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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탈출 (11/16)

11. 탈출

조이는 쫓기듯 병원으로 달려갔다. 군부대 앞에서 보았던 수십 대의 군용차는 병원 앞에서 민간인의 출입을 막아서고 있었다. 군복을 입지 않은 조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이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군번줄을 보여 주며 안으로 진입하려 했으나, 신입으로 보이는 군인이 조이를 막아 세웠다. 위조품 확인 절차를 끝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명령이다. 비켜!”

“죄송합니다. 중위님. 하지만… 절차가…….”

“안 중위!”

그때 안쪽에서 조이를 부르는 이가 나타났다. 태혁이었다. 수색 작업을 마지막으로 조이와 태혁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조이는 수색 작업을 떠나기 전 태혁이 경고하듯 내뱉었던 결정을 마음속으로 내렸기에, 어렵지만 제 솔직한 마음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태혁에게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태혁은 곧바로 다음 작전에 투입되어 그러했고, 권명의 지랄맞음에 태혁의 ‘티읕’ 자도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혁아! 조하가! 조하가 저기 있어! 대체 무슨 일이야? 들여보내 줘!”

태혁은 신병에게 조이를 들여보내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도 바리케이드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203호야! 조하가 있던 곳이. 조하를… 조하를 확인해야 해!”

“안심해, 조이. 동생은 무사해. 폭발이 일어난 곳은 220호 제일 끝방이었어.”

조하가 안전하다는 소리에 조이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비틀거리던 조이는 벽을 부여잡고 버텼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서제국에서?”

서제국에서 대체 어떻게 국경을 넘어 이곳 투뤼까지 파고든 걸까? 그것도 폭탄을 들고. 조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태혁을 바라보았다. 태혁의 입에서는 어떤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기밀 사항인 듯했다.

“조하를 지금 만나 볼 수 있을까? 꼭 직접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

“가능해. 안 그래도 보호자를 소환하려고 했어.”

태혁은 따라오라며 조이에게 간이 병실을 안내했다. 하얀색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조하와 함께 구조된 아이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간호사와 군의관들이 정신없이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조이는 환자들 사이로 조하를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조하는 가장 안쪽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꾸러기 안조하는 이 난리에도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안조하. 넌… 잠이 오냐…….”

조이는 울컥 화가 났다.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이 작은 녀석은 조금도 모를 것이다. 조이는 침대로 다가가 조하의 손을 꽉 잡았다.

‘감사합니다.’

조이는 마음속으로 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모르나 감사의 말을 속삭였다. 축 늘어진 조하의 손을 꽉 움켜쥐고 얼굴을 묻었다.

* * *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권명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영상통화일 줄 알았는데,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닌지 일반 통화였다. 권명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퍽 아쉬웠다. 조이는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

곧바로 권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명은 북부에 도착하자마자 폭발 사고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안조이! 괜찮아? 병원 폭발 사고 들었어. 별일 없는 거야? 다친 곳은?]

조이에 대한 걱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조이는 침착하게 조하가 있는 병실과는 먼 곳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조하는 안전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너 말이야. 너! 괜찮냐고!]

“응…….”

아픈 조하보다 조이를 더 걱정한 듯한 권명의 말에 조이는 찔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어머니가 조하를 낳고 돌아가신 후, 조이를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그 때문에 조이는 이런 관심과 애정이 눈물 나게 좋았다. 조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애써 숨긴 채, 권명에게 북부에 잘 도착했느냐고 물었다.

[어. 여기 일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을 거야. 그러니까… 하아. 씨발 걱정돼서 아무 일도 못 하겠어.]

“걱정하지 마. 거기서 일이나 잘 마무리해. 난 괜찮으니까.”

[추파 던지는 새끼는 없었지?]

눈물이 쏙 들어갔다. 대체 누가 조이에게 추파를 던진다는 말인가.

안 그래도 군에서는 조이가 권명의 허니가 됐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아무래도 권명 짓인 것 같았다.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어서 따져 묻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딴 거 없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그러는… 넌……?”

[나? 나야 잘생겼다. 결혼은 했냐. 이런 소리 잔뜩 듣지.]

“그래서.”

조이의 입에서 싸늘한 말투가 숨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권명은 약을 올리듯 ‘그래서… 그래서…….’라고 한참을 애를 태웠다.

[그래서. 잘생긴 건 맞다. 그런 말 지겹도록 듣는다고 했지.]

“그리고?”

[그리고 난 결혼했다. 애칭을 탄피라고 짓고 싶었는데, TNT가 된 파트너가 있다. 여기 오기 전까지 실컷 떡치다 왔다. 이렇게 딱 말해 줬지.]

“참 나. 그… 그런 거는 왜 말하는 건데!”

권명의 주접에 조이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권명이 처신을 똑바로 하고 다니는 듯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만약 권명이 북부에서 딴살림을 차린다면 조이는 아픈 조하를 둘러업고 북부로 쳐들어갈 것이다.

없이 살아서 그런가 조이는 꽤 소유욕이 강한 편이었다. 조이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는 한 권명은 조이의 것이었다.

[근데. 바주카포가 안부 묻더라고.]

“…….”

[그거 할까? 너무 그리운가 보더라고. 안쓰러워. 아까도 화장실에서 두 번이나 울었어.]

조이는 권명의 변태적인 판타지에 응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전화로 하는 그 짓은 괜찮을 것 같았다. 또 오늘따라 권명이 좀 예뻐 보였다.

처신도 똑바로 하고 있었고, 비록 다른 놈이 조이에게 추파를 던질까 걱정하는 게 더 큰 것 같지만 조이를 걱정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조이는 벌써 권명이 그리웠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는 건데?”

[일단 옷을 벗어 봐.]

“위에도……?”

[어. 젖꼭지도 만져야 하니까.]

조이는 권명이 눈앞에 없는데도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이런 민망한 말을 권명은 참으로 뻔뻔하게 잘했다.

“버… 벗었어…….”

[거울 앞으로 가 봐. 벗은 몸 좀 설명해 봐.]

조이는 통신구를 내려놓고 거울 앞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평범했다. 샤워할 때 늘 보던 모습.

“그냥 똑같아…….”

[젖꼭지 색깔하고 자지 색깔은?]

“좀… 붉어.”

[젖꼭지 섰지? 빨아 달라고 유혹하듯?]

조이의 젖꼭지는 정말로 삐쭉 솟아 있었다. 통신구 너머로 들려오는 권명의 낮은 목소리가 야릇하게 느껴졌다. 평소 권명의 목소리보다 훨씬 더 섹시했다.

[손으로 잡아 봐. 그리고 쭉 잡아당겨.]

“으으… 아파…….”

[참아. 넌 좀 아픈 걸 좋아하는 편이니까. 더 쭉 잡아당겨 가슴살이 들릴 정도로.]

“아읏…….”

조이는 한 손으로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잡아당겼다. 권명의 말대로 조금 아플 정도로 꾹 누르거나 잡아당기는 게 좋았다. 조이의 성기가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권명은 그런 조이의 모습이 훤히 보이기라도 하는지, 고개를 든 자지가 귀엽다며 쿡쿡 웃었다.

[자지로 손 내리지 마. 젖꼭지만으로 완벽하게 세워 봐. 조금만 더… 더… 하아…….]

“아읏… 섰어… 이제 만질래.”

[안 돼. 구멍 먼저야. 손가락 세 개 입에 물어서 적셔. 내가 하던 대로 알지?]

“우움…….”

조이는 권명이 늘 그러했듯 손가락 세 개를 입 안에 넣고 그 사이사이를 혀로 핥았다. 단맛을 본 것처럼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오물오물 손가락을 조금 더 깊게 넣었다가 빼자 거미줄처럼 은색 실선이 쭉 늘어졌다.

[중지부터 넣어 봐. 천천히.]

“으윽… 잘 안 들어가… 으읏…….”

[주름진 입구부터 적셔. 원을 그리듯 주변을 만지면 구멍이 슬슬 풀릴 거야. 입처럼 뻐끔거리지? 하아… 지금 넣어. 속살… 뜨겁지? 부드럽고?]

“으…응… 아읏…….”

권명의 명령에 따라 조이는 손가락을 하나씩 밀어 넣었다. 어느새 조이의 구멍에는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 세 개가 꽂혀 있었다. 권명은 거칠게 구멍을 쑤시라고 명령했다.

통신구 너머로 권명 역시 자신의 성기를 만지고 있는지 탁탁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이는 최면에 빠진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권명은 지금 조이의 구멍을 파고드는 손가락이 자신의 것인 것처럼 속삭였다. 불처럼 뜨겁다느니, 며칠 안 박아 줘서 총각처럼 좁아졌다느니.

“으흐…! 으읏… 아… 하으……!”

