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수색
뚝뚝뚝.
링거액이 떨어지는 소리와 산소호흡기가 작동되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엎드려 선잠을 자던 조이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궈… 권명!!”
헛것을 보듯 정신없이 허공을 맴돌던 조이의 눈이 주변 사물을 하나둘 인지하기 시작했다. 꿈과 현실을 오가던 조이는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하아…….”
조이는 축축하게 젖은 이마를 쓸어 넘겼다. 조하를 구출하게 되면 이런 악몽도 끝날 줄 알았다. 끈질기게 조이를 괴롭혔던 모든 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때문에 조이는 벌목 작전을 속으로 구원이라고 불렀었다.
하지만 조하를 구해 낸 지금도 조이는 악몽에 시달렸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게임의 규칙은 그날에도 유효했다. 수도로 가는 티켓을 얻는 대가로 조이는 어린 동생을 7구역에 두고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날, 그 작전에서 조이는 조하를 구하는 대가로 권명을 뒤로해야 했다.
첫 번째 선택으로 조이는 조하를 영영 잃을 위기에 처했고, 뒤늦게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었다. 그리고 조이는 또 한 번의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조이를 상담하던 군의관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지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 말도 안 되는 게임의 규칙을 벗어나 권명까지 구했어야 했는데.
‘어쩌면 그날 조하와 권명. 둘 모두를 구할 방법이 내게 있지 않았을까?’
조이를 괴롭히는 악몽은 번번이 조이를 그날, 그 장소로 데려갔다. 조하가 나오던 악몽과는 달랐다. 그저 그날의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조이의 상상이 더해질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도 충분한 악몽이었으니까.
그날 권명은 함정에 빠진 것처럼 순식간에 아래로 사라졌다. 조이는 비명을 지르며 무너진 다리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등 뒤로 조이를 꽉 끌어안는 힘이 느껴졌다.
‘조이! 안 돼!’
‘궈… 권명이! 권명이 떨어졌어! 구해야 해!’
조이는 상체를 흔들며 놓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태혁의 두 팔은 더 강하게 조이를 감싸 안았다.
‘이거 놔! 권명이 떨어졌다니까?!’
‘진정해! 권명은 에스퍼야. 강물로 떨어졌으니까 무사할 거야.’
‘뭐……?’
조이는 태혁의 침착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권명이 무너지는 잔해와 함께 강물 속으로 떨어졌는데, 어떻게 진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태혁의 눈은 평소와 달랐다. 늘 다정하다고 생각했던 태혁의 눈이 냉철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차가운 것은 눈만이 아니었다.
‘조이. 군용차가 공격을 받고 있어. 동생과 환자들을 생각해.’
그 순간 가슴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나의 심장이 반으로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반쪽짜리 심장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서. 더 늦기 전에.’
그날의 일이 떠오르자 또다시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조이의 손이 저절로 찌릿한 통증을 내뿜는 심장에 닿았다. 하지만 조이는 이내 가슴에 닿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아픔을 드러내는 것, 아파하는 것. 이 모든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그런 선택을 해 놓고는.
조이는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은 후,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조하를 살폈다. N50 구역에서 구조된 열다섯 명의 아이들 모두는 이렇게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안심하고 일어나도 될 텐데, 누구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의 말로는 동물을 안락사시킬 때 사용하는 약물을 투여한 것 같다고 했다. 다행히도 투여량이 적었는지, 아이들은 죽음의 늪에 빠지지 않았다. 서제국 놈들은 회유에 실패하자 에스퍼로 자라날 새싹을 모조리 망가트리기로 작정한 듯했다.
어쩌면 그들은 동제국의 군인들이 아이들을 회수해 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날 실험실 지하에서는 교전이 벌어졌지만, 7층은 생각보다 감시하는 군인의 수가 많지 않았다.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 버린 거겠지.
“조하야…….”
물끄러미 조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하는 여전히 앙상한 몸을 하고 있었다. 묽은 음식을 억지로 투입하여 먹이고 있으나, 예전의 얼굴을 되찾기에는 무리였다.
조이는 조하의 가느다란 손을 부여잡고 기도했다. 조하의 꿈이 어둡지 않기를. 조하를 괴롭게 했던 그 끔찍한 기억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조이.”
조하의 손에 얼굴을 묻고 기도를 하던 조이는 고개를 들었다. 어깨 위로 거친 군인의 손이 닿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아는 손이었다.
“잠시만.”
조이는 태혁을 따라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병실 문 앞에는 한솔이 있었다. 한솔은 여전히 태혁을 졸졸 따라다녔고, 여전히 조이를 끔찍하게도 미워했다. 조이가 싫고, 미워 죽겠다는 표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했다.
예전과 달리 저런 표정에도 조이는 큰 상처를 받지 않았다. 조이도 스스로가 몹시 밉고 싫었으니까.
“무슨 일이야?”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
태혁은 인터뷰 대본을 건넸다. 군에서는 조이가 방송에 얼굴이라도 내보이길 강력하게 원했으나, 조이는 도저히 예전처럼 멀쩡한 척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조하의 일이나, 그 일이나.
디데이에 맞춰 「실험실 급습 작전-안조이 중위 편」이 방영됐다. 감독의 예상은 적중했다.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조이는 제국민의 분노를 되살리는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조이에게 개인적으로 도움이나 후원을 보내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들었다.
“전화 인터뷰로 변경했어. 영상보다는 그래도 나을 거야.”
“그래… 고마워.”
“밥은 잘 챙겨 먹는 거야?”
“응… 그것보다. 혹시 추가 소식은 없었어?”
조이는 권명의 구조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권명은 군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무기였다. 반시체인 권명을 기어코 살려 내겠다고 사관학교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실종된 권명을 수색하는 팀이 구성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조만간 수색대가 꾸려질 거야.”
“그럼… 혹시 나도 갈 수 있어?”
“조하는 어떻게 하고?”
“돌봐 줄 사람을 알아볼 거야. 수색대장은 누가 맡게 될 거래? 통화라도 하게 해 줘.”
태혁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조이가 재차 매달리자 알아보겠다고 답했다.
“제발 알아봐 줘. 내가 꼭 가야 해서 그래.”
* * *
조이는 태혁에게 수색대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태혁은 사사로이 이런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니까. 태혁이 얼마나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지 조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이는 태혁 외에 수색대에 대한 정보를 줄 만한 이를 소환했다. 한 중위. 한 중위는 조이의 연락을 받고는 퍽 놀란 듯했으나 다음 날 바로 외출 허락을 받고 달려왔다.
“많이… 힘들지?”
조이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한 중위 역시 조이의 방송을 챙겨 본 듯했다. 이번 주에도 조이에 대한 방송이 방영됐다. 지난주보다 더 반응이 폭발적이었다고 들었다. 실험실을 급습한 후 돌아오는 이야기였으니까.
정작 방송의 주인공인 조이는 한편도 보지 못했다. 조하를 돌보느라 챙겨 볼 틈이 없었고, 그 끔찍한 장면을 편집본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권명 얘기 들었지?”
“어? 어… 봤어…….”
들은 것도 아니고 봤다니. 대체 뭘 봤다는 걸까? 조이를 주인공으로 한 방송 편에 권명도 나온 걸까?
“군에서는 뭐래? 수색대 편성하겠대?”
“어! 당연하지! 수색대 편성 안 하면 큰일 날걸?”
“잘됐네. 그럼 그 수색대를 누가 지휘하게 될 것 같아?”
“듣기로는 태혁 대위가 유력하다고 들었어.”
“태혁?”
태혁은 그날 애원에 가까운 조이의 부탁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유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본인도 수색대장을 맡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조이가 수색대 일원이 되기에 자질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걸까?
“너. 병실 좀 지키고 있어.”
“뭐? 나 복귀해야 해!”
“복귀하기 전까지는 돌아올 거야.”
“잠깐 짬을 내서 나온 거야. 진짜 안 돼.”
“진짜 안 돼?”
조이는 맨살이 드러나도록 팔을 걷어붙인 후 한 중위에게 잡으라는 듯 건넸다. 그러자 한 중위는 한숨을 폭 내쉬며 조이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어떤 결심을 내렸는지 꽤 징그러운 부탁을 덧붙였다.
“그럼… 손… 입에 넣어도 돼……?”
“뭐??”
저놈도 가만 보면 머리 꽤 굴리는 놈이었다. 권명 몰래 정보를 팔아 가이딩을 챙기고, 지금은 더 한 것을 요구해도 조이가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걸 아주 잘 아는 듯했다. 놈이 머리를 쓰니 조이도 머리를 좀 굴려야 할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구멍까지 내어 달라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이번만이야. 딱 하나만 골라.”
