌다. 고개를 푹 숙이자 형이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왜? 형한테 할 말 있어?”

“아니요. 없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뭔가를 기대하는 듯 말끝을 흐리는 언유를 형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무표정이라고 하기엔 부드러웠고, 웃는 얼굴이라고 하기엔 차가웠다. 잠시간 둘 사이엔 침묵이 내려앉았고, 곧 형이 먼저 ‘아주머니가 저녁 해놨으니까 잘 챙겨 먹어’라고 말한 뒤 서재로 들어갔다.

다시 홀로 남게 된 언유는 몇 분 더 그 자리를 지키다, 방으로 들어왔다.

언유는 학교를 좋아했다. 싫지 않았다. 공부도 재밌고 시끌벅적한 소리도 좋았다. 하지만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물질처럼 부유하는 기분은 썩 달갑지 않았다.

원래도 언유는 형이 정해준 규칙에 따라 남들과 말을 섞지 않았기에 친구가 없었지만, 최근엔 정도가 심했다. 마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유인물을 나눠줄 때도 언유는 건너뛰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언유는 잘 알았다.

언유는 괜히 옆자리를 힐끔 쳐다봤다. 옆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애는 다른 애들보다 끈질겼다. 보통 몇 번 말을 걸다 시큰둥한 반응에 욕을 하거나 무안해하며 자리를 뜨곤 하는데, 걔는 달랐다.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말을 걸어대고 틈만 나면 아는 척을 했다. 급기야 언유의 빈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했다. 힐끔힐끔 얼굴을 훔쳐보기도 하고, 쓸데없는 잡담을 걸며 언유를 귀찮게 했다. 정작 언유가 쳐다보면 도리어 눈을 피하는 주제에 말이다.

언유는 난감했다. 형이 정해준 규칙 때문에 대답하면 안 되는데 자꾸 말을 걸어왔으니까. 하지만 형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지도 못했다. 형이 오해를 할까 봐 걱정됐다. 혹시 걔와 말을 섞었을 거라 생각한다면 큰일이다. 정작 언유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말을 듣지 않는 아이라고 언유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언유는 풀이 죽었고, 입을 다문 건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애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다리 못 쓴다며, 진짜야?’

‘진짜래. 그래서 지금 입원했다던데.’

‘존나 무섭다. 어디서 그랬대? 우리도 위험한 거 아니야?’

‘차 사고라잖아, 등신아. 지가 도로에 뛰어들었대.’

떠드는 소리는 굳이 들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귀에 들어왔다. 사고가 나서 학교를 빠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안 왔구나……. 언유는 시무룩하게 생각했다. 종일 옆에서 귀찮게 구는 애가 없으니 허전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고갯짓이라도 열심히 해줄 걸 그랬나 보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형은 웬일로 언유보다 일찍 집에 와 있었다. 현관에 벗어놓은 형의 구두를 언유는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언유야, 하고 부르는 형의 목소리에 꿈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형?’

‘잠깐 서재로 와볼래?’

서재에 처음 들어가는 것도 아니건만 언유는 괜히 긴장이 됐다. 이 시간에 형이 집에 있는 것도 별일인데 이렇게 각 잡고 부른 적도 처음이었다.

언유는 형이 너무 좋았지만, 형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집도 자주 비우고, 집에 들어온다고 한들 인사를 나누는 게 전부였으니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적 없으니 저를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마냥 좋지만은 않은 기분으로 안에 들어갔을 때, 언유는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걸 느꼈다. 형이 여상히 묻는 말 때문이었다.

‘요즘 친구 생겼다며?’

‘…….’

물론 언유는 아직 머리털밖에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본인은 몰랐지만 언유는 남들보다 성장이 느렸다. 언유는 형이 짓는 부드러운 표정에 어쩐지 두려움부터 밀려들었다. 언유가 조심조심 고개를 저었다.

‘저 친구 없어요, 형.’

‘그럼?’

‘…….’

짧게 묻는 말에 언유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을 고민했다. 형이 이런 걸 왜 묻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언유는 친구가 없었다.

그런데 그 때, 한 얼굴이 떠올랐다. 옆에 앉아 쉴 새 없이 언유에게 말을 걸고, 매점에서 먹을 것도 사 와주고 교과서에 멋대로 낙서를 하던 그 애가.

이 한 사람 말고는 잡히는 게 없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형이 어떻게 알았느냐는 의문은 미처 떠올리지 못한 언유가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했다.

‘친구, 아닌데…….’