조이의 구멍에서는 늘 그렇듯 질척하게 체액이 뿜어져 나왔다. 손가락을 넣었다 뺄 때마다 조금 과할 정도로 물이 흘러나왔다. 조이는 조금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아래 홍수 났네. 씨발. 팔뚝까지 젖었겠다. 하아… 이제 꾹 누르고 흔들어. 젖은 소리 들려줘. 빨리.]

조이는 구멍 속에 박힌 손가락을 조금 더 빠르게 흔들었다. 권명이 종종 그러했듯 깊숙이 손가락을 쑤셔 넣고 마구잡이로. 이렇게 구멍을 자극하다 보면 성기에서 정액을 뱉어 내듯 구멍에서도 물을 뱉어 냈다.

“하읏! 아…! 아…흣!”

[크윽… 더 세게 흔들어! 더!]

귓가로 ‘탁탁탁’ 빠르게 성기를 훑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구멍과 성기를 동시에 자극하자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그 느낌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두 눈을 감고 권명을 떠올리자 정말로 권명이 구멍을 자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이의 성기에서는 금방이라도 정액을 토해 낼 듯 강한 자극이 올라왔다.

“아읏…! 아…! 권명! 아하읏!!”

구멍을 채우고 있는 손가락을 가능한 한 깊숙이 쑤셔 넣고 꾹 누르자 성기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하읏!!”

가랑이 사이에 있던 통신구 위로 하얀 정액이 빗방울처럼 쏟아졌다. 격렬한 운동을 한 것처럼 조이의 몸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하아… 아흐… 하아…….”

[안조이… 하아…….]

권명 역시 사정했는지 조이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려왔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권명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조이의 마음은 참으로 이상했다. 꼭 소중한 누군가가 옆에 없고서야 그들의 커다란 빈자리를 느끼는 걸 보면.

* * *

태혁은 병원에서 있었던 폭발 사고에 대해 어떤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서제국의 소행으로 보인다는 말뿐. 그 정도는 조이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조이는 군으로 달려가 복귀 신청을 냈다. 휴가가 이틀 정도 남았지만, 폭발 사고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단발적인 폭발 사고라면 다행이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폭탄테러 중 단발성으로 끝난 경우는 별로 없었다. 몇 해 전 7구역에서도 이런 폭발 사고가 있었는데, 이틀 간격으로 3번이나 발생한 후에 범인을 체포할 수 있었다.

범인은 국경을 넘어 밀입국한 서제국인으로 그들은 원래 수도를 향할 계획이었으나 섬처럼 고립된 7구역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7구역에서 폭탄테러를 강행했었다.

“한 중위!”

조이는 늘 그렇듯 자신의 비밀 정보원을 찾아갔다. 조이가 설원에서 권명을 찾아 헤맨 것처럼, 한 중위는 쏟아지는 정보의 바다에서 서제국에 대한 정보를 찾아 헤맨 듯, 얼굴이 좋지 않았다. 눈 밑이 퀭한 것이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린 것처럼 보였다.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안 그래도 일이 쏟아지는데… 폭탄 때문에…….”

폭탄테러로 정보국에서도 비상이 걸린 모양이었다. 조이는 한 중위에게 눈에 띄지 않는 곳은 없느냐고 물었다. 단번에 조이의 의도를 알아차린 한 중위는 좀비처럼 지친 얼굴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가이딩부터 하면 안 돼……?”

한 중위는 꽤 가이딩이 고팠는지 정보를 팔기 전, 손부터 잡게 해 달라고 빌었다. 조이는 놈이 꽤 짠해 보여 손을 내밀었다. 한 중위는 조이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손가락을 입에 물려고 했다. 조이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위협하듯 한 중위 앞에 가져다 댔다.

“잡는 것만이야! 진짜 진짜 유용한 정보일 때만 빠는 거고!”

“알았어…….”

아쉬운 듯했으나 한 중위는 조이의 손을 이리저리 잡고 얼굴에 비비며 난리를 피웠다. 은근슬쩍 조이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가져다 대기도 했는데, 입 안에 넣고 빤 것은 아니니 넘어가기로 했다.

조이는 정신을 집중했다. 한 중위의 상태가 빨리 멀쩡해져야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저놈의 정신이 멀쩡해지기를. 눈 밑을 검게 물들인 저 흔적이 사라지기를.

한참 동안 가이딩을 한 후, 조이는 그만이라고 소리치며 손을 잡아 뺐다. 한 중위는 퍽 아쉬운 듯했으나, 이 정도면 충분했다. 좀비 같던 얼굴이 사람다워졌다.

“폭탄테러. 서제국 놈들 소행이야?”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한 중위는 드물게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말을 고르듯 입을 달싹거렸다. 혹시 이놈이 가이딩만 받아먹고 정보를 안 주려고 꼼수를 부리는 건 아닐까?

“뭔데? 가이딩도 해 줬는데 왜 말을 안 해?”

“그게…….”

“그게 뭐!”

“충격받지 말고 들어. 사실… 실험체로 끌려갔던 아이 중 하나가 폭주한 거야.”

“뭐?”

조이는 당연히 밀입국한 서제국 놈들이 폭탄테러를 저지른 것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에스퍼의 폭주로 인한 폭발이었다니.

조이의 예상처럼 실험체로 끌려갔던 아이들 중 일부는 에스퍼였다. 그 때문에 병원으로 이송된 후 그들의 마른 몸에는 억제구가 한참 동안 채워져 있었다.

조하 역시 형질 테스트를 받았으나, 발현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조이는 늘 조하가 돌연변이로 발현하길 기도했었는데, 그때만큼은 조하가 그저 평범한 체질이길 바랐었다.

다행히도 군의관은 아이들이 쉽사리 깨어나지 못할 거라는 진단을 내렸고, 군에서도 억제구를 풀어 주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가 폭주를 하다니.

“군에서는 뭐래?”

“추가 폭발 가능성을 아주 높게 보고 있어. 형질 테스트를 또 한 번 진행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확실히 에스퍼야. 설사 에스퍼가 아니더라도 군에서는 환자들을 내보내는 것은 아직 위험하다는 입장이고.”

조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하의 형질 테스트 결과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한 중위는 본인도 그 정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럼… 군에서는 그 아이들을 어떻게 할 거래?”

“우선 도심에서 30km 떨어진 곳에 버려진 폐건물이 있는데, 그곳을 병원으로 개조할 거라고 했어. 아마 그곳으로 전원 이송될 거야.”

“감금이야……?”

30km 떨어진 곳으로 이송하는 것에는 조이도 이견이 없었다. 이번 폭주 사고로 간병인과 폭주한 에스퍼가 사망했고, 다섯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병원을 만들려는 군의 계획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만일 그 병원이 감금 목적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조하가 평생 그곳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한 중위는 환자들을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금하는 것인지는 아직 결정된 게 없다고 말했다.

“아직은 군에서도 판단이 안 서는 것 같아.”

조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군에서도 이번 사고가 적지 않게 충격인지 아직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조이는 늘 조하가 에스퍼로 발현하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에스퍼로 자라난 싹도 아니어야 했다. 상황이 정리되면 적어도 에스퍼로 자라날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은 퇴원시켜 줄지도 모르니까.

“폭주한 에스퍼, 전조 증상 같은 건 없었대? 에스퍼들이 폭주하기 전에 나타나는 증상 말이야. 눈이 빨갛게 변한다거나 열이 오른다거나.”

“폭주한 에스퍼를 담당하던 간병인 말로는 몸을 닦아 주려는데 열이 나더래. 그래서 의사를 호출했는데…….”

아마 의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폭주한 듯했다. 이런 급격한 폭주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권명의 폭주 증상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적이 있기에 조이는 폭주 전 증상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었다. 권명의 푸르른 눈은 붉게 변했었고, 그의 몸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었다.

이성이 좀 흐려지는 듯했지만, 권명은 그런대로 말도 했고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있었다. 이번 사고는 조이가 아는 상식을 뒤집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사관학교에서부터 배워온 지식과 조이의 경험 모두를 배반하는 사건. 조이는 어쩐지 이 일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 * *

폭주 사건 이후 조이는 도심으로부터 30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병원으로 발령을 요청했다. 보직 요청이 반려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곧바로 허락이 떨어졌다. 피해자의 직계가족은 관련 업무에서 배제될 확률이 높았는데,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이는 군에서 발령을 허락한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군에서는 조이를 제외하고 두 명의 가이드를 추가로 발령했다.

폭주 가능성이 높은 에스퍼를 진정시킬 목적으로 조이와 두 명의 가이드는 환자마다 적어도 한 시간씩 교대로 가이딩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수를 가이딩해야 하는 일이기에 무척 피곤하고 고된 일이었지만, 조하의 곁에 있을 수 있기에 조이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하는 어때요?”