조이는 손가락을 쫙 펼친 후 고르라고 말했다. 한 중위는 맛있는 사탕 다섯 개 중, 한 개를 골라야 하는 난제에 빠진 아이처럼 한참을 고민하더니 중지를 골랐다. 조이는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순했다. 가장 긴 손가락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빨아 먹겠다는 수작일 테지.
“빨아. 길게는 안 돼!”
100m 달리기라도 하는지 한 중위는 허겁지겁 달려들어 조이의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누가 초라도 재는 줄 알겠다. 놈은 조이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혀로 손가락을 자극하기도 했다. 조이는 이 정도는 봐준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 * *
조이는 김정명 감독과 작전장교를 만날 볼 생각이었다. 태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나, 조이를 수색대에 넣는 일에 비협조적이라는 것은 알았다. 해서 조이는 태혁이 거부할 수 없는 명령으로 수색대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작전장교의 경우 조이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감독을 통해서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홍보병 역할은 지긋지긋했지만, 만약 수색 작전에 투입될 수 있다면 꾹 참을 생각이었다.
벌목 작전의 성공으로 장기휴가를 받은 조이가 촬영장에 나타나자 스태프들과 감독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 중위님 건강 상태가 영 안 좋다고 들었는데…….”
어쩐지 감독의 태도가 이상했다. 조이만 보면 징그럽게 엉겨 붙었었는데, 몸을 사리는 듯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대화하고 싶은데요.”
조이가 대화를 청하자 감독의 표정은 더더욱 안 좋아졌다. 마치 간식을 몰래 훔쳐 먹은 강아지가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표정이었다. 죄를 지은 표정. 감독이 조이에게 뭔 잘못이라도 저지른 걸까?
“작전장교를 만나게 해 달라고요?”
“예. 제가 나온 방송이 꽤 잘됐다고 들었습니다. 수색 작업을 담은 내용으로 추가 방영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아! 너-무 좋은 생각이네요! 아니 우리 중위님은 군에 있을 게 아니라 방송계로 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감독은 과장되게 큰소리를 치며 조이를 칭찬했다. 그제야 죄지은 듯 눈치를 보던 표정을 달리했다. 작전장교와의 만남을 주선하겠다며 발 벗고 나섰다.
“약속 잡히면 바로 병원으로 콜 때릴게요! 우리 중위님은 그동안 얼굴에 마사지 좀…….”
“됐습니다.”
“뭐. 청승맞아 보여서 난 개인적으로 좋지만. 일부러 살 뺀 거 아니죠?”
조이는 감독의 마지막 물음을 무시한 채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조이는 어쩐지 작전장교가 조이를 수색팀에 넣어 줄 것 같았다. 감독은 못 믿어도 감독의 세 치 혀는 믿을 만하니까.
권명의 가이드라는 타이틀 외에는 군에서 관심조차 받지 못했던 조이를 주인공으로 방송까지 만들어 낸 자였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다고 감독은 조이를 강력하게 추천할 것이다. 방송에 미친 자니까. 듣기에 방송 때문에 세 번이나 이혼을 당했다고 들었다.
“후우…….”
조이는 조금 후련한 마음에 크게 숨을 내쉬었다. 병원으로 돌아가려는데, 저 멀리 훈련을 하는 군인들이 보였다. 얼마 전만 해도 조이 역시 저런 고된 훈련을 받았었는데. 가만 보니 훈련하는 이들 중 태혁과 한솔이 있었다. 조이는 방해하지 않고 가려 했으나 태혁 역시 조이를 발견했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조이! 여긴 어떻게 왔어?”
“볼일이 좀 있었어.”
“그래?”
태혁은 한솔에게 잠시만이라고 말을 하더니 낮은 펜스를 넘어 조이에게 다가왔다. 문뜩 조이는 태혁에게 잘 보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섭섭한 마음은 컸지만, 태혁은 어찌 되었든 작전을 지휘할 자였다. 조이의 건강한 모습을 본다면, 태혁 역시 조이를 다시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훈련하던 때가 그립네…….”
조이는 조금도 그립지 않았다. 아주 조금도. 지금 생각하면 그때 무슨 정신으로 그 고된 훈련을 받았던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 말해야 태혁도 조이가 건강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훈련이 그립다고?”
“응. 병원에만 있으니까 영… 몸이 찌뿌둥해.”
“종일 병원에만 있는 거야?”
“어… 뭐 그렇지.”
조이의 대답을 듣던 태혁은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태혁은 아직도 병원에서 자는 거냐고 물었다. 조이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시간 돼?”
“내일?”
저 멀리 한솔이 태혁의 이름을 또다시 부르고 있었다. 저놈도 참 어지간히 보챈다. 태혁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조이에게 내일 다섯 시에 만나자고 했다.
‘내일 다섯 시라. 나한테 따로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 * *
조이는 태혁과 약속한 대로 시간 맞춰 병원 앞으로 내려갔다. 어슬렁거리며 태혁을 찾는데, 저 멀리 태혁의 모습이 보였다.
보풀이 잔뜩 일어난 스웨터를 걸친 조이와 달리 태혁은 늘 입던 군복 대신 부드러운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태혁의 몸에 딱 떨어지는 것이 아주 잘 어울렸다. 태혁은 조이를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조이!”
“어. 태혁아.”
“추운데 옷을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태혁은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조이에게 건넸다. 조이는 거절할까 했으나, 태혁과의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순순히 받았다.
“고마워. 근데…….”
“잠깐 걸어야 하는데. 괜찮겠어?”
태혁은 잠시 걷자며 조이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북부로 발령을 받은 후 훼림 다음으로 오래 머무른 곳은 이곳 투뤼였다. 하지만 조이는 병원과 군부대만 쳇바퀴처럼 오갔기에 이곳 지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훌쩍거리며 태혁을 쫄래쫄래 따라가는데, 태혁이 조이를 힐끔 보더니 어깨를 감싸 안았다. 조이는 깜짝 놀라 어깨에 닿은 태혁의 손을 바라보았다.
“춥지?”
“으…응…….”
어색하게 대답하며 걸음을 이어가는데,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태혁에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사내답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얼굴이라고 느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도 태혁이 꽤 그럴싸해 보이는 것 같았다. 잘난 녀석. 저런 얼굴로 사는 삶은 분명 조이의 삶과는 다를 것이다.
“이쪽이야.”
태혁이 가리킨 곳은 투뤼식으로 지은 단층 주택이었다. 조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태혁은 피식 웃으며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여긴 뭐야?”
“휴가 나올 때마다 쉬는 곳이야.”
조이와 태혁은 북부에서 복무 중이었다. 그 때문에 휴가를 받아도 갈 곳이 없었다. 이곳에서 고향인 7구역까지 가려면 휴가 기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또한 그곳에 가 봐야 조이가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나마 이곳에서 휴가다운 휴가를 보낸 경험은 권명과 함께 갔던 온천이 유일했다. 그날의 일이 떠오르자 조이는 조금 침울해졌다.
“조이. 병원에서 지낸다고 들었어.”
“어. 조하도 그렇고… 휴가라고 7구역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 앞으로 여기서 지내.”
“응?”
태혁은 토끼처럼 놀란 조이를 바라보며 보기 좋은 웃음을 지었다. 조이의 팔을 끌어당기며 주택 내부를 소개했다. 잠시 쉬는 곳이라고 했지만, 방 두 칸에 넓은 거실과 작은 정원까지 있는 주택이었다. 권명만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태혁 역시 수도의 도련님이었다.
“근데…….”
“어차피 잠깐 쉴 때만 쓰는 곳이라 대부분 비어 있어.”
태혁은 조이의 입에서 나올 거절의 말을 방어하듯, 불편한 간이침대에서 생활하다 보면 건강하던 몸도 상하게 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불편함을 잘 느끼지 못하는 조이였지만, 병원 생활이 제집처럼 편할 리는 없었다.
“고마워…….”
“아직 식사 전이지?”
“어…….”
“그러면 오늘은 여기서 저녁도 먹고 푹 쉬어.”
태혁은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걸치며 말했다. 태혁은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저리도 다정한 자가 군 문제에 있어서는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이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군에서 더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에스퍼는 권명보다는 태혁이었다. 고위급 장교일수록 가장 필요한 덕목은 냉철한 판단력일 테니까.
“앉아. 저녁 만들어 줄게.”
* * *
태혁이 능숙하게 만들어 낸 요리가 식탁 위에 올랐다. 약간의 향신료로 맛을 낸 채식 메뉴였다. 태혁은 조이의 앞 접시에 손가락처럼 굵은 아스파라거스와 버섯 요리를 덜어 주었다.
