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2. 7구역 (12/16)

12. 7구역

콜록콜록.

타이어가 녹아내리며 끔찍한 냄새가 풍겨 왔다. 조이는 서둘러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적군 헬기의 시야를 방해하기 위해 골목마다 타이어를 태운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멀리서 보면 검은 연기가 도시를 삼켜 버린 모습이었다. 7구역 목사들이 일요일마다 떠들어 대던 지옥이 바로 이곳일까?

지난 며칠간 소모적인 시가전이 반복되고 있었다.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는 서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7구역에 남은 군인들은 고전적인 방법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중위님! 적군이 온다고 합니다! 헬기 4대요!”

서제국을 몰래 염탐하고 있던 대원이 헬기가 떴다는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조이는 대원들에게 위치를 지시한 후 건물 위로 올라갔다. 저 멀리 시커먼 연기 사이로 점처럼 작은 헬기 4대가 보였다.

조이가 7구역에 도착하기 하루 전, 서제국에서는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였던 7구역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7구역이 갑자기 대단한 의미를 가지게 되어 공격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N52 구역에서의 교전이 또다시 패배로 끝나며, 서제국은 북부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투뤼에서 있었던 에스퍼들의 연쇄 폭주로도 이미 꺾인 승패의 기운을 뒤집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서제국에서는 사기를 올릴 만한 승리가 필요했고, 쉽게 승리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곳인 7구역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 것이었다.

서제국은 커다란 식빵을 베어 물듯 7구역의 땅을 빠르게 점령했다. 때로는 한 입 크게, 때로는 갉아 먹듯 작게. 단 3일 만에 7구역의 절반 이상을 먹어 치웠다.

아마 며칠 내로 추가 지원이 없는 한 나머지 땅도 서제국의 입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지금 있는 병력으로는 이곳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니까. 하지만 조이는 절대 이곳을 넘겨줄 마음이 없었다. 이 방어선을 포기하는 순간 조하가 있는 병원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지직- 지직-

“서서 자는 거 아니지?”

조이가 딴생각하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린 이휘 대위가 장난치듯 무전기로 말을 걸어왔다. 반대편 건물 옥상에서 포탄을 장난감처럼 쥐고 있는 대위의 모습이 보였다. 에스퍼들이란 하나같이 저렇게 안전 불감증이었다.

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헬기를 바라보았다.

“중위가 두 번째 헬기 맡는다.”

“예!”

조이는 짧게 대답한 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헬기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꼬리를 맞혀야 하기에,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려진 로켓포가 더욱더 무겁게 느껴졌다.

“후우…….”

조이는 크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맹수를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심정이었다. 조이의 위치가 노출되는 순간 맹수의 이빨이 조이를 무참히 물어뜯을 테지만, 침착하게 기다려야 했다. 적의 맹점이 보일 때까지.

‘조금만 더. 조금만.’

조이의 이마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 턱밑에 맺힌 순간, 조이는 작게 지금이라고 속삭였다. 곧바로 미사일이 발사됐다.

삑- 삑-

불을 뿜으며 날아간 미사일이 정확하게 꼬리에 꽂혔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돌멩이처럼 조이가 쏘아 올린 미사일 한 방이 커다란 헬기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삑삑’ 요란한 소리를 내던 헬기가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먹으로 그림을 그리듯 검은 연기가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미션 완료!”

조이는 무전기를 통해 업무 보고를 마친 후 건물 밑으로 내려갔다. 저 멀리 격추된 헬기에서 적군이 하나둘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조이는 망설임 없이 다리 쪽을 쏴 그들을 주저앉혔다.

“다리 쪽을 노린다! 포획해야 해!”

마음 같아서는 다 쏴 죽이고 싶지만, 이놈들이 다 협상 도구였다. 그 때문에 조이는 대원들에게 최대한 포획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으윽! 윽!”

조이는 다리를 맞고 주저앉은 적군 근처로 다가갔다. 부상당한 와중에도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떨어진 총을 쥐려 했다. 조이는 곧바로 총을 걷어찬 후 개머리판으로 후려쳤다.

배터리가 다 된 인형처럼 픽 쓰러진 놈을 그대로 두고 몸을 일으켰다.

“데려간다!”

“예, 중위님!”

뒤늦게 달려온 부대원 둘이 기절한 적군의 팔을 잡아당겨 군용차에 실었다. 조이 역시 군용차에 걸터앉으며 차체를 탕탕 두들겼다. 출발하라는 의미로.

* * *

본부로 돌아온 조이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방공호에 숨어 있던 구청장이 대원들과 악수를 하고 있었다. 시커먼 먼지로 엉망인 대원들과 구청장의 깨끗한 옷이 흑백 영화와 컬러 영화처럼 달라 보였다.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우리 7구역의 영웅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구청장은 대원들이 아닌 반대쪽을 바라보며 연설을 하듯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쇼인가 싶어 조이는 조금 얼떨떨했다.

‘저 겁쟁이가 갑자기 왜 저러지?’

전투가 벌어지자 구청장은 모든 권한을 이휘 대위에게 넘긴 채 방공호로 들어갔었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 광대처럼 설쳐 대니 호기심이 일었다.

조이는 대원들을 비집고 앞쪽으로 향했다. 그제야 이 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조이는 허겁지겁 안경을 쓰고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어찌 된 일인지 그곳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군 홍보병을 했던 조이는 저 카메라에 붙어 있는 마크가 국방 채널 표시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추가 병력 지원도 어렵다면서 웬 카메라지?’

조이는 서둘러 몸을 숨기려 했으나, 어느새 조이의 뒤에는 이휘 대위가 서 있었다. 대위는 못된 장난을 저지르는 악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씨발. 놔요.”

조이는 자신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있는 대위에게 작게 소리쳤다. 그런데 이놈의 에스퍼가 귀까지 먹었는지 조이의 어깨를 더욱더 아프게 움켜쥘 뿐이었다.

“윽. 노… 놓으라고……!”

그 순간 구청장과 리포터가 이휘 대위 쪽으로 카메라를 대동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조이는 더욱더 거세가 발버둥 쳤으나 에스퍼의 힘을 무슨 수로 이길까. 조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카메라를 피하기로 했다.

“이번 작전의 지휘관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휘 대위입니다.”

“이휘 대위. 작전 소개해야지.”

이휘 대위의 짧은 자기소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구청장은 이번 작전에 대해 소개하라며 대위의 옆구리를 찔렀다. 대위는 암기한 내용을 말하듯 서제국의 헬기를 공격하여 적군을 포로로 잡는 작전을 맡은 이휘 대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번 작전으로 헬기를 격추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예. 4대 중 2대의 헬기를 격추했습니다.”

구청장은 요란스럽게 손뼉을 쳤고, 이휘 대위에게 쏠려 있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듯 7구역을 점령하고 있는 적군을 하루빨리 몰아내겠다며 위협적인 멘트를 날렸다. 이 모든 것이 연극 같았다. 조이는 이 연극에서 나무 1이나, 바위 1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구청장이 카메라 앞에서 설치는 덕분에 이휘 대위를 찍고 있는 카메라가 조금 멀어졌다.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조이는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 연극에 반전이 일어났다.

“여기 2번째 헬기를 격추… 윽… 대원이 있습니다.”

조이는 발뒤꿈치로 이휘 대위의 발등을 찍었다. 입 닥치라는 의미로. 하지만 카메라는 어느새 조이를 비추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저 입을 찍어 줬어야 했는데.

“아! 우리 용맹한 7구역의 전사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조이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서제국이 7구역을 공격하기 전까지 매일같이 뉴스에 나오던 탈영병 안 중위가 바로 자신이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이웅 중위입니다. 제 사촌 동생이죠.”

머뭇거리던 조이를 대신해 이휘 대위가 조이를 소개했다. 조이는 저 음흉한 놈이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조하가 입원한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휘 대위는 조이를 팔아먹는 대신 부려 먹기로 결심한 듯했다. 대원들에게 조이를 이웅이라고 소개했고 매일같이 조이를 데리고 작전에 나섰다.

“이웅 중위님,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소감을 묻는 리포터에게 조이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다행히도 조이의 심심한 소감이 퍽 재미없었는지 리포터는 다른 대원들 쪽으로 멀어졌다. 조이는 휙 고개를 돌린 채 이휘 대위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너. 따라와!’

조이는 구청 건물 뒤쪽으로 대위를 이끌었다. 조이를 쫄래쫄래 따라오던 이휘 대위는 황소처럼 콧김을 내뿜는 조이가 보이지도 않는지 태평한 말을 내뱉었다.

“어렸을 때 생각나네, 여기서 돈 많이 빼앗겼었지.”

이휘 대위는 오른쪽으로 보나 왼쪽으로 보나 돈을 빼앗길 덩치가 아니었다. 조이는 대위의 헛소리를 무시하며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나 안조이예요. 얼마 전까지 방송에서 잡아야 한다고 난리를 피우던!”

“알지. 유명한 분인 거.”

대위는 유명한 사람을 만나 영광이라는 듯 과장되게 인사를 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안 그래도 대원들 부족한데, 나까지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겁니까? 예? 자수할까요? 자수하냐고!”

조이는 이 오합지졸 7구역 수비대에서 그나마 이휘 대위의 명령을 알아먹고 제 몫을 하는 대원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조이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부대 작전도 조이의 상태에 맞게 재편성되거나 보류되어야 할 정도였다. 조이는 자신이 필수 인력이라는 것을 믿고 하극상을 부렸다.

조이의 당당한 말에 이휘 대위는 장난치듯 무서우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몸을 사렸다.

“그런데 왜 그딴 짓을 하냐고요!”

“구청장이 얼굴을 하나 만들어 내라잖아. 그것도 카메라발 잘 받는 놈으로. 우리 안 중위만 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경력직이잖아.”

“그렇다고 전 국민에게 역적으로 찍힌 나를 얼굴로 삼아요?”

조이의 말에 대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답답하다는 듯.

“아니… 이런 말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안 중위 누가 봐도 7구역 토박이야 지금. 걱정 마. 아무도 모를 거야.”

그 말에 조이도 반박할 수 없었다. 7구역에 발을 디디자마자 조이는 수도의 물을 빠르게 뱉어 냈다. 언젠가 거울 속에서 보았던 모습처럼, 허름한 군복에 낡은 소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심지어 7구역에서도 방영됐던 「실험실 급습 작전-안조이 편」을 본 대원들마저도 조이가 그 방송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여하튼! 조심해요! 콱! 자수해 버릴 테니까!”

조이는 괜스레 한 번 더 엄포를 놓은 후 휙 몸을 돌렸다. 조하가 있는 병원 쪽으로. 등 뒤로 이휘 대위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이는 저 곰 같은 에스퍼가 여우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 * *

조이는 조하와 간병인이 있을 병원으로 향했다. 조이가 임무를 맡는 동안 늘 그렇듯 간병인이 조하를 돌보고 있었다. 조이는 간병인의 저 마음이 쉽게 이해 가지 않았다. 가족 이외의 누군가를 살뜰히 돌보는 저 마음이.

‘진짜 핏줄도 서로 버리는 판이 아니던가. 아버지는 조하를. 나는 아버지를.’

그럼에도 간병인을 이곳까지 데려온 일은 잘한 선택이었다. 7구역이 이렇게 쑥대밭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조이가 방어선을 지키는 동안 조하를 돌볼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간병인은 조하를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중위님, 박사님이 오셨어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간병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간병인 옆으로 하뉨에서부터 만나길 고대해 왔던 박사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도 박사는 서제국의 침공에도 하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폭격으로 다친 이들을 돌보며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하의 차례를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지만, 지금 이 병원에는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환자가 많다는 것을 알기에 불평할 수 없었다.

조이는 한걸음에 달려가 박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웅 중위입니다. 박사님.”

“반갑습니다. 허령입니다.”

박사는 자신을 짧게 소개한 후 곧바로 조하의 상태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조이는 깊은 잠에 빠진 에스퍼를 폭주하게 했던 그 단어를 제외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박사는 한참 동안 고민에 빠진 듯 침묵을 지켰다.

조이는 조급함에 몇 번이나 입을 달싹거렸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마침내 박사의 입에서 그토록 기대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좋습니다. 최면을 시도해 보죠. 하지만 보호자님도 미리 아셔야 합니다. 최면은 만능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특히 이런 에스퍼를 상대로 최면에 성공하기란 무척 어렵다는 것.”

“예. 에스퍼에게 최면을 거는 실험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의 에스퍼를 상대로 성공한 실험이었죠. 그런데 지금 상태로는 최면의 효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구출 후, 회복된 조하의 몸이 최면을 푸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최면을 걸기 위해 조하를 다시 굶주리게 만들거나 아프게 만들 수도 없고. 서제국 놈들의 악랄함에 이가 갈렸다.

