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발령 2 (5/16)

5. 발령 2

N48 구역. 동제국 최북단에 위치한 구역이었다. 북부인들은 그곳을 훼림이라고 불렀다. 숲의 모양이 하늘에서 보면 닭 부리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침이면 뿌연 안개가 연기처럼 자욱했고, 수시로 눈이 내려 깊게 파 놓은 참호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세계대전이라 불리는 구시대의 전쟁을 떠올렸다.

문명의 손길을 거부하듯 빽빽하게 솟은 나무 때문에 대형 워봇은 진입할 수 없었고 뿌연 안개로 항공 지원도 어려웠다. 그 때문에 동제국에서는 오직 보병만으로 이곳을 사수하고 있었다. 조이가 속한 부대는 이 끔찍한 악조건 속에서 끈질기게 훼림을 지키고 있었다.

조이가 보기에 N48 구역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인데, 군에서는 이 땅을 전략적 요충지로 여기고 있었다. 훼림 북쪽 경계선을 지나면 북 제국이었다. 서제국의 팽창을 우려한 북제국은 훼림을 통해 동제국으로 비밀리에 지원 물품을 보낼 계획이었다.

냄새를 맡은 서제국 놈들이 훼림을 매섭게 공격하고 있었다. 기갑부대가 밤낮으로 포탄을 쏘아 댔다.

“피해! 공격이야!”

“제기랄. 공격 한번 못 하고 다 죽겠네!”

“저놈들은 밥도 안 먹나!”

쿵! 쿵!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포탄에 스친 나무가 박살 나며 장대비처럼 나무 조각이 떨어졌고, 사방에서 의무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이는 아침 식사도 내팽개친 채, 깊게 파 놓은 참호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처음 폭격을 경험하던 날이 떠올랐다. 다음 날까지 귀가 멍하고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었다. 어찌나 무시무시하던지.

조이와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다음 날이면 포탄으로 다리가 잘리거나, 죽음을 맞이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전쟁은 생각보다 더 참혹했다. 죽음의 냄새를 이보다 가깝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으윽!!”

“안조이!”

권명은 포탄을 피해 조이가 있는 참호까지 달려왔다. 등 뒤로 조이를 꽉 끌어안는 힘이 느껴졌다. 조이는 귀가 아플 정도로 꽉 틀어막았다. 이 공격이 빨리 끝나기를.

“으으!!”

한참 동안 온 숲을 뒤흔들던 폭격이 멈추었다. 누군가 불을 피운 탓에 위치가 노출된 것이었다. 조이는 꽉 감은 두 눈을 떴다. 폭격이 끝났음에도 선뜻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귀가 멍하고 온몸이 떨려 왔다. 그럼에도 조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야 했다.

등 뒤로 뭔가를 비벼 대는 망할 종자 때문에.

“떨어져!”

“조금만.”

“넌! 이런 상황에도!”

“이런 상황에도 뭐?”

권명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조이는 할 말이 참으로 많았지만, 그 말을 꺼내 봐야 권명이 좋아할 게 뻔하니 참기로 했다. 증폭기만 무사했어도 이런 짓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권명은 훼림으로 발령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조이의 증폭기를 망가트렸다.

폭격이 쏟아지는 날 참호 밖으로 증폭기를 내던진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의 같은데 본인은 한결같이 미끄러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이 안 통했다. 권명은 어찌 되었든 자신이 실수를 한 부분이니 수리까지 자신이 하겠다며 가져가 놓고는 깜깜무소식이었다.

“소대장님! 권명 중위님!”

저 멀리서 권명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명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뭐야.”

“중대장님이 찾으십니다!”

“귀찮아 죽겠네. 왜 자꾸 사람을 오라 가라야!”

권명이 위협적으로 다가가자 심부름꾼인 병사가 뒷걸음질을 쳤다. 누가 보면 서제국의 군사라도 만난 줄 알 것이다.

“넌 얌전히 처박혀 있어!”

“알았어. 대위 사냥꾼!”

조이는 얄밉게 경례를 하며 권명의 별명을 불렀다. 뒤돌아 가려던 권명은 조이에게 꿀밤이라도 먹일 기세로 다가왔다. 조이는 ‘잘 가’라고 소리치고는 참호 속으로 재빨리 기어들어 갔다.

대위 사냥꾼. 권명의 새로운 별명이었다. 가만 보면 권명은 군대랑 가장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계급장이 생명이 곳에서 번번이 하극상을 일으키니 말이다.

