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부활
디데이, 부활 작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조이는 조하의 곁을 지켰다. 내일 날이 밝거든 조하는 세 번째 최면 치료를 받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조하가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일 안에 승기를 잡아야 하는 부활 작전, 그리고 조하의 세 번째 최면 치료. 어쩌다 벌어진 우연이지만 부활 작전이 성공해야지만 조하도 깨어날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조이는 마지막으로 조하의 손을 부여잡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조하가 깨어나기를. 이번 작전이 무사히 끝나기를.
“중위님…….”
간병인은 조이에게 실을 엮어 만든 팔찌를 건넸다. 어떤 의미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이는 실 팔찌를 받아 들었다. 행운의 부적이 될 수 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가지고 가야 하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혹시라도 제가…….”
조이의 입에서 나올 불길한 말을 알아차렸는지 간병인은 조이의 말을 가로막았다.
“조하에게 형이 곧 돌아온다고 말해 놓을게요.”
“네… 꼭 그렇게 전해 주세요.”
조이는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간병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이를 꼭 끌어안았다.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조하를 낳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품이 떠올라서였다. 잊고 있던 어머니의 온도가 조이를 눈물짓게 했다. 만약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어땠을까?
“꼭 돌아와요. 중위님. 그전까지는 내가 잘 돌볼 테니.”
“네. 그럴게요.”
조이는 꼭 돌아오겠다는 말을 다짐처럼 내뱉은 후 집결지로 향했다.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한 번 돌아보면 두 번 돌아보고 싶어질 테고, 결국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 * *
집결지인 구청 앞에는 수십 대의 카메라가 군인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있었고, 그 화면 속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군인들이 이번 작전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권명이 7구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한 목적이 이것이었다. 서제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군인 수를 민간인으로 채우는 일. 연령과 성별을 초월한 군인들이 이곳에 집결해 있었다.
눈시라는 남성은 7구역 서쪽 출신으로, 서제국의 공격으로 목장과 농토를 잃었다며, 빼앗긴 삶의 터전을 되찾기 위해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성문이라는 여성은 초등학교에서 언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인데, 폭격으로 반쯤 허물어진 학교를 지키기 위해 지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들의 목소리와 표정은 이곳에 모인 제국군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병사들의 얼굴 위로 결연한 의지가 덧칠되고 있었다.
“안! 아니 이웅 중위!”
저 멀리 이휘 대위가 조이를 부르고 있었다. 대위는 조이에게 이곳에 서라며 자리를 양보했다. 가장 앞쪽이었다. 조이는 이 자리가 부담스러웠으나, 어차피 전투가 벌어지면 권명을 따라 가장 선두에 서야 했기에 순순히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거. 소령이 주란다.”
대위는 조이에게 방탄 철모를 건넸다. 고위급 장교들이 쓰는 특수 철모였다. 조이는 지금 만화에 등장하는 무쇠 인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방탄조끼에 방탄 철모라니. 그럼에도 조이는 순순히 철모를 받아 머리에 썼다.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는 일이니까.
“안 중위. 그리고 따라 해 봐.”
이휘 대위는 조이에게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라는 구호를 따라 하라고 했다. 조이는 이런 오그라드는 구호를 왜 외쳐야 하는지 물었으나 이휘 대위는 명령이라며 빨리 따라 하라고 다그쳤다.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 됐죠?”
“그래. 이 정도는 기억할 수 있지?”
“네?”
조이는 이휘 대위가 왜 조이에게 이런 구호를 가르친 것인지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카메라 한 대가 노골적으로 조이를 촬영하고 있었다. 군가를 부르고 군의 명령을 듣는 조이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조이는 이휘 대위의 발을 꽉 밟으며 카메라를 가리켰다.
“소령이 시킨 거야. 그러니까 그냥 잠자코 있어.”
권명이 시킨 일이라니. 왜 갑자기 조이를 방송에 노출시키는 걸까? 그럼에도 조이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라는 구호를 크게 외쳤다. 아무래도 조이는 방송 체질인 것 같았다.
방송 촬영이 끝나고 조이는 강기슭으로 이동해야 했다. 조이와 권명 그리고 일부 대원들은 어둠에 몸을 숨긴 채 강을 건너 기습하는 역할을 맡았다. 다행히도 물안개가 자욱했고 달이 구름에 가린 날이었다. 기습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남쪽에 있는 다리에서도 비슷한 작전이 시작될 것이다. 그 작전을 맡은 이는 태혁이었다. 다행히도 태혁은 남쪽에 있기에 이번 전투에서 마주칠 일은 없었다. 또한 조이에 대한 수사도 이번 작전으로 일시적으로 멈춘 상태였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적어도 한 가지 고민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작전 개시!”
권명의 신호와 함께 조이는 고무보트에 몸을 실었다. 군에서는 적에게 노출될 것을 우려해 모터도 달렸지 않은 고무 튜브를 보내왔다. 고전 소설에 등장하는 뱃사공처럼 병사들은 노를 저어가며 강을 가로질러야 했다.
강 건너편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권명과 일부 대원들은 물속에 잠수한 채 보초를 서는 병사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물속에 있는 악어가 사냥감을 향해 접근하는 모습이었다. 조이는 물속에 잠겨 있던 권명의 얼굴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 저격용 총을 들어 올렸다. 보초병의 이마 정중앙을 향해.
핏-
소음기가 장착된 총에서 작은 소리와 함께 총알이 날아갔다. 보초를 서던 적군 병사들이 하나둘 물 위로 쓰러졌다. 권명과 대원들은 죽은 병사들을 조심스럽게 받아 낸 후 수신호를 보냈다.
“전방 확보!”
조이는 뒤에 있는 대원들에게 진격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조이를 시작으로 고무보트를 타고 강을 건넌 병사들이 하나둘 강변에 도착했다.
“안조이. 뒤로 와.”
조이는 순순히 권명의 뒤로 다가가 몸을 숨겼다. 권명은 조명탄을 손에 쥔 채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조명탄이 터지면 곧바로 벙커부터 무력화한다.”
권명은 짧게 지시를 내린 후 하늘을 향해 조명탄을 날렸다.
탕-
하늘 높이 날아간 총알이 별똥별처럼 반짝하고 세상을 밝힌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강 너머에서 조명탄을 확인한 이휘 대위와 병사들은 이제 곧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진격!”
권명은 직격하라고 소리치며 선두로 달려 나갔다.
위잉- 위잉-
기습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벙커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총알이 날아가며 반짝이는 불빛 때문이었다. 조이는 낮은 포복으로 벙커 가까이 접근한 후 입구에 수류탄을 던졌다. 곧바로 몸을 돌려 귀를 틀어막았다.
쿵!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벙커 안에 있던 적군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스로 탈출한 그들의 몸 위로 화염방사기가 쏘아졌다. 깜깜한 어둠을 밝히듯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났다.
벙커를 뚫고 좀 더 안쪽으로 진입하자 4중 참호가 보였다. 동제국에서 이번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서제국에서는 방어선을 두껍게 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첫 번째 참호 사수한다! 진격!”
“하아… 하아…….”
도망가는 적군을 사살하고 시체를 건너뛰었다. 적군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놈들의 몸에 총알을 먼저 박아 넣어야 했다. 온몸의 신경이 예민하게 날 서 있었다. 작은 소리나 움직임을 감지하는 레이더처럼. 머리가 의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조이의 눈은 사방을 감시하며 적군의 위치를 살폈고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조이는 앞서가는 권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군에서는 유독 권명에게 위험한 작전을 맡기고는 했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 말 그대로 미친놈이었다.
