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수도
<오는 21일 7구역에서 열리는 제4차 종전 회담에서 대표단이 종전선언문을 최종 작성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입니다. 자세한 소식 들어 보겠습니다. 이문형 기자.>
조이는 종전 선언을 보도하는 라디오 내용을 흘려들으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싱그러운 초록빛 정원수 사이로 그날의 일이 환상처럼 펼쳐졌다. 3일 동안 지속됐던 교전. 그 치열한 현장 속에서 권명을 끌어안았던 순간. 온몸을 불태우던 열기.
“으윽…….”
그 일이 떠오르자 팔에서 욱신욱신 통증이 느껴졌다. 조이는 애써 그 감각을 무시하며 라디오에 집중했다. 기자는 반세기 동안 이어진 동제국과 서제국의 전쟁이 끝이 났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 조이를 제외한 모두가 저런 마음일 것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조이는 전장이 아닌 병실에 누워 있었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전쟁은 이미 끝나 있었다. 온통 종전에 대한 소식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조이는 아직까지 전쟁이 끝났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조이의 마음은 여전히 전장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절망스러웠고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종전선언문이 발표되면 실감이 날까?’
최후의 전투가 있고 정확하게 3일 뒤, 동제국과 서제국의 대표단이 만나 종전 협상을 시작했다. 평화유지 조약과 전쟁배상금에 대한 내용이었다. 서제국은 이번 패전으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동제국의 대표단이 종전 테이블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날의 전투가 서제국에게 작지 않은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조이 역시 그날의 일이 악몽처럼 느껴졌으니까.
“왜 일어나 있어? 상처 덧나려고 그래?”
권명은 조이의 몸을 번쩍 들어서는 침대에 내려놓았다. 깃털이 내려놓듯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수도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될 때만 해도 조이의 몸은 아기처럼 약해진 상태였다. 7구역 출신답게 억세고 질긴 몸이 그날 이후로 온실에서 자란 장미처럼 연약해졌다. 형광등 불빛에도 고통을 느끼고는 했으니까. 전신화상 때문이었다.
피부 복원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박사가 매일같이 조이의 몸을 살폈고, 그 덕분인지 예전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사실 통증보다 더 심각한 건 끔찍하게 변한 모습과 가이딩 능력이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할 당시 조이의 졸업장에는 1등급 가이드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그 능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조이는 이제 더 이상 가이딩을 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검사를 진행했지만, 그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기나긴 가뭄에 저수지가 마르듯, 조이의 능력도 말라버린 것 같았다.
가이딩을 할 수 없게 된 것과 동시에 권명에게서 느껴지던 파장을 감지하는 능력도 사라졌다. 권명과 조이를 연결하던 그 끈이 사라진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이 버석버석 마르는 기분이었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필요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무력감 때문에.
“우편 또 왔던데… 그 대표단.”
조이는 권명의 눈치를 살피며 우편물을 가리켰다. 군에 있는 높으신 분들은 종전선언문을 읽을 후보로 권명을 추천했다. 하지만 권명은 그 추천서를 받자마자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가문의 영광이라고 불릴 만한 일인데도 권명은 조이가 있는 이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조이가 잡혀갈 것을 우려하는지도 모르겠다. 조이는 대체 범죄자인 자신이 어떻게 수도에서 치료를 받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조이의 억울함을 풀어 준다던 권명이 무슨 술수를 부린 걸까?
“지긋지긋한 것들. 안 간다니까 왜 말귀를 못 알아먹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어디를 가? 네가 아픈데.”
조이는 권명의 단호한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자꾸만 확인받고 싶었다. 조이를 향한 권명의 마음이 여전히 같은지.
“나… 언제 7구역으로 가?”
조이는 7구역으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7구역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날의 일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럼에도 조이는 가이딩도 못 하게 된 쓸모없는 자신이 언제 7구역으로 떠나야 하는지 물었다. 권명은 조이의 물음에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7구역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거기에서 그런 꼴을 당하고도 그곳에 가고 싶어? 절대 안 돼. 그쪽으로는 오줌도 쌀 생각 하지 마. 재수 없으니까.”
권명의 이런 대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알아서 떠나겠다는 조이를 붙잡는 권명의 말이 듣고 싶어서. 원하는 대답을 들었지만 조이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 눈물이 나왔다. 꼭 이렇게 확인받아야지만 안심하는 나약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왜? 아파? 약물 목욕이라도 할까?”
“싫어. 너… 나가.”
조이는 마음에도 없는 축객령을 내렸다. 권명은 조이의 기분이 별로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조이의 몸 위로 얇은 이불을 덮어 준 후 입을 맞추려 했다. 조이는 끔찍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그 입술을 피했다.
이불속에 온몸을 숨긴 채 권명의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병원으로 이송된 후 조이의 얼굴과 몸은 끔찍한 상태였다. 우연히 창문에 비친 모습을 본 이후 조이는 병실에 있는 거울이란 거울은 모조리 깨 버렸다.
“흐윽… 읏…….”
어깨가 들썩거리도록 오열했다. 어린아이처럼 입을 크게 벌린 채 엉엉 울었다. 7구역에서 고된 노동을 할 때에도 조이는 종종 이렇게 울고는 했다. 실컷 울고 나면 기분이 후련했는데, 이상하게 이곳에서는 아무리 울어도 후련하지 않았다.
베개가 흠뻑 젖도록 눈물을 흘리는데 조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조이.”
조이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나간 줄로만 알았던 권명이 병실 안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 자꾸 혼자 울어? 아파서 그래?”
“읏… 나… 나가라고 했잖아!”
조이는 이불을 뒤집어쓴 상태로 권명에게 나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권명은 오히려 이불을 걷어 내고는 조이의 얼굴을 살피려 했다. 조이는 황급히 얼굴을 숨겼다.
“안조이. 앞으로 권명 형아라고 불러. 너 이렇게 우는 거 보니까 내가 형 해야겠어.”