“늘 같아요. 체온도 평균 수준이에요.”

조이는 낮 동안 병원을 돌며 가이딩을 하고 밤이면 조하가 있는 병실로 돌아왔다. 조이가 일하는 동안 조하를 돌보는 이는 역시나 간병인이었다. 조이는 진심으로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감사했다. 생부는 자식을 실험체로 적군에 팔아 버렸는데, 생판 남인 간병인은 조하를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돌보다니.

지난번 폭주 사건으로 간병인 중 일부가 일을 그만두었다고 들었다. 환자를 돌보는 일치고는 위험 부담이 큰 일인데, 간병인은 조하의 곁에 남기로 했다.

해서 조이는 간병인의 아들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간병인은 말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조이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조이는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체온이 급격하게 오르면 즉시 복도 끝에 있는 군인에게 알린 후 대피해야 해요. 아시죠?”

“예. 귀에 딱지 생기겠어요. 중위님.”

지난번 폭발 사고 이후 바뀐 프로세스였다. 간병인은 원래 의사가 올 때까지 환자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군에서는 민간인이 폭주에 휘말리게 둘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조이는 군의 입장에 코웃음이 나왔다. 군인은 도구처럼 사용하면서 민간인은 사람대접하는 모습이 모순되어 우습기만 했다.

간병인이 떠난 후 조이는 한 번 더 조하의 체온을 확인했다. 특수 침대에는 환자의 체온을 시시각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온도계가 달려 있었다. 군의관은 주기적으로 온도를 확인해 기록해 두라고 요청했었다. 조이는 간병인이 적어둔 도표에 온도를 기재한 후 잠시 눈을 붙였다.

“안 중위. 안조이!”

누군가 조이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부스스 눈을 뜨니 한 중위였다. 간병인 아들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거든 즉시 알려 달라고 했었는데, 벌써 정보 수집이 끝난 모양이었다. 한 중위의 눈 밑은 또다시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눈에는 안광이 스쳤다.

“찾았어! 정보!”

한 중위의 능력은 암시인데, 군에서는 정보 군으로 한 중위를 부려 먹고 있었다. 군에서는 왜 저 아까운 능력을 썩히는 걸까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한 중위는 본인의 능력인 암시보다 정보 수집에 더 쓸모가 있었다.

“으윽… 피곤해. 좀 알아봤어?”

“어. 송하영.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했더니 지난번 작전에서 본 이름이더라고.”

“지난번 작전?”

한 중위는 부상 이후 내근직만 맡고 있었다. 지난번 작전이라면 배때기가 뚫렸던 그 작전을 말하는 듯했다. 조이가 기억하기로 한 중위가 맡았던 작전은 어두운 땅굴에서 실종된 에스퍼를 찾는 일이었다.

“그 정신계 에스퍼 실종 사건?”

“어. 송영식 대위 실종 사건.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없었고, 모계 성을 따른 게 신기해서 인상 깊었거든. 봐 봐.”

한 중위는 뿌듯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건넸다. 첫 장에는 송영식 대위의 신상정보와 군 이력이 쭉 쓰여 있었다. 밑으로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사망……?’

조이는 간병인이 안쓰러웠다. 두 명의 아들 중 하나는 어려서 잃고 나머지 하나는 실종이라니.

“주 업무는 적군 포로를 심문하는 일이었어. 1등급 최면술. 그 당시 여러 명의 정신계 에스퍼가 실종됐었는데 군에서는 적어도 송영식 대위만큼은 되찾아야 한다고 했었지.”

한 중위의 말대로 꽤 유능했는지, 진급도 아주 빠른 편이었다. 하단에는 송영식 대위가 적군 포로에게 최면을 거는 영상이 첨부돼 있었다. 최면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실력이 아주 뛰어나 보였다.

“기가 막히지? 이 정도 실력자는 정말 흔하지 않아. 지시어 하나만 내뱉으면 정보를 술술 분다니까?”

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넘겼다. 마지막 장에는 회색 도장이 찍혀 있었다. 서제국 놈들이 작정하고 에스퍼를 납치한 탓에 구조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아 미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군에서는 포기한 거지? 구조 말이야.”

“응… 스파이 활동 중인 대원들도 그 흔적만큼은 찾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

조이는 이 서류를 묻어 두기로 했다. 혹여 간병인에게 전해 줄 만한 희망찬 소식이 있을까 기대했었는데, 이런 미결 서류를 줘 봐야 가슴만 아파질 테니까.

조이는 한 중위에게 실컷 가이딩을 해 준 후 내보냈다. 다시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려는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조이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권명?”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수준인데?]

조이의 반가운 목소리가 꽤 듣기 좋았는지 권명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장난을 쳤다. 조이는 권명의 목소리가 그리웠던 게 사실이기에 부인하지 않았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어.”

[그래도 나만큼은 아닐 거야. 북부를 다 불 지르고 싶을 정도니까.]

“과장은… 일은 잘되고 있어?”

[어. 두꺼비 같은 새끼들이 자꾸 추가 조건을 다는 거 말고는. 너는? 그 병원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조이는 가이딩을 한다는 말만큼은 할 수 없었다. 저 질투쟁이가 환자들을 가이딩한다는 말을 들으면 북부에서 당장 넘어오겠다고 난리를 피울 테니까.

[안조이. 보고 싶다.]

“나도…….”

[아마 이삼일 내로 영상통화가 가능할 거야. 통신병을 있는 대로 족쳤거든.]

“진짜? 잘됐다! 안 그래도 잘 지내나 궁금했는데…….”

조이는 그저 권명의 얼굴을 볼 생각에 기뻤는데, 권명은 역시나 다른 의미로 영상 통화를 기대하는 듯했다.

[내 바주카포? 다 죽어 가. 나도 안조이 TNT 궁금해. 시무룩한 모양일 것 같아.]

권명은 늘 쉽게 발기하는 조이의 성기가 기가 죽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게 걱정된다며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입 안에 넣고 이리저리 굴리면 금방 힘을 낼 텐데, 자신은 이 망할 북부에 있다며 분노했다. 권명은 정말이지 묘하게 분위기를 깨는 놈이었다.

* * *

모든 일이 그렇듯,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상통화로 그 짓을 하자는 권명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서제국에서 북부를 향해 통신 방해 미사일을 발사했기 때문이었다. 북부를 빼앗긴 것이 꽤나 억울했던지 N52 구역에서 자살폭탄테러가 연이어 벌어졌다.

권명이 있는 N62 구역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 여파로 권명과 통화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래도 아직까지 일반 통화는 가능했지만, 종종 지나치게 끊겨 권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이는 전화를 끊지 않고 잠자코 듣고 있었다.

조이가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는다면, 권명은 한동안 일반 통화도 어려울 거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내뱉으며 어찌나 통신병을 욕하던지, 통신병은 분명 장수할 것이다. 저런 욕을 듣고 사니. 그 통화를 마지막으로 권명으로부터 매일같이 걸려 오던 전화가 뚝 끊겼다.

그사이 조이는 한 중위에게서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을 배웠다. 한참을 지우고 쓰기를 반복한 끝에 조이가 원하는 내용을 담은 글이 완성됐다.

‘건ㅁㅕㅇ♡’

언제 권명이 이 메시지를 보게 될지는 모르지만, 보자마자 곧바로 연락이 올 테지. 조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통신구를 주머니에 넣었다.

윙- 윙-

소름 돋는 타이밍이었다. 권명을 생각하자마자 전화라니. 조이는 전화를 받자마자 권명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기대했던 권명이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누구시죠?”

[명아? 명이 형인데. 누구시죠?]

서로 누구냐고 정체를 묻는 이상한 통화였다. 권명의 형이라니. 조이가 아는 권명의 형은 7구역에 있는 사장뿐이었다.

“사장님?”

[조이?]

“네! 권명은 북부에 있는데…….”

사장은 권명이 아닌 조이에게 할 말이 있어 전화한 것이라고 했다. 사장이 조이에게 할 말이 무엇일까? 조이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다. 사장은 뜸을 들이듯 침묵을 지키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조이야.]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너희 아버지가 돌아오셨어.]

“네?!”

조이는 너무 놀라 한참 동안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7구역에 있는 걸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제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는 이가 찍은 사진을 통해서였다. 생각보다 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 분노가 끓어올랐었다.

그 후 조하를 구출한 후 아버지에 대해 잊으려 노력했다. 조이와 조하에게 끔찍한 기억만 선사한 아버지이지만, 종종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조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했다.

조이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미움이 큰데 어떻게 저런 인간을 걱정할 수 있는지.

“아버지랑은… 인연을 끊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알아.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이해해. 그런데… 아버지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셔.]

“아… 아프다는 말이에요? 어디 가요?”

[정신 문제인 것 같아. 아무래도 네가 한번 봐야 할 것 같아서 연락한 거야.]

