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두 번째 작전
권명이 어느 정도 회복하자 작전회의가 시작되었다. 태혁은 수색 작전을 훌륭하게 이끌었지만, 다음 작전의 지휘권을 권명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군에서는 다음 작전을 수행할 장교로 권명을 콕 짚어 지명했다. 조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작전회의가 시작되자 조이는 군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출신인 권명은 어찌 된 일인지 서제국 북부의 지리와 정세를 꿰고 있었다.
“시추 시설을 폭파해야 한다면, 이곳을 선택하는 게 맞아.”
권명은 지도에 표시된 시추 시설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으로 가려면 이동 시간이 길어져. 위험 부담도 커지고.”
이 일대는 민병대가 수시로 들쑤시는 곳이었다. 민병대는 소박하게 농사나 짓고 사는 사람들을 무지막지하게 끌고 갔다. 그렇기에 태혁은 이동 거리가 가까운 곳을 공격하자는 입장이었다. 괜히 민병대 눈에 띄어 봐야, 아까운 피만 흘리게 될 테니까.
“안 돼. 그쪽은 앞으로 10년 동안 뽑아 쓸 원유가 매장돼 있어.”
“그럼 여긴?”
조이는 권명이 목표로 삼는 시추 현장을 가리켰다.
“여긴 다 떨어져 가는 빈 깡통이야. 공포탄을 날려야 하는데, 실탄을 쏘면 되나.”
이번 작전은 북부의 석유 부자들을 압박하면서도 그들과 협상을 맺을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았다. 즉 겁을 줄 정도로만 공격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가만 보니 군에서 북부를 노리는 이유가 있었다. 석유 자원이 갖는 위상이 이전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석유는 여전히 중요한 에너지 자원 중 하나였다. 특히 군부대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군용차는 여전히 석유를 먹여야 굴러갔다.
그런데 이 석유 자원은 참으로 불공평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서제국의 광대한 영토 안에는 이런 석유가 솟아나는 지역이 세 곳이나 있었다. 그중 두 번째로 매장량이 많은 곳이 조이가 있는 이곳 북부였다.
동제국에서도 시추선을 띄워 석유를 뽑아내지만, 그 양이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서제국과의 전쟁이 발발하고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것 역시 석유 부족이었다.
“우린 이곳으로 간다.”
권명은 N62 구역에 있는 시추 현장을 가리켰다. 태혁 역시 이번 작전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작전회의가 끝나자 조이는 권명 옆으로 다가갔다. 조이와 권명은 대화를 꽤 많이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대화라는 게 대부분 장난이나 놀리는 말이었다.
조이는 발령을 받은 후, 권명과 한 세트처럼 붙어 다녔지만 권명의 과거에 대해 물은 적은 없었다. 조이의 어두운 과거를 꺼내고 싶지 않아서였고, 또 권명의 과거가 그리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은 권명에 대해 묻고 싶고, 알고 싶었다. 문뜩 이런 감정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알고 싶다는 이 마음이.
“너. 수도 출신 맞지?”
서류를 정리하던 권명은 조이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조이의 질문이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권명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조이 쪽으로 아예 몸을 틀었다.
“응. 수도에서 태어났어. 넌?”
“나도… 원래 수도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때문에 7구역으로 이주했어.”
“반역?”
조이는 대충 비슷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이는 권명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권명은 기다렸다는 듯 조이에게 질문을 쏟아 냈다.
“그럼 수도에서는 몇 살 때까지 살았어?”
“10살 되고 얼마 안 돼서 7구역으로 이주했어.”
“어머니는? 늘 아버지나 동생 얘기만 했었어. 너.”
권명은 조금 조심스럽게 어머니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벌써 10년 전이었다. 여전히 어머니가 그리웠지만 비밀로 삼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조이는 순순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권명은 수도에서 살 때는 어디에서 살았는지, 7구역으로 이주한 후 어떻게 살았는지 등등 오만가지 질문을 쏟아 냈다. 어쩐지 권명의 모습이 심문 장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는 전생 이야기까지 꺼낼지도 모르겠다. 조이는 권명의 말을 막아 세우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근데 왜 이렇게 잘 알아? 북부에 잠깐 살았어?”