권명은 장난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조이의 눈물을 닦아 주려 했다. 하지만 조이는 손을 들어 올려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길을 잃은 권명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조이의 손등에 닿았다. 손을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닿겠다는 듯.
“안아 줄까? 아니 안고 싶어.”
“싫어!”
권명은 그런 조이의 말을 무시한 채 침대 위로 올라왔다. 조이는 내려가라고 소리치며 커다란 덩치를 밀어냈으나, 권명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권명은 기어코 조이를 품에 꽉 안았다. 따뜻한 그 품에 안기자 권명을 밀어내던 손에 힘이 풀렸다.
조이는 순한 양이 되어 순순히 권명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콩닥콩닥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안하던 마음을 안정시켜 주던 그 소리. 또 눈물이 나오려 했다. 정말 이러다가는 철없는 권명보다 더 철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조이는 애써 눈물을 삼켰다.
“안조이. 환생 믿어?”
“아니. 그런 거 안 믿어.”
“그럼 오늘부터 믿어 봐. 다시 태어나면 난 가이드 할 거야. 넌?”
“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조이의 청개구리 같은 말에도 권명은 재주 좋게 말을 이어 나갔다.
“왜 가이드로 태어나고 싶은지 물어봐 봐.”
“싫어. 하나도 안 궁금해.”
조이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고 말했으나 어느새 권명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권명은 다음 생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조이의 가이드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매일매일 네가 조금도 아프지 않도록 가이딩을 할 거야. 혓바늘이 돋으면 그 혀를 쪽쪽 빨아서 치료할 거고, 손가락을 다치면 온종일 입에 물고 있을 거야. 다시는… 다시는 네가 다치지 않도록 할 거야. 절대.”
“…….”
가이드로 태어나고 싶은 이유를 늘어놓던 권명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꼭 조이처럼 권명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는 조이가 다치지 않도록 보살필 거라는 그 말이 어쩐지 자신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려왔다.
“조이야. 미안해.”
“읍…….”
권명은 조이를 조금 더 꽉 끌어안으며 자꾸만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조이는 무엇이 미안한 건지 물으려 했으나 울음이 튀어나와 물을 수 없었다.
“내일부터는 아프지 않도록 무슨 수라도 쓸 거야. 박사를 조지든가, 새로운 의사를 찾아볼게.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권명은 조이가 아픔을 견디다 못해 우는 줄 아는 듯했다. 조이는 권명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아직은 조이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으니까.
“그리고 혼자 아프지 마. 내가 있잖아.”
권명은 자신에게만큼은 아픔을 숨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자꾸만 조이에게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조이는 어렴풋이 권명의 죄책감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권명의 폭주 그리고 조이의 부상.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권명은 조이의 부상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 * *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일어난 조이는 눈을 뜨자마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권명의 얼굴이 무척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조이는 그동안 권명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붕대 아래 숨겨진 끔찍한 몰골을 권명에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권명이 조이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건 알지만, 이런 모습까지 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권명이 헤어짐을 고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조이는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권명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권명…….’
조이는 화상으로 울긋불긋하게 변한 손을 들어 올려 권명의 얼굴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만지던 저 얼굴을 이제는 이렇게 만져야 한다니. 조이의 작은 움직임을 잠결에도 알아차렸는지 권명이 부스스 눈을 떴다.
“일어났어? 아프지는 않고?”
“응…….”
“그럼 조금만 기다려. 식사 챙겨 올게.”
권명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조이의 식사를 챙기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 조이는 붕대를 풀고 젖은 수건으로 잽싸게 몸을 닦았다. 의사는 조이의 회복력이 꽤 뛰어난 편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았다. 여전히 울퉁불퉁했으나 예전처럼 누런 진물이 묻어나지는 않았다. 온몸을 닦은 후, 조이는 연고를 펴 발랐다.
“안조이? 씻고 있어? 내가 해 줄게. 혼자 하지 마!”
식사를 챙겨 돌아왔는지, 권명은 금방이라도 욕실 안으로 들어올 듯 소리쳤다. 조이는 절대 권명에게 이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 없었다.
“나가!”
조이는 앙칼지게 소리치고는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병적으로 약을 치덕치덕 펴 발랐다. 온몸이 연고로 번들거릴 정도로.
‘빨리 나아야 해. 조금이라도.’
한참 동안 몸에 약을 바른 후 조이는 욕실 문을 열었다. 권명은 그사이 식사 준비를 마쳤는지 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이가 욕실 문밖으로 나오자 재빨리 달려와 부축했다.
“자, 회복력에 좋다는 음식으로 만든 거야. 어서 먹어 봐.”
식탁에는 화상에 좋다는 약초가 첨가된 감자 브로콜리 샐러드와 연어 스테이크가 있었다. 조이도 마침 배가 고팠기에 권명이 차려 놓은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런데 포크도 숟가락도 조이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아-.”
권명은 조이에게 입을 벌려 받아먹기만 하라는 듯 입술 가까이 샐러드를 가져다 댔다. 조이는 저렇게 다정한 권명이 조이를 떠날 걸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아파 왔다. 약을 바르며 보았던 그 모습을 권명이 본다면 분명 떠날 것이다. 조이가 보기에도 끔찍하니까.
“내가 먹을 거야. 포크 줘.”
“아-.”
권명은 조이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있었다. 조이는 자신이 먹겠다면 재차 거절했으나, 권명의 끈질김에 결국 작게 입을 벌려야 했다. 한 번 받아먹으니 두 번은 쉬웠고 세 번은 더더욱 쉬웠다. 권명의 배려를 즐기며 조이는 내심 즐거운 식사를 마쳤다.
그런데 조이는 한발 늦게 권명의 식사가 차갑게 식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권명은 조이에게 물까지 먹여 준 후 뒤늦게 차가운 음식을 입에 넣었다. 눈가가 시큰해졌다.
