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B
여기까지 안내해준 남자의 인사를 받고 현재는 사무실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한 층 전체를 사무실로 사용하는지 지나치게 넓었다. 안쪽에는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현재는 그 문을 두드릴 생각도 하지 않고 문고리부터 잡았다.
“…….”
사무실은 한쪽 벽이 전부 유리창으로 돼 있었다. 커다란 원목 책상이 공간 중앙을 차지했고, 사람을 접대할 때 쓰는 테이블과 안락한 소파가 반대편에 있었다.
그 밖의 것을 관찰하기 전에, 소파에 앉아있는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현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소를 지어도, 어떤 표정을 지어도 차가워 보일 것 같았다. 어딘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게 이언유가 죽고 못 사는 형이구나.
현재는 남자를 파헤치려는 것처럼 샅샅이 훑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거만해 보이긴 힘들 텐데. 현재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 때, 서류를 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면서 둘은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현재는 남자가 굉장히 피곤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모양새에 멀끔한 낯인데도 어딘가 느낌이 그랬다.
남자가 앉으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별수 없었다. 현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저가 부른 주제에 먼저 말하란 듯이 현재를 빤히 쳐다봤다. 둘은 아직까지 간단한 인사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였다. 어차피 채현재도 남자와 길게 대화를 하고 싶진 않았다. 이언유 때문에 궁금하긴 했어도, 현재에게 있어 남자는 장애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현재였다. 짧은 설명으로도 남자는 현재가 하는 이야기를 단번에 이해했다.
‘동의도 구하지 않은 실험이 이뤄진 걸 알고 있다.’
최근 것은 모르고 과거에 일어났던 것만 알고 하는 말인 듯했다. 그 일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 중 발설했을 만한 몇 명이 남자의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지만, 이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허탈감이 가슴 속을 휩쓸었다.
더구나 그렇게 주장한다 하더라도 내세울 증거는 없다. 연구는 최근 다시 시작돼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건 남자 본인과 당사자인 이언유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는 입을 다물었으니, 이언유가 말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모를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제야 남자의 생각이 한 곳에 미쳤다. 이언유가 말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
사실 연구는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결론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언유가 가진 불완전한 생식기관은 아무리 호르몬을 투여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럼에도 자궁이 제 기능을 하게 됐다는 거짓말을 한 건, 딴 데서 구멍 벌리고 다니는 헤픈 이언유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한 남자의 수단이었다. 이렇게 역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남자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현재를 바라봤다.
남자 외에 이언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지금 마주 앉은 채현재가 있었다. 이언유와 접촉할 수 있고 구슬릴 수 있는 사람. 혹은 이언유를 강제로 외부에 노출시킬 수 있는 사람. 누군가 밝히지 않는 이상 이 비밀은 묻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제야 남자의 입매가 조금 움직였다.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만에 하나 이 이야기가 세상에 퍼진다고 하더라도 남자에게 큰 타격은 없을 것이다. 돈을 먹여 기사를 막는 건 일도 아니며, 화제가 되었다가도 금방 가라앉을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는 건 길어봤자 한 달이니 그 기간만 잘 수습하면 된다. 하지만……
“너도 그걸 밖에 내놓지는 못할 텐데.”
이언유를 밖에 드러낼 수 없었다. 선례는 없지만, 두 개의 성기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남들이 좋은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질 낮고 호기심 섞인 물음들이 대부분일 터다. 물론 그것보다 남자는 다른 이들의 눈이 이언유를 스친다는 점에 불쾌감이 일었다. 온몸에 오염된 물이 닿는 것처럼 기분이 더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채현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외부에 공개한다는 계획을 행동에 옮기지 못한 건 그 탓이었다. 그 감정에 독점욕이라 이름 붙여도, 너도 저 남자와 똑같다고 누가 비난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현재는 이렇게 찾아왔다. 부르지 않았으면 먼저 찾아갔을 거다. 현재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말은 전부 했다. 이건 게임과도 같았다. 한쪽이 포기하면 다른 한쪽이 이득을 보는 게임. 둘 중 누구도 포기할 마음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남자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요 며칠간 끈질기게 뇌에 달라붙어 남자를 괴롭히던 잔상이 떠올랐다. 평생 눌리고 눌리던 고집이 폭발하는 건가 싶던 그 모습이.
입을 굳게 다문, 잔뜩 웅크린 마른 몸이 환각처럼 남자의 근처를 맴돌았다. 때려도 범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반복된 험한 관계로 온몸에 피멍과 상처를 달고는, 곧 죽을 사람처럼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했다. 그건 마치 아무런 의지를 가지지 않은 인형처럼 보였다. 뒷보지로 음식을 처먹고 싶냐는 말에도 퀭한 눈으로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무사하다고,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말을 해줬지만 이젠 소용이 없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남자는 생전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 후회란 것은 깊고도 어두웠고,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 만큼 끈적거렸다. 그 안에 빨려 들어간 남자는 이언유와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짚어보곤 했다.
처음부터 발목을 부러뜨려 묶어뒀어야 했다. 집 밖에는 나갈 생각도 못 하게. 학교고 뭐고 이 세상에서 존재를 없앴어야 했다. 지금보다 더 강렬하게 나만 보게끔 했어야 했다. 이렇게 되기 전에, 저 애새끼를 만나기 전에, 그랬어야 했는데.
……차라리 알아차리자마자 죽였어야 했나. 죽이는 건 어려워도 다리 하나는 부러뜨려야 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모든 건 너무 늦은 뒤였다. 생각에 잠긴 채 남자는 테이블을 손가락 끝으로 툭, 툭 쳤다.
이게 최선인가? 이 또한 수없이 되뇌던 질문이었다. 그에 언제나 절대 최선이 아니란 답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언유를 생각하면 이제 저 애새끼를 함부로 내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둘은 침묵했다. 드디어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마침내 당사자를 뺀 협상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