“제자가 저지른 악행이니, 스승인 제가 해결해야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박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사는 이번 주에 바로 최면을 시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희망이 느껴졌다. 7구역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조이에게는 이 작은 달콤함도 커다랗게 느껴졌다. 사막을 걷던 중 만난 빗방울처럼.

박사와 간병인이 떠나고 조이는 혼자가 되었다. 조하의 일로 잠시 들떴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조이는 습관처럼 통신구를 만지작거렸다. 새로운 버릇이었다.

그날 군 병원에서 탈출한 후 어둑어둑한 도로에서 권명의 전화번호를 한참 동안 누르고 지우기를 반복했었다. 끝끝내 전화를 걸 수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날 전화를 걸지 않은 것이.

이곳 7구역으로 돌아온 이후, 조이는 또 한 번 커다란 용기를 내야 했다. 통신구의 꺼버릴 용기. 그러지 않는다면 또다시 전화번호를 누를 테니까. 일부러 충전기를 찾아보지 않은 것도 그 이유였다.

이제는 권명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조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웠다. 도와달라는 말. 함께 있어 달라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조이의 어두운 현실이 권명에게도 그림자를 드리울 테니까.

권명은 반짝이는 수도의 별이었다. 그 별을 추락시키는 짓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혐오하던 아버지와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1등급 에스퍼였던 어머니가 7구역으로 끌려가 무슨 일을 겪어야 했는지 조이는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하아…….”

조이는 한숨을 내쉬며 한참 동안 통신구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전원도 들어오지 않는 먹통 기계를.

* * *

며칠 뒤 7구역으로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지원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누구보다도 이 소식을 반기는 이는 이휘 대위였다.

화력 부족, 물자 부족, 유능한 장교의 부재 등. 대위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 방어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대위 위로 있던 장교들이 대부분 서제국의 기습에 죽음을 맞이했기에, 대위는 얼떨결에 작전을 지휘하고 계획하는 모든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또한 군인으로서의 책임감 외에도, 대위는 이곳 7구역 출신이기에 누구보다도 큰 사명감을 느끼는 듯했다.

작전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본부에 지원군을 요청했는데, 군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무조건 사수하라.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구시대적인 표어를 아직도 사용하는 조직다웠다. 군에서는 북부를 완벽하게 사수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7구역으로 지원군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입 찢어지겠어요.”

“하하.”

이휘 대위는 지원군을 환영하는 만찬에 직접 테이블을 나르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웃기는 모습이었다. 이런 전쟁터에서 만찬이라니.

“대체 군에서 지원군을 얼마나 보낸 거예요?”

“소령 둘이 온다더라고. 소령 하나는 이미 출발했고, 나머지 하나는 탈영한 에스퍼를 잡아들이느라 좀 늦는다나?”

“소령? 그럼 나이가 좀 있겠네요.”

“…….”

소령 정도라면 꽤 파격적인 지원이었다. 조이는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신출내기 장교 몇 명을 보내 주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에스퍼가 한 명만 더 있어도 전력에 큰 차이가 생기니까. 그런데 소령이라니.

“에스퍼 확실하죠?”

“당연하지!”

에스퍼에 소령이라면 현장 경험도 충분할 테고, 7구역 탈환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아주 잘된 일이었다. 그런데 이휘 대위는 어쩐지 조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기뻐하는 조이의 표정을 힐끔힐끔 보는 것이.

조이는 이휘 대위 때문에 꽤 자주 열이 받았었다. 사전에 협의된 작전 사항을 제 맘대로 변경하거나, 힘 조절을 잘못해 아군을 위험하게 한다거나. 하지만 그럼에도 해맑은 놈이었다. 단 한 번도 그런 짓을 저지르고 눈치를 본 적이 없었다. 보통 뻔뻔한 놈이 아닌데 저렇게 눈치를 보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표정 지을 거면서 왜 그런 거예요?”

“어……?!”

대위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표정을 보건대 분명 대위는 조이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 조이는 조금 더 파 볼 생각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냐고요.”

“뭐… 뭐가…? 아 참! 음식 준비가 됐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알지? 구청장 일 처리 형편없는 거.”

대위는 어색한 핑계를 대며 조이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조이는 저걸 잡아서 매달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 뭔가 있었다.

‘저렇게 몸을 사리는 걸 보면 진짜 뒷목 잡게 만들 사고를 친 게 분명한데…….’

구청장은 보초를 서는 병사들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환영회 만찬을 위해 불러들였다. 다 무너져 가는 구청 건물을 청소하고 조악한 품질의 조화로 이곳저곳을 장식했다. 조이가 소령이라면 이 장식을 보자마자 뒷걸음질 칠 것이다.

“자! 다들 각자 위치로!”

그놈의 소령이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었다. 때맞춰 성가대는 지원군을 환영하는 합창을 시작했다. 조이는 뼈 빠지게 일을 했으니, 이제 몰래 도망가도 될 것 같았다. 나름 살금살금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습을 본 이휘 대위가 조이를 보쌈하듯 번쩍 들어 올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내려놓으라고요!”

불시에 공격을 당한 조이는 온몸을 흔들며 반항했다. 조이의 발버둥이 꽤 힘들었는지 대위는 한숨을 내쉬며 조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 내려놨다. 이거 은근 무겁네.”

“미쳤나 봐 진짜!”

조이는 곧바로 대위를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대위는 그런 시선을 외면할 뿐이었다.

“대체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건데요?”

“구청장이…….”

“알잖아요… 내 상황.”

조이는 작게 조이의 난처한 상황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대위는 그런 건 정말 걱정하지 말라며 근거 없는 자신감을 뿜어냈다.

“대신 끌려갈 거예요?”

“내… 내가?”

“근데 뭔 자신감이야!”

조이는 다시 돌아가겠다고 소리쳤으나, 때맞춰 문이 열리며 소령과 지원군이 들어오고 있었다.

“영웅의 출현이 이러할까요? 환영합니다! 환영해요!”

구청장은 연극을 하는 말투로 지원군을 환영했다. 조이는 대위가 방심하는 틈에 옆구리를 팔꿈치로 때리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돌처럼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지원을 나온 소령이라는 자는 조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였다. 매일 밤 조이를 망설이게 하는 자. 굳게 먹은 마음도 번번이 무너트리는 자. 권명이었다.

조이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권명이 대원들에게 짧게 인사를 하며 다가오는 그 걸음에 맞춰 심장이 거세게 날뛰었다. 권명이 조이를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치길 바라면서도, 알아봐 주길 바라는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반갑습니다. 권명입니다.”

조이는 흐릿한 시야 사이로 권명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에 띄는 얼굴이지만 조이만큼이나 피곤해 보였다. 또한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보다 살이 빠져 있었다. 저 얼굴을 마주하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조이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권명 역시 힘들었던 걸까?

“안쪽으로 가시죠!”

조이는 권명의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었으나, 권명은 짧은 인사를 마친 후 구청장의 안내에 따라 연회가 있을 회관으로 향했다. 그 순간 조이는 조금 허탈해졌다. 이휘 대위의 말대로 조이의 모습이 달라지긴 한 모양이었다. 권명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하긴… 좀 그렇지.’

갈색 머리는 눈을 찌를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10년 전에나 썼을 것 같은 커다란 안경을 쓴 조이의 모습은 분명 예전과 다를 테니까.

“헙!”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조이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회관으로 향하던 권명이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조이가 있는 방향으로. 조이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으나, 권명의 발걸음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름이 뭐야?”

“…….”

“이웅 맞아?”

조이의 이름표를 확인한 모양인지 권명은 조이에게 이웅이 맞느냐고 물었다. 조이는 소리를 내 대답해야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권명은 작게 ‘이웅이라’라고 속삭이더니 다시 몸을 돌려 회관으로 사라졌다.

“후우…….”

“거봐. 내 말이 맞지?”

“네… 잘됐네요…….”

조이는 잘된 일인데도 마냥 기쁘지 않았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조이의 탈영을 수사하는 담당자가 조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으니 분명 잘된 일인데도, 이런 기분이 들다니.

“밥 먹고 가. 구청장이 식량 창고 털었어.”

“싸 줘요. 간병인도 줘야 하니까.”

“알겠어. 웅아.”

“하?”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힐끔 보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예전과 같이 뻔뻔하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위는 이제 전쟁도 끝이 보인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서제국 놈들이 아직 저 다리 건너에 있거든요?”

“에스퍼 둘이야. 심지어 권명이라고.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무슨 예상이요?”

“아… 아니 뭐… 배고프네!”

냄새가 났다. 무슨 예상을 했다는 걸까? 하지만 지금 조이에게 중요한 것은 대위 따위가 아니었다.

“근데 소령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래요?”

“응?”

“저기 저 사람 말이에요.”

조이는 권명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구청 문이 열리자마자 조이의 온 신경은 권명에게 꽂혀 있었다. 그의 옆에 누가 있는지, 또 몇 명이 있는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야 조이의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었다. 권명 옆에 있는 저 작은 놈.

“뭐, 에스퍼 옆에 있으니까 가이드겠지?”

“네? 가… 가이드?!”

* * *

조이는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뿜으며 구청 건물을 벗어났다. 도저히 저곳에 얌전히 있을 자신이 없었다.

권명 놈, 참으로 웃겼다. 가이딩은 죽어도 싫다고 말하던 놈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니, 권명은 가이딩을 한번 맛본 뒤로는 중독된 것처럼 가이딩을 원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조이의 몸을 끌어안거나 그 짓을 하자고 꼬드겼었다. 그사이 딴 주머니를 차다니.

발뒤꿈치가 땅에 박힐 듯 쾅쾅 걸음을 옮기던 조이는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눈물을 훔쳤다.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조이는 조금 늦더라도 돌아갈 생각이었다. 조하가 깨어나거든 권명에게 연락을 취해 모든 걸 설명할 생각이었다.

조이는 자신의 처지를 아주 잘 알기에 권명을 부를 수 없었던 것인데, 그 잠깐을 못 참고 가이드라니.

‘나보고 딴짓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심장 한쪽을 누가 꽉 쥐고 있는 것처럼 아팠다. 분노가 지나가자 서러움이. 서러움이 지나가자 또다시 분노가. 도돌이표처럼 분노와 서러움이 반복됐다.

마음 같아서는 권명에게 달려가 따져 묻고 싶었다. 바람난 애인을 취조하듯. 하지만 취조당할 사람은 권명이 아닌 조이였다. 또다시 영창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고 군 재판을 받게 될 테지. 조이가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조이가 무단으로 이탈한 것과 조하를 데리고 도망간 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니까.

“후우…….”

조이는 환영회 만찬이 벌어지고 있는 구청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창문을 넘어 조이에게도 들려왔다. 조이는 거칠게 눈물을 닦으며 쓸쓸히 걸음을 옮겼다. 저 소리로부터 도망치듯.

* * *

권명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던 그날 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찬을 즐기던 지원병도, 대원들도 모두가 급하게 공습경보를 듣고 달려야 했다.

조이는 귓가를 때리듯 울리는 공습경보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병실 한쪽에서 쪽잠을 자고 있던 간병인 역시 그 소리를 들었는지 조이에게 눈빛을 보냈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조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달렸다. 밖으로 나가자 각자 위치로 달려가는 대원들이 보였다. 조이는 그들 중 하나를 잡아채서 공격지점을 물었다.

“북쪽 다리요! 다리 쪽으로 개미 떼처럼 몰려온대요!”

서제국이 점령한 구역과 수비군이 가까스로 사수하고 있는 구역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것은 강이었다. R-27번 강. 서제국이 7구역의 나머지 땅을 모두 먹어 치우기 위해서는 다리를 점령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이곳 수비군이 죽기 살기를 각오하며 사수하는 곳 역시 다리였다.

수비군에서는 서제국의 공세에 밀릴 때마다 교량을 하나씩 폭파해 왔다. 적군의 손에 넘어갈 바에는 없애 버리는 게 낫겠다는 계산이었다. 벌써 6개의 교량 중 4개를 폭파한 상태였다. 남쪽과 북쪽에 있는 다리만 남겨 두고 있었는데, 서제국이 기어코 그 다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 밤에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다리 근처에 다다르자 폭발음과 총격음이 들려왔다. ‘쿵’ 하고 귀를 틀어막을 정도로 거센 소리가 들리고 나면 어김없이 의무병을 부르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서제국의 전차가 다리 절반을 건너온 상태였다. 전차를 엄폐물 삼아 보병들이 개미 떼처럼 줄지어 진격하고 있었다.

“전차! 전차를 먼저 공격한다!”

이휘 대위는 전차를 먼저 폭파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구식 포탄과 총알이 서제국의 전차를 향해 매섭게 쏟아졌다.