조이와 권명이 속한 S중대를 이끄는 대위는 권명을 보자마자 인상을 구겼었다. 꽤 전통적인 교육을 받은 것인지, 그는 에스퍼와 가이드를 혐오했고, 권명이 조이에게 치근덕거릴 때마다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권명을 보면 노골적으로 비꼬던 그는 훼림에서의 첫 번째 전투에서 경기를 일으킨 후 군 병원으로 이송됐다. 하필 그때 하얀 거품을 물며 쓰러진 대위 옆에 권명이 있었다. 그 후 중위였던 자가 대위로 승급하게 되었는데, 권명은 임관식에서 비아냥거리는 대위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 후 병사들은 권명을 대위 사냥꾼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대위가 될 때까지 대위 사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장난스레 떠드는 것은 여러 번 들었었다. 그 후 조이는 권명을 놀릴 때면 대위 사냥꾼이라고 불렀다.

뻔뻔한 권명도 그 별명만큼은 듣기 싫은지 조이가 딱 예상하는 반응을 보여 놀려 먹는 재미가 있었다.

‘잘 가라. 대위 사냥꾼.’

불량스러운 걸음으로 사라지는 권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이는 재빨리 참호 밖으로 튀어 나갔다. 권명의 말대로 얌전히 처박혀 있을 생각은 없었다.

조이는 N48 구역으로 온 이유가 있었다. 실험실의 존재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권명은 자신이 다 알아서 할 테니 믿고 따라오라고 했으나, 조이는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만약 이곳에 실험실이 없다면, 다음 유력 후보지로 발령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맨땅에 머리를 박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었으나, 조이는 이곳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지원군을 만나게 되었다. 약쟁이 에스퍼. 한 중위. 다 죽어 가던 놈을 조이가 살려 준 적이 있었다. 그 일이 꽤 감사했던지, 놈은 조이에게 꽤 유용한 정보를 흘려 주고 있었다.

“안 소위!”

“찾아봤어?”

“이리 와.”

놈은 스파이 짓에 아주 심취해 있었다. 겁에 질린 초식동물처럼 주변을 살핀 뒤 조이를 야전병원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자. 일단 이거 받아.”

대단한 비밀 무기를 거래하듯 건넨 것은 초콜릿이었다. 조이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조이는 스파이 짓에 장단을 맞추듯 초콜릿을 비밀스럽게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실험실은?”

“찾았어. N50 구역.”

“뭐? N50?”

N50은 동제국 영토가 아닌 서제국의 영토였다. 그곳으로 가려면 훼림에서의 교착 상태를 끝내야만 가능했다. 그곳에 조하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실험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이곳까지 온 보람은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래?”

“아마 조만간 워봇과 에스퍼가 지원을 올 거야.”

“그럼…….”

추가 지원을 온다면, 군에서는 훼림을 완벽하게 장악한 후 실험실이 있는 도심까지 밀고 갈 생각인 듯했다.

“지원자도 받을 것 같아?”

“그건 모르겠어. 너 지원하게??”

조이는 무조건 그 무리에 합류할 생각이었다. 어떤 작전으로 N50 구역까지 밀고 갈지는 모르지만, 분명 위험한 전투일 것이다. N50 구역이라면 시가전이 벌어질 테지. 그럼에도 조이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아주 작은 확률이라고 할지라도 조이는 그곳으로 갈 것이다.

“추가 정보가 생기면 또 알려 줘. 그리고 손잡아.”

“응!”

조이는 비밀리에 정보를 받고 가이딩도 해 주고 있었다. 한 중위는 조이의 가이딩 덕분에 이 추운 북부에서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면 주기적으로 가이딩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혹여 권명에게 그러했듯 구멍을 내주어야 할까 고민했는데, 겨우 손이나 내어 주는 정도였다.

권명이 요구하는 것에 비하면 꽤 얌전한 편이었다. 가이드는 필요 없다면서 학을 떼던 권명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놀고먹는 주제에 가이딩은 꼬박꼬박 받으려 했다.

북부로 향하는 긴 여정에서도 권명은 꽤 여러 번 조이의 엉덩이를 노렸었다. 때때로 가이딩이 목적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 짓이 목적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한 중위와 헤어진 후, 조이는 꽝꽝 언 참호로 돌아왔다. 조금 더 깊게 참호를 파낼 생각이었다. 집을 짓는 비버처럼 부서진 나무 기둥을 가져와 참호 위를 반쯤 막았다. 포탄이 이 구덩이로 떨어진다면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비처럼 쏟아지는 나뭇가지는 막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살림 차릴 거냐? 왜 또 땅을 파?”