“…….”

조이는 사장에게 며칠만 더 아버지를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며 통화를 마쳤다. 조이는 두 눈을 감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지금은 혼자의 힘으로 서 있기가 버거웠다.

참으로 끔찍한 인간이었다. 대체 서제국에서 무슨 짓을 당했기에 저런 꼴이 된 걸까. 그리고 그런 꼴로 뻔뻔하게 돌아오다니.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다.

* * *

다음 날 조이에게는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실종됐던 에스퍼 중 하나가 7구역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이 이곳 투뤼까지 전해졌다. 조이는 그 일에 가장 먼저 지원했다. 안 그래도 아버지의 일로 7구역으로 가야 했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환자에 대한 브리핑을 듣기 전까지 조이는 이번 임무를 7구역으로 가기 위한 구실 정도로 여겼었다. 하지만 환자의 신상정보를 확인하자 조이는 이 일에 깊은 사명감을 느꼈다.

‘송영식.’

조하를 살뜰히 돌보는 간병인의 실종된 아들이었다. 조이는 늘 어떤 방식으로라도 간병인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이번 작전은 여러 가지로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안조이 중위님이시죠? 타시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흥.”

조이는 환자 이송용 비행기에 올랐다. 조이의 뒤이어 얄미운 콧소리를 내며 탑승하는 이가 있었다. 한솔이었다. 태혁은 지난번 작전으로 소령으로 진급하였고, 폐건물을 개조한 임시 병원의 보안을 책임지게 되었다.

태혁은 현장 업무에서 벗어났기에, 이번 작전에 한솔을 추천했다고 들었다. 말이 추천이지 보내 버린 것이었다. 내근직 특성상 가이딩을 받을 일이 없으니까.

그 소식을 듣게 된 한솔은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태혁과 말다툼을 했다는데, 한 중위는 그 일이 무엇이 그렇게 재밌었는지 한솔의 목소리를 따라 하며 그 상황을 재연하려 했다. 조이는 굳이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한솔 소위. 다중 가이딩을 먼저 시도해 보고 이송 여부 결정하겠다. 도착하면 바로 진행하도록 준비해.”

“북부에서처럼?”

“그래. 북부에서처럼.”

“왜? 이번에는 밑에 안 팔아?”

북부에서 권명에게 밀접 가이딩을 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저 얄미운 새끼.

“밀접 가이딩? 좋지. 이번엔 너한테 그 임무를 맡길게.”

조이가 한솔의 가랑이 사이를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조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솔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조이는 이제 저 시선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저놈. 저 지랄이 하루 이틀인가.’

조이는 이번 임무의 책임자였다. 조이가 한솔에게 밀접 가이딩을 지시한다면 분명 한솔은 반발한 것이고, 군에서도 말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군에서는 살아 돌아온 에스퍼와 한솔의 가치를 비교할 것이고, 물어볼 것도 없이 한솔은 가랑이를 벌려야 할 것이다.

사관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실재 전장은 전혀 달랐다. 증폭기의 보급으로 밀접 가이딩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말은 순 홍보용 문구였다. 에스퍼는 다용도 워봇으로 사용됐고, 가이드는 그런 워봇의 배터리 정도로 취급됐다. 수명이 다할 때가 되어서야 교체되는 배터리. 군에서의 인권 의식은 고작 이런 수준이었다.

조이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7구역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토록 탈출하고 싶었던 곳으로 자진하여 돌아온 것이. 수도를 향하며 잊으려 노력했고, 반쯤은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구청 건물, 붉은 십자가를 매단 교회, 조이가 잠시 다녔던 학교.

결국 이곳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자꾸 이상한 감정이 몰아쳤다. 미우면서도 그리운 상반된 감정. 조이는 애써 그 감정을 다시 꾹꾹 눌러 담아 봉인했다.

조이는 이곳에 임무를 띠고 온 것이니 일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다친 에스퍼를 치료해 은혜에 보답하는 일. 정신 나간 아버지를 처리하는 일.

“반갑다. 안조이 중위. 이휘 대위다.”

자신을 이휘라고 소개한 에스퍼가 손을 내밀었다. 조이는 그 손을 살짝 잡고 흔들었다. 그 순간 조이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힘이 느껴졌다. 이휘 대위 역시 그 느낌을 받았는지 서둘러 조이의 손을 놓았다.

“작년에 내 가이드가 의가사 제대해서. 가이딩이 좀 급했나 봐.”

이휘 대위는 조금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페어를 이룬 가이드가 제대한 후 아직도 새로운 가이드를 배정받지 못한 듯했다.

수백 명의 에스퍼와 가이드가 득실거리는 북부와 달리 7구역에는 딱 한 명의 에스퍼와 가이드가 배정돼 있었다. 북부와 달리 7구역은 그리 교전이 활발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서제국에서도 7구역이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오도록.”

조이는 이휘 대위를 따라 탈출한 에스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대위는 병원이 아닌 7구역의 두꺼운 장벽 쪽으로 조이와 한솔을 이끌었다. 하얀색 천막으로 급조한 야전병원이 보였다. 대위는 이쪽이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하얀색 천막 안으로.

“헙!”

“우웩!”

한솔은 곧바로 몸을 돌려 속을 게워 냈다. 조이 역시 입을 틀어막았다. 조이는 이번 임무를 맡으면서 왜 탈출한 에스퍼를 투뤼로 이송하지 않은 것인지 궁금했었다. 막연하게 크게 다쳤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이건 쉽사리 살려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03시 25분, 7구역을 향해 돌진하는 서제국 군용차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거의 다 와서 담벼락을 그대로 들이받지 뭐야.”

이휘 대위는 아무렇지 않게 온몸에 수십 개의 철근을 꽂고 있는 에스퍼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필 이 에스퍼가 도주용으로 선택한 차가 화물 운송차였고, 그 뒤에는 철근이 실려 있었다. 담벼락과 충돌하며 그 쇠꼬챙이가 에스퍼의 몸에 가시처럼 박힌 것이었다.

가이딩은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죽은 자를 살려낼 정도로 만능은 아니었다.

“살아 있는 거 맞습니까……?”

“의무병이 조금 전까지 확인했다. 살아 있다.”

“하아…….”

조이는 저렇게 끔찍한 상태인데도 살아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조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해 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다른 누구도 아닌 간병인의 아들이니까.

“한솔 소위. 다중 가이딩 바로 실시한다. 그사이 저 철근… 제거 바랍니다.”

군의관과 의무병은 이미 수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회복 속도가 관건이었다. 부서져 가는 몸을 이겨 낼 정도로 회복력을 되찾아야 했다.

“한솔 소위!”

한솔은 여전히 충격에 벗어나지 못한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조이는 왜 태혁이 한솔을 이곳으로 보내 버리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훈련만 미숙한 게 아니었다. 조이는 한솔에게 다가가 가이딩을 준비하라는 말을 한 번 더 내뱉었다.

“응……?”

늘 매섭게 노려보던 놈이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 게 좀 고소하기는 했다. 하지만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저렇게 유약한 가이드라 할지라도.

“한솔 소위. 저 환자 우리가 살려 내야 해. 정신 차려.”

“으… 응…….”

조이는 한솔을 끌어당겨 가이딩 준비를 마친 후 두 눈을 감겨 주었다.

“후우… 가이딩 시작합니다.”

조이는 증폭기에 손을 올려놓고 강력한 힘을 불러일으켰다. 죽음의 늪에 잠긴 이 불쌍한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열망을 쏟아부었다. 그사이 군의관들은 공구 같은 수술 도구를 들어 올려 철근을 자르고 뽑아냈다.

“우욱……!”

한솔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상태였지만, 공구가 돌아가는 소리와 뭔가를 뽑아내고 피가 울컥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몸을 흠칫 떨었다. 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행히도 수술과 가이딩은 성공적이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고, 곧바로 이송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었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수고했네. 안조이 중위.”

“수고하셨어요. 중위님.”

군의관은 조이의 어깨를 두들기며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수술을 돕던 의무병은 가이딩을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라며 감동에 찬 눈빛을 보냈다. 평소였다면 그들의 표정과 격려에 입꼬리가 파르르 떨릴 정도로 뿌듯함을 느꼈을 테지만,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 한쪽에서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샘솟았다.

‘왜 이러지?’

조이는 그 불길함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어쩌면 아직 해결해야 하는 일이 한 가지 더 남아 있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아버지.

* * *

그날 밤 조이와 한솔은 교대로 가이딩을 진행하게 되었다. 조이의 차례가 끝나고 한솔이 가이딩을 하는 사이, 조이는 휴식을 취해 지친 몸을 충전해야 했지만,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일이 우선이었다.

정신이 멀쩡했을 때에도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사장이 데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보통 민폐가 아니었다.