* * *
약물 치료 후 권명은 의사와 긴 상담을 하는 듯했다. 그사이 조이는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이했다. 이휘 대위였다. 대위 역시 그날의 일로 크게 다친 듯했다. 에스퍼인 그가 아직도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이야. 안 중위 끝내주는 곳에서 회복 중이네?”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이휘 대위는 조이가 있는 병원을 전 국민이 알 텐데 자신이 모르는 게 말이 되느냐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침 수도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안 중위 걱정돼서 와 봤지. 뭐 먹을 건 없어?”
뻔뻔한 놈. 조이는 권명이 잔뜩 사다 놓은 간식과 음료수를 가리켰다. 이휘 대위는 이렇게 비싼 걸 먹는 걸 보면 조만간 회복하겠다며 조이를 약 올렸다.
“하긴 뭐. 앞날이 창창하시니까.”
“내 꼴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이런 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쓸 후원금도 들어올 텐데, 이 정도면 양호하지. 살아 있잖아.”
“참 나.”
이휘 대위는 그 전쟁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이 조이라도 된다는 듯 굴었다. 권명의 폭주를 홀로 막아서던 조이의 모습을 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후원금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일까?
“후원금이라니. 뭔 소리예요?”
“후원금 들어온 거 없어? 방송 타면 꽤 들어온다고 하던데.”
“무슨 방송이요?”
그사이 조이가 방송에 나오기라도 한 걸까? 이휘 대위에게 자세하게 물어보려고 했으나, 권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이. 좋은 소식이… 넌 뭐야?”
다정하게 조이를 부르던 권명의 목소리가 이휘 대위를 발견하고는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심기가 불편한지 한쪽 눈썹이 삐쭉 올라갔다. 평소였다면 별일 아닌 거로 질투하는 권명의 모습이 우스웠겠지만, 지금은 보기 좋았다. 더 질투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걱정돼서 병문안 온 거래.”
“씨발. 뭐 얼마나 친하다고 병문안까지 와? 안 바빠? 바쁘게 만들어 줘?”
권명은 커다란 덩치로 위협하듯 가까이 다가왔다. 이휘 대위는 조이를 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중령님! 군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병문안이라고 해 놓고는 권명에게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권명은 대위가 공손하게 건넨 편지를 낚아채고는 고개로 뒤쪽을 가리켰다. 어서 꺼지라는 듯.
“예!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십시오!”
대위는 몸이 기역 자가 될 정도로 인사를 올리고는 사라졌다. 조이는 헛웃음이 나왔다. 저 깍듯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군에서 오래 살아남을 놈이었다. 권명은 곧바로 편지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두어 줄 읽은 것 같은데 곧바로 쓰레기통에 편지를 쑤셔 넣었다.
“무슨 편지야?”
“별거 아냐. 무시해도 돼. 그것보다 안조이. 좋은 소식이야. 의사 말로는 붕대를 풀어도 될 것 같대.”
“뭐?”
“잘됐지? 이제 어느 정도 아물었으니 통풍에 주의하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오늘부터 붕대 풀자.”
“시… 싫어!”
권명은 자신이 붕대를 풀어 주겠다며 다가왔으나 조이는 기겁을 하며 권명을 밀어냈다. 그 과정에서 권명의 손을 ‘탁’ 하고 매섭게 내려쳤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너무 지나치게 반응한 것 같아 조이는 권명의 눈치를 살폈다. 권명은 조이의 매서운 태도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이를 설득하려 했다.
“조이야. 붕대를 풀어야 더 빨리 회복할 거래.”
“그… 그래도 싫어.”
조이가 극구 거절하자 권명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권명은 이 붕대 아래 있는 끔찍한 얼굴을 전혀 모를 테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권명은 어려운 말을 입에 담듯 말을 고르더니 조이에게 상담 치료를 받아 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상담 치료?”
“어. 이 병원이 상담 치료로도 유명하거든. 너도 큰 사건을 겪었으니까 그런 치료를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나도 받고 있고.”
“너도? 그 일 때문에……?”
권명도 상담 치료를 받는다니. 조이는 권명과 데면데면하던 것도 잊은 채 권명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폭주했던 그 일 때문이냐고. 조이의 걱정 가득한 표정을 보던 권명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기회를 발견한 표정이랄까?
“응. 정신적으로 너무 아팠는데, 상담 치료를 받고 훨씬 좋아졌어.”
“상담 의사는 군의관이야? 아니면…….”
“일반 의사야. 환자에 대한 모든 내용은 의사만 알고 있고.”
권명은 조이가 우려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듯했다. 조이는 권명이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 후 군의관에게 상담 치료를 받았었다. 별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상담을 진행할 의사가 일반 의사이고 또 환자에 대한 모든 내용을 기밀 사항으로 보관한다면 조이도 상담을 받아 볼 생각이 있었다. 조이의 썩어 문드러져 가는 마음을 다시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다. 또한 어쩌면 심리 치료로 잃어버린 가이딩 능력을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군에서는 여러 차례 조이의 피를 뽑아 갔고 여전히 조이가 가이드라고 진단을 내렸다. 그럼에도 조이는 권명에게서 흘러나오는 파장을 읽을 수 없었고 힘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지금 상태로는 재활용도 할 수 없는 고물이지만.
“상담 치료는 내일 예약할게. 붕대는, 그럼 오늘까지만 하는 거로 하자. 알았지?”
권명은 조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일 붕대를 풀어 보자고 제안했다. 권명이 반질반질한 낯짝으로 저런 말을 하니 조이는 순간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조이는 굳게 마음을 먹고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다.
* * *
권명이 제안한 것과는 달리 조이는 더욱더 꼼꼼하게 얼굴에 붕대를 감았다. 권명이 조이의 붕대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조하와 간병인이 조이를 보러 올 예정이었다. 조이가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는 동안, 조하는 최면 치료를 무사히 받을 수 있었다.