권명은 일반적으로 거치대에 놓고 사용하는 10킬로가 넘는 기관총을 소총 들듯 들고는 마구잡이로 발사했다. 그것도 참호 밖에서.
“야! 내려와! 위험해!”
조이는 미친놈처럼 날뛰는 권명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참호 안에서 몸을 숨긴 채 공격을 퍼부어도 위험한데, 간 떨리게 저게 대체 뭔 짓인가. 하지만 권명은 조이의 겁에 질린 표정을 보고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조이 형아는 내 뒤만 잘 따라와.”
그 순간 권명이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권명의 앞으로 쏟아지는 공격이 튕겨 나갔다.
“두 번째 참호도 점령한다! 돌격!”
권명은 속전속결로 놈들을 몰아낼 생각인 듯했다. 숨 돌릴 틈 없이 곧바로 다음 참호를 사수해야 했다. 적군들은 성난 물소처럼 달려오는 권명의 모습을 보고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왜 아니겠는가. 탄피가 비처럼 쏟아질 정도로 기관총을 난사했지만 권명은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권명은 탄약이 떨어진 총을 도끼처럼 들어서는 적군의 머리통을 갈겼다. 맨손으로 소도 때려잡을 놈이었다. 저 손에는 밥숟가락이 들려 있어도 무기로 사용될 테지.
“악!!”
“도… 도망가!!”
권명의 앞에 있던 적군이 종이 인형처럼 픽픽 쓰러졌다. 두 번째 참호를 홀로 점령한 권명은 조이를 바라보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미소까지 지으며.
“엄호사격 해 줄게, 이리로 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명은 적군의 기관총을 빼앗아서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군인들을 몰살시켰다.
“하아… 하아…….”
조이는 자세를 낮춘 채 두 번째 참호로 달렸다. 몸을 굴려 참호 안으로 떨어진 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권명은 조이를 바라보며 뭔가를 말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터지는 폭발음에 귓가가 멍멍했다.
“하아… 하아… 뭐라고?”
“안조이, 다친 데 없지?”
“어… 하아… 넌?”
권명의 다친 곳이 없다는 조이의 말에도 눈으로, 또 손바닥으로 조이의 몸을 훑었다.
“멀쩡해. 다친 곳 없어.”
“여기도?”
권명은 이런 와중에 조이의 성기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조이는 재빨리 꿀밤을 갈겼다. 하지만 권명이 철모를 쓰고 있다는 걸 깜빡했다.
“아!!”
바위에 주먹질을 한 것처럼 아팠다. 콧잔등에 주름이 질 정도로 아파하는 조이를 보며 권명은 약을 올리듯 피식피식 웃었다. 저 얄미운 낯짝.
“안조이, 자지에 파편 안 튀게 조심해. 이따 확인할 거야.”
권명은 그 말만 남긴 채 참호 밖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권명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전장을 누볐다. 기관총 정도로는 권명의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그나마 권명이 만들어 낸 방어막을 뚫을 수 있는 건 전차부대의 포탄 정도였다.
언젠가 다리 위에서 권명을 향해 쏟아졌던 그 공격. 하지만 그 역시도 권명과 일대일로 맞붙었을 때는 처참하게 불타올랐다.
“전차는 내가 처리한다. 나머지 참호 사수해! 빨리 달려! 막으라고!!”
권명은 지난번의 일을 복수하듯 전차를 공격했다. 허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주먹만 한 포탄을 손으로 집어 던졌다. 돌멩이 던지듯.
조이는 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권명을 걱정했었다. 가장 선두에서 공격해야 했기에 그가 다칠 것을 우려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며 보낸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곳에 있는 동제국군 전원이 사망해도 권명은 살아남을 것이다.
“내가 누굴 걱정한 거지……?”
조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 * *
날이 밝자 서제국의 폭격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놈들이 뒤쪽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이었다. 폭발음이 줄어들자 이곳저곳에서 의무병을 부르는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조이는 팔다리를 부여잡고 있는 병사들을 질질 끌어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중위님! 엉덩이…! 엉덩이에 총알이 박혔어요!”
조이와 지뢰 작업을 함께 했던 대원 중 하나가 총을 맞았다며 울고 있었다. 조이는 곧바로 바지를 찢어 상처를 확인했다. 대원의 말대로 엉덩이가 피투성이였다.
“엉덩이에 맞아서 다행인 줄 알아. 허리였으면 벌써 죽었어.”
“아아! 사… 살살 해 주십시오!”
조이는 하얀 가루를 엉덩이 위에 뿌린 후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놈의 이마에 피 묻은 손가락으로 3이라는 숫자를 썼다. 그리 위급한 상태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아… 아아…….”
조이의 예민한 귓가로 미약한 신음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조이는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모래주머니에 몸을 기댄 병사가 보였다. 그의 앞에는 포탄이 터진 흔적이 있었다.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육체적인 문제가 아닌 정신적인 문제인 듯했다.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이는 그 환자의 이마에 숫자 1을 썼다. 아마 다른 환자들보다 먼저 전역하게 될 테지. 이런 정신적인 문제는 전역 사유 1번이었다. 군에서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병사만큼은 곧바로 제대시켜 주었다. 환각, 환청에 시달리던 군인이 같은 부대원을 사살한 사건이 있었기에.
“안조이! 안조이!”
저 멀리서 조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이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목표하던 대로 교량 서쪽을 확보한 권명이 조이를 찾고 있었다.
“나 여기 있어!”
잽싸게 달려온 권명이 조이의 몸을 또다시 살폈다. 조이는 방탄조끼에 특수 철모까지 쓴 상태였다. 그저 온몸이 무거울 뿐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난 멀쩡해.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마.”
권명은 조이의 몸에 난 아주 작은 상처라도 찾아내겠다는 듯 예민하게 조이의 몸을 살폈다. 레이더처럼 조이의 몸을 훑고 내려간 끝에 ‘이상 없음’이 확인된 듯 늘 보던 유들유들한 표정을 되찾았다.
“따라와. 앞으로 너도 작전 회의에 참석해야 해.”
“나도…? 그래도 돼?”
조이는 안 그래도 이번 작전이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지 궁금했었다. 권명은 대략적인 작전을 말해 줄 뿐 세세한 부분까지는 말해 주지는 않았었다. 조이는 권명을 따라 장교들이 모여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이쪽은 그 유명한 안조이 중위야.”
“네??”
권명을 따라 지원을 나온 장교들은 조이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이 역시 깜짝 놀라 굳어 있었다. 권명은 이런 폭탄선언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조이의 안경을 벗기고 머리를 뒤로 넘겨 주었다.
“알다시피 안 중위는 7구역 출신이고, 7구역이 공격을 받는다는 소식을 입수하고는 이곳에서 홀로 외로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어.”
조이는 조하 때문에 이곳으로 왔고, 얼떨결에 전쟁에 휘말렸을 뿐, 7구역을 사수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권명은 조이가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탈영도 불사한 영웅이라고 소개했다.
“그럼… 수사도 종결된 건가요?”
“당연하지. 안 중위는 우리가 잡아야 하는 탈영병이 아닌 우리와 함께 싸우는 전우다. 잘 챙겨 줘.”
“예… 옙!”
장교들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조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조이는 그 손을 잡으려는데 권명의 입에서 경고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지내지는 말고. 참고로 안조이는 내 가이드야.”
조이에게 악수를 청했던 장교가 재빨리 주먹을 쥐었다. 조이와 닿을 수 없다는 듯. 조이는 권명의 유치한 질투에 헛웃음이 나왔다.