권명은 조이의 순수한 호기심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조이 형아는 정말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
“우리 아버지. 그 인간이 무슨 일 하는지 몰라?”
“모르는데……?”
권명의 아버지는 그저 돈이 많은 사업가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사업을 했더라?’
* * *
권명의 말대로 조이는 권명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권명의 아버지는 수도에서 꽤 유명한 자동차 회사 대표였다. 사관학교 출신 중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고 했다. 조이야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라 몰랐던 거지.
조이가 군에서 즐겨 탔던 군용차 역시 그 회사 제품이었다. 권명 놈, 그저 수도의 도련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꽤 대단한 집 아들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권명은 돈을 꽤 잘 썼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집안 아들이니, 그 정도야 말 그대로 껌값이었겠지.
“자동차뿐만 아니라 전략자원 밀수도 해. 돈 되는 건 다 하는 인간이야.”
그런데 권명은 그다지 아버지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인간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조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부를 때나 쓰던 단어였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권명의 아버지는 딱 봐도 냉철한 사업가였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사업 각각이 뛰어난 것 같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제조라인을 군용차 생산 목적으로 개조했고, 그뿐만 아니라 전략자원 밀수에도 뛰어들었다. 권명의 아버지가 전략자원 중 어떤 자원에 깊게 관여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석유일 테지.
사장이 7구역으로 쫓겨나기 전 큰 사고를 친 곳은 북부였다. 그리고 권명이 폭주를 일으킨 곳 역시 북부였고. 이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두 형제가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는 모르지만, 석유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군에서는 굳이 권명을 지목한 것일 테고.
언젠가 권명의 통화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권명은 죽을 뻔한 북부로는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소리쳤었다. 그런 권명이 또다시 북부에서 작전을 수행하게 된 것이었다. 조이는 어쩐지 이 우연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심각해? 내가 그 인간 아들이라니까 정떨어졌어?”
“아니 뭐… 우리 아버지는 도박꾼이야. 자식도 팔아 버리는… 그에 비하면…….”
권명은 자신의 아버지도 자식 팔아먹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며 피식 웃었다.
“너… 이번 작전은 안 불안해?”
“뭐?”
“예전에 조하를 구하러 가기 전에 너 불안하다고 했었잖아.”
“불안해.”
권명은 조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불안하다고 말했다. 혹여 이번에도 작전 도중 사고가 일어나는 건 아닐까? 조이는 권명을 두고 온 이후 끔찍한 악몽과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또다시 그런 고통의 시간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위험 부담이 큰 작전이라?”
“위험할 게 뭐 있어. 단순 폭파인데. 이건 혼자서도 할 일이야.”
“그럼 뭐가 불안한데?”
권명은 여전히 조이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리 와 봐.”
뜨거운 권명의 손이 조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조이는 에스퍼도 아닌데, 권명과 이렇게 살을 맞대고 있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안조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돌아가면?”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한 말이야.”
늘 장난기 가득하던 권명의 눈이 무척 진지해 보였다.
“지금 하면 안 돼?”
“안 돼.”
조이는 권명이 이렇게 뜸을 들이니 괜스레 불안했다. 저런 표정으로 권명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뭔데? 그냥 지금 말해.”
“쓰읍! 기다려!”
권명은 조이의 얼굴 앞으로 장난스럽게 손바닥을 펴 보였다. 강아지를 훈련하듯. 조이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자 권명의 얼굴에도 작게 미소가 피어났다. 다 죽어 가던 얼굴에 이제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조이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작전에 있어서 권명은 공수표를 남발하는 편이 아니었다. 권명 입에서 이번 작전은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했으니까 정말 그러할 테지.
* * *
며칠 뒤 마을 밖으로 외출을 나갔던 권명은 석유 다섯 통과 위장복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번 작전을 위해 모든 대원들은 N62 구역까지 이동해야 했기에 위장복이 필요했다. 군복을 입고 이동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그 위장 역할이 일용직 노동자인 듯했다.
조이는 낡은 체크 셔츠와 군데군데 석유 얼룩이 진 멜빵바지를 입었다. 거울 속에는 가이드로 발현한 후 볼 수 없었던 과거의 조이가 있었다. 만약 조이가 군인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모습으로 7구역에 있었을 것이다.