그사이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권명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왜 부른 거래?”

“똑같지 뭐. 너희에게 실망했다.”

중대장이 주로 하는 말은 너희에게 실망했다로 시작한다. 어쩜 그리도 실망할 일이 많은지. 무슨 사건만 생기면 실망했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때때로 하급 장교들을 두들겨 패기도 한다는데, 권명만큼은 예외였다.

“그래서 언제 교대해 준대?”

“무조건 사수하래.”

며칠째 폭격으로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군에서는 여전히 이 거지 같은 구역을 사수하라고 말할 뿐이었다. 훼림에 있는 전력으로는 선제공격을 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 때문에 군에서는 서제국 놈들이 알아서 이곳으로 들어와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까라면 까야지.’

조이는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권명은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를 뒤지더니 조이에게 짙은 녹색 양말을 건넸다. 이미 양말은 충분한데 이걸 왜 주는 걸까?

“이걸 왜?”

“이런 추위에 어디를 보호해야 하는지 알아?”

“손, 발, 귀?”

“쯧쯧.”

권명은 한 수 알려 주겠다는 듯 조이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조이의 고추를 꽉 움켜쥐었다.

“야!!”

“얼지 않게 간수 잘해라. 안 그래도 비실비실한 거.”

비실비실이라니. 조이의 물건은 엄연히 평균 사이즈였다. 권명의 물건이야말로 비정상적인데,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손 떼!”

파르르 떨어 대는 조이를 권명이 우습다는 듯 바라보았다. 미치지 않는 한 조이가 저 양말을 고추 장갑처럼 쓸 일은 없을 것이다. 조이는 짜증스럽게 양말을 군용 가방 위로 던졌다.

하지만 다음 날 조이는 기겁할 만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자고 일어나니, 조이의 고추에 녹색 양말이 씌어 있었다. 조이는 잠귀가 꽤 어두운 편이었는데, 권명 놈이 망측한 짓을 하는 줄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 미친놈!”

* * *

며칠 뒤 자욱하던 안개가 옅어졌다. 반격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아직 어스름이 깔린 새벽이었지만 조금 더 날이 밝으면 항공 지원도 가능할 것 같았다.

정보원에 따르면, 기나긴 폭격에도 아무런 대응이 없자, 일부 서제국의 소대가 훼림 안쪽으로 이동할 예정이라 했다.

4-4작전, 지난 며칠간 부대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박격포 4대와 항공 지원을 방해하던 대공포 4대를 무력화할 작전이었다.

중대장은 실망만 할 줄 알지, 실전에서 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소대장인 권명이 이번 작전을 지시하게 됐다. 조이는 이 무식한 놈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꽤 했다. 조금 거친 방법으로.

“자주 박격포 4대가 이곳, 이곳에 있다. 그리고 대공포는 이쪽.”

권명은 항공사진에 X자로 박격포 위치와 대공포 위치를 표시한 후 대원들에게 공격 타깃을 배정했다.

“하름. 대양이 첫 번째 전차를 맡는다. 그리고…….”

조이와 몇몇을 제외하고 모두가 타깃을 배정받았다. 조이는 즉 엄호사격을 하라는 말이었다.

“작동 시간까지 5분 걸린다.”

“예!”

“5분 안에 무조건 폭파시켜야 한다. 못 알아먹은 새끼는 그냥 돌아가. 이해했어?”

“예… 예!”

일반 병사들은 이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장거리 무기인 소형 박격포를 땅에 박아 설치했다. 반면 권명을 필두로 한 에스퍼들은 소총 들듯 장거리포를 들어 올렸다. 종종 동글동글한 포를 공처럼 가지고 노는 에스퍼도 있었다. 조이는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라고는 했다.

‘다 같이 죽자는 것도 아니고. 저게 뭐람……!’

조이는 최대한 그들과 멀리 떨어졌다. 나무 옆에 몸을 반쯤 숨긴 채 적진을 향해 총구를 조준했다.

“공격!”

권명의 말대로 전차가 작동하기 전까지 쉴 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기습을 당한 서제국 군인들이 반격을 가했으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차 4대는 목표한 대로 전투 불능 상태였다. 권명은 마지막 남은 대공포를 박살 낸 후 퇴각 신호를 보냈다.

등 뒤로 구름을 가르며 폭격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폭격기는 무심하게 뭔가를 떨어트리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떨어트린 무기는 무시무시한 폭발음을 내며 적진을 초토화시켰다.