부활 작전이 시작되는 날, 조하는 3차 최면 치료를 받았고 그날 기적적으로 꽉 감겨 있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고 한다. 그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해 무척 아쉬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조하는 실험실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함께 숲으로 갔던 기억이 전부였다. 자신이 그저 전쟁 중 사고를 당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조하를 상담하던 박사는 기억을 일깨우는 대신 조하의 상태를 좀 더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조이 역시 동의한 일이었다. 모든 기억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 조이도 할 수만 있다면 일부 기억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때로는 살기 위해서 잊어야 하는 기억도 있었다.
“혀… 형?”
조하는 어색하다는 듯 조이를 불렀다. 아마 붕대 때문일 테지. 끔찍한 상처를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조이는 조금 더 신경 써서 붕대를 감았다. 그런데 그게 조금 과했던 모양이었다. 조하는 작은 목소리로 미라 같다고 속삭였다.
“조하야. 형 맞아! 얼굴이… 좀… 아파서 그래.”
“형아가 맞네……?”
조하는 조이의 목소리를 알아차렸는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조하는 경계심 많은 소형동물처럼 한참 동안 조이의 곁을 맴돌다 조이의 품에 안겼다. 그 감격스러운 포옹에 조이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조하가 실종된 이후 얼마나 이 순간을 꿈꿔왔던가.
“조하야, 형 많이 보고 싶었지?”
“어! 병원에서 눈을 떴는데 아무도 없어서 무섭고 그랬어.”
“미안. 형이 미안…….”
조이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한두 방울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룩주룩. 조하는 조이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조이는 눈을 비비는 척하며 눈물을 훔쳤다. 조이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듯 조하의 학교생활에 대해 물었다. 조이가 수도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권명은 조하와 간병인을 수도로 데리고 왔다.
자세히 묻지는 못했으나, 조이와 조하의 억울한 누명이 어느 정도 벗겨진 듯했다. 7구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하는 수도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기색이었다. 여전히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했지만 다행히도 학교생활에는 빠르게 적응하는 중이었다.
“괴롭히는 애들은 없어?”
“응! 오늘 형아 만나러 간다니까, 친구들이 사인받아 오래.”
“사인? 누구 사인?”
“형! 형아 사인.”
“나?”
조하는 안 그래도 사인받을 종이를 준비해 왔다면 책가방에서 두툼한 A4 용지와 펜을 꺼냈다. 조이의 손에 억지로 펜을 쥐여 주고는 사인을 해 달라고 했다. 조이는 간병인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냐고 입 모양으로 물었으나 간병인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뭔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지난번 이휘 대위의 말이 떠올랐다. 조이가 방송에 출연했으니 큰 후원금을 받았을 거라던 그의 말이. 조이가 치료를 받는 동안 대체 무슨 방송이 나간 걸까?
“형! 빨리 사인하고 우리 이거 가지고 놀자.”
조하는 무서운 아저씨가 사 준 거라며 보드게임을 들어 올렸다. 조이는 조하와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조하가 저렇게 웃는 모습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존재할 것이라 여겼는데, 조하는 조이의 눈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도저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아 조이는 중간중간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조하는 모기에 물린 것이냐고 물었다. 조이가 가려워서 긁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내가 친구한테 배운 게 있는데.”
조하는 친구에게 배운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며 조이의 허벅지에 손톱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냈다. 아주 귀엽게.
“안조하! 이 귀염둥이!”
조이는 아주 기분이 좋을 때만 종종 불렀던 귀염둥이라는 애칭을 부르며 조하를 끌어안았다. 귓가로 조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동안 조이와 조하는 간지럼을 태우며 놀았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늘 시무룩하게 내려앉아 있던 조이의 입꼬리도 오랜만에 한껏 위로 올라갔다.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름처럼 가벼워진 것은 입꼬리만이 아니었다. 7구역을 떠난 뒤 조이의 마음 한쪽은 늘 조하에 대한 죄책감으로 무거웠었다. 그런데 오늘, 심장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안개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땅콩은 이제 집에 가.”
등 뒤로 권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일을 보고 온 건지 군복을 입고 있었다. 흉측한 조이를 보고도 방긋방긋 웃던 조하는 권명을 보더니 조이의 몸 뒤로 숨었다. 조하는 여전히 겁쟁이였다.
“집에 가기 싫어서 그래? 그럼 병원에서 자고 갈까?”
“안 돼.”
권명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소리쳤다. 치사했다. 본인은 매일같이 조이의 병실에서 자고 가면서 왜 조하는 안 된다는 걸까.
“형… 내일… 놀러 와도 돼?”
“어! 매일 와! 매일!”
“안 돼. 현장 학습 가야 하잖아.”
조이는 자꾸만 안 된다는 소리를 싸지르는 권명이 얄미웠다. 조하의 현장 학습 일정은 왜 저리도 잘 알고 있는 건지. 조하는 그제야 현장 학습이 떠올랐는지 순순히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어디에 쓰려는 건지 모르지만 조이가 사인한 종이를 꾹꾹 눌러 담고는 간병인의 손을 잡았다.
“형… 다음에 봐…….”
“주말에 와 그럼!”
“진짜?”
조하는 권명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조이는 재빨리 권명의 눈을 가리며 조하에게 주말에 와도 된다고 소리쳤다.
“형, 그럼 주말에 봐! 그때는 더 재밌게 놀자!”
조이는 조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조하와 간병인이 사라지자 떠들썩했던 병실이 고요해졌다. 그제야 조이는 권명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어색하게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었어?”
조이는 어색함을 깨 보고자 군복을 가리키며 말을 건넸다. 조이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퍽 기분이 좋았는지 권명은 조이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는 말없이 조이를 끌어안았다. 조이는 그 품이 싫지 않아 가만히 몸을 내맡겼다.
“전역서 내고 왔어. 네 것도 같이.”