조이는 자신이 10년 동안 누볐던 익숙한 거리를 지나, 목적지인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 시간이면 한창 영업을 해야 할 시간인데 마왕의 건물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조이는 쇠문을 흔들고 두들기며 한참 동안 소리쳤다.

“사장님! 사장님!!”

‘쾅쾅’ 문을 부수듯 두들긴 끝에, 안쪽에서 누군가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두꺼운 철문이 열리며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이?”

“죄송해요. 아버지 때문에…….”

사장은 보자마자 죄송하다는 말부터 내뱉는 조이의 머리를 비비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방금 조이의 머리를 이리저리 비비는 모습이 꽤 권명과 닮아 있었다. 이렇게 보니 형제가 맞긴 했다.

“아버지 때문에, 장사도 못 하시는 거예요?”

“아니야. 장사 안 한 지 꽤 됐어. 조만간 가게도 접어야 하고.”

“가게를요? 왜요?”

“수도로 다시 돌아가게 됐어.”

사장은 큰 사고를 쳐서 7구역으로 떨어진 것이라 들었었다. 7구역에서는 사장이 미쳐서 버림받은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었고, 조이 역시 반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보육원으로 봉사를 다니는 행위 자체가 그 소문을 뒷받침하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7구역에서는 먹기 힘든 해산물과 신선한 야채를 트럭 가득 싣고 갔었으니까.

7구역에 사는 사람들 기준으로는 미친 짓이었다.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7구역에서는 보기 드문, 아니, 본 적이 없는 모습. 그런데 그런 사장이 다시 수도로 가다니.

“그… 머리가 아픈 거 아니었어요?”

“머리?”

“그 왜… 소문…….”

조이는 미친 아버지를 둔 탓에 직접적으로 사장에게 ‘당신 돌았잖아’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사장은 조이가 말한 소문을 알아차렸는지 ‘하하하’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미쳤다는 소문? 뭐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왜 수도로 돌아가게 된 거 같아?”

“저야 모르죠.”

“왜 몰라? 네 덕분인데.”

“저…요?”

사장은 피식 웃으며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다. 조이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권명 놈, 사장과 꽤 알콩달콩한 형제 사이였다. 그사이 이 소식을 사장에게 전했다니.

“그렇게… 됐네요. 근데 그거랑 뭔 상관이에요?”

“명이가 군을 떠나겠다고 아버지에게 통보했어. 아버지 뒤통수도 제대로 때리고. 그러니 아버지가 다시 손 내밀 자식이 누구겠니.”

권명이 북부의 원유 공급과 관련된 정보를 몽땅 군에 넘기겠다고 하자, 권명의 아버지가 대로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말도 지지리 듣지 않는 망아지를 대신할 대체품이 필요해진 모양이었다. 그게 바로 권명의 형이고. 어찌 되었든 7구역을 벗어난다니 잘된 일이었다.

“축하드려요.”

“축하? 글쎄.”

사장은 조이의 축하한다는 말에 비소를 지었다. 사장은 그다지 7구역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조이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도 사장은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저 조이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아버지를 보여 주겠다며.

사장은 식료품을 주로 보관하던 창고로 조이를 이끌었다. 낡은 문이 열리고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팔다리에는 굵은 줄이 칭칭 감겨 있었고 입은 하얀 천으로 틀어 막혀 있었다. 심지어 눈까지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미안. 이러지 않으면 좀 난리를 피우셔서.”

조이는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다가가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풀어 주었다.

“흡……!”

조이는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아버지의 두 눈은 피가 나올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 눈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 붉은 눈은 광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온 세상이 무너지는 와중에 폭소하는 이의 눈이 저러할까?

“아버지……?”

조이의 불음에도 아버지의 눈은 쉽사리 조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참 동안 조이가 이름을 부른 끝에, 허공을 응시하던 아버지의 두 눈이 조이에게 닿았다. 조이는 입을 틀어막고 있던 천 역시 풀어냈다. 그 순간 아버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반짝반짝 작은 별!”

“윽!”

조이는 재빨리 귀를 틀어막았다. 고장 난 라디오에서 커다란 음악 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아버지는 쉬지 않고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있었다. 음정과 박자가 엉망이지만, 아버지는 지금 자장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조이에게 또는 조하에게 단 한 번도 불러 준 적 없던 그 자장가를.

조이는 귀를 꽉 막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두 눈은 광기에 가득 찼고, 입 모양은 동요를 부르는 아이처럼 쩍쩍 벌어졌다. 조이는 고함을 치듯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대체 왜 이러세요! 아버지!”

수십 번도 넘게 아버지를 부르고 온몸을 흔들어 보아도, 아버지는 끊임없이 같은 소리를 반복할 뿐이었다. 조이는 더 이상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사장이 그러했듯 아버지의 입을 틀어막고 두 눈을 가려야 했다.

7구역의 목사들이 말하던 단죄가 아버지에게도 내려지길 바랐었다. 아버지가 뼈저리게 후회하길 기도했었다. 하지만 막상 죗값을 치르는 걸 눈앞에서 보니, 조금도 후련하지 않았고,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조이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사장이 잡아 주지 않았다면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자. 한잔 쭉 마셔.”

사장은 마왕이라는 독주를 팔면서도 본인은 절대 그 술을 입에 담지 않았었다. 자신이 마실 술은 꼭 따로 준비해 뒀었는데, 사장은 때때로 맛만 보여준다며 귀한 술을 반 잔 정도 준 적이 있었다. 사장은 향긋하다며 음미하라고 했지만 조이에게는 그저 술이었다. 목이 타들어 갈 정도로 독한 술.

하지만 오늘은 이 술이 필요할 것 같았다. 조이는 사장이 건넨 술을 한 번에 들이마셨다.

“윽…….”

“가게 문 앞에 쓰러져 계셨어. 피투성이인 채로. 어깨에 철근이 관통한 상처가 있었는데, 그건 응급 처치를 했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저런 소리를 하시더라고.”

“…….”

조이는 오늘 온몸에 철근이 박힌 환자에게 가이딩을 했었다. 그런데 아버지 역시 철근으로 부상을 입었다니. 어쩌면 서제국에서 탈출을 시도한 송영식 대위가 아버지까지 데리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탓에 그런 부상을 입고도 송영식 대위가 살아 있는 것이었고.

조이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 일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저렇게 망가진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차라리 적국으로 넘어간 아버지를 원망하며 사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한 잔 더 줄까?”

“네.”

조금 전까지 귀를 때리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독한 술을 한 잔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조이는 두 번째 잔도 한 번에 들이마셨다. 여전히 목구멍이 타들어 갈 듯 뜨거웠다. 하지만 독주를 두 잔 비우고 나자, 아버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섰다.

“사장님. 아버지를 데리고 갈 곳이 있어요. 도와주세요.”

조이는 사장의 차에 아버지를 실은 후, 7구역 남쪽에 위치한 정신병원으로 향했다. 유독 미친 사람이 많은 7구역에서는 어지간히 미치지 않은 한 입소가 불가능한 곳이었고, 없는 살림에 비싼 병원비를 감당할 자가 많지 않아 입소가 어려운 곳이었다.

한밤중에 온몸이 결박된 중년 남성을 둘러업고 사내 둘이 나타나자 병원 관계자들은 쉽사리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조이가 군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사장은 침착하게 병원 입소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했으나, 조이는 그런 거에는 조금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결제는 어떻게.”

“이거로요.”

임관한 후 군에서 받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 놓은 통장을 건넸다. 통장의 액수를 확인한 원장은 비용을 조금 더 추가하면 최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며 상술을 펼쳤다.

“하뉨에 있는 유명한 박사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이곳을 방문하세요. 치료 효과가 아주 뛰어나요. 고소공포증을 최면으로 극복하게 하거나, 심리적인 문제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기도 하고요. 안조이 님 아버님께서도…….”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사망하더라도… 연락하지 마시고 장례 치러 주세요. 추가 비용이 필요할 경우에만 연락 주세요.”

조이의 입에서는 자신도 놀랄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장은 그저 조이가 정신 나간 아버지의 병간호에 진절머리가 난 것이라 여겼는지 알겠다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그런 조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등 뒤로 발버둥 치는 아버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움직임이 느껴질 때마다 심장까지 물이 차오른 기분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도 자꾸만 숨이 부족했다. 조이는 먼저 나가 있겠다고 말하고는 사장의 차로 돌아왔다.

쾅-

문을 닫은 후 조이는 엉엉 울었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 아버지였고, 어머니를 죽게 한 원흉이자, 조하를 팔아 버린 피도 눈물도 없는 아버지인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흐윽…….”

조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한참 동안 울었다. 이 복잡한 마음을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쁜 아버지는 자식을 버려도 떳떳한데, 왜 나쁜 아버지를 버리는 건 이렇게 힘든 걸까.