어쩐지 평행우주 속 또 다른 나를 만난 듯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딸깍.
등 뒤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울 가장자리에 권명의 모습이 보였다. 권명은 낡은 가죽 재킷과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권명의 모습 역시 낯설었다. 수도의 도련님답게 군복이 아닌 사복을 입어도 늘 고급스러운 옷만 입었는데, 이런 낡은 옷차림이라니.
또한 얼굴에는 이상한 흉터 자국이 나 있었고 듬성듬성 밴드가 붙어 있었다. 눈에 띄는 반질반질한 낯짝을 가리기 위함일 것이다.
“후우…….”
권명은 거울 속 조이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조이. 나 페티쉬 있었나 봐.”
그건 또 무슨 소리일까? 권명은 조이의 어깨에 불편하게 턱을 기댄 채 거울 속 조이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또렷하던 시선이 점점 몽롱하게 변해 갔다.
“페티쉬? 그게 뭔데?”
“난 공사장 반장이고 넌 일용직 노동자인 거지. 그리고 일하라고 불러 놓고 열심히 뒤를 따먹는 거야. 밤새도록. 뭔지 알지?”
“아니. 모르겠는데……?”
“아니면…….”
옆구리를 훑던 권명의 손이 조이의 엉덩이에 닿았다. 옷 위로 조이의 엉덩이를 꽉 움켜쥔 채 권명은 또 다른 예시를 들었다.
“나는 과수원 주인이고 너는 농장 인부인 거야. 너는 사과를 열심히 따고 나는 네 구멍을 열심히 따고… 일석이조인 거지. 하아… 상상해 봐. 너도 꼴리지?”
조이의 황당하다는 표정을 본 권명은 공감해 달라는 듯 또 다른 예시를 줄줄 늘어놓았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조이가 뒤를 따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권명은 평소와 달리 정도도 모르고 떠들고 있었다. 조이의 콧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촌이면 바다 한가운데서 그 짓을 하는 거야. 물고기 대신 널 잡는 거지. 그물에 걸린 너를 막…….”
“이… 이…! 미친놈!”
더 이상 들어 줄 수 없었다. 조이는 기겁을 하며 권명을 밀쳤다. 살짝 밀려났던 권명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조이의 귓불을 ‘앙’ 물었다. 조이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젖은 소리가 들려왔고 귓불에 스치는 혀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아읏!”
“안조이. 넌 어떻게 된 게 귓불도 맛있냐.”
권명은 조이의 귀를 온통 삼켜버릴 듯, 입 안에 넣고 혀로 애무했다. 조이보다 머리 하나는 큰 권명이 조이를 꽉 끌어안고 귀를 애무하는 모습이 거울을 통해 생생하게 보였다.
“읏, …그만해……!”
“잠깐만…! 하아… 나 아파지려고 해.”
아픈 거면 아픈 거지, 아파지려고 하는 건 뭐지? 순간 조이의 눈이 양쪽으로 뾰족해졌다. 설마 그동안 아프다는 게 성기였을까? 거칠게 조이의 엉덩이에 비벼 대는 성기가 느껴졌다. 옷을 뚫고 파고들듯.
며칠 전부터 권명은 조이의 엉덩이 사이를 매만지며 ‘구멍은 잘 있어?’ 같은 개소리를 늘어놓았었다. 환자인 권명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조이는 단호하게 권명의 손을 밀어냈었다.
의무병은 분명 권명의 몸에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조이가 보기에 권명은 아픈 게 틀림없었다. 본국으로 돌아가거든 조이는 진지하게 권명에게 정밀검사를 받아 보라고 권할 생각이었다.
‘단단히 맛이 갔다. 특히 머리가! 아니 고추도!’
* * *
짙은 어둠이 깔린 밤, 작전이 시작되었다. 자작나무숲을 벗어나자 권명이 구해 놓은 낡은 트럭이 보였다. 어디서 저렇게 낡은 물건을 구해 왔는지, 뒤에서 사람이 살짝 밀어야지만 시동이 걸리는 고물이었다.
“자, 올라타!”
재빨리 트럭에 올라탄 태혁이 조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조이는 안 그래도 뜀박질이 버거웠는데 잘됐다는 생각에 손을 내밀었는데 옆에서 짱돌 같은 놈이 조이를 들이받았다. 비틀거리며 한쪽으로 밀려난 조이는 옆을 노려보았다.