친구라기엔 둘은 대화 한번 한 적 없었다. 그리고 언유도 눈치는 있었다. 여기서 어떤 말이 정답인지 정도는 알았다.

계속해서 부정하는 언유를 형은 물끄러미 쳐다봤다. 친구가 아니면 뭐냐는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언유는, 그럴싸한 대답 하나를 내놓았다.

‘……그냥, 같은 반 애예요.’

다행히 정답이었을까.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턱을 괴며 잠시간 뭘 생각하더니 언유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뜻에 언유가 몇 걸음 다가갔지만, 형은 그걸로 부족한지 더 가까이 오라고 했다.

서로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가 돼서야 형은 고개를 끄덕였고, 불쑥 언유의 얼굴에다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손이 볼을 쓸자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언유의 눈꺼풀이 빠르게 팔랑였다.

하지만 형이 입 밖에 꺼낸 말은 더 놀라운 것이었다.

‘언유야, 걔 오늘 학교 못 왔지.’

그제야 언유는 위화감을 느꼈다. 형은 언유가 학교에 있을 동안 회사에 있었을 텐데, 어떻게 다 알고 있을까. 언유가 말한 적도 없는 얘기를. 대체 어떻게 알고 물어보는 걸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

이어서 어쩌면, 형이 모든 걸 알고 있을 거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언유가 말이 없자 형은 대답을 재촉하듯 볼을 엄지로 살살 밀었다. 그제야 언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형이 안타까워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거 언유 때문인데, 몰랐지.’

‘…….’

‘언유한테 말 걸어서 그렇게 된 거야.’

부드러운 어조와 달리 내용은 살벌했다. 언유는 형이 농담을 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저건 전부 사실이었다. 그럼 그건…… 사고가 아니었던 거다. 삽시간에 주변의 온도가 떨어졌다.

언유는 오늘 학교에서 들었던 소문을 곱씹었다. 도로에 뛰어들어 사고가 났는데, 하필이면 발견되기 힘든 외진 곳이라 한참을 그 상태로 있었다고. 뒤늦게 누군가 신고를 했지만 이미 늦은 뒤라 재활 치료를 하더라도 전처럼 움직이긴 힘들 거라고.

운이 안 좋았다고, 그러게 왜 그런 곳에 혼자 갔냐고 다들 그랬는데……. 혼란스러운 와중에, 형이 가볍게 타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처신을 좀 잘하지 그랬어.’

‘…….’

‘처신을 제대로 못 하니까 이상한 잡놈이 말을 걸잖아.’

그 말 때문이었을까. 언유는 저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의문을 품었다. ……내 탓인가? 한참 동안을 패닉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언유가 처음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만약 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걔는 무사했을 거다. 괜히 저에게 말을 걸어서, 그걸 또 형이 알게 돼서 이런 흉악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저가 잘 대처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형 말대로 처신을 잘했더라면…….

언유의 머리 안이 뒤죽박죽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충격을 견디지 못해 제대로 된 사고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걸 언유 본인은 몰랐으나, 형은 잘 알았다.

넋이 나간 모습을 확인하며, 형이 쐐기를 박았다. 전부 언유 탓이야. 그 말에 언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형이 아까처럼 가만가만 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무서워?’

‘…….’

그 말에 언유의 눈이 빠르게 촉촉해졌다. 정답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 언유에게 닥친 제일 큰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도망가고 싶기까지 했다. 언유가 눈도 깜빡이지 않자 형이 긴장을 풀라는 듯이 볼을 꼬집으며 웃었다.

‘언유가 다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

‘하긴, 언유는 좀 겁을 먹을 필요가 있어. 형이 너무 잘해주니까 정도를 모르는 것 같아.’

‘…….’

‘그나저나 걔도 불쌍하지, 언유만 아니었으면 잘 걸어 다니고 있을 텐데.’

결국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언유의 복잡한 머릿속을 단번에 정리해주는 말이었다.

형 말이 맞았다. 말 걸지 말라고, 싫은 티를 냈어야 했다. 제대로 했다면, 그랬다면, 그랬으면 걔도……. 언유는 심지어 걔한테 고갯짓을 더 잘해줄 걸 그랬다고 후회하기까지 했다. 그것까지 전부 알아차린 형이 이런 일을 벌인 게 분명했다. 말을 듣지 않은 언유에게 벌을 주려고.

눈물이 뺨을 타고 또르륵 떨어지자 형이 세심하게 눈가를 닦아줬다.