아버지가 그동안 저지른 악행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어린 시절 기억의 한 조각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이토록 타락하기 전 조이에게 보여 주었던 한 조각의 따뜻함이 떠올라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흐읍… 흑…….”

그날 밤 조이는 아버지를 위해 흘릴 수 있는 모든 눈물을 쏟아 냈다. 먼 미래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든 흘려야 할 눈물까지 모조리.

* * *

군으로 복귀한 조이는 환자를 가이딩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 기억을 뒤로하기 위해 한솔보다 더 긴 시간을 가이딩에 매달렸다.

그 효과인지 고슴도치처럼 철근을 꽂고 있던 에스퍼는 빠르게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한솔 말로는 잠시 정신을 차리고 이곳이 어디인지, 또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갈 것인지 등을 물었다고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조이가 지키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송 요청하겠습니다.”

조이의 말에 이휘 대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병원으로 돌아간 후 여러 명의 가이드들이 집중적으로 가이딩을 한다면 더 빠르게 회복할 테지.

조이와 한솔은 이송 비행기 안에서도 주기적으로 환자를 살폈다. 한솔은 처음과 달리 조이에게 얄미운 소리를 내뱉지는 않았다. 첫날 그 협박이 먹혀들어 간 건지 아니면 고슴도치처럼 철근을 꽂고 있던 에스퍼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건지.

조이와 환자를 실은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장에 도착했다. 조이는 곧바로 환자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 손에는 총과 억제구가 들려 있었다. 폭주 직전의 에스퍼를 제압하듯.

“이… 이게 대체……!”

“안 중위! 빨리 이쪽으로 와! 빨리!”

태혁은 거칠게 조이를 잡아끌었다. 그사이 나머지 대원들은 잠들어 있는 에스퍼에게 달려들었다.

“무슨 짓이야!”

대원들은 에스퍼의 온몸에 지나칠 정도로 치렁치렁한 억제구를 장착했다. 팔다리도 부족해 목과 머리까지. 큰 수술을 마친 환자를 대하는 몸짓이 아니었다. 악질 범죄자나 테러리스트를 체포하는 것 같았다.

“이송한다! 안조이 중위. 한솔 소위는 따라와라.”

조이는 태혁을 따라 군용차에 올랐다. 조이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왜 저렇게 억제구를 장착한 것이냐고 물었으나, 태혁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임시 병원에 도착했다.

“송영식 대위. 서관으로 옮긴다.”

태혁은 짧게 지시를 내린 후 조이를 끌어당겼다. 서관이라면 특수 병실로 전면 개조 중인 곳이었다. 조이를 더욱더 두려움에 떨게 했던 병실. 조이는 그 병실이 최대한 늦게 완성되기를 바랐었다.

조하가 지금까지 있었던 곳은 조악하더라도 병실이었다. 간병인이 조하를 살뜰히 돌봤고, 창문을 열면 녹색이 보이는 그런 병실. 하지만 서관의 병실은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사각형 콘크리트였다. 병실이라기보다는 감옥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저런 곳에 감금되는 순간 면회도 끝장일 것이고, 조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아낼 방도가 없을 것이다.

“앉아. 조이.”

태혁이 직급 대신 조이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걸 봐서는 사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조이는 어색하게 태혁이 가리킨 곳에 앉았다. 태혁의 담당병이 곧바로 차를 내왔다. 조이는 어색하게 컵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는데 태혁은 어서 한 입 마시라고 권했다.

“왜……?”

“일단 한 입 마셔. 조이.”

조이가 한 입 마신 차를 내려놓자 태혁은 조이의 손을 잡아 왔다. 태혁의 고백 이후 조이는 태혁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태혁 역시 조이의 마음을 존중하듯 그 거리를 파고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태혁이 이렇게 손을 잡아 오니 조금 부담스러웠다.

“조이. 놀라지 말고 들어. 네가 없는 사이 또 한 번 폭발이 있었어.”

“포… 폭주?”

조이의 입에서 폭발이 아닌 폭주라는 말이 나오자 태혁은 조금 놀란 듯했다. 조이는 한 중위를 통해 폭발의 정체를 알아냈기에 이를 모르는 척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조이는 자신의 정보원을 노출시킬 생각이 없기에 침묵하기로 했다.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조이를 바라보던 태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행히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태혁의 눈치를 살피던 조이는 다급하게 조하에 대해 물었다.

“조하는 안전해. 네 말대로 지난번 폭발과 이번 폭발 모두 에스퍼의 폭주로 인해 발생했어.”

“그래서?”

“군에서는 서제국에 잠시라도 머물렀던 모든 에스퍼들을 서관에 가두는 일을 논의하고 있어.”

“서관? 그럼 감금하겠다는 말이야? 조하가 폭주를 일으킨 게 아니잖아!”

조이는 태혁의 손을 꽉 쥐며 소리쳤다. 조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태혁의 입에서는 단호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일 중으로 결론이 나올 거야. 마음 단단히 먹어.”

조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감금 쪽으로 결론이 날 것 같은지 물었다. 태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조이의 예감은 감금 쪽으로 기울었다. 벌써 7구역에서 구조된 송영식 대위가 서관으로 입소하지 않았던가.

“어…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지금처럼 그냥 일반 병실에 머물 방법.”

조이는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처럼 태혁을 올려다보았다. 태혁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조이의 눈을 피했다. 대신 조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위로했다. 폭주를 일으키는 트리거만 찾아내면 감금에서 금방 풀려날지도 모른다고. 그전까지는 그곳에 갇혀 있는 게 더 안전할 거라고.

“조이 네 마음 이해해.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이성적? 격리에서 감금으로 바뀌었어. 감금 다음에는 뭐일 것 같은데?”

조이는 조금 날카로운 말투로 되물었다. 태혁과 달리 조이는 이 일에 이성적일 수 없었다. 만약 감금 후에도 폭주 사고가 일어난다면, 조하는 그대로 죽는 것이었다. 사고사로 위장되든, 자연사로 위장되든.

“알아. 힘든 거. 하지만 설령 내 동생이 조하와 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난 군의 의견에 따랐을 거야. 동생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게 둘 수는 없잖아.”

조이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성적. 의무. 수백 명을 살려낸 대가로 조하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조이는 더 이상 태혁과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태혁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태혁이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지만 가슴에서 열이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조하를 보고 싶어. 면회가 가능할까?”

“군에서 5분으로 면회 시간을 단축했어. 안전 문제야. 순번 확인해 줄게.”

조하가 감금당하기 전 마지막 면회였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감성이 조이의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조이의 마음속에는 아주 위험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계획을 어떻게, 또 언제 시작할지는 모르지만.

“오늘 밤. 제일 마지막이네. 순번을 바꿔 줄 수 있어.”

마지막 순번이라. 더없이 잘됐다. 조이는 지금 당장 조하를 보고 싶어도 꾹 참을 것이다.

“아니. 그냥 마지막으로 조하를 만날게. 나가 봐도 될까?”

조이의 딱딱한 대답에 태혁은 한숨을 쉬며 조이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조이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조이.”

“나가 볼게.”

* * *

태혁은 조이에게 조하를 만나기 전까지 휴식을 취하라고 했지만, 조이는 이대로 휴식을 취할 생각이 없었다. 최후의 방법을 쓰기 전까지 조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생각이었다. 조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폭주의 원인을 스스로 밝혀내는 것이었다.

태혁의 말대로 폭주할 가능성이 없다는 걸 밝혀내야 조하가 감금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우선 한 중위를 만나야 했다. 조이는 지나다니는 군인에게 정보국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서관 앞 간이 천막이요.”

조이는 천막에 들어서자마자 한 중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늘 한 중위와는 비밀스러운 만남을 추구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조…! 아… 안조이 중위님. 무슨 일이신가요?”

한 중위는 조금 당황한 듯 건물 뒤에서 기다리라고 작게 속삭였다. 조이는 곧바로 따라 나오라고 대답했다.

“후우…….”

한 중위가 나오기 전까지 조이는 거칠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손끝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흥분 상태였다. 시곗바늘이 조금씩 움직이며 정각을 향해 달리듯, 조이의 마음속 시계도 시간이 없다는 듯 째깍거렸다.

“조이! 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폭주 사고가 또 일어났다고 들었어. 새로운 정보 없어?”

“귀신같네, 진짜. 영상 복원이 이제 막 끝났어. 자, 같이 보자!”

조이는 한 중위 손에 들려 있던 태블릿을 낚아챘다. 곧바로 1차 폭주의 전말이 담긴 영상이 재생됐다. 익숙한 중년 남성의 얼굴이 보였다. 조하의 간병인과 꽤 친한 사이인지라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간병인처럼 투뤼 토박이라고 했던가?