“조이 이것부터 먹어 봐. 투뤼 특산물이야. 수도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신선해.”
“응…….”
요즘 통 입맛이 없던 조이는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깨작거리며 먹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식사보다 태혁에게 수색 작전에 대해 묻고 싶었다. 한 중위에게 들은 대로 태혁이 수색대장을 맡게 될 것인지 그리고 여전히 조이를 배제하길 원하는지.
“수색팀은… 어떻게 됐어?”
“아.”
태혁은 수저를 내려놓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조이. 수색 명령이 곧 떨어질 거야. 그리고 내가 수색대장이 됐어.”
“그럼……?”
“내 생각에는 조이 네가 여기서 쉬는 게 맞는 것 같아.”
“태혁아! 난 꼭 수색팀에 들어가야 해.”
“권명이라면 부대원들도 최선을 다해 수색할 거야. 그러니까 너까지 갈 필요는 없어.”
“내가 안 가면 누가 권명을 치료해?”
권명은 높은 다리 위에서 떨어졌다. 태혁의 말대로 에스퍼이니 살아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조이 역시 권명의 차가운 몸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간절하게 믿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에스퍼여도 그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분명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또한 그날 다리 위로 전차부대의 매서운 폭격이 쏟아졌었다. 부상을 피할 방법이 있었을까?
“한솔 소위가 수색에 나설 거고, 필요하다면 가이드 한 명을 더 충원할 생각도 있어.”
“그럼 그 충원 가이드를 내가 하면 되겠네.”
“조이. 네 상태를 좀 봐.”
태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이의 몸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이가 최근에 만난 사람들은 예전과 달리 살이 빠진 조이의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물음을 던지고는 했다. 거울을 통해 바라본 조이의 얼굴은 자신도 봐도 낯설 때가 있었다. 하지만 조이는 진정으로 아프지 않았다. 그저 살이 조금 빠졌을 뿐.
그리고 조이가 이곳에서 푹 쉰다고 할지라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 같지는 않았다. 조이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그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계속 이런 상태일 테니까.
“난 건강해.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조금씩 아픈 게 당연하잖아.”
“조이. 수색 작업이 이뤄질 곳은 N63 구역이야. 그 구역이라면 너도 잘 알 거야. 수색대장을 맡은 내 입장에서 조이 너를 그곳까지 데려갈 수는 없어.”
“…….”
생각보다 단호한 말에 조이는 할 말을 잃었다. 뒤늦게 조이의 표정을 살피던 태혁은 아차 싶었는지 말을 덧붙였다.
“우선, 식사 먼저 하자. 그리고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태혁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조이를 걱정하기에 하는 애정 어린 말이니까. 또한 수색이 이루어질 곳이 N63 구역이기에 더욱 우려될 테지.
N63 구역. 서제국 영토에 있는 최북단 구역이었다. 지난번 벌목 작전으로 동제국은 N49, N50 그리고 N51 구역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그 탓에 서제국은 북쪽과 남쪽의 영토가 나누어지게 되었다. 동제국이 새롭게 점령한 구역을 통과하지 않고는 N60 구역으로 진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제국에서는 고립된 북쪽 지역의 주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북쪽 땅에서는 민병대를 조직해 게릴라전을 벌이겠다고 나섰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게릴라전을 벌이며 권명을 구해 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수색 작업이 아니니까.
‘어쩌면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짐이 될지도 모르지…….’
조이는 그날 밤 태혁이 말한 대로 이곳에서 쉬고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간이침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푹신하고 넓은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이런 편안한 잠자리가 오랜만이라 그런지 어색했다. 한참을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조이는 태혁이 심심하면 사용하라고 두고 간 태블릿에 손을 뻗었다.
이런 물건을 사용한 적이 없기에 어색하기만 했다. 조이는 자신의 방송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동안 볼 틈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가 왔다. 조이는 검지 두 개로 검색어를 입력했다.
‘ㅇㅏㄴ조ㅇㅣ’
엉망인 검색어에도 조이의 영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1화는 조이의 인터뷰로 시작되었다. 조이는 어색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면 귀를 살짝 틀어막아야 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왜 꼴뚜기처럼 말하지……?’
어려서 본 만화 속 캐릭터 같은 목소리였다. 꽤 긴장했는지 툭 건들기만 해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얼굴로 달달 외운 답변을 쏟아 내는 것이 부끄러웠다.
조이의 인터뷰가 끝나고 대원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조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말에, 대원들은 두 문장 이상을 말하지 못했다. 조이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원들 중 대부분은 조이를 잘 알지 못할 테니, 저런 질문이 꽤 곤욕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권명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제작진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권명은 촬영감독을 보자마자 ‘삑-’ 처리되는 욕설을 내뱉었다. 감독을 한 대 쥐어박을 듯 위협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조련되지 않은 맹수의 모습이었다.
“자… 잠시만요!! 안조이 중위님이랑 사관학교 때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고 들었습니다! 이…인터뷰 좀 요청할게요!”
“안조이?”
권명은 예상외로 인터뷰에 응했다. 내레이션으로 몹시 어렵게 인터뷰에 성공했다는 멘트가 들려왔다.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권명에게 감독이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권명 대위님이 평가하는 안조이 중위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안조이라…….”
“예. 안조이 중위님이요.”
“안조이. 어떠냐?”
권명은 한참 동안 ‘안조이’, ‘어떠냐’를 읊조렸다.
“저… 태혁 중위님은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스타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감독은 그냥 그렇다고 고개만 끄덕이라는 듯 태혁이 본 조이에 대한 평가를 덧붙였다.
“스타일? 안조이는… 쫌…….”
“네…….”
“굳이 따지면 귀여운 스타일?”
“네…‧??”
저 미친놈. 권명은 엉뚱한 헛소리로 감독을 엿 먹이고 있었다. 요사스러운 혀를 가진 감독도 권명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 조이는 가만히 권명이 말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권명은 생각보다 조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감독이 원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대답이었지만 조이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특징들을 꿰고 있었다.
조이가 허물처럼 옷을 벗어 둔다는 것. 주량은 와인 두 잔이라는 것. 불편한 곳에서도 머리만 대면 잠을 잔다는 것 등등.
피식거리며 방송을 보던 조이의 눈가가 점점 붉게 물들었다. 조이는 코가 시큰해져 더 이상 방송을 볼 수 없었다. 늘 당연하게 옆에 있던 인물을 화면을 통해 보려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방송을 끄려는데 엉뚱한 걸 누른 모양인지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 버렸다. 어렵게 정지 버튼을 찾았지만 누를 수 없었다. 조이의 얼굴이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
조이는 그제야 왜 사람들이 자신을 그토록 불쌍하게 보았는지, 왜 군에서 조이에게 이례적으로 긴 휴가를 주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독 새끼가 왜 조이를 바라볼 때면 잘못을 저지른 개처럼 보았던 것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부서질 듯 꽉 눌린 태블릿에서는 권명의 마지막 모습과 조이의 비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끔찍한 장면까지 방송에 실린 것이었다. 권명을 부르는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조이는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태혁의 우려처럼 조이는 짐이 될지도 모른다. 또 그곳에서 큰 부상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명이 조이와 조하를 구해 주었듯이, 이번에는 조이가 권명을 구할 차례였다. 그곳이 설령 저승의 강처럼 위험한 곳이라 할지라도.
* * *
조이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감독은 수색대에 조이를 넣어 추가 방송을 제작하자고 장교를 꼬드겼다. 조이의 방송 효과로 중령 진급이 유력해진 작전장교는 그 제안을 덥석 잡아 물었다.
작전장교는 조이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기에 흔쾌히 발령 서류에 서명했다. 사실 조이의 상태를 알았더라도 작전장교는 조이를 수색대에 끼워 넣었을 것이다. 군인다운 냉철한 판단력은 조이의 쓸모가 다하기 전까지 더 써먹으라고 부채질했을 테니까.
뒤늦게 발령 소식을 전해 들은 태혁은 급하게 조이를 찾아왔다. 조이의 수작에 배신감을 느낀 표정이었다. 늘 침착하던 태혁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조이!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
“내가 말했잖아. N63 구역으로 가는 거라고!”
지은 죄가 있기에 조이는 태혁의 눈을 피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조이를 바라보던 태혁은 애써 화를 꾹꾹 누르며 딱딱하게 말했다.
“소령님께 직접 말씀드리겠어.”
“안 돼!”
조이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태혁에게 소리쳤다.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게. 정말이야! 훈련도 시작했어!”