‘앞으로 형 말 잘 들을 거지? 그래야 이런 일 다신 없을 거 아냐.’

‘흑, 끅……. 흐윽…….’

입을 열자 대답 말고 울음부터 나왔다. 목구멍을 뜨거운 무언가가 막고 있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자꾸 이상한 소리만 나와 언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형은 턱을 부서져라 세게 쥐고 위로 들게 했다. 강한 악력에 언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주친 형의 눈동자는 역설적이게도 참 다정했다.

‘형 눈 피하지 말고. 대답.’

‘……네, 흐윽, 끕, 네에……. 잘 들을, 게요, 흐윽.’

놀라 딸꾹질이 나왔지만, 대답이 급했다. 언유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제야 형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언유를 달랬다. 그래, 우리 언유. 착하다.

다음 날 언유가 학교에 갔을 때, 소문은 조금 변해있었다. 사고를 당해서 불구가 된 건 사실인데, 그게 다 이언유한테 말을 걸어서 그렇게 됐다는 거였다. 허황된 소문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들은 그게 무슨 괴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동네방네 열심히 떠들고 다녔다. 그리고 대부분이 이젠 더더욱 언유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괜히 찜찜하니까.

언유는 해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이란 걸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으니까. 단지, 그 애를 생각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 힘든 게 다였다. 내가 잘했으면 됐는데……. 모든 게 언유 본인의 탓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급격히 피곤해진 언유는 책상에 풀썩 엎드려버렸다. 아직 다음 시간이 시작하기까지 5분이나 남았으니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고 했다. 그 때, 옆에서 누군가 언유를 불렀다. 이언유, 이거 담임이…….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호들갑 떠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야 너도 다리 병신 되고 싶어?”

“좀, 기분 더럽게 만들지 말라고.”

재밌는 농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저들끼리 킥킥거렸다. 자주 있는 일이라 이젠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대꾸 없이 여전히 엎드려있던 언유는,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걔 전학 간다며?”

“아예 이사 가는 것 같던데.”

“다리는 계속 못 쓴다지?”

“엉. 문병 갔다 온 애가 그러더라.”

전학 가는구나. 다신 볼 일 없겠네. 언유는 저가 만든 어둠 속에서 멍하니 생각했다.

이제 걔가 없으니, 졸업할 때까지 쭈욱 이렇게 지내게 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 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에도 소문은 진득하게 자리를 지킬 것이다. 마치 지워지지 않는 그을림처럼 주위를 맴돌며 괴롭힐 테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 * *

집에 돌아와 온종일 참았던 오줌을 눴다. 언유는 일부러 학교에 있을 때 물을 마시지 않았다. 형 때문이지만, 원체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향이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물을 내리고,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놓고 책상에 앉았다. 언제 문소리가 나나 귀를 쫑긋 세운 채였다.

얼마 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을 때, 늘 그래왔던 것처럼 언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오셨어요?”

“언유야.”

언유가 쪼르르 달려가 형 주변을 기웃거렸다. 형은 오늘도 학교 잘 다녀왔느냐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곧바로 서재로 몸을 틀었다. 그런 형을 언유가 무작정 불러 세웠다.

“형……!”

여느 때라면 멀거니 뒷모습만 바라봤겠지만, 오늘따라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 형이 뒤를 돌아보자 우물쭈물 변명을 자아냈다.

“저, 그게, 저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형한테 물어보고 싶어서요…….”

공부는 못해도 된다며 선생님한테도 말을 걸지 못하게 했던 형이다. 그러니 언유도 일말의 변명거리는 있었다. 그 말에 형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었다. 언유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책 갖고 올게요, 잠시만요!”

언유는 방에 뛰어 들어가 아무 책이나 껴안고 다시 서재로 달려갔다. 그 사이에 형은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형한테는 늘 차가운 냄새가 났는데 언유는 이걸 바깥 냄새라고 불렀다. 하지만 언유는 밖에 나갔다 와도 이런 향이 나지 않았기에 형의 곁에 설 때면 집착하듯이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이거 모르겠어?”

“네에, 배웠는데 잘 모르겠어요.”

아무거나 집어온 책은 과학 교과서였다. 언유가 책을 휘리릭 펴고 아무 데나 짚자, 형이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언유는 집중한 옆얼굴을 아닌 척 관찰했다. 그러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지 스스로에게 묻기도 전에, 형이 펜을 쥐었다. 그 때 언유가 선수 치듯 말했다.

“혀, 형. 저 형 무릎에 앉아서 들으면 안 돼요……?”