환자를 살피던 간병인은 통신구로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이에게 전화를 받은 건지 아주 놀란 기색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하지만 통화는 길지 않았다. 짧은 통화를 끝낸 후 간병인은 자신이 언제 그렇게 놀랐냐는 듯 태연하게 수건을 들고 환자의 몸을 닦아 주었다.

이내 이상 증상을 알아차렸는지 인터폰으로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그다음의 일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폭주.

“눈이… 왜 저러지?”

한 중위는 영상 속 남성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냐는 조이의 물음에 한 중위는 눈이 일시적으로 몽롱하게 풀린 것 같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았다.

“다음 영상도 있지?”

“으응…….”

한 중위는 뭔가 찝찝한 표정으로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2차 폭주를 일으킨 에스퍼의 간병인은 아이의 언니였다. 꽤 유쾌한 성격인지 손가락 인형을 낀 채 동화책을 읽어 주거나, 작은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주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조이 역시 잠든 조하의 옆에서 저렇게 책을 읽어 주었었다. 노래는 차마 불러 주지 못했지만. 조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는 어머니가 불러 주던 자장가 정도였다. 어려서 조하에게 자주 불러 주고는 했는데, 커서는 불러 줄 일이 없었다.

조하는 때때로 잠이 오지 않는다며 조이에게 그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었다. 조이는 고된 노동 후 피곤함과 예민함에 그런 조하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고는 했었다. 또다시 조이의 심장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윽…….”

조이는 우쿨렐레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보호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이는 문뜩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저 모습이? 아니면 저 얼굴이?’

조이는 뚜렷하지 않지만, 뭔가가 잡힐 듯 말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입질이 오는 낚싯대를 부여잡고 있는 것 같았다. 수면 아래 뭔가가 찌를 문 것만은 확실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일지 아니면 대어일지는 끌어 올려 봐야 알 테지만.

“나 바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입 모양을 분석해 봐야겠어.”

한 중위는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조이에게 태블릿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조이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잠깐만…….”

한 중위 말대로 눈으로 뚜렷한 뭔가를 확인할 수 없다면 입 모양을 분석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조이는 한 번 더 영상을 훑어보았다. 여전히 기시감을 자극할 뿐이었다. 오감을 뛰어넘어 조이의 육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이 영상 안에 자신이 아는 뭔가가 있다고.

다시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스쳐 지나갔던 기억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분명 저 모습이 익숙했다. 어디선가 봤을 수도 있다. 저와 비슷한 뭔가를.

“아……!”

조이는 두 영상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둘 다 환자 옆에서 입을 벌리고 말을 했다는 점. 그리고 이내 폭주가 일어났다는 점. 그리고 조이의 기시감을 자극하는 저 둘의 입 모양이 며칠 전 조이를 충격에 빠트렸던 이의 입 모양과 닮았다는 점.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여 있었다. 비슷한 입 모양. 조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 금붕어처럼 저들의 입 모양을 따라 뻐끔거렸다.

“반짝…? 반짝… 작은 별?”

태블릿을 움켜쥔 조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아버지 입에서 그 노래가 나오자 얼마나 황당했던가. 평생 한 번도 불러 주지 않았던 자장가.

간병인의 입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 이게 우연일까? 짝이 맞지 않아 따로 분류해 놓았던 기억들이 조이의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튀어나와 모아졌다.

“한 중위… 최면으로… 정보를 캐낼 수도 있다고 했지?”

“그렇지. 뛰어난 최면술사는 한 시간 안에 어린 시절 기억까지 캐낼 수 있어.”

“혹시… 특정 행동을 하게 만들 수도 있어? 도… 도둑질을 하라고 하거나. 그런 거.”

“가능은 할 텐데… 그런 능력은 정말 드물어. 극소수만 할 수 있는 능력이야.”

조이는 맨몸으로 겨울바람을 맞은 듯 온몸이 떨려 왔다. 한 중위 역시 조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가까이 다가와 조이를 살폈다.

“1등급 최면술사면?”

“그 정도 되어야 할 텐데, 1등급 최면술사는 딱 다섯 명 정도야. 아니 이제 네 명이지. 한 명은…….”

“!!!”

그 순간 조이의 귓가로 끔찍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와의 추억을 상징하는 노래였지만, 아버지 때문에 끔찍한 소음이 된 음악.

“아… 안 돼!!”

조이는 괴성을 지르며 조하가 있는 동관으로 달려갔다. 건물 입구로 들어서자 서쪽에서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조하야!! 조하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저 소리가 조하의 귓가에 닿기 전에 조하의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조하가 저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조이의 조급한 마음을 다리가 따라 주질 않았다.

“달려! 안조이! 달리라고!”

조이는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가 미워 퍽퍽 때리기도 했다. 허상에 쫓기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계단을 올랐다. 조하가 있는 병실 문이 보였다. 그 순간 지지직거리며 스피커가 작동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 돼! 안 돼!!”

조이가 만들어 낸 끔찍한 환청인지 아니면 저 소리가 진정으로 들려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저 멀리서 폭발음이 도미노처럼 들려왔다. 소리에 다리가 달렸다면 저러할까? 거인의 발걸음처럼 땅을 울리는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이의 두 눈은 겁에 질린 것처럼 커다랗게 떠졌다.

쾅.

쾅.

쾅.

“조하야!”

조이는 조하의 이름을 부르며 다급하게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조……!”

그런데 병실 안에는 조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가 있었다.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싸우는 표정. 그럼에도 조하를 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의지를 담은 눈빛.

잠시 멈칫하던 조이는 서둘러 조하를 둘러업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저 폭발이 병실을 덮치기 전에 조하를 데리고 탈출해야 했다.

“빨리 따라오세요! 건물이 무너질지도 몰라요!”

‘쾅’ 하고 또다시 폭발음이 들려왔다. 지진이 난 것처럼 건물이 흔들렸다. 비틀거리던 조이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조하의 귀를 막고 있던 간병인 역시 그러했다. 진동이 멈추자 조이와 간병인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에스퍼의 연쇄 폭주로 비상이 걸린 군에서는 화재를 진압하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구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이와 간병인은 혼란을 틈타 군부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둠이 짙게 내린 도로를 한참 동안 달리던 조이는 백미러로 뒷좌석에서 조하를 살피고 있는 간병인을 바라보았다.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오늘 제가 누굴 구조해 왔는지 아세요?”

“…….”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아셨나요?”

“…….”

조이의 말이 끝나자 간병인은 울음을 터트렸다.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한참 동안 오열하던 간병인은 미안하다는 말을 작게 속삭일 뿐이었다. 간병인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왜 아들이 이런 미친 짓을 벌였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다.

“잠시 쉬었다가 가죠.”

조이는 그제야 무작정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귓가를 때리는 거대한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콧속으로 탄내가 맡아지지 않을 때까지.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조이는 차가운 새벽바람을 들이마시며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표지판에 하뉨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권명이 떠올랐다. 꼭 하뉨에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말하던 그 모습이.

그 순간 조이의 주머니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조이는 떨리는 손으로 통신구를 확인했다.

“하아…….”

북부에서의 일이 곧 마무리될 거라는 희망적인 메시지. 그 끝에는 보고 싶다는 달콤한 말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권명이 그리웠다.

조이는 한참 동안 통신구를 매만졌다. 권명의 전화번호를 여러 번 눌렀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처음으로 권명과 통화하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 연락하는 게 맞는 걸까? 전화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조하를 데리고 탈출했다고?

그날 밤 조이는 끝끝내 전화번호 끝자리를 누를 수 없었다.

* * *

조이와 간병인은 조하를 데리고 남쪽으로 향했다. 사건 현장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있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조이도 간병인도 차를 돌리지 못했다.

라디오를 시작으로 뉴스에는 연일 폭발 사고가 보도됐다. 조이가 아는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날 폭발이 에스퍼의 폭주로 인한 것이라는 내용은 삭제되었고, 1등급 최면술사가 배신했다는 내용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연구소가 폭발한 것이라고 보도됐다.

군의 수작이 훤히 보였다. 에스퍼는 동제국의 희망이었다. 제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에스퍼가 연쇄 폭주를 일으켰다면 더 이상 동제국의 마스코트가 되지 못할 테니까. 또한, 서제국의 소행이라고 하기에는 제국민으로부터 날아올 질타가 두려웠겠지. 국경선도 아닌 투뤼에서 폭발이 일어났으니까.

그럼에도 군을 향한 분노를 억누를 수 없는 것은 폭발 물질을 가지고 사라진 용의자에 조이의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겁한 놈들.”

조이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을 비난하는 저 방송을 끄려 했으나, 전원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화면 가득 보이는 잘생긴 얼굴 때문에.

“현재 도주 중인 용의자를 찾기 위해 군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와 닮은 사람을 보신 분은 군으로 연락하십시오. 아니 제 개인 연락처로 연락하세요! 제 번호는…….”