조이는 이 상황이 잘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다행이라면 앞으로 저 안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 눈을 찌를 듯한 머리를 자를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기습을 당한 서제국에서는 그날 밤이 되자 공격을 개시했다. 낮에 참석했던 작전회의 결과에 따라 조이와 병사들은 방어 대형으로 적군에 맞서고 있었다.
“서제국 놈들 땅 파는 실력만큼은 최고야. 아스팔트를 다 갈아서 이렇게 만들다니.”
아이러니하게도 서제국이 완벽하게 파 놓은 참호에 동제국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이곳은 서제국이 점령한 땅이었다. 한순간에 동제국 영토가 된 이곳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근데 권명 소령 화끈하네? 난 이렇게 바로 터트릴 줄 몰랐는데.”
“그러게요.”
권명은 조이의 누명을 벗기는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했었다. 조이는 그 일이 그리 쉽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작정 말 한마디로 끝내다니.
“장교들 반응은 어때요?”
“뭐, 권명 소령이 그렇다고 하니까 다들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이곳은 군대잖아. 그리고 지금은 전시 상황이고.”
잊었다. 이곳은 까라면 까는 곳이자, 상명하복이 절대적인 군대라는 것을. 특히나 작전 수행 중 명령 불복종은 즉시 처결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방법이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전 중인 지금은 모두가 권명의 말에 순순히 따를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때도 권명의 말 한마디가 영향력을 발휘할까?
“여하튼 나도 마음이 편하다. 범죄자를 숨겨 주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거든!”
숨기기는 개뿔 조이를 가지고 이곳저곳에 이용해 먹었으면서. 조이는 이휘 대위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마 이휘 대위는 권명이 조이를 구속하기 위해 찾고 있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이를 미끼로 사용해 권명을 7구역으로 끌어들인 걸 보니. 곰처럼 생겨서는 능구렁이였다. 가만 보니.
“공격!”
그 순간 적진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조이와 이휘 대위는 곧바로 소총을 들어 올려 적진을 겨냥해 발사했다. 어두운 밤을 지나 태양이 뜰 때까지, 동제국과 서제국의 의미 없는 교전이 이어졌다. 서제국은 쉽사리 빼앗긴 땅을 수복할 수 없었고, 동제국은 서제국이 만들어 놓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 방어에만 전념했다.
* *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조이는 작전 회의에 참석했다. 지난밤 이곳을 사수했음에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남쪽이랑 연락이 안 된다는 거야?”
“예, 아무래도 그쪽에 통신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태혁이 이끄는 병사들은 조이가 그러했듯 남쪽 다리를 건너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쯤이면 교량을 사수했다거나, 사수에 실패했다는 보고서가 올라와야 하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북쪽에서 지원군이 7-24로 집결할 거야. 우린 7-21을 공격하고, 남쪽에 있는 병력이 7-19를 공격해야 해. 한쪽이라도 밀리면 전세가 역전될지도 모른다.”
이번 작전을 위해서는 어느 한쪽도 밀려서는 안 됐다. 남쪽이 밀리는 순간 지금 북쪽에 모여 있는 전력이 양쪽으로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모르니까.
“남쪽으로 통신 복구팀을 보낸다. 지금 당장 출발하고 복구 상황 보고한다. 그 후 복구팀 거처를 결정하겠다.”
“지원하겠습니다.”
조이는 통신 복구팀에 자원하겠다고 나섰다. 조이는 7구역 출신이었다. 태혁이 이끄는 부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가장 빨리 찾을 자신이 있었다. 조이가 10년 동안 누볐던 곳이니까.
“소령님. 안조이 중위가 7구역 출신이라 길을 안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조이 중위만 남고 나가.”
장교들이 모두 나간 후 조이는 권명에게 다가갔다. 예상했던 대로 권명의 입에서는 조이를 만류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너 안 가도 돼. 그냥 여기 있어.”
“내가 가는 게 빨라.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있잖아. 조금만 틀어져도 위험하다며.”
“그렇다고 그걸 네가 할 필요는 없어.”
“복구만 하고 다시 이곳으로 올게.”
권명은 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조이의 합류를 망설였다. 지난밤 기습 작전의 성공으로 조이는 희망을 발견했다. 이번 작전으로 이 기나긴 전쟁도 끝이 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 너랑 나, 이런 작전 같은 거 할 필요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그냥 평범하게.”
조이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더 이상 전쟁 얘기가 흘러나오지 않는 아침을 상상했다. 권명과 함께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떠올렸다. 그 삶은 분명 꿈처럼 행복할 것이다. 어둠에 가까웠던 조이의 인생도 환한 빛처럼 밝아질 것이다.
“그리 위험한 일도 아니고, 잠시 다녀올 뿐이잖아. 응?”
“갔다 오면 뭐 해 줄 건데?”
권명은 뻔뻔하게 대가를 요구했다.
“뭘… 해 줘야 하는데……?”
“일단 입술 좀 비벼 봐. 쫑알쫑알 말하는 거 귀여워.”
조이는 재빨리 입을 맞추었다. 권명은 두 눈을 감고 조이의 입술을 마음껏 음미했다. 하나로 맞물린 입술이 서로의 체온을 조금씩 높이고 있었다. 깊게 파고드는 혀가 조이의 입 안 곳곳을 자극하자 몸이 나른해졌다.
“흐음…….”
조금씩 물러나던 조이의 몸이 벽에 닿았다. 옆구리를 훑던 권명의 손이 허리춤으로 파고들었다. 말랑한 성기에 권명의 뜨거운 손이 닿자 조금씩 힘을 내기 시작했다.
“하읏……!”
쾅쾅. 순간 문밖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몽롱하게 풀려 있던 조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아… 잠깐…! 밖에…….”
권명은 조이의 입술을 핥으며 아쉽게 입술을 떼어 냈다. 나른하게 풀려 있던 눈이 매섭게 떠졌다. 한쪽 눈썹이 삐쭉 솟도록.
“안조이. 전쟁이고 나발이고. 그냥 맘껏 떡치며 살고 싶다. 씨발. 망할 방해꾼들.”
* * *
조이는 통신 복구팀에 합류해 남쪽으로 향했다. 오늘 안에 그곳에서 일을 본 후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조이는 7구역에 살던 때를 떠올리며 가장 빠른 길을 안내했다.
“저 숲길로 들어가면 지름길이 나와.”
“저게 길이에요……?”
운전병은 도저히 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듯 조이에게 되물었다. 이해한다. 수도의 도련님이 뭘 알겠는가. 굽이진 오프로드를 달리다 보면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와 합류하는 지점이 나온다. 적어도 10분은 절약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저 앞에서 왼쪽으로 틀어.”
“와! 중위님, 우리 점심은 그쪽에서 먹겠는데요?”
원래대로라면 이 좁은 차에서 적당히 점심을 해결해야 했지만, 이 속도라면 점심 전에 남쪽 다리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다리가 육안으로 보이자 조이는 잠시 차를 멈춰 세웠다. 혹시라도 남쪽 다리가 적군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조이는 저 멀리 다리 위를 어슬렁거리는 군인들을 쌍안경으로 살폈다. 다행히도 조이가 입고 있는 군복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다리 부근에 다다르자 통행을 막아서는 게이트가 보였다. 그들은 갑작스레 군용차가 나타나자 긴장하는 듯했다. 운전병은 무기를 들지 않은 양손을 보여 주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권명 소령이 이쪽이랑 연락 안 된다고 난리입니다. 통신 문제 있는 거 맞죠?”
게이트를 지키는 군인들도 통신 문제를 알고 있었는지 어서 해결해 달라며 게이트를 열었다. 조이를 제외한 대원들은 통신 복구 업무에 매달렸다. 그사이 조이는 느긋하게 식사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장교 중 하나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임 소위를 구하려다가 소령님이 다친 거라던데?”