“어……?”
“쉽게 처리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하루빨리 제출해야 할 것 같아서.”
깜짝 놀라 조이의 표정을 본 권명은 설마 군에 미련이 남은 것이냐고 물었다. 조이는 미련 따위는 전혀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안 아쉬워……?”
“아쉽기는. 후련해. 그 거지 같은 조직에 발목 잡히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잖아. 망할 새끼들, 제때 나타났으면…….”
권명이 뒤이어 할 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날 그 전투에서 지원군이 제때 나타났다면 권명도 조이도 이런 끔찍한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조이는 권명의 눈치를 살폈다. 진정으로 권명이 군에 미련이 없는 건지 확인하듯.
권명의 후련한 표정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난번 권명이 구겨 버린 편지를 몰래 펴 본 적이 있었다. 권명을 대령으로 진급시킨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대령 진급은 아주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런데 권명은 그런 제안을 모두 거절한 것이었다.
“혹시… 나 때문이야? 가이딩 못 하니까……?”
권명은 곧바로 뭔가를 답하려 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조이의 표정을 물끄러미 살폈다. 의도를 가늠하듯. 평소의 조이였다면 본심을 숨겼겠지만, 지금의 조이는 초조함을 조금도 숨길 수 없었다.
“안조이. 난 가끔, 아니 꽤 자주 생각해. 네가 가이드가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네가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넌 그날 그 전장에 없었을 테고, 무모하게 날 구하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그럼 넌 지금…….”
“난 후회 안 해.”
조이는 권명의 말을 가로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조이는 진정으로 조금도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 그날 권명을 구하지 못했다면 조이는 지금보다 훨씬 더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을 테니까.
병원으로 이송된 후 늘 권명의 눈을 피해 왔지만 조이는 이번만큼은 권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진심을 알아 달라는 듯. 조이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권명의 눈매가 아래로 휘어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예쁘게.
“가만 보면 우리 조이 형아도 날 참 좋아해, 그렇지?”
“…어…….”
조이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권명은 다시 조이를 꽉 끌어안으며 귓가로 속삭였다. 끊임없이.
“안조이, 사랑해. 사랑해.”
* * *
조이는 요즘 권명이 제안한 대로 상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군의관에게 상담 치료를 받을 때와는 달리 조이는 말을 가려서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지 입을 떼기가 한결 쉬웠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과 그 일로 인해 지금 어떤 심정인지 털어놓을 때면 무거웠던 마음도 일시적으로 가벼워졌다.
“지난주 화상 치료는 어땠어요?”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잘됐네요. 어느 부분이 나아졌어요?”
조이는 팔 안쪽을 보여 주었다. 가장 심각한 화상을 입은 부위였다. 도저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어느새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조이의 화상 치료를 전담하는 박사는 조이의 회복력이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며, 가이딩 능력이 퇴화하는 대신 자신을 치유하는 쪽으로 발전한 건 아닌지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조이에게는 아직 부족한 수준이었다. 여전히 조금만 건조해도 껍질이 벗겨지고는 했으니까. 그 때문에 연고를 주기적으로 발라 주어야 했다. 그 일을 도맡아 하는 이는 권명이었다.
지난밤 조이는 잠을 자던 중 설핏 눈을 떴다. 커다란 덩치가 몸을 구부린 채 조이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권명은 조이의 팔에 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가이딩을 하듯 온 정신을 집중한 채. 조이는 다시 눈을 감았지만 권명의 그런 모습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 전까지 조이는 매일 밤 권명이 연고를 발라 주는 것도 모르고 그저 연고의 효과가 좋다고 여겼었다. 밤에 연고를 바르고 자면 다음 날 아침까지 촉촉했으니까. 권명은 밤새 몇 번이나 조이의 몸에 연고를 발랐던 걸까?
“주변 사람들에게도 보여 줬어요? 동생이나 파트너한테요.”
“네…….”
미라처럼 조이의 몸에 감겨 있던 붕대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종아리, 허벅지, 그리고 팔.
조하는 조이의 매끈한 팔을 보고도 왜 얼굴은 여전히 미라 같으냐며 순순한 궁금증을 내비쳤었다. 그리고 권명은 조이의 팔을 한참 동안 매만졌고 미안하다는 말을 작게 속삭일 뿐이었다. 조하와 달리 권명은 조이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붕대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기다리는 것 같았다.
“가족들도 기뻐했겠네요. 스스로는 어때요?”
“기뻐요…. 그리고… 좀 무서워요.”
때때로 회복된 피부를 만질 때면 조이의 얼굴에 남아 있는 울퉁불퉁한 흔적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희망이 솟아났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상담 치료를 마치고 문을 열자 권명이 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권명은 곧장 다가와 상담 치료가 어땠는지 물었다.
“그냥… 뭐.”
권명은 조이의 뜨뜻미지근한 대답에도 활짝 웃음을 지었다.
“나도 상담받아야 하니까 잠깐만 기다릴래? 아니면 병실까지 데려다줄게.”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러니까 넌 빨리 들어가. 선생님 기다리셔.”
권명은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어디 가지 말고 이곳에 있든가 아니면 병실로 돌아가 있으라고 당부했다. 조하가 들을 법한 말이었다. 조이는 빨리 들어가라며 권명의 등을 밀쳤다.
권명이 상담을 받는 동안 조이는 밖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얼굴이 퍽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조이는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
병실 안에는 조이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조하를 데리고 탈출한 이후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이였다. 한 중위. 이휘 대위가 말했던 대로 조이가 이 병원에 있다는 걸 모든 사람이 아는 것 같았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거야?”
한 중위는 붕대를 감고 있는 조이의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부축할 듯 가까이 다가왔으나 조이는 알아서 침대 위로 척척 올라갔다. 조이의 뒤에서 어색하게 따라오던 한 중위는 혹여 조이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었는지 두 팔을 어정쩡하게 내밀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진짜 온 제국민이 다 아는 거야?”