권명이었다.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뉴스에는 권명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이처럼 권명도 범죄를 저지른 용의자로 등장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권명은 멀끔한 군복을 입고 있었고, 안조이 중위 탈영 및 폭발 사건을 전담하게 되었다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북부에서의 일을 매듭짓거든 군을 나간다고 했던 권명은 여전히 군인 신분이었다. 변태 같은 말만 내뱉던 입으로 수사 방향에 대해 떠들었다. 무척 달라 보였다. 꼭 배우 같았다. 본인 성격과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

‘보통 돈 놈이 아닌데… 저런 연기를 하네…….’

조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만약 권명의 첫인상이 저렇게 멀쩡했더라면, 태혁 대신 권명을 페어로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조이는 멀쩡하고 멀끔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권명…….’

때때로 조이는 권명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다. 몇 번이나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수십 번의 시도에도 조이의 마음은 전화기를 내려놓으라고 결론을 내렸다.

권명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웠다. 태혁처럼 권명 역시 조이를 설득하려 한다면? 군으로 돌아오라고 말한다면?

“후우… 아직은 아니지. 아직은…….”

조이는 아직 돌아갈 수 없었다. 조하를 살릴 희망을 발견했으니까. 간병인은 지난밤 조하가 최면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조이에게 털어놓았다. 간병인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제국으로 넘어갔을 것이라 여겼던 아들에게서 연락이 왔었다고 했다.

자기 아들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차마 전화를 받을 수 없었지만, 두 번의 폭발과 아들이 구조됐으니 만나러 오라는 군의 연락을 받고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고 했다.

조이 역시 한 중위가 보여준 영상을 보고서야 폭주의 원인이 최면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정신계 에스퍼의 힘은 같은 돌연변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군에서도 최면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서제국에서는 에스퍼에게 최면을 거는 방법을 알아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최면 당한 에스퍼를 동제국이 알아서 회수해 가길 바랐던 것이었고.

간병인은 이곳 하뉨에 최면술로 유명한 박사가 있다며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겠다고 나섰다. 한때 송영식 대위가 그 박사에게 수업을 들었기에 그 친분을 이용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이곳으로 박사님을 모셔 올게요. 만약 일이 틀어지면 옆집 문을 두들길 테니까 바로 도망가요.”

간병인을 생각하면 조이는 여전히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날 병실 문을 열자 조이의 눈에 보인 것은 조하의 귀를 틀어막고 있던 간병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끔찍한 연쇄 폭주를 일으키고, 조하를 죽일 뻔한 이는 간병인의 아들이었고.

역시 이상한 관계였다. 조이와 간병인은.

* * *

간병인이 나간 후 조이는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훔치자 거울 속에는 낯선 이가 있었다. 뉴스에 조이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오는 탓에 검은색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했다.

물기를 닦은 조이는 어색한 안경을 쓰고 7구역에서나 입을 법한 허름한 옷을 걸쳤다. 조이는 콧수염까지 붙이고 싶었으나 이는 간병인이 말렸다.

‘누가 보면 코스프레하는 줄 알 거예요.’

조이의 얼굴에 콧수염이 가당키나 하냐는 말투였다. 조이는 내심 아쉬웠다. 콧수염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조이는 낯선 이의 신원을 확인하듯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20년 넘게 검은 머리로 살았는데, 갈색 머리도 나쁘지 않았다.

똑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이는 조심스럽게 문가로 다가가 문밖을 살폈다. 저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이 조하를 단번에 깨워 줄지도 모른다.

“어서 오세요. 박사님.”

“아… 저는 박사님 밑에서 수련 중인 허뮨입니다.”

“예? 그럼 박사님은?”

“출장 중이세요. 어제 막 떠나셔서, 2주 뒤에나 돌아오실 텐데.”

조하를 깨우는 이 여정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 조이는 자신을 허뮨이라고 소개한 여성에게 조하의 상태를 간략하게 소개했다.

“그럼 어떤 소리를 듣고 이상 반응을 보인다는 말씀이시죠? 구체적으로 어떤 이상 반응이죠?”

“자살이랑… 비슷해요. 절대 그 소리를 듣게 해서는 안 돼요.”

“흐음… 그런 고약한 최면을 걸어 놓다니. 이런 어린아이에게. 이 일은 제가 박사님께 꼭 말씀드려야겠네요.”

조이는 허뮨을 통해 최면에 대해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최면 감수성에 따라 최면에 잘 걸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 에스퍼에게 최면을 거는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것.

“에스퍼에게도 최면을 걸 수 있다는 건가요?”

“예, 논문으로 본 적이 있어요. 부상당한 에스퍼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가이딩 외에 최면을 사용해 보자는 취지였죠. 억지로 최면 감수성을 높여서요. 의식을 아예 차리지 못하는 상태나 신체적으로 약해진 상태에서는 최면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봤어요. 물론 가이딩까지 성공한 건 아니라 실패한 실험이었지만.”

“예를 들면. 굶주림은요?”

“그것도 방법이겠지만 너무 야만적이어서 그런 방법으로 실험을 하지는 않았어요.”

구조 당시, 조하를 포함한 아이들은 극심한 굶주림을 겪은 것처럼 말라 있었다. 또한 군의관 말에 따르면 동물을 안락사할 때 사용하는 약품을 아이들에게 사용한 것 같다고 했었다. 그 탓에 구조된 아이들은 죽음같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서제국에서는 에스퍼에게 최면을 걸 수 있는 완벽한 상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굶주림과 수면.

“그럼. 그런 에스퍼에게 걸린 최면을 푸는 건 더 어려운 일이겠죠?”

“아니요. 논문에서는 최면을 건 당사자가 최면을 거두는 것으로 실험을 종료해서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만약…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가 최면을 거둬야 한다면요?”

“그렇게 되면 쉽지는 않겠네요.”

조하를 깨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최면을 건 당사자로 유력한 송영식이 최면을 거두어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미친놈에게 조하를 맡길 수는 없었다. 또한 그놈이라면 군에 잡혔거나 탈출했을 테니 지금으로서는 그놈을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조이는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박사에게 최면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혹시 박사님이 어디로 출장을 가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조금 급해서… 그쪽으로 직접 찾아뵙고 싶어서요.”

“아… 사실, 7구역으로 출장 가셨어요.”

“7구역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조이가 찾는 박사는 언젠가 7구역에 있는 정신병원 원장이 말했던 그분 같았다. 하필 7구역이라니.

“감사합니다. 혹여 박사님께 연락이 닿는다면 7구역으로 저희가 직접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조이는 허뮨을 보낸 후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간병인이 한발 빨리 조하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조이는 그동안 미뤄 두었던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조하랑 저는 7구역으로 향할 겁니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세요.”

“…….”

조이는 곧바로 조하를 업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간병인이 조이의 손을 잡아 왔다. 조이는 순간적으로 간병인의 손을 매섭게 쳐 냈다. 간병인은 그럼에도 조이의 손을 다시 잡아 왔다.

“염치없는 거 압니다. 그래도… 조하가 깨어나는 것까지는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조하가 깨어나거든 그때는… 알아서 사라질 거에요. 중위님.”

“이런다고 송영식이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용서받으려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런… 그런 마음 품은 적도 없어요! 이번에는 꼭 살리고 싶어서 그래요. 이번에는…….”

간병인은 송영식 밑으로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조이 역시 송영식 대위의 신상정보를 통해 확인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송영식의 잘못으로 사망한 줄은 몰랐다.

“조하처럼 코마 상태였어요. 가끔 눈을 파르르 떨고 깨어날 것처럼… 그랬는데…….”

언젠가 조하의 눈이 파르르 떨리는 증상을 보고 조이는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조하가 깨어날 것만 같았으니까. 그때 간병인은 조이의 심정을 이해한다며 진정시켰었는데, 그것이 결국 간병이 자신의 경험담이었다. 간병인은 조하를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제발요… 중위님.”

조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 여부가 고민되는 것은 아니었다. 간병인의 마음만큼은 진실할 테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폭발 속에서 조하의 귀를 틀어막고 있지도 않았을 테고.

“조하가 깨어나거든 바로 떠나세요.”

“예. 그럴게요. 정말 고마워요. 중위님.”

간병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이 이상했다. 그 말은 사실 조이가 해야 하는 말이지만, 그의 아들이 떠올라 고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다.

간병인을 데리고 가는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 탈출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계획한 일이 무엇 하나 있었겠는가. 그저 조이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서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그 마음은 조이에게 7구역으로 어서 달려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7구역. 조이가 탈출하고자 노력했던 곳이자, 모든 일의 시작점 같은 곳이었다. 조이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미약하게나마 희망이 느껴졌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곳이 7구역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희망.

“출발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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