“안조이! 대체…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태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조이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태혁은 종종 성까지 붙여 ‘안조이’라고 부를 때가 있었다. 딱딱하게 들려야 마땅하지만 태혁의 목소리에는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가움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였다. 늘 온화했던 표정 역시 차갑게 굳어 있었다.
“…….”
“권명. 그 자식 때문인 거야?”
늘 반듯하던 태혁이 욕을 하다니. 조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태혁은 조이의 어깨를 아프게 움켜쥐며 눈을 마주쳤다. 대답하라는 듯.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조이도 그 답을 모르니까. 조이의 마음속에는 이곳에 남아 건강을 회복하고 조하를 돌보라는 목소리와 더 늦기 전에 북쪽으로 달려가 권명을 구하라는 목소리가 정신없이 충돌했었다.
하지만 며칠 전 그 영상을 본 후, 마음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는 하나가 되었다. 권명을 구하라는 목소리로.
조하를 구해 준 권명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조이도 모르는 사이 권명을 향한 어떤 마음이 자라난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저 하루빨리 권명의 무사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모르겠어… 그곳에 내가 꼭 가야 할 것 같아. 그래야… 그래야 나도 내 마음을 알 것 같아…….”
조이의 대답에 태혁은 속으로 화를 삭이는 듯 이를 꽉 물었다. 턱 근육이 불끈 솟을 정도로. 조이는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후우…….”
“…….”
“안조이. 좋아. N63 구역으로 함께 가자. 그리고 그곳에서 돌아오거든 네 마음을 결정해.”
“태혁아……?”
“넌 늘 내가 다정하다고 했지? 사실 난 그렇게 다정한 놈이 아냐.”
태혁은 조이의 어깨를 한 번 더 강하게 움켜쥐고는 뒤돌아섰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태혁의 입에서 나온 결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한때 조이가 간절하게 원하던 감정의 조각인데도, 조이는 독이 든 사과를 베어 문 듯 가슴이 콱 막힌 기분이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먹은 태혁의 따뜻한 배려가 명치에 걸려 내려가질 않았다.
* * *
N63 구역으로 떠나기 전 조이는 마지막으로 조하를 살폈다. 군에서는 조이를 대신해 조하를 돌봐 줄 간병인을 구해 주었다. 투뤼 출신으로 30년 동안 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 경험이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조하를… 잘 부탁드려요.”
“걱정하지 마세요. 중위님. 제가 잘 돌볼게요.”
간병인은 조이의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간병인 역시 조이의 방송을 본 듯했다. 조이를 볼 때면 대단한 영웅을 보듯 바라보고는 했는데, 그 눈빛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몇 해 전 아들이 국경 근처에서 실종됐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조이와 조하의 사연에 더욱 감정이 이입된 듯했다. 조이는 한 번 더 인사를 건넨 후 군부대로 향했다.
벌목 작전이 시작되던 그 날처럼, 조이는 이륙 준비를 마친 헬기를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을 촬영하던 감독은 경박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안조이 중위님은 조금만 더 천천히 걸어갈게요! 주인공이니까!”
감독은 찡긋 한쪽 눈을 감으며 조이에게 소리쳤다.
‘잘 걸렸다. 개자식.’
감독의 말과는 반대로 조이는 거침없이 카메라를 향해 걸어갔다. 감독의 놀란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조이는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아이구! 내 턱!!”
감독은 턱을 부여잡으러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감독은 봉변을 당한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으나, 조이가 한 번 더 주먹을 들어 올리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허락도 없이 그 장면을 방송에 내보낸 감독이 괘씸했다. 다시 만나게 되거든 실컷 두들겨 패리라 다짐했는데, 순순히 얼굴을 가져다 대는 감독을 보니 주먹에 힘이 풀렸다.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로 퉁 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내 주먹이 뭐 그리 아플까. 권명의 왕 주먹에 맞아야 아프지.’
“권명 대위. 반드시 구해서 돌아올 겁니다. 감독님은 기대하시죠.”
조이는 그 말만 내뱉은 후 헬기에 올라탔다. 등 뒤로 감독이 비명을 지르며 뭐라고 소리쳤으나, 헬기 소리에 뒤섞여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조이는 N63 구역으로 곧바로 날아간 후 N62, N61 그리고 N60 구역까지 순차적으로 수색할 임무를 맡았다. 권명을 집어삼킨 뉴쿤강은 원주민 말로 ‘크다’라는 뜻을 가진 강이었다.
그날 거대한 다리 밑으로 흘러가던 물줄기는 동제국에서도 보기 드문 규모였다. 권명이 급류에 휩쓸렸다면 강 하류가 있는 N63 구역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중대장님. 그런데 이렇게 적군 영토로 바로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대원 중 하나는 게릴라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북부의 영토로 기어들어 가는 것이 영 불안한 듯했다. 조이 역시 우려하던 부분이었다. 아무리 밤이라지만, 북부의 영토 중 가장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걸 적군이 알아차리기라도 했다가는 공중에서 격추당할지도 모른다.
“민병대에 대공포 같은 무기는 아직 없다. 안심해도 좋다.”
다정한 태혁이 사라지고, 냉철한 군인이 이곳에 있었다. 태혁의 말투는 딱딱하고 차가웠지만, 그 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행히도 북부에는 헬기를 격추할만한 무기가 없는 듯했다. 태혁은 서제국에서 게릴라전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 차례 항공기를 띄웠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군에서는 북부의 상황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남부로 내려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듯 N49, N50, N51 구역에 눌러앉아 방어선을 두껍게 쌓고 있었다. 서제국에서는 도발하듯 몇 차례 국경선을 넘어오는 공격을 강행했으나, 군에서는 힘을 비축하듯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번 수색 작전과 함께 군에서는 북쪽을 겨냥한 추가 작전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조이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런 세부 사항을 알려줄 만한 이는 태혁이 유일한데, 그날 이후 조이는 눈치가 보여 태혁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낙하 준비!”
태혁의 지시에 따라 조이는 몸을 일으킨 후 뒤돌아선 태혁의 장비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조이의 뒤에 있던 대원 역시 조이의 장비를 확인한 후 어깨를 두들기는 것으로 이상이 없음을 알렸다. 조이는 태혁의 어깨를 두들기며 소리쳤다.
“이상 무!”
“낙하!”
태혁을 선두로 대원들이 하나둘 허공으로 뛰어들었다. 이번 낙하가 세 번째이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바닥으로 내려온 조이는 능숙하게 낙하산을 정리했다. 한솔은 여전히 낙하산에 엉겨 허둥댔으나, 옆에 있던 대원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곧바로 수색을 시작한다.”
조이는 등 뒤로 대원들에게 따라오라는 수신호를 전했다. 지난번 낙하지점과 달리 이곳은 엄폐물을 찾기 힘든 설원이었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 싶은데, 북부는 석유 시추로 먹고산다고 들었다.
과거에는 뉴쿤강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를 잡아서 근근이 먹고살았다는데, 지금은 석유 시추로 벼락부자가 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서제국에 대한 충성도가 유독 높은 구역이었다. 민병대를 조직해 동제국에 대항하겠다고 할 만큼.
“쉿.”
주변을 살피던 조이는 태혁의 신호에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저 설산을 넘어야 한다. 저곳만 넘으면 뉴쿤강 하류야. 매복을 조심하고 안조이 중위와 한솔 소위는 대원들의 엄호를 받으며 안쪽에서 이동한다.”
조이는 이런 특별 대우를 바라지 않았는데, 가이드이기 때문인지 태혁은 대원들에게 조이와 한솔을 엄호하라고 지시했다. 조이는 이런 대접이 불편했으나 한솔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웃긴 놈.
* * *
날이 밝고 다시 어둑어둑 어둠이 내릴 때까지 설원을 기어 올라갔다. 산세가 꽤 험해, 두 발이 아닌 네 발로 기어 올라가야 할 때도 있었다. 체중이 줄어든 만큼 체력도 줄어든 모양인지 조이의 발이 번번이 미끄러졌다.
“안 중위. 잡아라.”
태혁은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으나, 이전과 달리 저 손을 잡는 것이 꺼려졌다. 조이가 머뭇거릴 때면 태혁의 눈은 더욱더 차가워졌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지나자 평지와 내리막길이 나왔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민병대와는 마주치지는 않았다. 대신 눈 덮인 산을 급하게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이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겁지겁 산을 구르듯 내려오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아이를 공격하려는 코요테가 보였다. 컹컹거리며 연약한 살을 물어뜯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조이는 망설임 없이 총을 들어 올렸다.
“몸을 숙여!”
아이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확인하더니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총구에서 날아간 총알이 코요테의 머리에 정확히 박혔다. 깨갱거리며 날아간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튀어 오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통역을 맡은 병사가 곧바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조이는 조하가 떠올라 아이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런 산속에 아이라니.