“군에 있는 사람들 중 일부만 아는 거야. 정보국에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물어봤지. 몸은 좀 어때? 화상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회복 중이야. 근데 어쩐 일이야?”
“아… 우리가 보통 사이인가! 당연히 병문안을 와야지.”
한 중위는 정보국 소속에서 홍보국 소속으로 변경되었다며 자신이 새롭게 맡은 일에 대해 한참 동안 떠들었다. 소속에서 알 수 있듯 군을 홍보하는 역할이었다. 김정명 감독이 했던 것과 같이 홍보물을 만들고 발행하는 일.
전쟁이 끝나고 군에서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군대 홍보물을 만들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전시체제에 돌입한 이후, 군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일들은 쉽게 묵인되었고 어느 정도는 용인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군의 비중과 역할에 대해 재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군이라는 조직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지만, 축소는 불가피한 상황인 듯했다. 군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이 기존에 쥐고 있던 힘을 놓치지 않기 위해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네 인터뷰를 내보내면 어떨까 싶어서. 그냥 한번 생각만 해 봐.”
“내 인터뷰를? 굳이 왜?”
“방송 이후로 영 노출을 안 하니까…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할 인물이기도 하고.”
조이는 은근슬쩍 자신의 방송이 어땠는지를 캐물었다. 들어보니 7구역 출신인 조이가 폭발물질을 가지고 탈영해 서제국에게 복수를 하는 내용이었다. 기승전결이 있는 한 편의 영화였다. 오직 애국심을 고취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였고 권명의 폭주는 조이가 연구소에서 훔쳐 낸 폭발물질로 대체되었다.
에스퍼들의 연쇄 폭주나 최면 역시 일절 나오지 않았다. 조하는 그저 아픈 동생으로 출연해 제국민의 동정을 한 몸에 받았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또 무슨 목적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권명과 김정명 감독의 작품일 테지. 부활 작전을 앞두고 군가나 구호를 외치는 조이의 모습. 그리고 조이가 구조한 이들의 인터뷰와 생생한 증언. 역적이었던 조이를 한순간에 영웅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재료였다.
조이는 한순간에 뒤바뀐 역할에 그저 어리둥절했다.
“내 후속 기사를 내고 싶다고? 군에서 그걸 허락했어?”
“당연하지! 그리고 군에서는 조이 네가 원하는 보직을 최대한 맞춰 줄 거야. 혹시 네가 원하면 나랑 같이 홍보국에서 일을 할 수도 있고 만약 현장직을 원하면 그것도 가능해.”
“현장직? 나 이제 가이딩 못 하는데?”
“문제 될 거 없어. 어차피 전쟁도 끝났고 현장직이라고 해 봐야 국경 쪽에서 근무하는 일이니까.”
“흐음… 그게 다야?”
“어…? 아… 아 참! 진급 얘기를 안 했네. 대위직을 한 달간 맡고 나서 소령으로 진급해 준다는 답변도 받았어. 바로 건너뛸 수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조이의 방송은 군과의 합작품이 아닌 것 같았다. 합작품이었다면 군에서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할 리 없으니까. 한 중위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이는 제국민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군에서는 이제 더 이상 가이딩도 못 하는 조이를 어떻게 해서든 군에 끌어들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었고.
“생각해 볼게.”
“어! 충분히 생각하고 연락해. 참고로 1면에 단독으로 나가는 거야. 1면 기사는…….”
한 중위는 1면 단독 기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선례를 들어 설명하려 했다. 조이는 한 중위의 말을 도중에 똑 잘라 냈다.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었다.
“나 쉬어야 해.”
한 중위는 조이에게 재차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겠다는 말을 전하며 병실을 떠났다. 조이는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으나 고민할 게 없었다. 이제 군이라면 지긋지긋하니까. 조이가 원하는 건 오직 권명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삶이었다.
퇴원하거든 일자리를 찾기는 해야 하지만 군에 속박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어느새 상담 치료를 마친 권명이 조이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조이가 앉아 있는 좁은 침대 위로 올라오려고 했다. 조이는 조금 당황했으나 순순히 자리를 내주었다. 한숨을 폭 내쉬는 걸 보면 상담 치료가 꽤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상담 치료가 힘들었어?”
권명은 아무 말 없이 조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더 이상 가이딩을 할 수 없는 몸인데도 권명은 조이의 체취를 들이마시고 온몸을 끌어안았다.
권명과 조이는 10년 동안 함께 산 부부처럼 별짓을 다 했었는데, 지금은 이런 접촉도 낯설게 느껴졌다. 권명은 어색하게 굳어 있는 조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왜?”
“그냥. 눈썹도 잘생겼구나 싶어서.”
“무슨…….”
권명은 손을 들어 올려 붕대 사이로 보이는 조이의 눈썹을 매만졌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조이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상담 선생님은 뭐라셔?”
“나? 그냥 똑같대. 애인한테 충분히 사랑받아야 나을 거라고 하더라고.”
권명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조이처럼 권명의 문제도 쉽게 나을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폭주 후 살아남은 에스퍼들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가 꽤 많았다.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거나 폭주를 제어하지 못해 또다시 폭주 상태에 접어들기도 했다.
그에 비해 권명은 꽤 멀쩡하게 지내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권명 내부에도 조이가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담 치료 끝나고 박사랑 면담도 하고 왔어. 최근 치료 결과 때문에.”
“아…….”
“박사 말로는 너 이제 퇴원해도 된대.”
“벌써……?”
“어. 상처도 다 아물었고, 통풍만 신경 쓰래.”
지난번에 보았을 때도, 박사는 조이에게 제발 붕대 좀 그만 감으라고 잔소리를 했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벌써 나았을 상처라고. 하지만 조이는 아직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이제 붕대 풀어. 이러다 상처 덧나.”