“그럼 지휘권은 누구한테 넘어가는 거야?”
조이는 지휘권에 대해 떠드는 군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소령이 다쳤다고?”
“네……?”
“태혁 소령 말하는 거야?”
“네… 지금 회복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디야? 그곳이?”
조이는 야전병원으로 달려갔다. 태혁이 다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태혁은 우수한 에스퍼니까. 그런데 태혁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다쳤다니.
조이는 군의관에게 태혁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군의관은 환자가 안정을 찾아야 하기에 면회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조이는 그들에게 자신이 가이드라는 걸 밝혀야 했다.
잠시 뒤 조이는 해령 소위를 만날 수 있었다. 무척 지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밤새 가이딩을 한 듯했다.
“상태는 어때? 가이딩 진행 상황은?”
“복부 상처는 어느 정도 지혈이 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가이딩은 어디까지 진행했어?”
“밀접… 가이딩까지요.”
자신 때문에 태혁이 이렇게 다친 것이 꽤 미안했던지 해령은 밀접 가이딩을 진행한 모양이었다. 해령과 태혁의 매칭률은 알지 못하지만, 밀접 가이딩을 했다면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밀접 가이딩이 효과를 보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권명 역시 밀접 가이딩 후 바로 눈을 뜬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잠시 쉬도록 해. 그사이 내가 가이딩을 진행할게.”
“증폭기 필요하시죠?”
조이는 증폭기를 받아 들었지만 증폭기 대신 태혁의 손을 잡고 가이딩을 할 생각이었다. 태혁은 권명이 그러했듯 그저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복부 쪽에 두툼하게 감긴 붕대만 아니라면.
조이는 붕대 안쪽을 살펴보았다. 아직 완벽하게 새살이 돋아난 것은 아니지만, 이 울퉁불퉁한 살도 곧 매끈하게 변할 것이다.
“태혁아…….”
조이는 태혁의 이름을 부르며 힘을 불러일으켰다. 태혁이 어서 눈을 뜨길. 그리 기도하며 한참 동안 온 정신을 집중했다. 따뜻한 그 기운이 태혁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물을 마시듯, 태혁은 자신의 몸을 회복시킬 기운을 거침없이 빨아들였다. 조이는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
조이의 가이딩이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태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금방이라도 눈을 뜰 듯.
“태혁아! 태혁아!”
힘겹게 눈을 뜬 태혁은 곧바로 복부를 확인하려 했다. 자신이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듯했다. 조이는 태혁의 손을 잡아 내리며 상태를 말해 주었다.
“괜찮아. 복부 상처는 거의 회복됐어.”
“조…이?”
태혁은 조이를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조이가 있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내 조이의 이름표에 이웅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것을 확인하고는 허탈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역시 너였구나…….”
“미안…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내 상황이…….”
태혁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건 조이나 태혁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조이는 조하에 대한 말부터 꺼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태혁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권명은… 알고 있었지?”
“어? 어…….”
“그럴 줄 알았어… 북부에서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7구역에 도착하자마자 얌전해진 게 증거나 다름없었는데… 으윽…….”
조이는 몸을 일으키려 하는 태혁을 부축했다. 등 뒤에 베개를 세운 후 태혁의 몸을 살짝 끌어안았다. 상처는 거의 아물었으나 아직 통증이 있는지 태혁의 입에서는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이는 어색한 기분에 다시 멀어지려 했으나, 태혁이 조이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 순간 태혁의 눈에 담긴 감정들이 조이의 마음속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조이는 그 눈빛을 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조이를 대신해 이번에도 태혁이 먼저 입을 뗐다.
“왜 난 이렇게… 한 발씩 늦는 걸까?”
“태혁아…….”
“꿈을 꿨어. 너랑 페어가 되는 꿈.”
“…….”
조이 역시 한때는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었다. 홀로 영창에 있던 그 날, 태혁은 북부로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 편이지만 그날은 참지 못하고 태혁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렸었다. 자신이 놓쳐 버린 기회가 아깝고 아쉬워서.
“그때 그 일이 무척 아쉬웠나 봐. 꿈에 나타날 정도로. 우린 서로 1순위였잖아.”
“응… 그랬지…….”
“후회를 잘 안 하는 편인데 그 일은 후회했어.”
태혁은 자신에게 페어는 그저 함께 일할 동료를 찾는 정도의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권명과 조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며 아쉬워했다.
“어쩌면 네 옆에 내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태혁아. 미안해… 나는….”
“그만. 알아. 네가 무슨 말을 할지.”
태혁은 조이의 말을 가로막았다. 조이의 입에서 나올 말을 알고 있는 듯했다. 조이가 미처 말하지 못한 그 말을 태혁은 직접 들은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조이는 그런 태혁의 얼굴을 마주할수록 뭔가가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태혁은 한참 동안 조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조이는 그 시선을 피해 태혁에게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침묵의 시간이었지만 태혁의 마음이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마음 중 가장 커다랗게 느껴지는 것은 후회와 미련이었다. 조이가 가이드이고 태혁이 에스퍼이기 때문일까? 서로의 감정이 파장으로 느껴졌다. 아마 태혁은 조이의 마음 중 미안함을 가장 크게 느꼈을 것이다.
태혁은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조이의 팔을 놓아주며 말했다.
“이만 나가 줘. 조이야.”
“…몸…조심해…….”
조이는 잘 지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뒤돌아섰다. 친구로 지내자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태혁의 마음이 얼마나 거세게 흔들렸는지 아니까. 태혁을 잃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또다시 그가 상처 입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 * *
조이와 대원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 북쪽으로 향했다. 그 여정 동안 조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노을 진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물어 가는 저 빛처럼 조이의 마음도 점점 가라앉았다.
어둠이 내린 늦은 밤이 되어서야 북부에 도착했다. 조이는 곧바로 권명이 머물고 있는 임시 숙소로 향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권명은 깨어 있었다.
“다녀왔어.”
“별일 없었어?”
서류를 확인하던 권명이 조이를 반겼다. 보던 서류도 내려놓은 채. 조이는 머뭇거리다 태혁이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지금은 정신을 차렸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태혁이한테는 말했어.”
“뭘?”
“너랑… 그렇게 됐다고.”
“뭘 새삼스럽게. 걔가 그걸 몰랐을까 봐?”
“아니… 그래도…….”
“잘했네. 이리 와. 안조이.”
권명은 평소와 달리 조용히 조이를 끌어안았다. 조이의 가라앉은 기분을 알아차린 걸까?
“안조이, 오늘만이야.”
“응…….”
태혁을 향한 마음은 이미 정리했다고 여겼었다. 조이는 권명을 선택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이런 일이 벌어지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한쪽이 허한 느낌.
작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조이와 권명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귓가로 들려오는 권명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장가처럼 포근한 소리였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마지막 작전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권명. 만약 네가 그때 폭주하지 않았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어젯밤부터 조이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이었다. 만약으로 시작하는 상상. 조이가 사관학교에 입학할 당시 권명은 이례적으로 입학 3개월 만에 임관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갑작스러운 폭주로 사관학교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 일이 조이와 권명의 첫 만남이었다. 통속소설에 등장하는 멋있는 첫 만남과는 전혀 달랐다. 권명은 죽은 듯 잠들어 있었고, 조이는 돈을 받고 권명과 관계를 맺었다.
“그때가 아니었어도 난 언젠가 폭주했을 거야. 그리고 넌 날 살려 냈을 거고.”
“몸이 많이 안 좋았어?”