“고마워!”
한솔은 얄밉게 조이를 밀친 후 태혁의 손을 잡고 트럭 위로 올랐다. 조이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새내기 대원이 태혁을 대신해 조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한솔은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조이를 바라봤으나, 조이는 저놈이 그냥 우스웠다. 유치한 놈.
달구지처럼 덜덜거리는 트럭이 어둠을 가르며 N62 구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북부의 매서운 바람이 조이를 휩쓸고 지나가자, 점점 더 몸이 작게 말렸다. 태혁은 종종 조이에게 말을 걸었으나, 번번이 한솔이 끼어들어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이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조이는 안 그래로 태혁과의 대화를 피하고 있었다. 권명을 되찾고 나자 조이는 다음 숙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 수색 작업이 시작되기 전, 태혁이 조이에게 경고하듯 내뱉은 말이 있었다. 결정을 내리라는 말.
‘결정이라…….’
조이는 그 결정이 어렵다기보다는 두려웠다. 조이가 하는 선택은 늘 끔찍한 후폭풍을 일으켰으니까.
한참을 거친 도로를 내달리던 트럭 앞으로 무수한 불빛이 보였다. 밤하늘에 보이는 반짝거림은 희망이지만, 이런 깜깜한 도로에서 보이는 불빛은 불길함이었다.
‘우려했던 민병대인 걸까?’
일부러 짙은 어둠이 내리고서야 출발했는데, 북부의 민병대는 잠도 없는 듯했다. 놈들은 조명을 이리저리 비추며 차를 멈추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조이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태혁을 바라보았다. 태혁 역시 불길한 낌새를 감지했는지 의자 밑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곳에는 총이 숨겨져 있었다.
끼이익-
덜덜거리던 차가 멈추고, 낡은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권명이 민병대 앞으로 다가갔다.
‘겁도 없지. 저놈!’
조이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살짝 몸을 일으켰다. 권명의 입에서는 동제국어가 아닌 북부의 방언이 튀어나왔다. 잘은 모르지만, 통역병보다 능숙해 보였다.
조이와 태혁은 권명이 내뱉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원들 중 유일하게 통역병은 권명의 말을 알아듣고는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왜? 뭐라는 거야?”
“그게…….”
웃음을 참던 대원이 막 권명과 민병대가 주고받았던 대화를 통역해 주려는데, 권명이 민병대 중 하나를 잡아끌며 트럭 뒤로 데려왔다. 누가 보면 십년지기 친구인 줄 알 것이다.
권명은 대원들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뭐라고 떠들었다. 일단, 안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조이의 차례가 오자 권명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조이에 대해 설명했다.
“일꾼 1, 일꾼 2…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애인이야. 잠시만 떨어져도 자지가 허전해서 일할 때마다 달고 다녀.”
그 말이 끝나자 통역병과 민병대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저놈이 대체 뭐라고 지껄인 거야?’
조이는 꽥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왜 앞 담화를 하느냐고. 하지만 조이가 입을 열어 봤자, 동제국어가 튀어나올 테니 위험했다.
* * *
무사히 검문을 빠져나온 대원들은 일력 사무소 앞에 도착했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이 여정이 수월하게 끝난 것 같아 조이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조이는 통역병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아까 뭐라고 한 거야? 왜 그냥 보내 준 거래?”
“아… 대위님이 시추 현장 지원 가는 노동자라고 말했어요.”
“그게 다야?”
“예? 예…….”
대원은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그 끝을 흐렸다. 조이는 그저 권명이 헛소리를 했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석유 부자들은 민병대 조직을 위해 소수민족이나 도심 외곽에 사는 이들을 집중적으로 징병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도심에 사는 이들 대부분은 유전시설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욕심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석유 부자들은 게릴라전을 계획하면서도 자신들의 공장이 쉴 틈 없이 돌아가길 바랐다. 그 때문에 시추 현장으로 지원을 하러 가는 거라는 권명의 변명이 쉽사리 먹혀들어 간 것이었다.
조이는 권명의 말대로 이번 작전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유 부자들 역시 게릴라전에 그리 사활을 건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협상에 조금 더 유리한 고지를 잡기 위한 과도한 액션이랄까?