“시… 싫어! 이따가… 밤에 풀 거야!”
조이는 싫다고 꽥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도 권명은 억지로 붕대를 풀지 않겠다는 듯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조이의 화상을 치료하는 박사는 얼굴의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고 말했으나, 그 말을 순순히 믿을 수 없었다.
예전에 비하면 나아졌다고 말하는 것 같아 의심이 들었다. 직접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 빠를 테지만 아직 그럴 자신이 없었다. 만약 지금의 모습이 그때 창문에 비친 모습과 다르지 않다면 조이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에 빠질 테니까.
“안조이. 퇴원하면 어떻게 할 거야?”
“어?”
조이는 권명의 질문을 해석하고 있었다. 퇴원 후 거취를 묻는 걸까? 아니면 조이가 고민했던 것처럼 직업을 묻는 걸까?
권명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꽤 오래 망설였다. 권명답지 않았다. 지금까지 권명이 망설이던 말은 딱 하나였다. 결혼. 그 말을 하기 전까지 권명은 불안하게 다리를 떨었었다. 바로 지금처럼.
“너… 퇴원하면 나랑 하뉨으로 갈 거지?”
“응?”
“우리 얘기한 게 있잖아. 호수에서 나체 수영하거나… 일주일 동안 그 짓 하는 거나… 그리고 결정적으로…….”
권명은 괴상한 변태 짓에 조이가 동의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내… 내가 언제?”
“뭐?”
조이가 자신은 그런 일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자 권명은 조이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병원에 입원한 이후, 늘 조이를 유리알처럼 대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조이를 노려보았다.
“안조이. 너 이제 와서 발 빼겠다는 거야? 결혼하기로 했잖아 우리!”
권명은 고함을 치듯 결혼 얘기를 꺼냈다. 조이는 그제야 권명이 하뉨에 가자고 하는 진짜 목적을 알아차렸다.
‘결혼이라…….’
물론 조이도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꼴로 결혼이 가당키나 할까? 오페라극장 지하에 산다는 유령처럼 조이 역시 흉측하게 변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권명은 밤마다 가면 아래 있는 얼굴이 궁금해 참을 수 없을 테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파국이 튀어나올 테지.
“왜 망설여? 누구야? 이휘 대위인가 그 새끼야?”
권명은 또 생사람을 잡으려고 했다. 얼마 전 이휘 대위가 권명에게 편지를 전해 주기 위해 조이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권명이 사다 놓은 간식이며 음료수를 축내다 사라졌었다. 병문안이 아니라 무전취식을 하러 온 것 같았다.
“다른 사람 때문에 그런 거 아냐!”
“그럼, 왜? 왜 망설이는 거냐고!”
한동안 조이에게 부드러운 모습만 보여 주던 권명이 드물게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조이는 이 망설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고민의 시간을 권명은 다른 쪽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내가… 내가 널 아프게 해서 그래? 조이야. 내가 노력할게. 내가…….”
“그… 그것도 아니야! 절대!”
조이는 권명의 입에서 슬픈 말이 나오기 전에 가로막았다. 권명은 때때로 조이가 권명을 원망하고 미워할 거라고 여기는 듯했으나, 조이는 그저 권명의 입에서 이별의 말이 나올까 봐 두려울 뿐, 권명을 원망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날 권명의 폭주를 잠재우기 위해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은 조이의 선택이었으니까.
권명이 폭주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조이 역시 사라져 버리고 싶었으니까. 조하에 대한 책임감도 잊고 권명을 따라서.
“나. 너 안 미워. 조금도.”
“그게 아니면 대체 뭔데?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다 할 테니까 말만 해.”
권명은 조이의 대답에 조금 안심하는 듯했다. 조이는 권명이 왜 저렇게 버림받을까 걱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참으로 주책맞게 들리겠지만, 권명은 조이에게 아까운 사람이었다.
조이를 돌보느라 살이 조금 내리긴 했지만, 권명의 얼굴은 여전히 반질반질했다. 조이가 박사를 만나러 가거나, 치료를 받을 때면, 사방에서 권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자기들끼리 키득키득하는 걸 보면 권명의 얼굴이 비단 조이에게만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또한 반세기 동안 이어진 기나긴 전쟁을 끝낸 공로로 권명은 어린 나이에 벌써 대령이었다. 에스퍼의 진급이 일반 군인들에 비하면 빠른 편이라지만, 권명의 진급 속도는 에스퍼 중에서도 특출났다. 군에서도 권명에게 돌아오라고 매일같이 편지를 보내고 있었고.
즉 권명은 사회적으로도 성공을 이룬 젊은 군인이라는 말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권명의 하드웨어는 독보적이었다.
다만 사소한 소프트웨어의 결함이라면 유치한 성격과 변태적인 성향이었다. 물론 조이는 그런 단점도 모두 품을 수 있었다. 쉽지 않겠지만.
“그럼 왜 망설이는 건데? 내가 미운 것도 아니고, 다른 놈이 생긴 것도 아니라며.”
“…….”
권명은 조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되물었다. 왜 결혼을 망설이는 것인지. 권명은 조금도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기필코 들어야겠다는 표정이었다. 조이는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권명. 너… 넌 내가 어디가 좋아?”
“너? 귀여워.”
권명은 조이의 황당한 물음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낯간지럽게도 권명은 조이가 귀엽다고 말했다.
“어… 얼굴이?”
뻔뻔한 물음이지만 조이는 권명이 정확하게 조이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 건지 알아야 했다. 그걸 알아야 조이를 괴롭히는 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얼굴도 귀엽고 하는 짓도 귀여워. 그리고 애가 똘똘하고 야무져. 근데 종종 허술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데 그게 발림 포인트야.”
“발려?”
“어. 너 옷 정리도 못하고 머리도 못 말리잖아. 그러니까 내가 옆에 있어야 해. 난 옷 정리도 잘하고 머리도 잘 말리니까.”