“응.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었어. 힘을 몽땅 쓰고 나면 지치는 게 아니라 온몸이 불타올랐으니까. 차가운 얼음물에 몸을 담가도 순식간에 뜨거운 물이 됐어.”
권명은 담담하게 폭주 직전까지 몰렸던 지난날을 털어놓았다. 조이는 에스퍼가 아니기에 폭주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듣고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 일이 얼마나 괴로울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고통을 권명은 홀로 묵묵히 견뎌 왔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차가운 얼음물에 몸을 담그며 권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의 권명은 어떤 마음으로 살았던 걸까?’
“근데 왜 가이딩을 안 받았어?”
“이래야 우리 조이 형아답지. 너 은근 백치미 있어. 아무것도 모르고.”
“뭐야?”
조이는 권명의 머리에 철모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꿀밤을 갈겼다. 권명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척 조이의 가슴에 머리를 비벼 댔다. 강아지같이.
“그래서 왜 가이딩 안 받은 건데? 그렇게 괴로웠으면서.”
“안조이. 너 코끼리 사육법 알아?”
“코끼리 사육법……?”
조이는 코끼리를 본 적도 없었다. 사육법을 알 리가. 조이는 모른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끼 때부터 밧줄로 온몸을 묶어 놓는대. 그러면 커서도 못 벗어난다고 하더라. 그딴 밧줄은 손쉽게 끊어 낼 힘이 있는데도.”
“…….”
“나 같은 에스퍼한테 밧줄은 가이드야. 잘못 걸렸다가는 동물원이나 서커스장으로 끌려가는 거지. 우리 형처럼.”
권명의 형은 북부에서 큰 사고를 친 탓에 군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그것도 7구역이라는 나락으로. 그 사고가 가이드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가이드가 배신을 했다던가?
“그럼… 형 때문에 가이딩을 거부한 거야?”
“응. 형을 보면서 다짐했어. 아무리 자지가 허전해도 가이드는 먹지 말자고.”
“참나.”
조이는 진지하게 권명의 얘기를 듣던 게 허탈해졌다. 형의 몰락을 보고 다짐한 게 겨우 그런 거라니. 그와 동시에 조이는 어쩐지 심장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깊은 잠에 빠진 권명을 상대로 그 짓을 했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그럼… 내가 원망스럽겠네?”
“응?”
“내가… 그거 했잖아…….”
“나한테 변태 짓 한 거? 그건 네가 잘못한 게 맞지. 순진하게 생겨서는 날 덮치고 말이야.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
권명은 조이가 돈을 받고 그 일을 했다는 건 아예 잊어버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조이도 굳이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안조이. 너랑 나 사이에 만약은 없어. 우린 어떻게 됐든 만났을 거고, 이런 사이가 됐을 거야.”
눈치 빠른 권명은 조이가 왜 이런 질문을 한 것인지 아는 것 같았다. 태혁의 일로 조이는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엇갈림을 떠올리고 있었다.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아무리 서로의 마음이 같아도 피할 수 없는 파도가 밀려온다면 조이와 권명도 헤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폭주하자마자 네가 나타나잖아. 그것도 매칭률 92%. 이게 운명이지 뭐야? 다 죽어 가던 날 살려 낸 게 우연이라고? 아니 운명이야. 그러니까 의심하지 마. 너랑 나는 바늘과 실이고, 질문과 정답이야. 또…….”
권명은 한참 동안 쌍을 이루는 단어를 속삭였다. 황당한 믿음이지만 조이는 권명의 믿음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죽어 가던 권명을 살려 내고 페어가 된 일. 그리고 서로에게 하나뿐인 사람이 된 일. 이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고 믿고 싶었다. 절대로 갈라낼 수 없는 운명.
어려서부터 조이의 유일한 소원은 돌연변이로 발현해 수도로 가는 것이었다. 가이드란 그저 수로도 가기 위한 조건 중 하나였는데, 조이는 자신이 에스퍼가 아닌 가이드로 발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이가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권명과 이런 사이로 발전할 수 없었을 테니까. 권명 말대로 이게 바로 운명일 테지.
조이는 권명을 끌어안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콧속으로 권명의 향기가 맡아졌다. 불안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그 향기가.
* * *
북부에서 이곳 7구역으로 이동 중인 지원군의 이동 속도가 더뎌지고 있었다. 서제국의 항공 공격으로 발이 묶여 있다고 들었다. 그와 반대로 서제국 수도에서 출발한 보충병은 빠른 속도로 7구역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어둠이 내린 뒤 진격할 예정이었던 마지막 작전이 앞당겨졌다. 불길한 신호였다. 이번 작전에서 에스퍼들은 가장 치열한 교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7-21구역의 북쪽을 맡게 되었다. 그사이 조이와 같은 가이드 및 일반 병사들은 7-21구역의 중앙과 남쪽을 점령해야 했다.
남쪽을 점령한 후 조이의 부대는 곧바로 에스퍼들을 지원해야 했다. 에스퍼의 힘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총집결 중인 서제국의 막강한 화력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에스퍼들의 역할은 그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북부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권명!”
조이는 권명에게 다가가 자신의 손목에 있던 실 팔찌를 채워 주었다. 아주 작은 행운의 부적이라도 권명에게 넘기고 싶었다.
“약속한 거 잊지 마.”
언젠가 당부한 것처럼 다치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권명은 조이의 불안한 표정을 보더니 조이를 꽉 끌어안았다. 권명의 단단한 팔이 아플 정도로 온몸을 옥죄었지만 그럼에도 조이는 권명을 밀어내지 않았다. 조이 역시 권명을 더 꽉 끌어안았다.
“안조이.”
서로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권명은 조이의 입술을 집어삼키며 깊게 입을 맞추었다. 조이는 필사적으로 권명의 목에 매달리며 그 입맞춤을 받았다. 지금 이 순간이 자꾸만 아깝고 아쉬웠다.
이 전투가 끝나면 또다시 이런 입맞춤을 할 수 있을 텐데, 조이는 절박한 마음에 쉽사리 떨어질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온갖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다.
“안조이. 이런 장면에서는 꼭 그 말 하던데. ‘사’로 시작하는 말 있잖아.”
권명은 ‘사’로 시작하는 그 간지러운 말이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평소였다면 조이의 청개구리가 그 말을 가로막았을 테지만, 오늘은 권명이 원하는 그 어떤 것이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권명. 그…, …해.”
“뭐라고?”
권명은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그 단어를 다시 말해 보라며 귀를 가져다 댔다.
“그…. 사…랑한다고…….”
“나도. 이 귀여운 자식아.”
권명은 쑥스러운 조이의 고백이 꽤 만족스러웠는지 조이의 양 볼을 짓누른 채 쪽쪽 입을 맞추었다. 볼 살에 짓눌린 붕어 입술에.
“권명, 우리 꼭 하뉨으로 가자.”
“그래.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내고 하뉨으로 가자.”
조이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권명을 꽉 끌어안은 후 권명을 보내 주어야 했다. 이번 작전으로 이 기나긴 전쟁도 끝이 나기를. 조이는 저 멀리 이번 작전이 벌어질 도시를 바라보았다.
서제국이 점령하고 있는 저 도시를 기필코 되찾아야 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저곳을 탈환하면 이 전쟁도 끝이 보일 것이다. 조이는 늘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는 습관이 있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을 떠올려야 그보다 덜 최악인 상황과 맞닥뜨릴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탓에.
하지만 오늘만큼은 조금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밀어내고 간절한 믿음과 희망만 남겨 놓았다.
“대검 장착!”