하지만 서제국의 전차는 다이아몬드를 갈아서 만들기라도 했는지, 수비군이 쏟아 내는 공격에도 굳건히 전진하고 있었다. 또한 그 옆으로 어둠을 틈타 헬기가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둠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지만 조이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지난 며칠간 지겹도록 본 헬기가 아니던가. 교전이 벌어지는 곳을 피해 군인들을 내려놓을 생각인 듯했다.

“대위님! 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이휘 대위는 조이게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며, 대원 한 명을 붙여 주었다. 조이는 로켓포를 든 채 헬기가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갔다. 조이의 예상대로 교전이 벌어지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강둑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조이는 모래주머니를 쌓아 놓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 포탄을 장착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무게가 어깨에서 느껴졌다. 조이는 옆에 있는 대원에게 눈빛을 보낸 후 헬기를 향해 조준했다.

픽-

옆에 있던 대원이 먼저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 순간 헬기가 미세하게 방향을 틀며 공격을 피했다. 조이는 헬기가 균형을 잡기 전에 재빨리 미사일을 날렸다. 다행히도 두 번째 미사일이 꼬리에 스쳤다. 꼬리에서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헬기가 휘청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헬기는 조이가 있는 강둑으로 힘겹게 날아오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느릿느릿 움직인다고 여겼는데,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급격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 중위님?”

“달려!”

방향을 잃은 헬기가 조이를 향해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조이와 대원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프로펠러 소리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리를 빨리 놀려도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질 뿐이었다.

“중위님!”

조이는 고개를 돌려 뒤처지는 대원을 바라보았다. 탈선한 기차처럼 거대한 물체가 대원을 덮치려 했다. 조이는 달리던 방향을 틀어 대원을 끌어안으며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으윽!”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물체가 땅에 부딪히며 쭈욱 미끄러지고 있었다. 조이와 대원이 있는 방향으로.

“악!!”

조이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지금, 이 순간 다리에 날개가 달리지 않는 한 저 물체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쿠쿵!

그때 요란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조이를 향해 달려오던 물체가 어딘가에 부딪힌 걸까? 조이는 머리를 꽉 감싸 안고 있던 팔을 내려놓았다. 조이를 한입에 집어삼킬 듯 다가오던 헬기는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막힌 듯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조하를 구조하고 돌아오던 그 날처럼 권명은 거대한 헬기를 향해 양손을 뻗은 채 밀어내고 있었다.

“하아…….”

권명의 발이 뒤로 쭉 밀리는 듯했으나, 이내 뚝 멈추었다. 헬기가 완벽하게 멈추자, 권명은 몸을 돌려 땅바닥에 누워 있는 조이와 대원을 바라보았다.

“소령님! 다리 쪽! 다리 쪽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빨리요!”

권명 옆에 붙어 있던 놈이 뒤늦게 달려와 지원을 요청했다. 그럼에도 권명은 쓰러진 조이와 대원을 노려볼 뿐이었다. 조이는 지은 죄가 있기에 몸을 움찔거렸다. 다행히도 권명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입을 달싹거린 후 ‘휙’ 몸을 돌렸다.

“어어!”

그 순간 겁에 질려 조이를 꽉 끌어안고 있던 대원이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쭉 들어 올려졌다가 내동댕이쳐졌다.

“……?”

염력이었다. 에스퍼의 힘이 무한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권명은 전투가 벌어질 때만 힘을 사용했었다. 그것도 꼭 필요한 순간에만.

‘그런데… 왜……?’

조이는 조금 전 보았던 권명의 입 모양을 따라 해 봤다. 어쩐지 그 입 모양이 이와 비슷했다.

“떨…어져?”

* * *

그 후 조이는 권명의 주변을 맴도는 해바라기가 되었다. 그사이 몇 번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권명과 마주치는 상황이 꽤 자주 벌어졌었다. 하지만 권명은 조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더욱 안달이 나는 건 조이였다.

자꾸만 권명이 이대로 조이를 잊었을까 봐 두려웠다. 조이와 권명의 매칭률이 높은 수준이긴 하지만, 권명에게 새로운 가이드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그것도 조이보다 높은 매칭률의 가이드.

“후우…….”

“안 중위. 아니지! 이-웅. 먹을 거 있어?”

이휘 대위는 조이의 이중생활을 놀리고 있었다. 본인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조금도 모르는 것 같았다.

“먹을 거 있냐고.”

“없어요. 하나도.”

조이의 안주머니에는 보급품으로 받은 초콜릿이 있지만, 이 물건을 받을 사람은 따로 있기에 대위에게 줄 생각은 없었다. 안 그래도 미운 놈에게 떡을 왜 준다는 말인가. 이휘 대위는 물이나 마셔야겠다며 조이의 수통을 가로챘다. 장담하건대 7구역에서 돈을 빼앗기고 다녔을 놈이 아니다. 빼앗고 다녔으면 다녔지.

“근데 안 중위. 대체 무슨 죄를 저지르고 다닌 거야?”

“네?”

“새로운 소령도 피해 다니던데. 아냐?”

“아…….”

7구역으로 지원을 나온 두 명의 소령. 며칠 전 7구역에 도착한 두 번째 소령은 태혁이었다. 국경 쪽으로 도주한 송영식 대위를 추적하느라 늦게 도착한 것이라고 들었다. 조이는 권명을 맞닥뜨릴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충격에 빠졌다.

권명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태혁에게 걸렸다가는 끝장이었다. 태혁은 망설임 없이 조이의 존재를 본부에 알릴 것이고, 조이와 조하는 군으로 끌려갈 테지. 그 때문에 조이는 태혁이 지휘하는 임무에는 절대 지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듯 몸을 사려야 했다.

“아 참. 담당병 얘기 들었지?”

“아… 전 언제예요?”

“오늘 오후. 빨리 가서 청소하고 와. 지뢰 작업해야 하니까.”

‘일 복이 터졌구나. 안조이.’

조이는 흙 뭍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담당병. 전문 용어로는 허드레꾼. 대위까지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하는 직급이었다. 하지만 소령부터는 아니었다. 소령이 되는 순간부터 담당병이 하나씩 따라붙었다.

담당병은 장교의 식사를 챙기고 집무실을 청소하고, 남은 시간에는 서류 무덤에 갇혀 온갖 잡무를 전담해야 했다. 종종 지랄맞은 장교를 만날 경우, 갖은 짜증과 히스테리를 받아 내는 정신 고문도 업무에 추가된다고 들었다.

일반적으로 행정병 중 하나가 발탁되어 담당병을 하게 되는데, 어찌 된 일인지 권명에게는 담당병이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꽤나 안타까웠던지 구청장은 안 해도 될 짓을 제안했다. 바로 7구역에서 삽질하는 대원들이 돌아가며 권명의 잡무를 담당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대원들에게는 귀찮은 일일지 모르나, 조이에게는 아니었다. 마침 조이에게는 꼭 권명의 숙소를 확인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늘 권명을 졸졸 따라다니는 작은 놈이 진정 가이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같은 방을 쓴다면 가이드일 확률이 높았다. 조이 역시 그러했으니까. 조이와 권명은 늘 한 세트로 취급받았었고, 권명의 옆자리에는 전담 군의관이나 마찬가지인 조이가 있었다.

조이는 예민하게 주변을 살피며 복도 끝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저곳이 바로 권명의 숙소였다. 조이는 권명이 자리를 비운 사이 청소를 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흡!”

딸깍 소리와 함께 권명의 모습이 보였다. 조이는 재빨리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권명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조이는 힐끔 복도를 바라보았다. 권명이 막 코너를 돌며 사라지고 있었다.

조이는 재빨리 권명의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코였다. 익숙한 향기가 맡아졌다. 수도의 도련님들에게 향수는 필수품 중 하나인지, 권명에게는 늘 좋은 냄새가 났었다. 조이는 재빨리 움직이겠다는 다짐도 잊고 멍하니 코를 벌렁거리고 있었다.

‘변태 같아…….’

조이는 문뜩 자신이 스토킹 범죄자처럼 느껴졌다. 스토킹하는 상대의 집에 몰래 잠입해 냄새나 맡는 변태. 우울한 상상이었다.

‘정신 차리자.’

조이는 자신의 볼을 살짝 때린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은 의자와 책상 그리고 일인용 침대가 전부였다. 두 명이 눕기에는 버거운 사이즈였다. 조이는 속으로 권명을 실컷 욕했던 것을 취소하기로 했다.

‘그럼 그렇지. 권명이 그럴 리 없지.’

조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런데 조이의 눈을 사로잡는 물건이 보였다. 투뤼에서 조이와 권명이 함께 덮던 침구였다.

‘왜… 이런 걸…….’

어떤 사물을 만지면 그것과 관련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에스퍼가 있다고 들었다. 조이에게도 그 능력이 생긴 것일까? 침구를 만지자마자 권명과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조이를 꽉 끌어안던 체온, 향기, 이 침구를 덮으며 나누었던 대화들.

“후우…….”

조이는 자꾸만 코끝이 시큰해졌다. 통신구를 매만지며 권명을 그리워하던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 닿을 수 없다니…….’

조이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침구를 정리했다. 권명의 베개를 침대 정중앙에 올려놓고 몸을 돌리는데, 조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할 만큼 놀랐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권명이 돌아와 있었다.

“으으……!!”

“담당병? 할 일 끝났으면 나가.”

권명은 싸늘한 말투로 조이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조이는 권명의 말투에 충격을 받았다. 사관학교를 벗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저렇게 차갑게 말하는 권명을 본 적이 없었다. 장난스러운 말투나 어리광을 부리는 말투만 썼었는데.

“안 들려? 나가라고.”

조이는 권명의 축객령에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비수처럼 날아와 박히는 저 차가운 말이 조이의 걸음까지 얼려 버린 것 같았다. 차갑게 굳어 버린 다리와 달리 조이의 눈가에는 열이 올랐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조이는 눈을 부릅떴다.

눈을 가릴 정도로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권명의 모습이 보였다. 흐릿하지만 조이를 바라보는 권명의 시선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조이는 그제야 권명이 자신을 알아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낯선 이를 대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원망하는 표정.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흡…….”

조이는 작게 훌쩍이며 안주머니에 숨겨 놓았던 초콜릿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권명이 두 번이나 말한 것처럼 몸을 돌려 문가로 향했다. 조이의 속마음을 대변하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하지만 문가에 다다랐음에도 멈추라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흡…….”

조이는 서러움에 한 번 더 훌쩍거리며 문고리를 비틀었다. 그 순간 기다리던 권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이리 와 봐. 너.”

권명은 조이가 몸을 틀기도 전에 먼저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리에 조이의 심장이 또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 방에 들어서며 맡았던 향기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너. 기억을 잃거나, 머리를 다친 적이 있어?”

권명의 입에서는 황당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조이는 병원을 탈출하며 여러 번 위기를 겪었으나 머리를 다친 적은 없었다. 조이는 그런 적은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이의 앞에 있던 권명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롤플레이야? 낯선 사람인 척하고 떡치는 그런 거?”

황당한 물음에 조이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그 순간 권명의 손이 조이의 얼굴을 향해 뻗어왔다.

권명이 조이를 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조이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권명은 그저 조이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조이의 머리를 뒤로 넘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꽉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조이를 내려다보는 권명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권명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앞둔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리 봐도 안조이인데, 왜 이웅이래?”

권명은 어서 말해 보라며 채근했지만, 조이는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을 고르고 골라야 했다. 하지만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엉뚱한 물음이었다.

“날… 잡아가려고 온 거야……?”

“하아…….”

권명이 입에서는 허탈하다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7구역에 도착한 이후로 권명은 늘 딱딱한 표정만 지었었다. 그의 얼굴에서 예전과 같은 미소를 보고 싶었다. 이런 차갑고 허탈한 미소가 아니라. 조이는 이 역시도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안조이. 넌 정말로 날 모르는구나. 널 잡아갈 거였으면, 그런 짓을 벌이지도 않았어. 일부러 수사를 맡은 거야. 널 먼저 찾고 싶어서.”

“조하도……?”

“그래. 네가 원하면 조하도 너도 절대 군에 잡히지 않을 거야. 내가 기필코 막을 테니까. 그런데… 넌 왜…….”

권명은 지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조이의 시선을 피하며 크게 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 모습이 홀로 화를 삭이는 것 같았다. 조이는 권명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진정하라는 말을 대신했다. 권명은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억눌린 목소리로 왜 이런 짓을 벌인 거냐고 물었다.

“영영 이렇게 살려고 그랬어? 날 버리고?”

“아… 아냐! 연락하려고 했어! 상황이… 상황이 정리되면…….”

“1년 뒤에? 아니면 10년 뒤에?”