권명이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조이와 대원들은 모두 한곳으로 파견될 수 있었다. 폭파할 시추 현장. 권명은 이곳 북부 말을 통역병보다 잘하는 게 맞았다. 권명이 무슨 말만 하면 대화 상대들이 빵빵 웃음을 터트렸다.
담배는 피우지도 않던 놈이 스스럼없이 인력사무소 소장과 맞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반면 조이와 대원들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트럭 위에 앉아 있었다. 추위에 떨며.
“농땡이 부릴 생각 하지 마! 작업반장한테 안 좋은 소리 들려오면 바로 모가지니까!”
소장은 조이를 향해 윽박지르듯 소리를 치고는 트럭을 탕탕 두들겼다. 출발하라는 듯.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대충 눈치로 때려잡을 수 있었다. 일 똑바로 하라는 거겠지. 7구역에서 만났던 사장들은 저런 표정으로 조이를 쥐 잡듯 잡았었다.
‘왜 하필 나만…….’
살이 내려서 그런지 인력사무소 소장은 조이를 보며 혀를 쯧쯧 찼었다. 이래 봬도 조이는 7구역에서 고된 노동으로 다져진 몸이었다.
‘날 뭐로 보고!’
하지만 시추 현장에 도착하자 조이는 인력사무소 소장의 우려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조이는 이곳을 폭파할 목적으로 온 것인데, 땡볕에 밭을 가는 소처럼 일을 해야 했다.
아스팔트를 삽으로 긁어낸 후 곧바로 시추 작업에 투입됐다. 무척 고된 노동이었다. 7구역에서 단련된 몸도 비명을 지를 정도로.
권명은 자연스럽게 폭탄을 설치한 후, 6시에 퇴근하면 완벽 범죄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럴 틈이 도저히 없었다.
시추탑 밑에서 10m가 넘는 거대한 드릴 파이프를 연결하고, 드라이버 역할을 하는 장비를 끌어와 장착해야 했다. 꽂고 빼고. 또, 꽂고 빼고.
“으윽… 힘들어…….”
“어이! 안 씨. 힘들어?”
그사이 권명은 폭탄 설치를 끝낸 모양이었다.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추탑에는 가스 누출로 대형 폭발이 일어날 것을 예방하기 위해 폭발 방지 장치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권명은 그 장치를 제거하고 시추탑마다 폭탄을 하나씩 박아 넣었다. 이제 조이가 있는 곳에 폭탄을 설치할 차례인 듯했다.
“윽… 언제까지 해야 해? 죽겠어.”
지독한 원유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권명은 조이의 모습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크게 웃는 건 또 처음 보았다. 막냇동생의 재롱을 보는 형의 표정으로 조이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렸다. 마치 조이가 귀엽다는 듯. 소름 돋지만 권명의 표정이 정말 그러했다.
“안조이. 너 일당 받으러 왔냐? 왜 이렇게 열심히 해?”
그 순간 조이는 깨달았다. 모범생의 단점을. 조이는 사관학교 시절 교관이 시키는 일을 가장 열심히 따라 하는 생도였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작업반장이 알려 준 순서에 따라 시추 작업을 땀나게 따라 하고 있었다. 이곳에 침입한 목적도 잊은 채, 마치 시추 작업이 자신의 본업이라는 듯.
휙휙 고개를 돌려보니, 대원들 모두 장비를 대충 잡고 시늉만 하고 있었다.
‘어쩐지…! 다들 설명을 제대로 안 듣더라니!!’
* * *
고된 노동을 끝낸 후, 조이와 대원들은 다시 낡은 트럭에 올라탔다. 조이는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는데, 권명은 태연하게 인력사무소 소장에게 일당을 받아 챙기기까지 했다.
“자. 안 씨는 일당 두 배로 넣었어.”
권명은 역할극에 심취한 듯 조이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미친놈. 저놈을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할 텐데.
대원들을 태운 낡은 트럭은 인적이 드문 숲을 향해 한참을 달렸다. 마침내 귀신 나오게 생긴 산장 앞에 멈추어 섰다. 창문 중 온전한 것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비라도 왔다가는 지붕에서 비가 주룩주룩 샐 것 같은 낡은 건물이었다.