백병전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 권명은 총구에 대검을 장착하라고 지시했다. 조이는 권명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기다렸다. 저 입에서 나올 말을. 이 치열한 전투의 시작을 알릴 그 말을. 째깍째깍 시곗바늘이 정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진격!”
“와!!!!”
수천 명의 병사들이 고함을 치며 적진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조이 역시 그 기세에 힘을 보태며 달렸다.
“방어막 형성한다!”
앞서가던 에스퍼들이 날개를 펼치듯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럼에도 일부 병사들은 총알에 맞아 슬로 모션처럼 뒤로 밀려났다. 조이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들의 모습을 따라가려 했으나 애써 고개를 돌렸다. 매서운 공격을 꿋꿋하게 막아 내는 권명 쪽으로.
전차와의 간격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에스퍼들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리 다리를 놀리더니 그대로 전차와 충돌했다.
쿠-쿵!
덤프트럭이 추돌한 것처럼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퍼들이 뿜어내는 방어막에 쭉 밀려나던 전차가 갸우뚱하더니 뒤로 쓰러졌다. 에스퍼들은 기세를 몰아 북쪽으로 진격했다. 헛바퀴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전차에서 적군이 하나둘 기어 나오고 있었다. 조이는 그들을 향해 거침없이 총알을 박아 넣었다. 조이와 일부 대원들은 7구역 남쪽 구역으로 이동했다. 권명이 사라진 곳과는 반대쪽으로.
* * *
조이와 대원들은 전방을 살피며 남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까지 쭉 뻗은 메인 도로를 지날 때쯤 매복 중인 기관총과 맞닥뜨렸다. 조이는 황급히 벽 쪽으로 몸을 숨겼다. 대원들 역시 조이를 따라 몸을 낮췄다.
“중위님, 어떻게 하죠?”
조이는 고개를 내밀어 전방을 살폈다. 곧바로 총알이 날아왔다. 매복 중인 놈들이 조이와 대원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알아서 기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내가 유인할 테니까 뒤쪽으로 돌아서 공격해.”
조이는 작게 속삭인 후 한 번 더 전방을 살폈다. 또다시 매서운 총알이 날아와 박혔다.
“후우… 후우… 후웁!”
조이는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날렸다. 사관학교에서 배운 대로 총알을 피하고자 지그재그로 달렸다. 그림자처럼 조이를 따라 총알이 박혔다. 조이의 다리를 스칠 듯 말 듯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지막 날아온 총알이 조이의 바지를 스쳤지만, 다행히도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하아… 하아…….”
가까스로 건너편 건물에 몸을 숨긴 조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까딱하다가는 벌집이 될 뻔했다. 조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주시했다. 조이를 향해 매서운 총알을 날리던 곳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중위님, 전방 확보했습니다!”
조이는 잘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원들과 조이는 조금 더 안쪽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적군이 보이지 않았다. 유령도시처럼 사방이 조용했다. 초입에서 기관총을 만나 짧은 교전을 벌인 것이 전부였다.
“이상한데? 통신병!”
조이는 다른 경로로 진입 중인 중대장과 교신을 시도했다. 중대장 역시 순조롭게 집결지인 교회 쪽으로 접근 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이 정도로 순조로울 수 있을까?
“중대장님, 수색대를 먼저 보내는 게……!!”
말을 끝맺기도 전에 ‘쾅’ 하며 포탄이 내리꽂혔다. 거미줄을 치고 먹이가 들어오길 기다렸다는 듯 수십 개의 포탄이 조이와 대원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자주포야! 흩어져!! 흩어지라고!!”
조이는 대원들에게 흩어지라고 소리치며 길에서 벗어났다. 훼림에서의 그 폭격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온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듯 거침없이 포탄이 날아왔다. 서제국에서도 이번 전투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이 땅을 불지옥으로 만들겠다는 듯 망가트리고 있었다.
“피해!! 도로에서 벗어나!”
“중위님! 살려 주세요!”
조이는 다리를 다친 듯 주저앉은 대원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이를 꽉 물고 대원을 질질 끌어다가 담벼락 밑으로 데려갔다. 막 거친 숨을 내쉬려는데 대원이 조이의 뒤쪽을 가리켰다.
“주… 중위님!!”
겁에 질린 대원이 조이를 부르는 순간 또다시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조이가 있는 곳으로.
“으윽……!”
눈보다 예민한 귀가 먼저 공격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에스퍼도 아닌 조이가 저 포탄을 무슨 수로 막아 낼까. 조이는 겁에 질린 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포탄을 멍하게 응시했다. 신기하게도 포탄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것이 보일 정도로. 눈을 깜빡 감았다 뜬 순간 포탄이 ‘쿵’ 소리를 내며 담벼락에 박혔다.
조이는 그제야 두 눈을 감았다. 온몸을 찢어발길 고통을 예상했다. 그런데 아프지 않았다. 이게 바로 죽음인 걸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살아온 인생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고 하던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깜깜한 어둠이었다. 조이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이게… 뭐야……?”
눈을 뜨니 담벼락에 박힌 포탄이 보였다. 조이의 살갗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어야 할 포탄이 연기만 내뿜고 있었다. 조이는 허탈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권명은 서제국의 공격이 질보다는 양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넓은 영토와 인구수로 무기 생산이 동제국에 비해 3배는 빨랐지만, 속도에 반비례하듯 품질은 허술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의 허술함에 감사했다. 불발탄이라니. 조금 전 죽음을 떠올린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다.
조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잡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자주포 공격으로 유령도시 같았던 이곳이 단번에 전쟁터로 변모해 있었다. 건물 대부분이 허물어졌고 군데군데 불길이 솟아올랐다. 불씨와 흙먼지 사이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군인들이 보였다. 콘크리트 잔해에 깔려 납작하게 눌린 시체와 팔다리를 잃은 병사들.
그 끔찍한 모습에도 조이는 눈을 감고 외면할 수 없었다. 조이는 이들을 이끌 장교니까.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도, 식사를 한 적도 없지만 조이는 저들에게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안조이.’
이곳을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든 건 자주포였다. 자주포는 눈에 보이는 적을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었다. 최대 30km 떨어진 곳에서 날아온 포탄이었다. 서제국 놈들이 함정을 파 놓고 먼 거리에서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모범생인 조이는 자주포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서 조이와 대원들의 좌표를 송신하고 있었다. 그 좌표에 따라 저 멀리서 포를 쏘는 것이고.
그놈만 처리하면 자주포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눈을 가리고 칼을 휘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조이는 아직 피를 뚝뚝 쏟아 내는 시체 더미 뒤로 몸을 굴렸다. 등 뒤에 메고 온 저격용 총을 들어 올려 전방을 살폈다. 흐릿하게 통신병으로 보이는 놈이 보였다. 조이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펑-
소총과 달리 저격용 총은 풍선 터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와 함께 통신병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조이는 곧바로 옆 건물로 달렸다. 옆 건물에 닿기도 전에 조금 전까지 조이가 있었던 곳으로 포탄이 떨어졌다. 위치 정보를 송신하는 놈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이었다.
조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쯤 허물어진 교회 건물이 보였다. 조이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마자 저격용 총을 들어 올렸다. 시야가 확보되자 건물 안에 숨어 있는 몇몇 서제국 놈들이 보였다. 조이는 그들을 단숨에 처리할 수 있었지만, 저런 놈들에게 아까운 총알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좌표를 전송하고 있는 놈을 먼저 찾아야 했다.
이번에도 놓친다면 또다시 포탄이 날아올 테니까. 조이는 빠르게 주변 건물을 살폈다.
‘대원들의 위치를 확인할 만한 곳이 어디일까?’