그 순간 권명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조이의 팔을 꽉 움켜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조이는 팔에서 느껴지는 아픔보다 권명의 표정을 보는 것이 더 아팠다. 권명은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서웠어. 무서웠단 말이야! 네가 돌아오라고 할까 봐. 폭탄 취급받는 조하를 데리고 오라고 할까 봐! 그리고… 그리고 내 상황이…….”

“안조이. 조이야.”

권명은 처음으로 ‘안조이’가 아닌 ‘조이’라고 이름을 불렀다. 조이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권명의 커다란 품이 조이의 몸을 꽉 감싸 안았다. 귓가로 살 냄새를 맡듯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잘못이다. 넌… 말하지 않으면 하나도 모르는 바보인데. 내가 말을 안 했어.”

“나 바보 아니거든!”

사실 이 말이 더 바보 같았다. 동네 바보를 놀리면 흔히 동네 바보는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고 대꾸한다. 방금 조이가 그러했듯.

“아냐. 넌 바보야. 아무것도 모르니까. 조이야. 난 네가 가자고 하면 7구역뿐만 아니라 서제국으로도 갈 수 있어.”

올려다본 권명의 눈은 정말로 그러했다. 조이가 지금 당장 서제국으로 넘어가자고 해도 따라올 것만 같았다.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근데 그러면 안 되잖아. 넌… 넌 수도에 있어야 어울리는 사람인데…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흡… 우리 엄마처럼…….”

조이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자 권명은 조이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난 수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지.”

울컥하고 어깨가 들썩거렸다. 조이는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우는 모습은 정말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지금은 참을 수가 없었다. 조이는 권명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권명은 조이의 귓가로 ‘멍청이 안조이’ 또는 ‘바보 안조이’라고 속삭이며 어깨를 토닥거렸다. 조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 순간 조이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림자를 피해 도망 다녔다는 것을.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뭔가를 피해 왔다는 것을.

“권명…….”

권명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서로의 코가 닿고 입술이 닿으려던 그 순간,

똑똑-

밖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이는 깜짝 놀라 권명을 올려다보았다. 한 번 더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권명의 이름을 불렀다.

“권명. 안에 있어?”

태혁의 목소리였다. 조이는 작게 어떻게 하냐고 속삭였다. 권명은 조이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놀란 토끼 같은 조이와 달리 권명은 느긋했다. 잠투정을 부리는 아들을 재우는 모습 같았다.

“그냥 이대로 있어. 졸리면 한숨 자고. 알겠지?”

조이는 지금 이 순간 권명이 무슨 명령을 내려도 따를 생각이었다. 조이는 잘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

조이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도록.

“무슨 일이야?”

“저건…….”

“아. 영 뻐근해서. 걱정하지 마. 네 가이드는 아니니까. 가이드 관리 좀 해. 자꾸 내 침대로 기어들어 오려고 하니까.”

권명의 얄미운 말에 태혁이 이를 꽉 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태혁의 가이드는 한솔이었는데, 그사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주의하지. 그것보다 본부에서 연락이 왔어. 수사에 진전이 없다면 수사권을 내가 받게 될 거야.”

“그게 뭔 개소리야?”

“난 처음부터 반대했었어. 조이의 에스퍼였던 너한테 이런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어.”

“에스퍼였던 게 아니라 지금도 안조이 에스퍼는 나야.”

“그래. 바로 그런 이유야. 조이가 탈영한 지 벌써 3주가 지났어. 수사를 하고 있기는 해?”

조이는 자꾸만 몸이 움찔거렸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 저 상황을 수습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권명의 말대로 꾹 참아야 했다. 무슨 소리가 들려도 가만히 있으라고 했으니까.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조이였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생각이었다.

“안조이 탈영 아냐. 외출이 길어지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번 주까지 진전이 없다면 나도 수사에 뛰어들겠어.”

“넌, 씨발 대체 이 일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거냐? 중령 달고 싶어서 그래?”

“너만 조이를 걱정하는 게 아냐. 폭주 위험이 큰 동생을 무단으로 데리고 나갔어. 하루빨리 찾아야 하는데 넌 그동안… 됐다. 내 의견 충분히 전한 것 같으니까 그렇게 알아.”

태혁은 더 이상 권명과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끊었다. 뒤돌아 나가려는 태혁의 뒤로 권명이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안조이를 찾으면? 그럼 군으로 돌아오라고 말하게?”

“조하를 생각하면, 조이에게는 군의 도움이 필요해.”

조이의 예상처럼 태혁에게 걸렸다가는 끝장이었다. 군의 도움이라니. 조하는 콘크리트 감옥에 갇힐 것이고 조이는 지난번 탈영 때처럼 신문을 받을 테지. 조이의 말을 과연 그들이 들어 주기나 할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도 조이는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겁에 질린 듯 작게 말린 몸 위로 권명의 몸이 닿았다.

“안조이. 들었지? 저놈한테 걸리면 바로 영창이야.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

“응. 조심할 거야.”

“그리고 앞으로 절대 도망가지 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네 누명 벗겨 낼 거니까.”

“응. 그럴게.”

권명은 이불을 걷어 내고 조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순순히 대답하는 조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졌어? 앞으로 내 말 잘 듣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서 싫어?”

저 얼굴을 다시 마주하니, 무슨 말이든 다 들어주고 싶었다. 권명에게 연락해서는 안 된다고 벽을 세우던 마음이 조금도 힘을 내지 못했다. 고분고분한 조이의 대답에 권명은 기회를 발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바주카포랑 탄피 인사시켜도 돼?”

“TNT거든!”

권명은 하하하 크게 웃으며 조이의 얼굴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이제야 권명 같았다. 늘 조이가 알던 권명. 조이는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권명을 꽉 끌어안았다.

* * *

피는 못 속인다고 하던가. 조이 역시 아버지처럼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권명을 절대 7구역으로 들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건만, 결국 권명을 7구역으로 끌고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조이였다.

권명은 지난번 7구역에서 촬영된 방송을 보았고, 그 방송에서 귀엽게 서 있는 조이의 모습을 단번에 알아봤다며 운명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역시 그 방송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 방송을 원망해야 한다는 마음은 조이의 본심을 위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심 조이는 이렇게 권명을 다시 만난 게 된 게 운명 같아 신기했다. 홀로 조하를 돌보며 얼마나 외로웠던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조이의 마음이 얼마나 뒤흔들렸던가.

하지만 7구역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권명을 볼 때면 송곳처럼 날카로운 물건이 심장을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조하를 구출하며 조이의 죄책감도 사라지는 듯했으나, 권명으로 인해 조이의 마음에는 또다시 커다란 바위가 들어앉았다. 그럼에도 권명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함께 있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요즘 권명과 조이는 흔히 말하는 비밀 연애 중이었다. 대원들이 있을 때는 말 한마디 섞지 않다가 둘만 남게 되면 그곳이 어디든 서로의 물건을 인사시키고는 했다. 이렇게 어둠이 내린 골목이라 할지라도. 권명의 정신이상이 조이에게도 시작된 듯했다.

“으윽… 하읏… 사… 살살 해. 아파… 읏!”

권명은 조이의 물건과 자신의 물건을 한 번에 잡고 무지막지하게 흔들었다. 권명의 통나무가 조이의 말랑한 성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같은 수컷의 물건이지만 조이의 것은 먹이, 권명의 것은 포식자처럼 느껴졌다.

“안조이. 네 자지 새것 같아. 부드러워”

“으읏… 사… 살살… 하으…….”

탁탁탁 성기 두 개를 쥐고 흔드는 것으로도 부족해 권명은 그 짓을 할 때처럼 허리를 움직였다. 핏줄이 불끈 솟은 권명의 성기가 조이의 성기 겉면을 쓰윽쓰윽 문지르며 자극했다. 입술을 질끈 문 조이의 얼굴이 하늘을 향했다.

“하으… 나… 나 할 것 같아… 읏! 나… 놔 봐…….”

권명은 순순히 조이가 사정하도록 놔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정액을 뱉어 낼 듯 붉게 물든 귀두 사이를 엄지손가락으로 틀어막았다.

“아흣!”

그곳을 꾹 누르며 빙글빙글 돌려 대자 입이 크게 벌어졌다. 강한 자극에 조이의 입에서는 조금 큰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이는 재빨리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어둠이 내렸다지만, 전시 상황이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이들이 널려 있었다.

조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놓아 달라는 표시를 했지만, 고약한 권명은 자신의 통나무에서 정액이 터져 나오기 전까지 조이를 놔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읍… 하아… 읍…….”

조이가 몸부림칠수록 권명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조이의 붉게 물든 눈가를 뚫어지게 보던 권명의 입에서 쇠를 긁는 듯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윽……!”

온몸을 휘감는 찌릿함에 조이는 권명의 어깨에 기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조이를 내려다보며 권명은 피식 웃음소리를 내었다. 조이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반쯤 권명의 몸에 의지하고 있었다. 권명은 사정을 하고도 아쉬운지 조이의 가랑이 사이에 성기를 넣고 비비고 있었다.

“하아. 하아… 왜……?”

“뒤에 넣고 싶어.”

조금 망설이던 조이는 비틀거리는 몸을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두 팔로 벽을 집고 엉덩이를 내밀었다. 등 뒤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을 권명에게 작게 속삭였다.

“…해…….”

권명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진정 그 말을 들은 것이 맞는지 헷갈린다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기뻐하니 조금 민망했다. 권명은 봉긋 솟은 조이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며 물었다.

“너 누구야? 이웅이지?”

“뭔 소리야.”

“안조이라면 떨어지라고 소리쳐야 하는데, 이러잖아.”

“싫으면 말아.”

“안조이 좋아 죽겠는데, 그래도 여기서는 아니지. 한번 싸고 말 것도 아닌데.”

권명은 도련님답게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이의 성기와 배에 묻은 체액을 닦아 주었다. 조이의 못 말리는 성기는 그 다정한 손길에도 반응하려 했다. 조이는 애써 엄숙한 상황을 상상해야 했다.

“자. TNT 정리 끝. 내일도 여기에서 만나. 매일 한 발씩 빼자.”

“봐서.”

조이는 내일 후다닥 일을 처리하고 이곳에서 권명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이의 입에서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권명은 그런 대답도 만족스러운지 쪽쪽 입을 맞추었다.

조이는 권명의 표정을 살피다 대수롭지 않은 척 질문을 던졌다. 며칠 전부터 벼르던 질문이었다.

태혁의 새로운 가이드라는 해령은 어찌 된 일인지 본인의 페어인 태혁보다 권명을 따라다니는 일이 더 많았다. 조이는 늘 권명을 몰래 바라보았기에 번번이 그놈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둘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조이는 그때마다 그 둘을 방해하고는 했다. 일부러 그 둘 사이로 지나다니거나, 몸을 숨긴 채 ‘소령님’이라고 소리치는 식이었다. 비밀연애만 아니었어도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는 건데.

“그런데… 걔는 왜 데리고 다니는 거야?”

“누구?”

“그… 가이드.”

“아. 다 쓸모가 있어서 데리고 있는 거야. 태혁 그놈이… 잠깐만. 설마…? 설마!”

“서… 설마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권명은 조이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하려다 말고, 눈매가 아래로 휘어지도록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을 치듯 검지로 조이의 옆구리를 이리저리 찔러댔다.

“안조이. 너, 이 자식. 누가 이렇게 귀여운 짓 하래. 어?”

“참 나,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지.”

“그런 게 뭔데? 그거 맞지? 그렇지?”

권명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조이의 얼굴에 이리저리 입을 맞추었다. 덩치는 산만 한데 하는 짓은 강아지 같았다. 조이는 권명이 정신없이 입을 맞추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웃음 대신 입으로 엄한 소리를 내뱉었다.

“너. 처신 똑바로 해.”

조이는 경고하듯 검지를 권명의 얼굴 앞으로 가져다 댔다. 권명은 그 손가락을 살짝 깨물며 키득거렸다.

“장난 아냐.”

“알겠어. 조이 형아. 근데 걱정하지 마. 내 자지는 조이 형아 거잖아. 한 번 더 보여 줄까?”

권명은 한쪽 눈을 감으며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조이 역시 한 번 더 보고 싶었으나, 조하의 최면 치료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박사는 한두 번의 최면 치료로는 조하를 깨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조이는 치료 효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나 병원 가 봐야 해. 오늘 그날이야.”

“잘됐네. 이거 가지고 가.”

권명이 건넨 것은 조이가 평소 쓰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안경이었다. 권명은 조이의 예전 안경을 한 손으로 부숴버리더니 새 안경을 씌워 주었다. 예전에 쓰던 것보다 조이의 얼굴을 잘 가려 주는 물건이기에 순순히 받았다.