“대위님. 근처에 민가가 있을 것 같은데, 확인해 보는 게 어떨까요?”
* * *
조이와 대원들은 아이를 따라 민가로 내려갔다. 부모로 보이는 이들은 아이를 보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왔다. 태혁은 경계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조이는 이들이 민병대에 속한 것 같지는 않았다.
세 식구가 사는 단출한 집이었고, 그들이 사는 방식이 석유 시추로 막대한 부를 쌓은 이들처럼 보이지 않아서였다. 처마에 주렁주렁 생선이 매달려 있는 걸 보면, 이 설산에서 자급자족하며 사는 듯했다.
“통역관!”
“예!”
“신원 파악하고 대위에 대해 알아본다.”
“예!”
태혁의 명령에 통역관이 달려가 아이의 부모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다. 서제국어에 능통하다는 통역관은 중간중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슴팍에 있던 사전을 펼쳐 떠듬떠듬 뭔가를 묻고 답했다.
조이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통역관 옆에서 그들의 말에 집중했다.
“최근에 강에서 사람을 구조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대?”
조이는 통역관에게 바짝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무 이름을 말하는데… 치료할 수 있는 곳에 데려다준 것 같습니다. 방언이 심해서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조이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누군가 조이의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가 놔준 듯했다.
“하아…….”
조이는 저들이 구해 준 이가 권명인 것 같았다. 아니 권명이라고 믿었다. 이곳에 권명이 있었다니. 바로 이곳에. 희망을 감지한 조이의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아이의 부모는 감사의 의미로 하룻밤 쉬어 갈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나무로 지어진 조악한 가건물이었지만, 북부의 매서운 칼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태혁은 신중하게 주변을 탐색한 후 이곳에 머물지 결정하겠다고 했다.
“대원들은 주변을 수색한다. 안조이 중위와 한솔 소위는 저들을 감시한다.”
태혁의 말이 끝나자 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가건물 주변을 살폈다. 조이는 마당에 서서 자신들의 일을 묵묵히 하는 집주인과 아이를 바라보았다. 한솔은 조이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싫다는 듯 몸을 돌리더니 주저앉았다.
“나도 너 별로야. 근데 일은 해야지. 감시 안 해?”
“뭐?”
한솔은 눈이 돌아갈 듯 조이를 노려보았다. 조이는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아버지만 해도 그러했다.
비참하게 이용당했음에도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했었다. 그런데 한솔이 조이를 이렇게 미워하는 건 좀 신기했다. 7구역 출신이라는 게 그렇게도 싫은 걸까?
“나랑 있는 게 끔찍한 건 알겠는데, 네 몫은 똑바로 하라고.”
“하? 잘 아네! 끔찍해! 더러운 새끼.”
“난 안쪽 확인할 테니까. 넌 대문 쪽 살펴.”
조이는 한솔과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조이를 향한 저 적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굳이 따져 묻고 싶지도 않았다. 참 피곤한 새끼였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등 뒤로 한솔의 경고가 들려왔다.
“야! 너 태혁 앞에서 알짱거리지 마! 알겠어?”
조이를 향한 적의가 무엇에 기인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태혁과 페어가 되고 싶다고 난리를 치더니, 단순한 동료애가 아닌 모양이었다. 조이는 한솔의 경고에 대한 대답으로 중지를 들어 올렸다. 수도에서 새롭게 배운 욕이었다.
“야!!”
한솔은 파르르 떨며 꽥 소리를 질렀다. 저 모습을 보니 꽤 효과가 좋은 욕이었다. 또 써먹어야지.
대원들이 모두 복귀하자, 태혁은 이 낡은 건물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산에서 내려가자고 했다. 가건물 중앙에는 작은 난로가 있었다. 조이는 난로에 나무를 가득 밀어 넣고 손을 녹였다.
온종일 눈 덮인 산길을 걸어오느라 온몸이 아팠다. 으슬으슬 몸이 떨리는 걸 봐서는 조만간 몸살이 날 것 같았다. 다른 대원들에 비해 유독 힘들어하는 걸 보면 조이의 체력이 정말 떨어지긴 한 모양이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선다.”
조이는 자신의 불침번 순서를 확인한 후, 물을 마시는 척하며 몰래 진통제를 삼켰다. 수색 작업 동안 짐이 되지 않기로 다짐했기에 조이는 아픈 티를 낼 수 없었다.
조이는 진통제 효과가 빨리 퍼지기를 바라며 누울 곳을 찾았다. 그런데 발 빠른 대원들이 이미 난로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이는 난로를 포기하고, 구석에 침낭을 펼쳤다. 그곳에 누워 잠을 자려는데, 태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안 좋은 이들은 안쪽에서 쉬도록.”
태혁은 조이를 바라보며 말했으나 잠든 척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던 조이는 살짝 눈을 떴다. 조이를 매섭게 노려보는 시선 때문이었다. 한솔이었다.
저놈한테 예쁨받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더 미움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았다. 한솔의 눈빛은 지금 당장 조이를 총으로 쏴 버리고 싶다는 살의로 가득하니 말이다.
“뭘 봐.”
조이는 그 눈빛을 모르는 척 무시하며 뒤로 돌아누웠다.
* * *
다음 날 아이의 아버지는 대원들을 이끌고 뉴쿤강 하류까지 길을 안내했다. 물살이 꽤 거센 편이지만, 상류와 비교하면 강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배가 없어도 강을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이는 물끄러미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이곳이었다. 권명이 발견된 곳이. 푸르른 강물이 붉게 물들며 정신을 잃은 권명이 쓸려 내려오는 환영이 보였다. 조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권명은 무사할 거야. 권명은…….’
강 주변을 수색한 후 곧바로 강을 건너게 되었다. 원주민들이 강을 건널 때 사용한다는 밧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저 밧줄에 의지해 강을 건너야 했다.
태혁은 자신의 앞쪽에는 조이를, 뒤쪽에는 한솔을 세운 후 강을 건너자고 했다. 조이는 이 역시도 태혁의 배려라는 것을 알았다.
태혁의 마음을 몰랐다면, 저런 배려를 아무 의심 없이 꿀떡꿀떡 받아먹었겠지만, 그 마음을 알게 된 이상 이전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솔 소위. 자리 바꿔.”
“…….”
한솔은 조이의 의도를 가늠하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필요 없으면 말고.”
조이가 미련 없이 뒤로 돌아서자, 한솔이 재빨리 앞쪽으로 치고 나갔다. 가만 보면 한솔도 참 어려운 놈은 아니었다. 저리 알기 쉬우니. 태혁은 자신의 뒤쪽에 선 조이를 힐끔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이는 안간힘을 다해 밧줄에 매달렸다. 여러 줄로 엉킨 밧줄이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유속이 강하다고 느꼈는데, 조금만 방심해도 급류에 휩쓸릴 정도였다. 또한 뼛속 깊숙이 파고드는 냉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주… 중위님!!”
조이는 재빨리 뒤로 돌아 쓸려 내려가는 대원을 붙잡았다. 신참 대원이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한쪽 팔을 놓친 것이었다. 대원을 붙잡은 팔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으윽!!”
이를 꽉 물고 태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조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이를 차갑게 바라보는 태혁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조이의 입에서 구조 요청이 나오기 전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태혁은 스스로가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 말이 어쩐지 실감이 됐다.
무사히 강을 건넌 후 조이는 이가 달달 떨려 올 정도로 몸을 떨었다. 강물에 반쯤 잠겨 있을 때보다 물 밖으로 나온 지금이 더 추웠다.
“으윽…….”
“중위님. 감사합니다.”
신참 대원이 손난로를 건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손난로를 받아 든 조이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만약 이 자리에 권명이 있었다면 조이의 손난로는 저 멀리 강물에 쓸려 사라졌을 테지.
초콜릿 하나에도 길길이 날뛰던 권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당시 조이는 권명의 유난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권명의 기이했던 행동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반쯤 맞춰진 퍼즐이 권명을 만나면 온전한 그림을 보여 줄 것 같았다. 그러니 이 고된 여정을 계속해야 했다. 조이는 지친 몸을 다시 일으켰다.
또다시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걸었다. 종아리까지 쌓인 눈 때문에 발이 푹푹 빠져 이동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고된 훈련을 받던 그 날처럼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아득하기만 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 때문에 감각이 둔해진 탓이었다.
“쉿!”
태혁이 또다시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조이는 자세를 낮춘 채 전방을 주시했다. 낡은 목장용 트럭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축이 실려 있어야 할 짐칸에는 총을 든 민간인이 있었다. 북부의 석유 부자들이 조직했다는 민병대인 듯했다.