조준경을 이리저리 돌리던 조이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조이가 있는 교회 건물과 비슷한 높이의 건물 안쪽에서 망원경을 들고 있는 놈이 보였다.
강력한 확신이 들었다. 저놈이구나. 놈의 위치를 알아차렸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조이는 총알을 장전한 후 숨을 천천히 내쉬고 들이마셨다. 조준경 안에 놈의 머리가 들어올 때까지. 놈의 머리가 동그란 원 안에 들어온 순간 조이는 방아쇠를 당겼다.
펑-
풍선 터지듯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 * *
조이는 포로로 사로잡은 서제국 군인들을 중대장에게 넘긴 후 곧바로 군용차에 올랐다. 온몸이 축축 늘어질 정도로 지쳤지만 조이는 북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권명을 지원해야 했다.
군에서 보내온 정보와 달리 남쪽과 중앙에 집결한 서제국의 군사는 많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서제국의 전력 대부분이 북쪽에 포진해 있다는 말이었다.
조이가 타고 있는 군용차에 탑승한 군인들 대부분은 가이드였다. 통신병에게 듣기로는 예상보다 서제국의 반격이 훨씬 거센 것 같았다. 그곳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을 에스퍼들의 피로도와 부상은 이미 한계를 넘은 수준일 것이다.
북쪽에 다다를수록 조이의 예민한 귀가 참혹한 전장을 먼저 알아차렸고, 그다음으로 코가 반응했다. 도축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진한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두려움보다는 권명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지난밤 권명은 폭주로 고통받던 과거를 담담하게 털어놓았었다. 그런 고통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으나, 그 말을 듣는 조이의 심장은 욱신욱신 아팠다. 권명을 바라보며 조이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앞으로는 절대 권명이 그런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조이에게는 그럴 힘이 있으니까.
‘권명…….’
“중위님! 차량 진입이 어렵습니다!”
운전병이 전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남쪽과 북쪽을 잇는 메인 도로가 파손돼 있었다.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차 후 곧바로 교전에 투입될 거야. 엄폐물부터 찾아야 해.”
“예!”
조이는 가장 먼저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사이에도 총알이 이리저리 날아와 군용차에 박혔다. 운전병은 모든 대원들이 하차하자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사라졌다.
“헙……!”
검은 연기가 사라진 후 청각과 후각으로 예상했던 참혹한 전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겪은 대원들도 그 끔찍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교전이 벌어지는 곳은 교화의 광장이었다. 조이는 이곳 근처에서 3개월 동안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도박 빚을 대신 갚기 위해. 그때 이곳에 사는 이들은 이 광장을 붉은 광장이라고 불렀었다.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붉은 벽돌을 제외하더라도 붉은 광장 그 자체였다. 탑처럼 쌓인 시체 더미에서 꾸역꾸역 핏물이 흘러나와 땅을 적셨고, 그 피가 마르기 전에 또 다른 피가 수혈되고 있었다. 온통 피로 물든 이곳을 붉은 광장 이외에 어떤 단어로 부를 수 있을까.
광장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보병들이 끊임없이 진격하고 있었다. 아니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뒤로 기관총이 난사되고 있었으니까. 세계대전이라는 구시대의 전쟁 당시, 퇴각하는 병사들을 쏴 죽였다는 일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오늘 이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죽기 살기로 달려오는 적군들 앞으로 피투성이가 된 에스퍼들이 보였다. 잿빛 동제국의 군복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본인의 피뿐만 아니라 적군의 피를 몽땅 뒤집어쓴 모습이 광란의 카니발을 연상케 했다.
“다… 다들 자세 낮추고! 따라와!”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이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권명의 모습 역시 저들과 다르지 않을 테니, 빨리 권명을 찾아야 했다. 조이는 자세를 낮춘 채 교전이 벌어지는 곳을 향해 접근했다. 시체 더미에 몸을 반쯤 기댄 채 포탄을 던지는 이가 보였다. 이휘 대위였다.
“대위님! 권명은요? 권명 소령은 어디 있어요?”
“안 중위……?”
“다친 거예요?”
“으윽…….”
조이를 알아본 대위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대위의 옆구리에는 검게 그을린 흔적이 있었고 팔다리에는 총상이 있었다. 심각한 부상이었다. 그런 부상을 입고도 대위는 적진을 향해 포탄을 던지고 있었다.
조이는 곧바로 핏물이 흘러나오는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벌건 속살을 내보이던 환부가 아물어 갈수록 대위의 눈동자도 조금씩 또렷해졌다.
“소령은… 저쪽…….”
대위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 보니 외딴 섬처럼 적진 한가운데 서 있는 이가 보였다.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피에 젖은 사내. 조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권명……!”
권명 옆에는 수십 개의 포탄 상자가 권명의 키만큼 높게 쌓여 있었고 권명이 손을 들어 올릴 때마다 그 상자에서 포탄이 튀어나왔다. 공중으로 치솟은 포탄은 권명의 손동작에 맞춰 사방으로 쏘아졌다.
“으윽…….”
그 이후의 모습은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림을 그리듯 붉은 물감이 공중에 흩날렸다. 권명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두 눈은 멀리서 보아도 알아차릴 정도로 붉은빛이었다. 위험한 상태였다.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교대는요?”
“교대… 윽… 해 줄 사람이 없어…….”
이휘 대위의 말이 맞았다. 권명을 제외하고는 저런 공격을 쏟아 낼 에스퍼가 없기도 했고, 그나마 살아 있는 에스퍼들의 상태는 처참했다. 북부에서 남하하는 지원군이 도착해야 저들이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을 텐데, 어디를 둘러보아도 지원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원군은요?”
대위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쯤 되니 그들이 진정 오기는 하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그들이 오지 않는다면…….’
그 뒤 벌어질 상황이 영화처럼 조이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광장에 널려 있는 시체처럼 피를 흘리는 대원들의 모습. 힘을 몽땅 써 버리고 활활 타오르는 권명. 남쪽을 점령한 후 조이의 마음속에 피어난 희망이 스멀스멀 불길한 상상에 물들어 갔다.
“각자 페어인 에스퍼들을 가이딩하도록! 페어가 없는 이들은 부상 정도에 따라 차례대로 가이딩해야 해! 서둘러!”
간단한 지시를 내린 후 조이는 다시 대위의 몸에 양손을 올렸다. 조이를 이용해 먹던 얄미운 놈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태가 되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이의 손에서 시작된 따뜻한 기운이 대위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하아…….”
가이딩이라는 마술이 오늘따라 유독 경이롭게 느껴졌다. 죽음의 늪에 잠긴 이를 끌어 올리는 기분이었다. 시체처럼 하얀 대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꾸역꾸역 핏물을 토해 내던 옆구리에도 새살이 돋아났다. 아직 완벽하게 치유된 것은 아니지만 조이는 가이딩을 멈추었다. 권명에게 쏟아 줄 힘을 아껴 둬야 했다.
“일어나요.”
“더… 안 해 주냐?”
대위는 아쉽다는 듯 조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이는 하극상이라는 것도 잊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닥치고 따라오라는 의미로. 이휘 대위는 피식 웃으며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조이와 대위는 권명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열기가 느껴졌다. 이 열기가 권명의 상태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대위 역시 심상치 않다고 느낀 듯했다.
“이거 위험하겠는데?”
“길을 내줘요. 가이딩은 내가 할게요!”
이휘 대위는 그사이 몸을 회복한 에스퍼 대원들을 소환했다. 권명의 폭주를 막고 방어선을 앞쪽으로 당길 작정인 듯했다.
“자. 매뉴얼대로 억제구 장착하는 거 잊지 마. 소령 정도의 에스퍼가 폭주하면 우리도 다 죽는 거야.”