“여긴 뭐야……?”
“아지트. 들어가. 먹을 거 구해 올게.”
“식량? 같이 가!”
조이는 권명을 따라가려 했으나, 같이 가자는 말을 듣지 못했는지 낡은 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같이 가자니까…….”
조이는 멀어지는 트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산장 안에는 태혁이 지친 대원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조이는 그런 태혁에게 다가가 이제 모든 임무가 끝난 것이냐고 물었다.
“아직. 협상이 남았어. 이번 폭파로 그쪽에서 먼저 제안이 오면 다행일 텐데, 아니라고 하면 추가 폭파 작전이 있을 거야.”
“또? 이제 일용직으로 잠입할 수도 없을 텐데…….”
“군에서는 협상이 타결되기 전까지는 구조헬기를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야.”
지독한 것들. 적진 한가운데 떨궈 놓고는 살려 줄 만한 가치를 보이라는 태도였다. 이곳에서의 체류가 길어질 것 같았다. 조이는 조용히 고민에 빠졌다. 권명도 구해 냈고, 폭파 작전도 어찌 되었든 무사히 끝냈으나, 조이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병원에 있는 조하가 걱정됐다. 혹시라도 조하가 기적적으로 깨어난 건 아닐까? 그 겁쟁이가 형은 어디 있냐고 찾는 건 아닐까? 헛된 상상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형아’라고 부르던 조하의 옛 모습이 떠올랐다. 볼품없이 마른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조하는 꽤 귀여울 것이다.
* * *
그날 밤이 지나 새벽이 올 때까지 권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이는 권명을 기다리다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침낭으로 기어들어 갔다. 설핏 잠이 든 것 같은데, 등 뒤로 누군가 조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권명……?”
“…….”
아무 말도 없었지만 조이는 자신의 뒤에 있는 이가 권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찬 기운을 달고 나타난 권명에게는 피비린내가 났다. 조이는 몸을 돌려 킁킁 냄새를 맡았다.
“너… 어디 다쳤어? 피 냄새 나.”
“면도하다 다쳤나 보지. 자자.”
피 냄새가 짙게 나는데도 권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다. 꽤 피곤한 모양인지 조이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밤부터 이어진 긴 작전이 육체적으로 뛰어난 에스퍼에게도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조이 역시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지역신문과 뉴스에는 시추 현장 폭발 사고가 크게 보도됐다. 대원들 모두는 협상이 타결되기 전까지 이곳 산장에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기에, 뉴스 보도에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예정대로 시추 현장은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지만, 대원들은 기뻐할 수 없었다. 낯선 언어로 내뱉는 말이었지만, 앵커의 표정과 어조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군에서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반격을 가해야 한다고 난리네요. 다들…….”
태혁의 말한 것처럼 어쩌면 제2의 폭파 작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뒤이어 두꺼비처럼 뚱뚱한 중년 남성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저 사람이 누군데 뉴스까지 나와?”
“원유협회 회장이요. 10년 동안 장기 집권하던 사람이라고 하네요.”
“아. 왜 죽었대?”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네요? 어젯밤에요.”
“살해? 어젯밤……?”
그 순간 조이의 머릿속으로 여러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권명, 피 냄새, 지난밤. 원유협회 회장.
조이는 고개를 돌려 대원들 뒤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권명을 바라보았다. 조이가 꿈을 꾼 게 아니라면 지난 새벽 권명에게서 피비린내가 났었다.
‘설마……?’
조이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권명은 읽던 신문을 내려놓고 가까이 다가왔다. 조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밥 먹어. 안조이.”
침울한 대원들과 달리 권명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표정이 좋았다. 권명이 구해 온 식량이 거실 한복판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권명은 대원들에게 마음껏 먹고 마시라며 경쾌하게 소리쳤으나, 이곳에 권명과 같이 질긴 신경 줄을 가진 이는 없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서 그런지 권명은 아주 대단한 신경 줄을 가지고 있었다.
대원들은 산처럼 쌓인 식량으로 다가가 이것저것 되는대로 주워 먹었다. 대부분 반조리된 식품이거나 특별한 조리가 필요 없는 음식이었다. 조이 역시 그중 하나를 집어 먹을 생각이었는데, 권명은 굳이 조이의 팔을 잡아당겨 끝 방으로 데려갔다. 죄를 지은 것도 없건만 이렇게 숨어서 먹어야 할까?