총을 든 병사들은 차에서 내린 후 자작나무숲으로 사라졌다. 운전병과 일부 보초를 서는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태혁은 공격보다는 상황을 지켜보는 쪽으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
“자세를 낮춰.”
얼마 지나지 않아, 숲으로 사라졌던 민병대가 다시 나타났다. 그들 뒤로 포로처럼 결박된 사람들이 끌려오고 있었다. 민병대는 그들을 트럭에 태운 후 사라졌다. 그제야 태혁은 몸을 일으켰다.
“통역. 저곳이라고 했나? 아이 아버지가 말한 곳이?”
“예. 자작나무 숲을 지나면 나오는 마을이라고 했습니다.”
“저곳을 확인한다.”
* * *
눈 내린 자작나무 숲은 꿈속을 거닐 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하얀색 나뭇가지는 마치 새하얀 눈을 마시고 자란 것 같았다. 몽롱한 분위기에 취한 조이는 민병대의 발자국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볼을 살짝 꼬집어 봤을지도 모른다.
조이와 대원들은 민병대의 발자국을 따라 손쉽게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을과 가까워지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공터에는 여러 명의 여인과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은 하얀 숲에서 무장한 군인들이 나타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태혁이 눈빛을 보내자 통역병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쳤으나 아마 진정하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막 건물 안으로 사람들을 대피시키던 중년 여성이 통역병 앞으로 다가왔다. 마을의 촌장인 듯했다. 그 여성의 입에서는 이곳에서 들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던 동제국어가 튀어나왔다.
“누구십니까?”
“동제국어를 하십니까? 저희는 실종된 부대원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입니다. 안심하세요. 해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실종이요……?”
촌장으로 보이는 여성이 통역병과 차분히 대화를 나누자, 긴장한 채 상황을 주시하던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실종된 자가 갈색 머리던가요?”
“아니요! 검은 머리에 바다색 눈이요. 어깨에 총상이 있고, 허리 쪽에는 칼에 베인 상처가 있어요!”
조이는 재빨리 튀어 나가 권명의 특징을 줄줄 늘어놓았다. 의심스럽게 군인들을 바라보던 촌장은 고개를 끄덕인 후 따라오라고 말했다.
“안조이 중위. 뒤쪽에서 따라오도록.”
조이는 태혁의 명령을 무시한 채 촌장을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태혁이 거칠게 조이를 돌려세웠다. 조이의 어깨에 닿은 태혁의 손이 갈고리처럼 아프게 파고들었다.
“아윽…….”
“뒤쪽에서 따라오도록.”
조이는 아프다는 표정으로 태혁을 바라봤으나, 태혁은 조이의 입에서 알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으… 알았습니다.”
태혁의 뒤를 바짝 따라붙어 숲길을 걸었다. 커다란 어깨 너머로 권명의 모습을 쉴 틈 없이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눈 내린 다음 날 태양 빛에 녹아 버린 눈사람을 찾는 기분이었다. 분명 이곳에 있어야 하는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기분.
불길하게 떨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두들겼다. 진정하라는 듯. 한참 동안 앞서 걷던 촌장이 커다란 바위 옆에 멈추어 섰다. 하지만 권명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이쪽입니다.”
촌장은 커다란 바위 뒤쪽을 가리켰다. 조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태혁을 지나쳐 바위 쪽으로 달려갔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험난한 설산과 설원을 밤낮없이 지나왔건만 이 잠깐이 견딜 수 없이 길게 느껴졌다.
온 신경이 바위를 향해 꽂혔다. 저곳이었다. 조이가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람이 있는 곳이.
“권명!!”
커다란 바위 뒤에는, 털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쓴 사람이 있었다. 조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털 이불을 걷어 냈다.
“하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조이는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깊은 잠에 빠진 이가 이곳에 있었다. 늘 반질반질하던 얼굴은 그간의 고생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핏기 없이 푸르른 낯빛, 하얗게 튼 입술, 유독 도드라진 턱 선.
조이는 홀린 듯 그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끝으로 얼음덩어리를 만지는 것처럼 차가운 온도가 느껴졌다. 움찔하며 손이 멀어졌다.
“권명 대위.”
뒤이어 도착한 태혁이 권명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따뜻한 곳으로 옮겨서 가이딩을 해야 해! 몸이 너무… 너무 차가워……!”
“회관으로 가시죠.”
권명은 원래 마을 회관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민병대가 들이닥친다는 제보를 받고 이쪽으로 옮긴 것이라고 했다. 북부의 모든 사람들이 민병대 조직에 찬성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권명을 숨겨 주는 걸 보면.
촌장은 민병대에 대해 말할 때면 분노가 치민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이가 보았던 것처럼 마을을 습격해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 간 것이 비단 오늘만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쪽입니다.”
조이는 권명을 등에 업으려 했으나, 태혁은 뒤에 있던 대원들에게 들것으로 권명을 옮기라고 말했다.
마을로 내려온 조이는 한솔과 함께 24시간 집중 가이딩을 시작했다. 교대라고는 하지만 12시간씩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일이기에, 조이와 한솔 모두에게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특히 조이는 12시간 가이딩을 끝내고 나면 온몸의 기운이 몽땅 빠져나가 기절하기 일쑤였다.
큰 기대를 걸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집중 가이딩으로도 권명은 깨어나지 않았다. 권명의 낯빛은 여전히 죽음과 가까워 보였다. 태혁 역시 권명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느낀 것인지 본부와 여러 번 연락을 취했으나, 뾰족한 답변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
차라리 본국으로 이송해 다른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일 텐데, 군에서는 헬기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수색 작업과 함께 실시된다는 또 다른 작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탓인 걸까?
“태… 아니 대위님.”
“…….”
골치 아픈 일이 있는지 태혁은 이마를 부여잡고 있었다. 조이의 부름에 태혁은 말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의 가이딩으로는 권명 대위가 깨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동제국으로 이송해 치료를 받든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방법?”
“밀접…….”
“뭐?”
말을 끝맺기도 전에, 태혁의 반듯한 이마가 ‘와그작’ 구겨졌다. 조이는 골든타임을 놓치는 게 아닐까 싶어 점점 초조해졌다. 간접 가이딩으로는 부족했다. 사관학교에서 그러했듯, 밀접접촉이라면 잠들어 있는 권명을 깨울지도 모른다.
“밀접 가이딩? 누가?”
“네……?”
태혁은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위협적으로 조이에게 다가왔다. 조이는 본능적으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안조이. 누가 밀접 가이딩을 할 건데? 한솔?”
조이는 그제야 조급한 마음에 태혁에게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중 가이딩을 시도한다. 한솔 소위 깨워.”
태혁의 말대로 조이와 한솔은 두 개의 증폭기를 연결해 주술을 걸듯 권명에게 가이딩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혀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조이는 자꾸만 조급한 마음에 들었다. 이러다가 권명도 조하처럼 깊은 잠에 빠져드는 건 아닐까?
* * *
조이는 태혁에게 다중 가이딩 역시 실패했다고 보고해야 했다. 태혁이 머무는 숙소로 다가가 노크를 하려는데, 안쪽에서 태혁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화를 꾹꾹 눌러 담듯 억눌린 목소리였다.
“위치가 노출되는 순간 끝장입니다. 이곳에 있는 대원들 수로는 절대 탈출 불가합니다. 추가 지원이 필요합니다. 권명 대위… 아직도 코마 상태입니다.”
조이는 잠자코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서서히 군에서 계획한 그림이 조이의 머릿속에도 그려졌다.
군에서는 북부의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남쪽을 향해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 때문에 조이는 북부를 정리할 어떤 묘책이 있을 것이라 여겼었다. 또한 수색 작업 이외에 추가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들었고.
그런데 지금 보니, 그 묘책이 권명이었다. 수색대를 보낼 만큼 권명의 생존에 기대를 걸었던 군에서는 권명을 깨워 두 번째 작전을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폭파 작전?’
군에서 군인들을 얼마나 소모품처럼 다루는지는 익히 아는 바였다. 훼림에서의 개죽음, 방송목적으로 만들어진 실험실 급습 작전. 하다 하다 이제는 죽음의 강에 반쯤 몸을 담근 권명을 깨워 작전을 수행하라니.
조이는 통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후 노크를 했다.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이는 태혁에게 다중 가이딩을 실패했다고 짧게 보고했다.
“어떻게… 할까요?”
“후우…….”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리던 태혁은 집중 가이딩을 진행하라고 짧게 명령을 내렸다. 조이는 한 번 더 밀접 가이딩을 입에 올릴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깊은 잠에 빠진 권명을 깨울 방법은 밀접 가이딩이 유일했다.