“그리고 내일 오전에 집합이 있을 거야. 맨 앞줄에 서. 나 연설해.”

“무슨 연설?”

“뭐. 그냥 연설. 나 떨리니까 내조 좀 해.”

권명은 조이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느끼한 말을 내뱉었다. 맨 앞줄은 조이가 늘 피해 오던 자리였다. 조이의 처지 때문에. 하지만 권명의 말대로 내일은 맨 앞줄에 설 생각이었다.

조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대답하는 조이의 모습이 꽤 보기 좋았는지 권명은 장난스러운 말을 덧붙였다.

“잘 다녀와. 자기야.”

* * *

박사의 말대로 최면 치료를 받는다고 죽은 듯 잠든 조하가 단번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하를 깨우는 유일한 방법이 최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는 한참 동안 조하의 옆에서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간병인은 두 손을 모아 잡고 기도라도 하는 듯했다. 조이 역시 그 옆에 앉아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가이딩을 할 때처럼 황당한 주문을 외우며.

‘조하야, 일어나. 눈을 떠.’

한참 동안 간절하게 속삭였지만, 조하의 눈은 여전히 꼭 감겨 있었다. 대신 조하의 입에서는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난생처음 성대를 사용하는 것처럼 힘겨운 목소리였다.

“으… 으…….”

말이 되지 못한 신음 소리에 불과했지만, 그 어떤 소리보다 희망차게 느껴졌다. 죽은 듯 잠든 조하가 금방이라도 깨어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박사는 최면 치료를 중단했다.

“보호자님, 잠시 이야기 나누죠.”

최면 치료가 꽤 힘들었는지 박사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조이는 박사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갔다.

“박사님. 조하 상태가 어떤가요?”

“예상했던 대로 쉽지 않네요.”

“…말을 하려고 했던 건요… 그건요?”

조이는 조심스러웠다. 언젠가 조하의 눈이 파르르 떨렸던 반응을 두고 큰 희망을 품었던 적이 있기에.

“희망적인 신호죠. 폭주를 일으킬 단어가 아니어도 정신을 깨울 수 있다는 의미니까요. 이틀 간격으로 최면을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분명 차도가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박사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박사는 조하의 어깨를 살짝 두들긴 후 다음 환자를 살펴야 한다며 서둘러 짐을 챙기고 떠났다. 조이는 박사의 입에서 나온 희망의 말을 곱씹으며 한참 동안 병원 복도에 서 있었다.

“저…….”

한발 늦게 복도로 나온 간병인은 박사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간병인은 조이를 마주할 때면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거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들 송영식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 것 같았다. 송영식에 대한 분노와는 별개로 조이는 그의 죄를 간병인에게 물을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조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조이는 순순히 박사에게 들은 희망찬 소식을 간병인에게 전했다.

“조하가 깨어날지도 몰라요. 미약하지만… 희망적인 반응이래요.”

“아!”

조이의 말이 끝나자 간병인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허공을 바라보며 신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조이 역시 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 큰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화염에 휩싸인 병원을 뒤로하며 달려왔던 그간의 일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기필코 조하를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달려온 여정. 그 여정이 지금 열매를 맺고 있었다. 아직은 영글지 못한 풋과실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조이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저 열매가 탐스럽게 익어 결실을 볼 거라는 믿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간병인은 여전히 누군가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조이는 그런 간병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수한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얼굴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아들의 죄를 묻지 않을 거라는 말. 할 말은 많았지만 조이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조이는 그저 말없이 간병인의 손을 잡았다.

* * *

조이는 간이침대에 뉘었던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찌뿌둥했다. 불편함을 잘 견디는 조이였지만, 이 생활이 몸에 무리를 주는 듯했다. 충분히 잠을 잤는데도 온몸이 무거웠다. 군사훈련과 잡무로 쌓인 피로가 조금도 회복되지 못한 듯했다.

그럼에도 어젯밤 조이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 때문인지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조하야. 형 일하고 올게.”

조이는 혹시 하는 마음에 조하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어제처럼 조하의 입에서 작은 소리라도 흘러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하지만 낮은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조이는 괜스레 조하의 코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잠꾸러기. 안조하.”

조이는 서둘러 몸을 씻은 후 구청 앞으로 향했다. 구청 앞은 지원군이 도착하던 날보다 더 요란한 모습이었다. 군인뿐만 아니라 7구역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라고 들었다. 수십 개의 스피커가 전신주처럼 세워져 있었고 구청 앞에는 임시로 만든 단상이 있었다. 그 주변으로 수십 대의 카메라가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이는 생각보다 큰 규모에 조금 어리둥절했다. 조이는 권명의 말대로 가장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자리를 잡자마자 때늦은 후회를 했다.

“단상 위는 줌으로 잡고, 군인들은 전체적으로 좀 많아 보이게 찍자고. 대각선으로. 알지?”

촬영기사에게 잔소리를 쏟아붓는 이가 보였다. 김정명 감독. 대체 저 하이에나가 무슨 냄새를 맡고 이곳까지 온 것일까? 방송에 미친 놈다웠다. 7구역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조이는 혹시 감독이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권명을 제외하고 조이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손톱을 물어뜯고 싶을 만큼 불안했다. 힐끔힐끔 감독을 바라보던 조이의 귓가로 ‘톡톡’ 마이크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상 위로 권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조이의 불안한 마음을 단번에 날려 버릴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

해령이라는 가이드 놈이 권명의 넥타이를 손보고 있었다. 다정한 한 쌍처럼 보였다. 조이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권명은 태혁을 감시할 목적으로 해령을 가까이에 두는 것이라 했지만, 저러다 바람이라도 나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가만 보니 해령은 꽤 그럴듯하게 생겼다. 권명 옆에 있어서 작다고 느꼈는데 키도 조이보다 크고 몸도 꽤 좋아 보였다. 조이는 이를 뽀득뽀득 갈았다. 유치하지만 속에서 열불이 났다. 아무래도 한 번 더 단단히 경고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7구역 수복 작전의 총지휘관 권명입니다.”

단상 정중앙에 선 권명은 짧은 자기소개와 함께 연설을 시작했다. 언젠가 방송에서 권명의 모습을 보았던 그때처럼 저 모습이 낯설었다. 변태 같은 말만 내뱉던 모습이 아닌 진중한 장교의 모습이었다.

“저는 오늘 몹시 어려운 말을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이 가까스로 되찾은 안녕을 뒤흔드는 말을 전해야 하기에 무척 마음이 무겁습니다. 지난밤 서제국에서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연설을 듣던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부 군인들은 야유하며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쳤다. 권명은 그들의 분노를 잠재우는 척하지만 더욱 북돋는 소리를 내뱉었다.

자신에게 패전은 죽음보다 비참한 일이라는 둥, 동제국의 기상을 제대로 보여 주지도 못하고 항복을 선언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둥. 작전을 설명하기보다는 제국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목적에 더 가까워 보였다.

서제국의 공격을 언급할 때는 한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열정을 쏟아 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번에 권명이 맡은 역할은 군의 스피커인 모양이었다.

“군은 절대 7구역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서제국에게 빼앗긴 우리의 땅을 기필코 수복하겠습니다. 제 명예를 걸고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7구역을 강제 점령하고 있는 악의 무리를 반드시 몰아내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제군군 여러분. 태양은 언제나 동쪽에서 뜬다는 것을!”

권명의 연설이 끝나자 경청하고 있던 군인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그의 열정적인 태도에 군인들은 열광했다. 군에서는 이번 작전의 총책임자로 권명을 지명했는데, 그 이유가 혹시 저런 모습 때문이지 않을까?

홍보용 군복을 입은 권명의 모습은 꽤 그럴듯했다. 또한 늘 헛소리를 내뱉던 저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니 꽤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조이는 권명을 잘 알기에 저 모습이 모두 연기라는 것을 안다. 그 누구보다도 군을 지긋지긋해하던 이가 아니던가.

상명하복. 까라면 까는 군인 정신과 가장 멀어 보이는 이는 다름 아닌 권명이었다. 은퇴를 입에 올리며 권명이 얼마나 기뻐했던가. 조이는 헛웃음을 치며 설렁설렁 손뼉을 쳤다. 그 순간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휙 고개를 돌리자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히익!”

깜짝 놀란 조이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럼에도 감독의 시선이 조이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대체 저자가 왜 하필 7구역까지 기어들어 와서는.

* * *

행사가 끝나고 조이는 지난 밤 앙큼한 짓을 벌였던 골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권명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연설이 끝나고 권명은 전화기 두 대를 들고 이리저리 통화하고 있었다. 막중한 임무를 맡은 탓에 일이 많은 것 같았다.

오늘 권명의 연설을 듣고 나니, 조만간 대격돌이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연설문에 등장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서제국을 향한 투지를 불태울 목적으로 쓰였다. 군에서 제국민의 분노를 일깨울 목적은 오직 하나일 것이다. 전투.

그리고 비단 그런 작전을 계획하는 것이 동제국만은 아닐 것이다. 이곳 7구역에 도착한 이후 서제국에서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크고 작은 도발을 이어 왔었다. 그런데 그런 도발이 이틀 전부터 뚝 끊겼다.

서제국에서도 뭔가를 계획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두 제국 간의 긴장감이 탑을 쌓듯 높아지고 있었다. 불안불안해 보이는 그 탑은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리며 무너질 테지. 그리고 긴장의 탑이 무너지는 그 날이 바로 대격돌의 날일 것이다.

이번 작전이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전투가 될지도 모른다. 동제국도 서제국도 사활을 걸 테니까. 서제국은 북부를 빼앗겼기에 이번 작전에서 절대로 밀리지 않을 것이고, 동제국은 북부에 이어 7구역까지 사수하며 승기를 잡으려 할 것이다.

“후우…….”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생각하니 한숨이 흘러나왔다. 전쟁이 얼마나 허망하게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가는지 훼림에서 지겹게 보았었다. 그 일이 조만간 7구역에서도 벌어질 것이다. 불안한 날갯짓을 하듯 심장이 떨려 왔다. 권명의 입에서 이번 작전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 나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내 생각 하고 있었어? 나 멋있지?”

권명은 철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조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신은 왜 저리도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주둥이를 주셨을까. 조이는 ‘개뿔’이라고 작게 속삭였다. 권명은 피식 웃으며 조이의 얼굴을 잡았다.

“다들 난리던데. 진짜 별로였어?”

다시 재대로 보라며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확실한 건 눈치 빠른 권명은 조이가 저 얼굴에 약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그랬나 보지.”

7구역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피곤하고 살이 빠져 보였는데, 금세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남몰래 마사지라도 받는지 얼굴에서 광이 났다. 반면에 조이의 얼굴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그것보다. 큰일 났어.”

“뭐가?”

“감독! 이번 촬영을 총괄하는 사람이 김정명 감독이야!”

“아.”

권명은 그리 놀랍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다면 놀랄 테지. 조이는 권명에게 바짝 다가가 비밀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아까… 날 본 것 같아. 어떡하지? 밤에 습격해서 가둬 둘까?”

은밀하게 범죄를 제안하는 조이의 말에 권명은 웃음을 터트렸다. 조이의 머리를 이리저리 비비며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는 표정을 지었다. 징그러웠다.

“웃을 상황 아냐!”

“걱정하지 마. 그 자식 딴마음 먹음 바로 날려 버릴 거니까.”

권명은 이번 작전을 방송을 내보낼 계획을 세웠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이 직접 김정명 감독을 불러들인 것이라고 했다.

‘굳이 이렇게 요란을 떨 필요가 있을까?’

불안해하는 조이에게 권명은 안심하라고 말했다. 절대 조이의 존재를 누설하지 못할 것이라고. 저렇게 호언장담을 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럼 다행이고. 작전은? 이번 작전… 많이 위험하겠지?”

“준비할 시간이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뭐.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이길 테니까.”

“어떻게 알아?”

“몰랐어? 너랑 나랑 페어로 참여한 작전은 다 성공했어.”

권명은 조이와 자신에게 행운의 기운이 깃든 것 같다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작전은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 작전 도중 권명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반송장이 되었었다.

조이는 굳이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기만 해도 불길한 말이니까. 조이는 대신 한 달이라도 빨리 태어난 선배답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덕담을 건넸다.

“사람이 좀 진지해져라.”

“네. 진지해질게요. 조이 형님.”

권명은 장난치듯 커다란 덩치로 꾸벅 인사를 했다. 인사하는 폼이 딱 봐도 깡패였다. 조이는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저렇게 긴장감 없이 살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것보다, 형님을 위해 준비한 게 있으니 따라오시죠. 이쪽입니다.”

권명은 나이 많은 어른을 모시듯 정중하게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인적이 드문 골목 끝에 다다르자 매끈한 차 한 대가 보였다. 일반적으로 보던 낡고 허름한 군용차가 아니었다. 막 출시된 것처럼 번쩍번쩍했다.