“그냥 같이 먹지. 굳이 왜?”
“떨거지들 줄 거는 없어.”
권명은 문을 꼭 닫고는 테이블을 세팅했다. 낡아 빠진 테이블 위로 조리된 음식이 있었다. 대원들이 먹는 공장표 식품이 아닌, 식당에서 포장해 온 듯한 음식이었다. 아직도 은은하게 온기를 품고 있었다.
“빨리 먹어. 냄새 맡기 전에.”
조이는 살이 빠진 후 먹는 양 역시 확 줄어들었다.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좀처럼 입맛이 돌지 않았다. 권명은 그런 조이를 바라보며 이상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이거 먹어 봐.”
깨작거리는 조이를 보던 권명은 곧바로 다른 음식을 조이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권명 앞에 있는 식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난 됐어. 너나 좀 먹어.”
지금까지 먹을 것으로도 충분했다. 더 먹었다가는 속이 안 좋아질 것 같았다. 조이는 대충 입을 닦고 일어났다. 창문이라도 열어 냄새를 빼야 할 것 같았다. 조이 혼자 이런 호화로운 식사를 누렸다는 걸 대원들이 알면 돼지 먹보 취급할 테니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어. 안 그래도 삐쩍 마른 게, 더 마르면 어떡해?”
“하?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조하의 일도 조하의 일이지만 조이가 이렇게 된 이유 중 8할은 권명 탓이었다. 저놈이 그날 그렇게 되는 바람에 밥도 먹지 못했다는 걸 권명은 죽어도 모를 테지.
“나……?!”
권명은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눈꼬리가 휘어지며 보기 좋은 웃음을 지었다. 듣기 좋은 칭찬을 열 개쯤 들은 표정이었다.
어쩐지 권명이 저리 좋아하니, 솔직하게 말하기가 쑥스러웠다. 어쩌면 조이의 마음속에는 청개구리 한 마리가 사는지도 모르겠다.
“누… 누가 너 때문이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그런 거지!”
“그 여러 가지 이유 중 내가 있다? 몇 퍼센트나? 어? 얼마나?”
그럼에도 권명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황소처럼 조이에게 달려들더니 조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으윽!! 뭐 하는 거야!!”
조이는 어지럽다고 소리쳤으나 권명은 조이를 안은 채 빙글빙글 돌며 장난을 쳤다. ‘하하하’ 귓가로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권명이 이렇게 시원하게 웃는 모습은 또 오랜만이었다. 조이는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혁이 말했던 그 결정이라는 게 이미 조이의 마음 안에는 내려져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 * *
산장에 갇힌 지 3일이 지나고 있었다. 힘이 넘치는 대원들은 나무를 베어 내 산장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영영 둥지를 틀 생각은 없지만, 체류가 길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그들 마음속에도 피어난 모양이었다.
권명과 태혁은 본부와 소통하며 협약서를 작성했고, 때때로 권명은 혼자서 외출을 할 때가 많았다. 다른 대원들이 절대 차를 끌고 나가지 못하도록 차 키를 꼭 자신의 주머니에 보관했었다.
“중위님! 뉴스 나와요!”
우물을 손보던 조이는 새내기 대원의 말에 재빨리 산장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발전기 문제인지, 아니면 신호 문제인지 조이는 이틀 동안 뉴스를 볼 수 없었다.
권명은 자신이 고치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조이 옆에서 장난이나 칠 뿐이었다. 보다 못한 새내기 대원이 알아서 고친 모양이었다.
“뭐래? 뭐라는 거야?”
뉴스에는 국경 근처에서 민병대와 동제국 군인이 충돌했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아무래도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후속 보도에는 또다시 누군가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번에는 또 누가 죽은 걸까?
“저 사람들은 누구야? 또 원유협회?”
“네. 지난번에는 회장이 죽고, 이틀 사이에 부회장을 포함한 협회 인원 다섯 명이 죽었다네요.”
“그렇게나 많이……?”
“물갈이되는 거겠지.”