“저…….”
“나가 봐. 안 중위.”
태혁은 조이의 입에서 나올 말을 알아차린 듯했다. 어서 나가 보라는 태혁의 말에 조이는 어쩔 수 없이 돌아 나와야 했다.
태혁의 명령에 따라, 조이와 한솔은 또다시 12시간씩 교대하며 집중 가이딩을 진행했다. 아직 별다른 효과를 볼 수 없었으나,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태혁은 며칠째 자신의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조이는 오늘까지 권명이 깨어나지 않거든 태혁의 명령 없이도 밀접 가이딩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개고생을 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권명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병실을 지키는 대원들만 따돌린다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들은 조이와 권명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내가 지킬 테니까 잠깐 쉬어.”
“아닙니다! 절대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었다. 조이는 대위에게는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살살 달래 봤지만, 신입 대원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안조이 중위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무조건 지키겠습니다!”
썅. 권명이 종종 내뱉던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쓸데없이 충성스러운 놈이었다. 저놈.
조이는 짜증스럽게 하얀 수건을 물에 담가 흔들었다. 권명의 얼굴을 슬슬 문질러 닦을 생각이었다. 새하얀 수건만큼이나 하얀 저 얼굴을.
조이는 물끄러미 권명을 내려다보았다. 어려운 퍼즐을 맞추듯 복잡했던 마음이 권명을 다시 만난 후 명쾌해졌다. 여전히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크지만, 그 안에는 죄책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중위님! 대위님이 숙소로 모이라고 하십니다.”
조이는 권명을 잘 살피라고 지시를 내린 후, 태혁의 숙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한솔이 있었다. 장교 중에서도 조이와 한솔만 불러들인 모양이었다. 가이드 장교 둘만 불러 모아 할 말이 무엇일까? 조이는 어쩐지 태혁의 입에서 나올 말이 예상이 갔다.
태혁은 편하게 말하겠다며 조이와 한솔 앞으로 다가왔다.
“권명 대위가 깨어나면, 대위는 새로운 작전을 인계받게 돼. 시추 시설 폭파 작전. 군에서는 그 작전이 성공해야, 북부의 민병대와 협상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야.”
군에서는 북부의 벼락부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을 건드릴 생각인 듯했다. 석유. 그들을 단숨에 부자로 만들어 준 황금 덩어리를 공격한다면, 지금처럼 완강한 태도도 한풀 꺾일지도 모른다.
군에서 수색대를 북부까지 무리하게 보낸 이유가 있었다. 권명을 구조하는 것이 중간 목표라면, 군의 최종 목표는 북부의 석유 부자들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권명은 도저히 그런 임무를 맡을 상태가 아니야.”
“지원은? 추가 지원은?”
한솔은 구조 작업이 위험한 임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자 겁을 먹은 듯했다. 추가 지원은 없는 거냐며 절박하게 물었다. 태혁은 애절한 한솔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밀접 가이딩을… 실시한다.”
“태… 태혁아!”
“……!”
며칠 동안 태혁이 밤새 고민한 결론이 이것이었다. 군에서는 알아서 살아 돌아오라는 입장인 것 같았다. 버려진 패처럼.
한솔은 배신감과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으나, 조이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조이가 권명과 태혁이라는 선택지를 앞에 두고 있듯, 태혁은 조이와 명령이라는 선택지를 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한솔 소위가…….”
“지원하겠습니다.”
조이가 앞장서 밀접 가이딩을 하겠다고 나섰다. 옆에 있던 한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혁은 턱 근육이 불끈 솟을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고민에 빠진 것처럼 말이 없던 태혁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그날 밤 조이는 차가운 물로 몸을 씻은 후, 권명이 시체처럼 잠들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관학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그때의 조이는 밀접 가이딩을 노동쯤으로 여겼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구한다기보다는 대가를 치른다는 마음이었다. 아버지의 사고를 수습할 정도로 큰돈을 받았으니, 그만한 일을 한다는 생각. 그 때문에 밀접 가이딩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권명의 회복만을 간절하게 바랐다. 권명을 살리는 것. 그것 자체가 조이의 유일한 목표였다.
조이는 다 죽어 가던 권명을 살려 낸 적이 있었다. 심지어 폭주 직전의 권명을. 그러니 이번에도 권명을 살려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한 열망을 담아 기도할 거니까.
조이는 권명의 몸을 가리고 있는 이불을 걷어 냈다. 그사이 살이 내린 권명의 몸은 조이가 기억하던 모습과 달랐다. 그 차가운 몸 위로 조이의 뜨거운 몸이 겹쳐졌다.
조이는 얼음 기둥을 꾹 누른 채 허리를 흔들었다. 뜨거운 구멍에 차가운 성기가 닿자 주뼛 소름이 돋았다. 불시에 찬물을 맞은 듯. 하지만 쓰윽쓰윽 그곳을 여러 번 문지르자 찬 기운에 경직된 구멍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조이의 몸은 조금씩 달아올랐지만, 권명의 몸은 여전히 찬 기운만 내뿜었다. 조이는 그 기운을 이겨 내듯 더욱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삐걱삐걱 낡은 침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부들부들 떨리던 입술 사이로 울음이 쏟아졌다.
“흐읍…….”
권명의 상체 위로 빗방울처럼 눈물이 떨어졌다. 권명의 죽음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느껴졌다. 늘 조이의 몸을 뜨겁게 감싸던 권명의 품이 이렇게 싸늘하다니.
“흐윽… 흡… 권명…….”
조이는 울먹이며 권명의 상체를 꽉 끌어안았다. 죽음의 사자가 권명의 차가운 몸을 지나치도록. 권명을 데려가지 못하도록.
“흐으… 권명… 흑…….”
권명과 함께 했던 평범한 일상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당연했기에 감사한 줄 몰랐던 그 시간들이. 장난을 치던 권명의 목소리, 웃음, 그리고 그 눈빛.
돌이켜보면 권명은 그의 특별한 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그때는… 그때는…….’
조이는 한참 동안 권명이 가슴에 기댄 채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정신없이 울어 버린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흐읍.”
울컥하고 치솟던 울음이 가라앉자 귓가로 콩닥콩닥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느껴 우느라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 조이는 그 미약한 움직임이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콩닥콩닥.
조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며 몸을 일으켰다. 권명의 몸이 다시 뜨거워지도록 움직일 생각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조이는 손가락 세 개를 입에 물어 질척하게 적신 후 마른 구멍에 펴 발랐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내려 권명의 성기를 다시 꾹 눌렀다. 기다란 살 기둥을 구멍으로 훑듯 움직였다.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밑에서 젖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쩐지.
“……!”
엉덩이 골을 서늘하게 스치던 성기에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던 체온이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온기가 희망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조이는 스스로 엉덩이를 벌려 살짝 발기한 귀두를 구멍에 가져다 댔다. 아마 이 모습을 권명이 보았다면 무척 흥분했을 테지.
짓궂은 권명은 관계 도중 조이에게 스스로 엉덩이를 벌리라고 주문할 때가 있었다. 안달 난 조이가 양손으로 엉덩이를 잡아 벌릴 때면 기이할 정도로 흥분하고는 했었다.
“으윽…….”
두툼한 귀두가 주름에 턱 걸려 있었다. 조이는 조금 더 허리를 내려 살덩어리를 몸속으로 받아들였다. 아래가 확장되는 느낌이 생생했다. 발기 전에도 어린아이 주먹 같은 귀두가 내벽을 긁으며 파고들었다.
“아흣……!”
어느새 꼿꼿하게 고개를 든 성기 위로 완전히 내려앉았다. 신음 소리와 함께 고개가 저절로 뒤로 넘어갔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조이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아니 뻔뻔한 명령을 속삭였다. 시체야 일어나라. 눈을 떠라. 다시 내 이름을 불러라. 그리고 날…….
* * *
밀접 가이딩 후, 조이는 반나절을 꼬박 앓아누웠다. 차가운 살 기둥을 내장 깊숙이 받아들인 탓인지 몸살이 났다. 조이를 괴롭히던 악몽도 죽을 듯한 수마에 기를 펴지 못했다. 조이는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등이 흠뻑 젖도록 땀을 흘리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중위님! 대위님 상태가 호전됐대요!”
조이는 훌러덩 이불을 걷어 냈다. 곧바로 달려 나가려 했으나, 비틀거리며 벽을 부여잡아야 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마를 부여잡고 잠시 멈추어 섰다. 눈앞이 조금씩 또렷해지자 조이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회관에는 태혁과 몇몇 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역시 이 기쁜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체온이 상승했어요.”