“이게 뭐야?”

“내 전용차. 옵션을 다 때려 박았어. 방탄유리에 도청 방지기까지.”

“아…….”

자동차를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과일 집 아들이 사과 가격을 꿰고 있듯, 권명은 자동차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조이에게 자동차란 그저 바퀴가 네 개 달린 이동 수단에 지나지 않았는데, 차에 이렇게 많은 기능이 있는지는 오늘 처음 알았다. 권명은 가장 중요한 기능이 있다며 뒷자리로 조이를 데려갔다.

권명 말대로 갖가지 옵션을 때려 박은 차라 그런지 승차감이 좋았다.

“뭐… 좋네.”

“아주 중요한 기능이 하나 더 있어. 이것 봐.”

권명이 손잡이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뒷좌석이 쭉 앞으로 밀리며 침대처럼 펼쳐졌다. 조이는 신기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권명은 조이의 옆으로 반짝 다가와 있었다.

“안조이 기억나?”

권명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만 보니 조이는 저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에도 약한 것 같았다. 조이는 괜스레 귀가 간지러워 손으로 벅벅 긁었다.

“뭘……?”

“언젠가 우리 얘기했던 거 있잖아. 기억 안 나?”

권명은 언제가 변태적인 섹스 판타지에 대해 길게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권명의 입에서 나왔던 괴상한 짓거리 중 하나가 곧바로 떠올랐다. 차에서 하는 그 짓. 권명은 장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은 바주카포가 좀 더 찐한 인사를 하고 싶다나 봐.”

그 순간 조이는 진심으로 권명이 부러웠다. 특히 저 고래 심줄 같은 신경 줄이. 폭풍전야 같은 전시 상황에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라니.

‘저런 놈을 믿고 전쟁터로 나가도 되는 걸까?’

황당하다는 듯 올려다본 시선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커다란 덩치가 조이를 덮쳤다. 권명은 조이의 입술을 다급하게 집어삼켰다. 벌어진 입 속으로 파고든 혀가 조이의 입 안 구석구석을 누비며 자극했다. 혀뿌리가 아릿해질 정도로 옭아매고 입천장을 길게 핥았다.

“하아… 으음…….”

입을 맞출수록 몸이 조금씩 나른해졌다. 부드러운 혀가 온몸을 녹이는 것 같았다. 부족한 호흡에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입술을 뗄 수 없었다.

그사이 권명의 빠른 손이 조이의 옷을 한 겹 한 겹 벗겨 냈다. 어느새 조이는 나신의 몸이 되었다. 아무리 자동차 안이라지만 이렇게 벗고 있어도 되는 걸까?

“자… 잠시만… 하아… 하아…….”

권명을 살짝 밀어낸 조이는 가슴이 크게 부풀 정도로 숨을 몰아쉬었다. 권명은 거칠게 숨을 내쉬는 입술을 대신해 조이의 목과 상체에 입을 맞추었다. 커다란 손이 오목한 배꼽, 도드라진 갈비뼈, 그 위에 빨간 유실을 차례대로 매만졌다.

엄지로 빨간 점을 동그랗게 굴리자 그곳이 점점 딱딱해졌다. 손가락에 따라 이리저리 짓눌릴 때마다 입 밖으로 야릇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읏……!”

“안조이. 나 없는 동안 자위 많이 했어?”

“하아… 가끔…….”

병원에서 조하를 데리고 탈출한 후, 7구역까지 쉴 새 없이 달려야 했다. 또한 가까스로 도착한 7구역에서는 전투가 벌어졌기에 혼자서 그런 짓을 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때때로 권명이 못 견디게 그리울 때는 몰래 성기를 훑어야 했다.

“어디로? 뒤?”

“아… 앞!”

“확인해 볼래. 가랑이 벌려 봐. 구멍 보이게.”

조이는 가슴에 허벅지가 닿을 정도로 다리를 잡아당겼다. 엉덩이가 벌어지며 꽉 오므라든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권명의 시선이 단번에 그곳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권명은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둔 것처럼 야하게 입술을 핥았다.

“안조이. 더 벌려.”

조이는 조금 더 강하게 다리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권명은 조이의 엉덩이 한쪽을 잡아 벌렸다. 비웃음을 짓는 입 모양처럼 구멍 한쪽이 살짝 벌어졌다. 권명은 그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려 했다.

“으윽…….”

“좁네?”

당연한 일이었다. 권명과 그 짓을 한 게 벌써 몇 주 전의 일이었으니까. 살짝 벌어졌던 구멍이 움츠러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권명은 좁아진 조이의 구멍이 뭣이 그리 좋은지 실실 웃으며 조이의 얼굴에 이리저리 입을 맞추었다.

“윽…….”

“아파?”

손가락 하나를 넣었을 뿐이지만 벌써 구멍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매일같이 권명의 물건을 머금을 때만 해도 항상 물기가 돌았었는데, 지금은 바싹 말라 손가락이 밀고 들어올 때마다 건조한 느낌이 들어 아팠다.

“안조이. 빨아 봐. 아무래도 바로 넣으면 찢어지겠어.”

권명은 자신의 성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이가 머뭇거리자 권명은 손수 성기를 꺼내 조이의 얼굴 앞으로 가져다 댔다. 언제나 생각한 거지만 무식한 크기였다. 선뜻 입 안에 넣을 엄두가 안 났다. 권명은 그런 조이의 마음도 모르고 입술 위를 덧칠하듯 두툼한 귀두를 비벼 댔다.

“벌려. 그래야 넣지. 그새 까먹은 거야?”

조이는 살짝 입을 벌렸다. 그 틈으로 권명의 귀두가 단번에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우웁!”

이빨에 부딪힌 살 기둥이 아프지도 않은지 권명은 어서 움직이라며 조이를 채근했다.

“조이 형아. 왜 총각처럼 굴어? 혀 움직여서 적셔야지.”

“우우… 우웁.”

조이는 총각처럼 구는 게 아니었다. 저 물건이 입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탓에 혀를 움직일 공간이 없을 뿐. 조이는 눈을 흘기며 권명의 살 기둥을 손으로 잡았다. 조금씩 고개를 움직이며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권명 역시 꽤 흥분했는지 살 기둥에 불끈불끈 핏줄이 솟아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나무 기둥을 타고 오르는 뱀처럼 느껴졌다. 곱상한 낯짝과 달리 권명의 성기는 그로테스크한 구석이 있었다.

“하아…….”

조이는 열과 성을 다해 권명의 성기를 애무했다. 입 밖으로 꺼낸 귀두에 입을 맞추고 불끈 솟은 핏줄을 혀로 핥았다. 조이의 움직임에 권명이 반응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조이가 성기를 애무하며 올려다볼 때마다 권명은 턱 근육이 불끈 솟을 정도로 이를 꽉 물고는 했다.

“안조이. 하아… 엉덩이 올려 봐. 구멍에 손가락 넣게.”

조이는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혹시라도 저 창문 밖에서 누군가 이 모습을 훔쳐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짙게 코팅되어 있다는 건 알지만 누군가 가까이 다가와서 본다면?

“하아… 근데 누가 보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 할 여유가 있었어?”

“하윽!”

권명의 손가락이 구멍을 다시 벌리기 시작했다. 성기를 넣기에는 아직 빠듯한 입구를 빙그르르 돌리며 자극했다. 새침하게 꽉 다물려 있던 구멍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메마른 입구에도 촉촉하게 물기가 돌았다.

권명은 그 구멍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더 쑤셔 넣고 가위질하듯 내벽을 벌렸다. 그 탓에 입구가 벌어지며 찬 기운이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누군가 그곳에 입김을 불어 넣는 것 같았다.

“으읏…! 그거… 그거 하지 마.”

권명은 성기나 더 빨라며 조이의 머리를 꾹 눌렀다. 입 안을 가득 채우던 성기가 목구멍까지 파고들자 ‘우웁’ 하며 거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조이는 자꾸만 뒤쪽이 신경 쓰여 도통 집중할 수 없었다. 뒤를 자극하는 손가락 때문이기도 했고, 혹여 누군가 창문으로 이 모습을 볼까 두려웠다. 하지만 권명은 그런 건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지 조이의 뒷머리를 움켜쥘 뿐이었다.

“우웁! 우웃!”

조이의 의지를 떠나 권명의 팔이 움직이는 대로 한참 동안 성기를 머금었다 뱉어 내기를 반복했다. 조이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되었다. 울고 싶어서가 아니라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저 무식한 물건이 목구멍을 콱 틀어막을 때면 눈가가 저절로 촉촉해졌다. 숨이 넘어갈 듯 버거웠으나, 권명은 그 느낌이 좋았는지 조이의 머리를 부여잡고 무식하게 성기를 쑤셔 넣었다.

조이는 점점 숨이 모자랐다. 숨을 들이마실 틈도 없이 성기가 파고들었다. 머리가 핑 돌 것 같았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권명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왜? 이제 박아?”

“하아… 하아… 수… 숨…….”

권명은 조이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엉망으로 변한 얼굴을 숨기고 싶었으나 숨을 몰아쉬는 게 먼저였다.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안 그래도 불끈 솟아 있던 권명의 성기가 배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쳐들었다. 권명은 조이의 얼굴이 엉망이 될수록 흥분하는 변태였다.

“안조이. 안 되겠다. 지금 박아야겠다.”

권명은 조이를 밀치며 다리를 쫙 잡아 벌렸다. 살짝 벌어진 구멍 위로 권명의 성기 끝이 닿았다. 열이 오른 귀두가 느릿느릿하게 주름진 입구를 적셨다. 그것으로 권명이 할 수 있는 배려는 끝이었다.

“아흣!”

주먹처럼 단단한 귀두가 입구를 벌리며 파고들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주름진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조이. 힘 좀 빼.”

“으흣… 자… 잠깐… 아읏!!”

오랜만에 이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받아들이려니 조이의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반쯤 삽입된 성기가 좀처럼 안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었다. 권명은 입을 맞추며 조이의 젖꼭지를 잡아당겼다. 가슴살이 위로 들릴 정도로 쭉.

꽉 잡힌 젖꼭지를 검지와 엄지로 비비자 아릿하게 아프면서도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조이의 구멍은 확실히 가슴과 연결된 것이 맞았다. 권명이 가슴을 매만지며 자극할 때마다 커다란 살 기둥을 물고 있는 구멍이 움찔거리며 느슨해졌다. 조이의 몸을 조이보다 잘 알고 있는 권명은 구멍이 느슨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불기둥을 단번에 쳐올렸다.

“아흑!”

아래를 꽉 채우는 느낌에 입이 크게 벌어졌다. 한두 번 얕게 파고들던 움직임이 조금씩 깊이를 더해 갔다. 열감이 느껴지는 구멍은 여전히 아팠으나, 안쪽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쾌감이 조이의 몸을 덮치기 시작했다.

“으읏…! 하읏!”

권명의 격한 움직임에 조이는 도망치듯 조금씩 몸을 뒤로 물렸다. 권명과의 그 짓은 꽤 좋았지만 동시에 무서웠다. 어딘가 망가지는 기분이 들었고,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느새 등 뒤로 차가운 문이 닿았다.

“안조이. 어디를 그렇게 가는 거야? 이리 와.”

그 모습을 보던 권명은 약이 오르는지 조이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쭉 끌려온 조이의 가랑이 사이로 권명의 성기가 ‘퍽’ 하고 처박혔다.

“아아흣!!”

조이는 뒤늦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고양이가 우는 것처럼 작은 소리를 내는 것도 위험한데 조금 전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누가 들어도 교성이었다. 지금 조이의 몸은 유독 예민한 상태였다. 한동안 이런 짓을 안 하던 몸인지라 작은 움직임에도 지나치게 느끼고 있었다. 조이는 권명의 어깨를 밀어내며 조금만 살살 해 달라고 속삭였다.

“사… 살살…….”

그런데 그 순간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차갑게 식히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조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대체 그 명단이 왜 필요하다는 거냐?”

“그 왜 있잖아. 얼마 전까지 뉴스에 나오던 탈영병.”

“탈영병도 뇌가 있지, 도망갈 곳이 없어서 7구역으로? 어차피 잡히면 이곳으로 보내질 텐데?”

“까라며 까야지. 근데 이건 웬 차냐?”

조이의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들이 혹여 이 자동차 안을 들여다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조이는 어서 떨어지라는 뜻으로 권명을 밀어냈다. 다행히도 권명의 성기가 쓰윽 빠져나가며 주름에 걸렸다.

조이는 고개를 들어 창문가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안조이. 무서워?”