“무릎에?”

형이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언유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담임 선생님이 보여준 영화에 나온 장면이었다. 영화는 재미없었지만 장면 하나는 기억에 오래 남았다. 슬퍼하는 이를 무릎에 앉히고 달래는 모습이었다. 언유는 그게 참 다정하다고,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형 무릎에 앉아보고 싶었다.

“형이, 싫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물론 형이 허락해 줄 거라는 자신은 없었다. 기가 죽어 어물거리는 언유를 보다, 형이 자신의 허벅지를 탁탁 쳤다.

“올라와.”

“…….”

혹시 형이 무를까 봐 겁난 언유는 재빠르게 다리 위로 올라갔다. 말랑한 제 허벅지와는 달리 형의 것은 무척이나 딱딱해 의자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팔을 어디에 둬야 하나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언유의 등을 단단한 팔이 받쳤다.

“한번 볼까?”

“……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펜을 들고 형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식물체는 크게 영양기관과 생식기관으로…… 이 문제에서 말하는 건……. 형은 열심히 설명해줬지만 언유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형과 접촉해있는 부위만 자꾸 신경 쓰였다. 형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언유는 자꾸 안절부절못했다. 급기야 저가 숨을 쉬는 소리가 너무 큰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어 조심조심 날숨을 뱉는 지경에 이르렀다.

“언유야, 알겠어?”

“네? 네. 네,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그러니 설명이 끝나는 줄도 모를 수밖에. 형의 말에 언유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형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런 형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언유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이제 내려가야 하는데,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된다면 평생 이렇게 형과 있고 싶었다. 오늘 내내 서글프기만 했던 학교생활을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형은 언유의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언유는 제 친부모가 누군지 몰랐고, 양부모는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남아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형이었다. 저를 돌봐주고 감싸주는 유일무이한 사람. 언유는 형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형, 저 안 무거워요……?”

그렇기에 지금도 조심스러웠다. 혹시 무릎에 앉히기 싫은데 억지로 허락한 거라면, 속으로 귀찮다 여기고 있다면? 불쑥 머리를 든 걱정에 언유가 눈치를 살살 보자 형이 웃으며 언유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하나도 안 무거워.”

“진짜요?”

“형 눈에 언유는 아직 너무 작아.”

언유는 또래 남자애들보다 키가 작긴 했다. 평소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문제인데 형이 이렇게 말하니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너무 작은가? 언유가 또 이상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형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빨리 크자, 언유야.”

그제야 농담인 걸 알아차린 언유가 저도 배시시 웃었다. 온몸이 긴장이 풀린 듯한, 경계심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미소였다.

그 얼굴에 형은 만족감을 느꼈다. 일이 설계대로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언유는 몇 분을 더 그 위에서 즐기고 난 뒤에야 내려왔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형을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 방에 들어갈게요.”

“그래.”

문고리를 반쯤 당긴 언유는 또 뭉그적거리며 쉽게 나가려 하지 않았다. 형은 인내심 깊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자 언유가 머뭇거리다 고개만 틀더니,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저 이제 아무랑도 얘기 안 해요.”

“…….”

“이제 누가 말 걸면 그냥 집으로 와버릴 거예요…….”

“…….”

“언유는 형이랑 한 약속 어기기 싫어요. 언유는 형이 제일 좋으니까요……. 형이 제일 중요해요.”

“…….”

“언유가 잘할게요.”

끝엔 거의 어리광부리는 말투였다. 갑작스러운 말에도 형은 놀라지 않았다. 사실 놀랄 것도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매일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아이 하나 족친다고 해서 제게서 마음이 돌아설 만큼 이언유는 강하지 않았다. 애정에 목마른 사람이 어떻게 유일한 공급원을 쳐내겠냐는 말이다.

혹시나 생길 변수까지 처리한 지금, 형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역시나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형은 인자한 척, 마치 봐준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형은 언유 믿으니까. 앞으로도 형 말 잘 들을 수 있지?”

“네!”

뭣도 모르고 언유는 고개를 몇 번이고 힘차게 끄덕였다.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형은 가슴께를 꽉 채우고도 남을 흡족함에 다시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언유를 배웅하며 형은 스무 살까지 몇 년이 남았는지를 계산했다. 그러다 어차피 평생 함께할 건데 고작 몇 년 기다리는 게 뭐 어때서, 란 생각에 계산을 멈췄다.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가족인 그들은 죽을 때까지 함께였다.

오늘은 그 많고 많은 날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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