조이의 옆에 있던 새내기 대원이 귓속말을 했다. 체온이 올라갔다면, 분명 좋은 징조였다. 권명의 몸은 시체처럼 차가웠으니까. 조이는 대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권명이 누워 있는 침대까지.
체온이 상승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시체처럼 하얗던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권명… 권명……!”
조이는 어서 일어나라는 듯 권명을 흔들어 깨웠다. 권명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태혁은 진정하라며 조이의 어깨를 잡아 말렸다. 그 순간 권명의 눈이 파르르 떨려 왔다.
“어! 눈! 눈이 떨렸어!”
조이에게만 보이는 환영이 아닌 것 같았다. 태혁 역시 조이를 말리던 손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뚫어질 듯한 시선을 받던 눈이 서서히 떠지더니, 짙은 바다색 동공이 드러났다.
“권명! 나… 나 알아보겠어?”
“권명 대위!”
조이와 태혁의 물음에 푸르른 동공이 점차 또렷해지고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들을 알아본 것인지 물기 없이 메마른 입술이 벌어졌다.
“둘은… 한 거야……?”
“뭐라고…?”
권명이 작게 속삭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조이는 권명의 입술 위로 자신의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둘은… 뭐야…? 사귀는 거야?”
“??”
조이는 황당한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그 순간 조이가 즐겨 보던 통속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클리셰였다. 주인공 중 하나가 크게 다치고 나면 종종 기억을 잃었다. 권명의 머리에도 하얀색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기억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태혁과 사귀냐니!?’
“나… 나 안조이야! 기억하지?”
조이는 벌새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이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나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을 숨길 수 없었다. 조이는 애절하게 권명을 바라보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그 순간 권명의 눈썹 한쪽이 삐쭉 솟았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권명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악기처럼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알아… 안조이. 넌 태혁. 너희 둘이 왜… 같이 있는 거야……?”
“이… 이 자식아! 깜짝 놀랐잖아!”
“귀 아파…….”
꽥 소리를 지르던 조이는 ‘흡’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도 권명의 기억은 멀쩡했다. 소설에서 본 것처럼 기억을 잃었다면 충격요법으로 머리를 후려칠 생각이었는데, 그런 극단적인 방법까지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온전한 기억과는 별개로 권명의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인상을 쓰고 있었다.
“널… 구조하러 온 거야. 강물에… 그렇게 돼서…….”
“빨리도 오네…….”
권명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그 입에서 나온 대답 역시 차갑기만 했다. 조이는 권명과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귀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그런데 권명은 조이가 반갑지 않은 걸까?
“미안해…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조이는 권명의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고작 이런 사과로 권명의 서운함이 풀릴 것 같지는 않았는데, 권명은 생각보다 쉬운 놈이었다. ‘쳇’ 하며 고개를 돌렸으나, 눈보라를 내뿜던 권명의 표정이 조금 녹아 있었다.
“권명 대위. 몸을 일으킬 수 있겠나?”
“아니. 못 일어나. 등이 침대랑 붙었나 봐.”
“의무병 앞으로!”
태혁의 명령에 뒤쪽에 있던 의무병이 대원들 사이로 튀어나왔다. 곧바로 침대로 다가와 권명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다. 조심성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환자를 저렇게 거칠게 대하다니.
“됐어! 내가 할게.”
조이는 의무병 대신 권명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예전보다 살이 내리긴 했으나, 여전히 대단한 덩치였다. 어째 조이가 부축하는 것이 아닌 매달리는 모양새였다. 조이는 ‘윽’ 소리를 내며 권명의 몸을 들어 올렸다.
‘어……?’
바위처럼 무겁던 몸이 한순간에 쑤욱 들렸다. 조이의 힘이 세진 게 아니라면 권명이 가벼워진 거겠지. 또 울컥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조이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권명을 바라보았다. 뚫어지게 조이를 보던 권명의 입에서 뒤늦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파? 어디? 어디가?”
조이는 멀뚱멀뚱 서 있는 의무병에게 권명의 상태를 살피라고 소리쳤다.
“대위님,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그냥 다.”
의무병은 권명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인하려는 것인지, 눈과 안색을 살핀 후 어깨, 팔, 허리 그리고 이불 속에 감춰진 하체를 살폈다. 그 순간 조이는 헛것을 본 듯 눈을 비벼야 했다.
‘왜 고추가……?’
정신을 차리면서 저 물건도 같이 깨어난 걸까? 권명의 방망이가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조이는 슬쩍 권명의 하체 위로 두꺼운 이불을 살포시 덮어 주었다. 하지만 어느새 완벽하게 발기한 성기가 이불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망측하기 그지없었다.
“권명 대위 상태는 어떤가?”
“큰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만, 아프시다고 하는 걸 보면…….”
태혁은 의무병에게 권명의 상태를 보고받으며 조금씩 멀어졌다. 의무병의 입에서 ‘환-’으로 시작하는 병명이 나왔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환으로 시작하는 병이 뭐가 있지? 환각? 환상?’
의무병의 입에서 나올 만한 단어를 떠올리는데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권명은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조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네 에스퍼는 누구야……?”
“??”
권명은 아까부터 이상한 질문만 하고 있었다. 당연히 조이는 권명의 가이드이고, 권명은 조이의 에스퍼였다.
“너잖아…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조이는 권명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열이 나는 게 아닐까? 그 순간 권명의 입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조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권명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권명은 머리를 크게 다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살짝 돌았는데. 여기서 더 돌면 어떡하지?’
* * *
에스퍼의 놀라운 회복력은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의식을 찾지 못해, 꽝꽝 언 시체처럼 누워 있던 권명은 멀쩡하게 걸어 다닐 뿐만 아니라, 격렬한 운동을 할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다.
살짝 살이 내렸던 몸 역시 고무줄처럼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밤만 되면 아프다고 칭얼거렸다. 낮 동안 무리한 몸이 밤이면 고통을 호소하는 걸까?
권명이 깨어나기만 하면, 조이의 심장을 콕콕 찌르던 죄책감도 사라질 줄 알았는데, 조이는 여전히 권명에게 미안했다. 권명의 병간호를 자청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물론 태혁은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베개 어때? 너무 높아?”
“괜찮은 거 같기도? 근데 너도 누워.”
“나도……?”
“응. 바로 옆에 누워.”
조이는 순순히 권명의 옆에 몸을 뉘었다. 곧바로 조이의 옷 속으로 권명의 손이 파고들었다. 냉기를 뿜어내던 권명의 손은 회복과 동시에 예전처럼 조금은 뜨거운 온도를 내뿜었다.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 스르륵 조이의 옷 안으로 파고든 손이 옆구리를 타고 올라와 조이의 가슴에 닿았다.
“왜……?”
“젖꼭지, 잘 있어?”
“어.”
젖꼭지에 발이 달렸겠는가 아니면 날개가 달렸겠는가. 잘 있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권명의 손가락은 원을 그리듯 그 부분을 매만졌다. 자꾸 야한 생각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조이는 뇌에 힘을 주고 참고 있었다. 환자를 앞에 두고 이게 무슨 망측한 상상인가.
“작아졌어.”
“뭐가?”
“찌찌. 커다란 게 꽤 꼴렸는데.”
권명은 하얀색 티셔츠 위로 삐쭉 솟은 젖꼭지가 꽤 꼴렸다며 헛소리를 지껄였다. 두 눈을 감고 상상이라도 하는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까지 띠었다. 미친놈. 아프다는 놈이 이게 뭔 짓인가.
“야! 손 떼!”
조이는 찰싹하고 권명의 손등을 내려쳤다.
“아! 나 또 아픈 것 같아.”
“뭐? 어디가?”
어디가 아프냐는 물음에도 권명은 조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실실 웃기만 했다. 갓 태어난 아기도 아니건만, 이리 자주 아파서야. 조이는 앞으로 조금 더 살뜰히 권명을 보살펴야 할 것 같았다. 덩치만 산만 하지, 권명은 생각보다 연약했다. 하긴, 저 나이에 벌써 두 번이나 요단강을 건널 뻔했으니.
“괜찮아?”
“몰라-.”
권명은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조이를 확 끌어안았다. 조이는 숨이 막혀 권명을 밀어냈으나 권명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이를 꽉 끌어안더니 침대 위를 뒹굴뒹굴했다.
“근데, 난 아마 꽤 오래 아플 거야.”
권명은 아픔을 입에 담으면서도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꽤 오래 아플 거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지? 후유증을 말하는 건가?’
조이의 고민을 방해하듯, 권명의 손이 또다시 조이의 가슴을 매만졌다. 조이는 혼란스러웠다. 이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