권명의 얼굴 위로 악동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불길한 신호를 감지한 조이는 멈추라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주름진 입구에 걸려 있던 살 기둥이 짝을 맞추듯 안으로 파고들었다.

“으읍!!”

조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밖에 있던 군인들이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읍!!”

조이가 발버둥 치자 권명은 조이의 몸을 들어 올렸다. 조이는 머리만 숨기면 자신이 안 보이는 줄 아는 어린아이처럼 권명의 가슴에 필사적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궁금한가 봐, 뭔 짓 하는지. 문 열어 볼까?”

조이는 몸을 한껏 움츠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에도 권명은 차 문을 열 듯 손잡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시… 싫어…! 그… 그만!”

울먹이며 싫다고 속삭이자 권명은 조이의 눈가를 매만지며 다정한 척 말했다.

“목에 팔 감아. 한 번만 더 도망가면 보닛 위에서 박을 거야.”

조이는 절박하게 권명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밖에 있는 이들은 여전히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권명은 주먹을 쥐더니 천장을 쿵 때리며 소리쳤다.

“씨발. 당장 꺼져!”

“예… 옙, 소령님!”

다행히도 그들은 권명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인지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조이는 권명의 품에 얼굴을 숨겼다.

“자. 이제 구멍 다시 벌려. 끝까지 넣고 싶으니까.”

조이는 권명이 벌리라는 대로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잡았다. 권명은 고환까지 쑤셔 넣을 듯 깊숙이 성기를 푹푹 꽂아 넣었다. 두툼한 귀두가 예민한 내벽을 긁으며 파고들자 딱딱하게 굳었던 조이의 몸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그곳이 짓찧어질 때마다 또다시 도망가고 싶었으나 조금도 몸을 피할 할 수 없었다. 조이의 몸은 반으로 접힌 채 하늘을 향해 가랑이를 쫙 벌리고 있었고, 권명의 성기는 수직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쿵쿵 불기둥이 처박힐 때마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흣! 으흐…! 아…! 아으읏……!”

너무 깊은 삽입이었다. 머리끝이 하얗게 타 버리다 못해 어딘가 망가질 것 같았다. 지나치게 몸이 달아올라 제 몸 같지 않았다. 이렇게 느끼는 게 정상일까?

“아… 아읏…! 아앗!”

“여기? 하아… 여기 좋아, 안조이?”

“아흣!!”

권명은 조이의 몸이 가장 격렬하게 반응하는 그곳을 공격하듯 짓눌렀다. 사이렌이 울리는 것처럼 귓가로 경고음이 들려왔다. 조이는 권명을 밀치며 발버둥 쳤다. 이렇게 계속 그곳을 자극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권명은 반항하는 조이의 움직임에 아랑곳없이 힘껏 성기를 쑤셔 넣었다. 조이가 애써 피하려 하는 그곳을 향해. 쿵쿵. 온몸이 뒤흔드는 충격에 조이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입가로 주르륵 침이 흘러넘치는데도 닦을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조이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권명의 팔을 부여잡았다. 절박하게.

“아…! 아…! 제…발…! 아아앗!!”

애써 참아 왔던 뭔가가 터져 버리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비명과 함께 조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감전이라도 된 듯 파르르 떨리던 몸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권명의 팔을 절박하게 잡고 있던 팔 역시 시트 위로 툭 떨어졌다. 권명은 뭔가를 알아차린 듯 거세게 움직이던 허리 짓을 멈추었다.

“하? 안조이 싼 거야?”

“하으… 하으… 아읏…….”

“씨발, 앞이나 뒤나 난리 났네. 안조이. 이거 보여?”

권명은 조이의 성기에서 쏟아져 나온 액체를 손에 발라 보여 주었다. 굳이 보여 줄 필요가 없었다. 반으로 접힌 탓에 조이의 성기에서 튀어나온 물이 조이의 턱까지 적셨으니까.

조이는 흐느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의 몸이건만 이렇게 조절할 수 없다는 게 두려웠다. 어딘가 망가진 것 같았다. 어린아이도 아닌 다 큰 성인이 이렇게 실수를 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으흣…! 그… 그만할래. 나… 안 돼!”

겁에 질린 조이의 표정을 흐뭇하게 보던 권명이 다시 고약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정을 치듯 쾅쾅 성기가 박혀 왔다. 조이의 얼굴은 무서운 존재를 마주한 사람처럼 겁에 질렸다. 조금 전 전신을 휘감았던 불길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억지로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또다시 그 신호를 보내왔다.

“아흣! 아…! 아… 그… 아읏!”

“안조이. 이 물 많은 새끼.”

권명은 조이가 물을 쏟아 낼 때마다 미친 사람처럼 흥분했다. 그동안 참아왔던 성욕을 모조리 쏟아붓듯 쉴 틈 없이 조이를 몰아붙였다. 그 움직임에 조이의 성기는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묽은 물을 쏟아 냈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하는 쾌락에 조이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앞으로 조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 * *

7구역에 내려앉은 어둠이 조금씩 사라질 때가 되어서야 권명은 조이를 내려놓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조이는 입가로 흘러내리는 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안조이, 칠칠찮게 이게 뭐야.”

권명은 아기처럼 조이를 들어 올려 물을 먹여 주었다. 조이는 간신히 꼴깍꼴깍 물을 삼켰다. 미처 삼키지 못한 물이 주르륵 입가로 흘러내리자 권명이 그 물길을 핥아 올렸다. 처참한 꼴이었다. 그럼에도 권명은 그 모습이 퍽 보기 좋았던지 조이의 동그란 이마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앞으로 여기서 자주 떡치자. 괜찮지?”

조이는 개소리 말라며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말할 힘도 없었다. 그와 반대로 권명은 힘이 넘쳐 보였다. 권명 역시 꽤 여러 번 사정했을 텐데, 저리도 힘이 넘치다니. 저 모습이 신기하다 못해 무섭게 느껴졌다.

권명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조이의 몸을 뭔가로 닦기 시작했다. 간신히 눈을 돌려 내려다보니 따뜻한 천이었다. 권명이 자랑하던 차에는 이런 기능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조이 형아, 말랑한 자-지. 귀여워.”

권명은 장난치듯 조이의 성기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밤새 고문당한 성기는 물렁물렁한 젤리처럼 권명의 손에 잡힌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조이의 성기는 꽤 쉽게 발기하는 물건이었는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죽은 것처럼 축 늘어진 게 아무래도 망가진 것 같았다.

“그…만…….”

“아파? 귀여워서 그랬어. 미안.”

권명은 조이가 아닌 성기에게 미안하다고 속삭이더니 쪽 입을 맞추었다. 그것도 귀두 끝에. 조이에게 조금만 힘이 있었다면 저 얄미운 주둥이를 때려 줬을 텐데. 퍽 아쉬웠다.

“자, 다 됐다. 옷 입혀 줄게.”

권명은 인형 놀이를 하듯 조이의 다리를 벌려 팬티를 입혀 주었다. 조이의 흰색 팬티를 보고는 세상에서 제일 야한 팬티라는 개소리를 빼먹지 않았다.

“사관학교 때부터 꼴렸어. 손바닥만 한 팬티를 조물조물 빨아서 문고리에 걸어 뒀잖아. 누가 훔쳐 가면 어떻게 하려고.”

“대체… 누가…….”

어느 미친놈이 입던 팬티를 훔쳐 간다는 말인가. 가만 생각해 보니 안 그래도 부족한 팬티가 두어 번 없어진 적이 있었다.

‘혹시……?’

조이는 무서운 진실을 마주할까 두려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오늘은 좀 더 쉬어. 내가 말해 놓을게.”

대격돌을 앞두고 해야 할 잡무가 쌓여 있지만 지금 상태로는 무리였다. 권명은 조이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후 몸을 일으켰다.

“잠깐…….”

권명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조이는 권명의 목에 걸려 있던 넥타이를 한 번 더 반듯하게 정돈해 주었다. 단상 위에서 그 일이 떠올라서였다.

“가 봐…….”

“돈 많이 벌어 올게. 자기야.”

권명은 상쾌한 표정으로 문을 닫고 나갔다. 조이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태양이 정점을 지나 붉은 노을을 만들어 낼 때가 되어서야 조이는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조금 더 쉬고 싶었으나, 중요한 업무가 떠올랐다.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남은 교량에 폭탄을 설치하는 일.

이휘 대위가 늦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일이었다. 조이는 어렵게 몸을 일으킨 후 밖을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사람들이 자주 돌아다니는 골목이 아닌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조이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뜩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벌인 괴상한 짓거리.

‘설마 그놈들이 얼굴까지 봤을까?’

최소한 벌거벗은 궁둥이는 봤을 테지. 문손잡이를 잡을 정도도 가까운 거리였으니까. 지난밤 조이를 못살게 굴던 권명이 떠올라 이가 갈렸다. 몹쓸 변태. 조이는 화풀이하듯 자동차 문을 쾅 닫았다.

어디 하나가 망가지길 바랐으나, 그리 쉽게 망가질 차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금 후련했다. 조이는 한 번 더 문을 쾅 닫을 생각에 문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 조이는 권명 이 망할 놈이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걸 깨달았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도 차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이 망할 놈!”

* * *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조이는 다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군에서는 이번 작전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폭탄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다리 건너에 있는 구역을 사수하지 못하고 후퇴하면 즉시 이 다리를 폭파해야 했다.

이 다리를 폭파하고 나면, 서제국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막을 수는 있으나, 그와 동시에 강 너머의 땅을 수복하기는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군에서는 남은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나 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왜 일을 하나도 안 하……!”

이휘 대위에게 가까이 다가가던 조이는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절대 이곳에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던 이가 있었다. 태혁.

조이는 이대로 몸을 돌려 달아나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얼음처럼 굳어 있는 조이를 대신해 이휘 대위가 조이를 이웅이라고 소개했다.

“이웅 중위라고?”

“예… 예!”

조이는 턱을 아래로 내리누른 채 조금 낮은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태혁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행히도 대위가 그 시선을 가로챘다.

“보고서는 언제까지 드려야 할까요?”

“내일까지 보고하도록.”

태혁은 대위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 후 몸을 돌려 사라졌다. 다행히도 태혁이 조이를 알아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조이는 태혁의 발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이제 오는 거야? 일찍 오라고 했잖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무슨 일이래요? 무슨 보고서?”

“인적 사항을 모조리 보고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 아무래도 널 찾는 것 같아.”

“어떻게 할 거예요……?”

“일단 최대한 늦춰 볼게. 근데 수도에서 관리하는 전산하고 비교를 할 테니… 아무래도…….”

들킬 테지. 조이가 이웅 중위가 아니라는 걸. 이웅 대위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서제국이 7구역을 공격하던 날 폭격으로 전사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조이가 이웅 중위인 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에 있는 대다수의 군인들이 직업 군인이 아닌 7구역을 수비하기 위해 임시로 군에 편입된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이휘 대위가 조이를 이웅 중위로 소개한 후, 그 누구도 조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 오합지졸 수비군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하지만 태혁에게는 절대 통하지 않을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도망이라는 단어가 또다시 조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투뤼에서 하뉨으로 그리고 7구역으로. 조이가 도망갈 곳이 동제국 영토에 남아 있긴 할까?

“안 중위… 혹시라도 이대로 도망갈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조이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이휘 대위는 걱정과 의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조이를 바라보았다. 이휘 대위가 7구역을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권명이 조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그 방송은 이휘 대위와 구청장의 작품이었다.

북부에 몰려 있는 관심을 조금이라도 7구역으로 돌릴 목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이휘 대위만큼 7구역에 애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저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조이 역시 7구역을 서제국 손에 넘길 생각은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조이의 고향이 아니던가.

“그런 생각 안 해요. 조하도 아직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러니까 그 보고서 최대한 미뤄 봐요.”

“알았어! 최대한 미뤄 볼게.”

조이의 대답에 이휘 대위는 조금 안심이 되는 듯했다.

“자. 해 떨어졌다! 다리 사이에 폭탄 설치하고, 전선 제대로 꽂는 거 잊지 말고!”

이휘 대위의 지시에 따라 조이와 몇몇 대원들은 어둠을 틈타 다리에 폭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조이는 다리 난간 사이사이에 폭탄을 설치하면서도 이 폭탄을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이 폭탄이 터진다는 건 총공격이 실패했다는 의미니까.

* * *

두 번째 최면 치료를 받는 날이 다가왔다. 지난번의 일로 간병인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다. 늘 죄인처럼 조이의 눈치를 살폈기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조이의 마음도 불편했었다.

여전히 송영식 대위를 생각하면 이가 갈리지만, 그 자의 죄를 간병인에게 묻고 싶지는 않았다.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대물림되고, 자식의 죄를 부모가 책임지는 연좌제는 조이가 가장 끊고 싶어 하던 굴레였으니까.