권명은 조이의 장점을 늘어놓는 와중에도 자신을 칭찬할 부분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순하게 생긴 것과 달리 섹시해. 박아 달라고 보챌 때 보면.”
“내가 언제!”
“기억 안 나면 지금 살짝 보여 줘? 난 괜찮은데.”
권명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지금 당장 보여 줄 수 있다는 말을 내뱉었다. 어째 저 변태가 한동안 잠잠하다 했다. 조이는 화상 때문인지 온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럼 내가… 좀 다쳐서 못생겨지면?”
그 물음에 권명은 조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며 조이는 심각하게 못생겨지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덧붙였다. 연고도 매일같이 바르고 있으니 얼굴도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
“조이야. 나 봐 봐.”
조이는 쉽사리 권명과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권명은 끈질기게 조이와 눈을 마주치려 했고, 한참 동안 겉돌던 조이의 시선이 마침내 권명의 눈에 닿았다.
“난 네가 세눈박이여도 사랑했을 거야.”
눈치 빠른 권명은 단번에 이 물음의 목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권명은 붕대 사이로 유일하게 보이는 조이의 두 눈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권명은 장난스럽게 입술이 두 개면 더 예뻤을 거라는 헛소리도 빼먹지 않았다.
“맛있는 입술이 두 개면 더 좋겠지.”
“참 나! 너… 넌 진짜.”
권명의 헛소리에 황당하다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조이는 권명의 눈을 쉴 틈 없이 살폈다. 그 눈에 거짓이 숨겨져 있지 않은지 확인하겠다는 듯. 권명은 조이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이제 알아 달라는 듯 올곧게 조이를 바라보았다.
권명은 오직 눈으로 진실한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조이가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하겠다고.
“후우…….”
조이는 한참 동안 한숨을 내쉬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권명은 평소와 달리 인내심 있게 조이를 기다렸다.
“후우…….”
조이는 마침내 큰 결정을 내렸다. 여전히 조이의 마음속에는 의혹의 불씨가 살아 있지만 지금 권명의 몸과 마음은 조이에게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조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이는 천천히 얼굴에 감아 놓은 붕대를 풀었다. 하얀 천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동그란 이마, 작은 코 그리고 유독 붉은 볼.
권명은 그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중간중간 멈칫하던 조이는 권명의 눈빛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설사 조이의 얼굴이 예전과 다르더라도 권명이 도망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불신을 압도하고 있었다.
어쩌면 권명은 근사한 가면을 만들어 주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자. 봐 봐.”
붕대를 모조리 풀어낸 조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제 권명의 반응을 확인해야 했다. 조이의 눈앞에는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의심이 많은 조이지만 그럼에도 저 눈이 말하는 감정을 의심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조이.”
“…….”
“빨리 하뉨으로 가야겠다. 빨리 도장 찍어야겠어. 짐 싸.”
“뭐? 지금?”
“그래 지금! 씨발 안 되겠어. 붕대 다시 감아.”
“왜… 왜! 입술 두 개여도 좋다며!”
“입술 두 개였음 넌 벌써 감금당했어! 누가 훔쳐 갈까 봐 내가 숨겨 뒀겠지.”
권명은 미친놈처럼 병실을 뒤집기 시작했다. 어디서 커다란 가방을 찾아내서는 조이의 짐을 무작정 쑤셔 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이는 황당함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이의 얼굴이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권명을 도망가게 할 정도로 흉측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조이는 낯선 이의 얼굴을 만지듯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이마와 코는 이전과 다름없었으나 오른쪽 턱 부분은 오톨도톨한 화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을 확인한 순간 조이는 권명에 대한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다.
조이는 급하게 짐을 챙기는 권명에게 다가갔다. 조이가 주로 읽던 책을 가방 안에 밀어 넣고 있는 권명의 손을 잡았다.
“권명…….”
권명은 순순히 짐을 싸던 것을 멈춘 채 조이를 바라보았다. 조이의 입에서 나올 말을 알고 있다는 듯 차분히 기다렸다.
“권명. 사랑해.”
“내가 훨씬 더 사랑해.”
“경쟁 아니거든!”
권명은 경쟁을 하듯 자신의 사랑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하는 유치한 비유를 하며. 바다보다, 하늘보다, 그리고 우주보다 더 큰 사랑. 조이는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권명을 꽉 끌어안았다.
조이는 종전 소식이 라디오에서 들려올 때마다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평화의 시기가 왔다며 기뻐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졌었다. 조이의 마음은 여전히 전장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불안했으니까.
막연하게 종전선언서가 발표되면 조이도 평화가 왔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종전선언서가 발표되어도 조이의 마음은 여전히 풍랑에 휩쓸리는 배처럼 불안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조이는 기나긴 전쟁이 끝이 났음을 실감했다. 조이의 인생을 어둡게 덧칠하던 구름이 가시고 밝은 빛이 조이를 비추기 시작했다. 조이는 그 빛을 향해 걸어 들어갈 생각이었다. 온전히 그 빛이 조이를 향해 내리꽂히도록.
“권명. 지금 당장 가자. 하뉨으로.”
권명은 몸을 일으키며 조이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런 짐 따위는 이제 더 이상 상관이 없는 듯했다. 조이 역시 그러했다. 지금 이 순간 조이에게 필요한 건, 저런 책이나 옷가지가 아니었다. 오직 권명 하나뿐.
그날 밤, 조이와 권명은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어둠이 내린 도로를 질주했다. 태양이 떠오르고 권명이 늘 자랑하던 하뉨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일 때까지.
하뉨.
전쟁을 겪으며 늘 마음속으로 떠올리던 곳이었다. 그곳에 가면 그토록 소원하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테지. 조이는 창문을 내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시원한 바람 소리와 푸르른 들판이 눈에 보였다. 벌써 평화의 기운이 느껴졌다.
조이는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차가운 공기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주먹 쥔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이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