태혁은 지나가는 말로 원유협회가 내부적으로 큰 급변을 겪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이는 자꾸 저들의 죽음에 권명이 개입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권명은 지난밤에도 외출을 했었다.
“그런데 큰일이네요. 충돌했다면… 국경을 건너기가 더욱 어렵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조이는 권명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분명 권명은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윽… 뭐야?”
“권명 일어나 봐! 일어나!”
조이는 권명의 몸을 흔들어 깨웠으나, 권명은 침대에 몸이 찰싹 달라붙은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권명의 팔을 잡아당겨 일으키려 해도, 조이의 힘으로는 도저히 권명을 일으킬 수 없었다.
“윽! 아읔니. 일어나 보라고! 윽!”
조이는 여러 번 권명을 일으키려 했으나 권명은 일부러 힘을 주고 버티고 있었다. 에스퍼의 힘을 조이가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조이는 그 모습이 얄미워 권명의 옆구리를 힘껏 꼬집었다. 권명은 아프지도 않은지 ‘큭큭’거리며 조이를 놀리기 바빴다.
“밤에 안 놀아 줬다고 보채는 거야?”
“이렇게 한가하게 누워 있을 때가 아냐! 국경에서 민병대랑 우리 군하고 충돌했대! 기사 났어!”
“난 또 뭐라고.”
조이는 걱정도 안 되냐며 따져 물었다. 권명은 조이의 허리를 끌어당기더니 옆에 누우라고 했다.
“누우면 말해 주고.”
조이는 곧바로 옆에 누웠다. 권명은 보아뱀처럼 조이의 온몸을 감싸 안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비밀 얘기라고 이러는지 원.
“걱정하지 마. 다 쇼니까.”
“어?”
“그놈들은 다들 장사꾼이야. 지금이야 동제국이 우세하다지만 언제 전시 상황이 급변할지 모르잖아. 아무런 반항 없이 협약을 맺었다고 하면 서제국에서 가만두겠어?”
국경에서 있었던 충돌은 미래를 위한 약간의 보험 같은 것이었다. 권명의 표정은 정말로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뭔가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오래된 숙원을 해결한 것처럼.
“조이 형아는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나 해.”
권명의 말대로 조이와 대원들은 며칠 뒤 헬기 착륙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민병대와 동제국은 두어 번 더 충돌했지만, 그 충돌 중에도 협약서는 쉴 틈 없이 오갔다. 마침내 협약서에 온전한 도장이 찍히고 나자 동제국에서는 이송 헬기를 출발시켰다.
낡은 트럭에서 내리자, 그곳에는 수색 작업을 위해 조이와 대원들을 실어 나르던 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조이의 눈앞에 이번 여정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권명을 찾아 헤맸던 일, 죽은 듯 잠든 권명의 옆에서 조이가 간절하게 속삭였던 기도들. 그때의 기억들이 몰려오자 눈가가 시큰해졌다. 조이는 애써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안조이, 빨리 튀어 와!”
조이의 이런 감상을 방해하듯 권명이 빨리 오라고 꽥 소리를 질렀다.
‘진짜 눈치 없는 놈.’
조이는 거센 바람을 일으키는 헬기 근처로 다가갔다. 헬기 안에는 이미 권명과 태혁이 앉아 있었다. 조이가 헬기에 오르려 하자 태혁과 권명이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듯.
“조이. 잡아 줄게.”
“안조이! 그 손 잡기만 해!”
조이는 양쪽 손을 바라보았다. 둘 중 하나를 잡아야 하는 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고민되지는 않았다. 조이의 마음은 이미 한쪽을 향해 있으니까.
“됐어!”
조이는 고집스럽게 홀로 헬기에 올랐다. 권명의 옆에 자리를 잡자, 헬기가 조금씩 위로 솟아올랐다. 조이는 점점 멀어지는 설산과 하얀 자작나무 숲을 내려다보았다. 조이는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권명은 조이처럼 멀어지는 설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이는 손을 내려 권명의 손가락을 슬쩍 건드렸다.
“!”
권명은 자기 손가락에 닿은 조이의 손을 바라보았다. 조이는 모르는 척 두 눈을 감으며 권명의 손을 꽉 잡았다. 옆에서 피식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눈을 뜨지 않았다. 분명 조이의 얼굴은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붉게 물들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