“알아요.”
억제구를 손에 쥐자 생존 훈련을 받던 그때가 떠올랐다. 생존 훈련 초반, 억제구를 착용한 권명은 자신의 힘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종국에는 억제구를 태워 버릴 정도로 힘을 방출한 뒤 폭주 증상을 보였었다.
그 때문에 이 억제구가 폭주를 앞둔 권명을 구해 줄 동아줄이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권명의 폭주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이의 가이딩이었다.
“권명 소령. 폭주 2단계야. 3단계면 다들 알지?”
권명을 남겨둔 채 후방으로 후퇴해야 했다. 아군을 폭주에 휘말리게 둘 수는 없으니까. 조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억제구를 장착한 후에도 상태가 진정되지 않는다면 조이 역시 권명을 두고 후방으로 빠져야 했다.
“안 중위. 매뉴얼대로 해. 권명 소령도 그걸 원할 테니까.”
이휘 대위는 조이에게 한 번 더 지시사항에 따를 것을 당부했다. 조이는 사관학교 시절 교관의 말을 가장 잘 따르는 생도였고, 인간 매뉴얼이라 불릴 정도로 규칙을 존중했었다. 하지만 권명의 목숨이 걸린 일을 앞두자,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이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권명이 쏟아 내는 공격을 막을 재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접근하고 있었다. 근접전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동제국과 서제국의 전쟁이 발발한 이후, 무기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 왔다. 그럼에도 육탄전을 벌이는 건 결국 사람이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는 돌도끼에서 대검으로, 마침내 소총으로 진화했지만 그럼에도 그 모습이 사냥감을 놓고 다투는 원시인의 싸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돌파한다! 진격!!”
조이는 이휘 대위의 외침과 함께 적진을 향해 달려 나갔다.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저 멀리 개미 떼처럼 보였던 이들의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지거나 서로의 몸에 올라타며 주먹을 휘둘렀다.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끔찍한 모습이 지옥도의 한 장면 같았다. 죽음의 사신이 조이의 옆을 맴돌고 있었다. 조이의 영혼을 데려가려는 듯.
“안 중위! 지금이야!”
“권명! 권명!!”
이휘 대위와 대원들이 뚫어 준 길 사이로 조이는 권명의 이름을 부르며 달렸다. 한참을 불러도 권명은 조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워봇처럼 포탄을 쏘아 댈 뿐이었다. 조이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권명을 불렀다.
“권명!!”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도 미약하게 울리는 조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권명은 조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살기로 가득한 붉은 눈동자가 조이를 낯선 물건처럼 바라보았다. 조이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밤새 조이를 끌어안고 이야기를 나누던 따뜻한 눈빛이 아니었다. 본성에 지배당한 짐승의 눈이 저러할까?
“궈… 권명!”
조이는 한 번 더 권명을 불렀다. 그제야 조이를 알아본 것인지 붉은 동공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벌어지며 ‘조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하아…….”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저 몸을 꽉 끌어안고 달래고 싶었다. 권명을 괴롭게 하는 저 열기를 조이의 힘으로 가라앉히고 싶었다. 하지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조이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풍선을 터트리는 것처럼 커다란 소리. 조이는 이 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저격용 총의 총성. 이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어깨에 불이 붙은 듯 뜨거움이 느껴졌다. 어깨를 꽉 부여잡자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저격수의 능력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운이 나빴던 건지 방탄조끼로 가려지지 않은 부위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씨발. 안조이!!”
권명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군을 밀어내며 조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늘 당당하던 권명은 길을 잃은 아이처럼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안심해. 난 괜찮아.’
이 말을 해야 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총을 맞은 곳은 분명 어깨인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안 중위! 저격수가 아직 살아 있어 움직이지 마!”
등 뒤로 이휘 대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저격수를 처리한 후 조이를 구조할 생각인 듯했다. 귓가로 들려오는 온갖 소리가 점점 아득하게 느껴졌다. 불발탄으로 목숨을 구했던 일. 그 일로 조이의 행운을 모조리 써 버린 모양이었다.
‘호기롭게 권명을 구하겠다고 나섰는데, 이렇게 되다니.’
피에 젖은 땅이라는 건 알지만, 등이 바닥에 닿자 온몸이 축 늘어졌다. 낮부터 시작된 전투에 온몸이 지쳐 잠깐이라도 쉬고 싶었다. 조이는 어느새 눈까지 감고 있었다.
펑-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누군가 저격을 당한 걸까? 다행히도 조이를 향해 날아온 총알은 아닌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면 누굴까? 설마… 권명……?’
조이를 향해 달려오던 권명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 조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득하게 들려왔던 전장의 소음이 귓가를 때리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내지르는 괴성,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 살려 달라는 애원과 비명.
“으윽…….”
조이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또다시 저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권명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수많은 군인들 사이로 권명의 모습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권명을 발견하자마자 조이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안 돼!”
권명의 폭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조이를 인식하던 권명의 눈이 피가 나올 듯 붉어졌다. 그 눈은 오직 살육에 대한 본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이는 애절한 목소리로 한 번 더 권명을 불렀다.
“권명!!”
권명의 얼굴이 조이가 있는 곳을 향해 미약하게 움직였다. 그의 입술이 마지막 인사처럼 조이에게 말을 걸었다. ‘도망가’라고. 그 말을 끝으로 권명의 입에서는 꾹꾹 눌러 왔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으윽!!”
권명의 비명과 함께 셀 수 없이 많은 포탄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던 수백 개의 포탄이 권명의 분노를 양분 삼아 ‘쿵쿵’ 지상으로 떨어졌다.
광장 안으로 진격하던 서제국의 군인들이 하나둘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들 뒤에서 총알을 쏘던 장교들 역시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에 말문을 잃었다. 한낱 인간의 분노가 지진이나 태풍처럼 대자연을 모방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떠올랐다. 피할 수 없는 재난을 마주한 인간들은 무기를 들 의지도, 싸울 전의도 상실한 채 무너졌다. 앞다투어 도망가거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듯 무릎을 꿇었다.
“권명!”
조이는 화염에 휩싸인 권명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조이의 상체를 흠뻑 적셨지만 멈출 수 없었다. 권명에게 다가갈수록 살갗에 닿는 온도가 점점 높아졌다. 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껍질이 까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조이는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마침내 손을 뻗으면 권명과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조이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는 권명과 조이의 사이를 가로막는 화염이 있었다. 이 장벽이 지금보다 더 조이를 아프게 할 거라는 걸 알았지만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으으윽!!”
조이는 권명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불에 달궈진 쇳덩어리를 품에 안는 것 같았다. 조이의 가느다란 팔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도저히 속으로 삭일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숯과 재로 뒤덮인 지옥을 걷는 것 같았다.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은 충격에 조이는 엉엉 울며 소리쳤다.
‘제… 제발… 주세요…! …살려 주세요!’
조이는 애절하다 못해 비굴할 정도로 간청했다. 권명을 살려 달라고. 자신에게 제발 권명을 구해 낼 힘을 달라고. 조이는 몸 안에 남아 있는 모든 기운을 끌어모았다. 돈을 받고 하는 가이딩, 선의로 행한 가이딩, 조이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가이딩보다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제발… 제발……!’
조이의 절박한 마음을 담은 그 기운이 조금씩 권명에게 옮겨 가고 있었다. 지옥 불처럼 뜨겁던 몸이 조금씩 식어 갈수록 조이의 몸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궈… 권명…….”
죽어 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내뱉는 호흡처럼 조이는 아주 작고 미약한 소리로 권명을 불렀다. 그것이 조이가 기억하는 부활 작전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