“늦었네요! 수술을 앞둔 환자를 마취하고 오느라.”

군에서는 포로들에게 정보를 빼앗을 목적으로 최면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지금 보니 최면의 가장 주된 용도는 의료용이었다. 깊은 잠에 빠진 조하를 깨우는 일뿐만 아니라, 마취제 없이 환자들을 잠재우는 목적으로도 최면이 사용되고 있었다.

“의료 용품이 많이 부족하다고 들었는데, 그것 때문인가요?”

“네. 팔다리를 절단하는 정도의 수술이 아닌 이상 마취제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 때문에 내가 할 일은 더 늘었지만. 자, 바로 시작하죠.”

박사는 무척 지친 표정이었으나, 그 얼굴에는 그보다 큰 사명감이 느껴졌다. 조이는 저런 박사의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조이와 달리 박사는 언제든지 하뉨으로 돌아갈 수 있는 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남아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자신의 고향도 아닌 이 낯선 땅에서.

조이는 문뜩 태혁과 마주친 후 머릿속으로 도망을 떠올렸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중위님. 조하 좀 보세요.”

간병인은 조이에게 가까이 다가와 조하를 살펴보라고 말했다. 조이는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꽉 채우던 생각을 애써 무시한 채 조하에게 다가갔다. 처음 최면 치료를 받았던 그때처럼 조하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으…….”

“조하 군. 지금 조하 군을 묶어 놓은 사슬이 보이나요?”

“으…….”

“쇠로 된 아주 단단한 사슬일 거예요. 그렇죠?”

“으…….”

“조하 군 손에 열쇠를 쥐여 줄게요. 사슬을 풀 열쇠예요.”

“윽… 돼…….”

조하는 사슬이 풀리지 않는다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약한 소리를 내뱉었다. 조이는 손에 땀이 나도록 조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최면 치료의 효과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신음 소리에 불과했던 그 음이 단어를 만들어 냈다.

제발. 조하가 자신을 꽁꽁 묶어 놓은 사슬을 벗어나 눈을 뜨길. 하지만 이번에도 조하의 눈은 꼭 감겨 있었다. 어쩌면 다음 치료에는 눈을 뜰지도 모른다. 오늘 조하는 ‘안 돼’라는 말을 제법 또렷하게 내뱉었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박사는 이마를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휘청거리는 몸을 조이가 재빨리 부축했다. 최면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정신적으로, 또 체력적으로 무척 힘든 일인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조금 어지럽네요.”

박사는 이제 괜찮다며 꽉 움켜쥐고 있던 조이의 팔을 놓았다. 하지만 조이는 자신이 1층까지 부축하겠다고 나섰다. 박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이는 간병인에게 조하를 맡긴 후 박사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전력 부족으로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기에 계단을 이용해 내려가야 했다. 조이는 자신이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중간쯤 내려갔을까. 박사가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1층에는 다행히도 박사의 조수인 허뮨이 기다리고 있었다. 허뮨 역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 같았다.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조이는 박사를 보냈다.

“후우…….”

문뜩 조하의 회복이 전쟁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 끝나야 박사도 조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테고, 그래야 조하도 깨어날 수 있지 않을까? 점점 이번 전투가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 조이의 눈앞으로 군용차 세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린 군인들이 병원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불길함을 감지한 조이는 재빨리 그들을 따라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 전원에 대한 명단을 요구합니다.”

“명단이라뇨? 이곳에 있은 환자들이 몇 명인 줄 아세요?”

“최근에 작성한 명단이라도 확보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협조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군인들이 병원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태혁의 수사가 점점 조이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태혁은 대체 왜 이렇게 조이를 찾고 있는 걸까? 지난번 권명이 말한 대로 중령 진급 때문에?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조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권명의 추측처럼 단순히 진급을 위해 이 일에 매달리는 건 아닐 것이다. 조이는 태혁을 알았다. 작전에 임할 때는 냉정해지는 태혁이지만, 그 얼굴 안에 다정함과 따뜻함이 있다는 걸.

어쩌면 태혁은 진심으로 조이에게 군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군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조이와 달리 태혁은 군에 충실한 사람이니까.

‘만약… 조하의 상태를 털어놓는다면…? 그럼에도 태혁은 조하를 콘크리트 감옥에 보내려 할까? 날… 심문하려 할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태혁의 수사망이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이가 속한 부대. 병원. 그리고 그다음은 어디일까?

* * *

조이는 청소도구를 들고 권명의 숙소로 향했다. 조이의 차례가 돌아오려면 한참 남았지만 조이는 자진해서 담당병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다. 권명과 상의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연설 이후 권명은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빠졌다. 으슥한 골목에서 그 짓을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조이는 문가로 다가가 귀를 가져다 댔다. 권명이 혼자가 아니라면 조이는 기다려야 했다. 권명이 혼자가 될 때까지. 방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권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권명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놈이었다.

“태혁은 요즘 어때?”

“엄청 바빠요. 명단인가 뭔가를 찾느라고…….”

“명단? 작전 때문인가 보네.”

“아니요. 사실… 작전이 아니라 그 왜 있잖아요. 탈영했다는 안 중위. 그놈을 찾는 것 같더라고요.”

권명의 말대로 태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생각으로 저 가이드를 옆에 두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조이는 불쾌했다. 저 작은 방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이는 지금이라도 방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이를 깜짝 놀라게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뭐 하는 거지?”

“네… 네!?”

“왜 방문 앞에 있는 거냐고 물었다. 이웅 중위.”

태혁은 조이의 이름표를 힐끔 본 후 물었다. 조이는 들고 있던 청소도구를 들어 올렸다.

“담당병인가?”

“예…….”

조이는 턱을 아래로 내린 채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혁은 잠시 조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혹시 가이드인가?”

조이는 흠칫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혁은 조이에게 돌연변이 테스트를 받아 보라는 말을 전한 후 방문을 두들겼다. 꽤 거칠게.

“해령 소위. 작전이다. 나와라.”

늘 다정하던 태혁은 딱딱한 목소리로 자신의 가이드를 불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잔뜩 긴장한 해령이 튀어나왔다.

“예… 예! 소령님!”

“내가 지시한 건 제대로 처리한 건가? 그 일이 그리 쉽지 않을 텐데 여유롭군.”

태혁은 방 안에 있는 권명을 힐끔 본 후 싸늘하게 말했다. 해령은 아버지에게 혼나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잔뜩 긴장한 채.

“즈… 즉시 시정하겠습니다!”

“10분 뒤 현관으로 집합.”

태혁의 말이 끝나자, 해령은 총성과 함께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계단을 향해 달렸다.

“적당히 풀어 주지 그래? 네가 무섭다더라.”

권명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혁은 그 소리가 퍽 기분이 상했는지 드물게 매서운 목소리로 반격했다.

“남의 가이드한테 침 흘리는 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게 뭔 개소리야?”

“안조이에 이어 이번엔 쟤야?”

“하? 단단히 착각을 하셨네. 모르나 본데 안조이는 네 가이드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안조이한테 1순위는 나였어.”

“그래서 뭐? 결국 매칭한 건 나야. 1순위라면서 걜 버린 건 너고.”

태혁은 모욕이라도 들은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금방이라도 저 주먹이 권명을 향해 날아갈 것 같았다. 권명 역시 공격이 날아오거든 곧바로 맞서겠다는 듯 매섭게 태혁을 노려보았다.

“저… 청소…….”

조이는 참지 못하고 둘 사이에 흐르는 기운을 잘라 냈다. 태혁은 갑자기 끼어든 조이를 짧게 노려본 후 몸을 돌려 사라졌다. 조이는 멀어지는 태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쉬워해도 소용없어.”

“아쉬움 같은 거 없어.”

그럼에도 권명은 조이를 의심하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권명을 구조하는 작전을 끝마치며 조이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심지어 반쯤은 강요된 것이기는 하나, 청혼을 받아들이기도 했고. 조이는 진정 태혁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말을 다시 내뱉으려 했다.

“나는…….”

“나는 처첩한테 아주 못된 본처가 될 거야. 후려치고 매일같이 갈굴 거야. 그러니까 생각도 하지 마.”

“참 나.”

권명은 자신이 얼마나 악독하게 괴롭힐지에 대해 장난스럽게 떠들었다. 그 말에 조이는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소박맞으라고 저주도 걸 거야. 볏짚 인형에 바늘 꽂아서.”

“그런 생각 안 해. 그러니까… 너나 앞으로 태혁이 가이드 만나지 마. 괜히 그런 소리나 듣고.”

“알았어. 어차피 더 이상 이 짓도 다 필요 없으니까.”

권명은 순순히 조이에게 그러하겠다고 답했다. 조이는 권명의 얼굴을 살폈다. 이렇게 순순히 대답할 위인이 아닌데.

“무슨 일 있어?”

“안조이. 디데이 날짜가 나왔어.”

조만간 총공격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막상 디데이 날짜가 잡혔다는 말을 듣자 조이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

“언제야?”

“이틀 뒤 새벽. 작전명 부활.”

이번 작전의 이름은 부활이었다. 아마도 작전을 계획한 장교가 종교인인 모양이었다. 동제국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는 오직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됐다. 종교가 통치 수단으로 사용되는 7구역에서 자라 왔기에 조이는 부활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번 작전에 대해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종교 서적에 등장하는 신은 악귀와 싸우다 죽었으나 3일 만에 부활했다. 이번 작전이 사흘 동안 지속할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서제국 수도에서 7구역으로 보충병을 보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나머지 7구역까지 밀고 들어올 작정인 거지. 그놈들이 도착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해야 해. 7구역에 있는 모든 병력이 전면전에 나설 거고 그사이 북부에서 지원군이 내려와 측면을 공격할 거야. 사흘 안에 무조건 승기를 잡아야 해. 보충병이 도착하기 전까지.”

“못 잡으면……?”

“그럼 또 다른 작전이 있겠지.”

전면전이라. 조이가 경험한 전투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될 것이다. 북부로 발령을 받은 후 조이는 실험실을 급습하거나, 실종된 권명을 수색하는 소규모 작전에 투입되었었다. 이런 총공격에 투입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드물게 권명 역시 걱정이 되는지 조금 굳은 표정이었다.

“권명. 무서워?”

“무서워. 두렵고. 전쟁이 아니라. 너 때문에.”

권명의 커다란 손이 조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조이를 내려다보는 권명의 눈빛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권명은 서로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얼굴을 가져다 대고는 당부하듯 말했다.

“작전이 시작되면 절대 앞서 나가지 마. 꼭 내 뒤에 있어야 해.”

“그럴게.”

“혹시라도 내가 다치면. 넌 후방으로 물러나.”

“뭐?”

조이는 그것만큼은 순순히 따를 수 없었다. 권명이 다치면 조이가 제일 먼저 달려가야 했다. 조이는 권명의 가이드이지 않은가.

조하를 구출하고 돌아오던 그 일이 떠올랐다. 권명이 다리 밑으로 사라졌던 그 일. 혹여 권명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거든 조이는 이번에는 기필코 권명을 구해 낼 생각이었다.

“난 다쳐도 살 수 있어. 근데 네가 다치면 우리 둘 다 죽는 거야.”

“싫어. 네가 다쳤는데 어떻게 그래? 다치지 마. 그러면 될 거 아냐!”

조이는 억지를 부리듯 다치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권명은 그런 조이를 꽉 끌어안았다.

“알았어. 안 다칠게. 우리 조이 형아 새장가 드는 꼴은 내가 못 보지.”

“참나. 사람이 좀 진지해져라. 어?”

조이는 권명을 밀어내며 훈수를 뒀다. 저런 정신 상태로 전쟁터를 어찌 헤쳐 나갈지 원. 권명은 순순히 알았다고 답하며 조이를 다시 끌어안았다.

“안조이. 이번 작전만 끝나면 진짜로 결혼식을 올리자.”

“하뉨에서?”

“응. 하뉨에서.”

조이는 하뉨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상상을 했다. 폐허가 된 7구역이 아닌 평화로운 그곳. 전쟁도 임무도 없는 그곳을 떠올리자 가슴이 따뜻해졌다. 턱시도를 입은 권명, 조이를 보며 웃는 귀여운 조하. 그리고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이는 안조이.

“상상만 해도 행복해…….”

“결혼식 끝내주게 치르고, 권 사장 별장으로 신혼여행을 가는 거야. 일주일 정도?”

“일주일이나?”

“어. 첫날밤 기대돼.”

“하?”

이미 닳아 없어질 정도로 그 짓을 했건만 권명은 진지하게 첫날밤이 기대된다고 속삭였다. 일주일 내내 발가벗고 그 짓을 하자며 장난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조이는 권명의 헛소리에 잠시나마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