무사히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조이는 야전병원으로 향했다. N50 구역 관련하여 추가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는데, 한 중위를 만날 수 없었다. 또 어디론가 스파이 활동을 나가기라도 한 걸까? 대신 조이는 그곳에서 예상외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북부로 발령을 결정 지으며, 어쩌면 조금은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태혁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조이!”

“태혁아!”

태혁은 조이만큼 이 만남이 반가운지 조이를 꽉 끌어안았다. 지난번 한 중위가 말한 지원병에 태혁이 포함된 모양이었다. 조이는 막연하게 태혁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얼떨떨하기만 했다.

“어떻게 지냈어?”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영창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잖아.”

태혁은 언젠가 철장 너머로 조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그 눈빛 그대로 조이를 내려다보았다. 조이는 적어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는 것 같아 기뻤다.

“나는… 여기로 발령받았어.”

“혼자?”

“아니….”

“그럼… 매칭했겠구나.”

태혁은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조이는 영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심문 장교와 북부 발령으로 협상을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컷! 아-주 좋습니다!”

그 순간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촬영기사와 그 옆에서 지시 내리는 자가 보였다. 저 둘은 방금 조이와 태혁의 재회를 말도 없이 촬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이는 어쩐지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저 영상 안에 담긴 조이의 표정은 숨김없이 모든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을 텐데.

“이게 뭐야?”

“아… 이거……?”

늘 당당하던 태혁이 어쩐지 멋쩍은 듯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군 홍보병을 하게 됐어.”

“아…….”

어울렸다. 태혁은 발령 전에도 모범이 되는 군인이었다. 군에서는 매년 여러 명의 홍보병을 뽑아 전 구역으로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 가장 우수한 군인을 방송에 내보냈다. 성적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뛰어난 군인. 자원 입대자를 끌어모으기 위함이었다. 7구역에서도 몇 편 본 적이 있었다. 포병 특집이었던가?

“조이. 잠시만.”

감독은 수선을 떨며 조금 전 찍었던 장면을 태혁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태혁의 모습이 기가 막히게 찍혔다나 뭐라나. 태혁은 조이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조이는 고개를 끄덕인 채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방송 촬영 현장을 본 것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촬영이 끝나거든 조금 더 태혁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태혁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태혁아. 여기 있었어? 어……?”

태혁에게 다가오던 인물은 조이를 알아본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태혁과 페어를 이룰 가이드가 누구일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궁금증과 알고 싶지 않다는 상반된 마음에 결국 물어볼 수 없었다. 차라리 영영 모르는 게 나았을 텐데.

“중위님. 이쪽에서 한 번 더 촬영하겠습니다.”

“조이. 잠시만!”

태혁은 조이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조이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저들의 모습과 조금 전까지 훼림을 내달리던 조이의 모습이 너무 상반되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옷이라도 갈아입는 건데.

태혁을 다시 만나게 된 건 반가운데, 어쩐지 조금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태혁이 군에서 인정을 받고 잘나가는 건 분명 잘된 일인데, 왜 이렇게 입 안이 쓴지 모르겠다. 조이는 씁쓸한 기분에 차디찬 훼림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조이가 힘겹게 파 놓은 참호에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일 안 하는 베짱이처럼 놀고 있었다. 조이는 말없이 참호로 기어들어 가 권명 옆에 앉았다.

조이의 가라앉은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권명은 조이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이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겠다는 듯 관찰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조이는 그 부담스러운 관심을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난 권명은 조이 앞으로 뭔가를 건넸다.

“자.”

초콜릿이었다. 그제야 지난번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초콜릿이 떠올랐다. 근데 웬 초콜릿이지? 7구역 출신인 조이가 모르는 기념일이라도 있던 걸까? 한 중위도 그렇고 권명도 그렇고.

“됐어. 나도 있어.”

조이는 안주머니에서 반쯤 부서진 초콜릿을 꺼냈다. 권명의 눈썹 한쪽이 삐쭉 솟았다. 권명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안 들거나 불결한 것을 볼 때면 권명의 눈썹 한쪽이 저렇게 삐쭉 솟고는 했다.

“어떤 놈이 준 거야?”

“있어. 그러니까 난 됐어.”

“누구냐고? 임 소위 그 새끼지? 그렇지?”

맹세코 그 에스퍼와는 말도 나누어 본 적도 없었다. 포탄을 공처럼 가지고 놀기에 불안한 마음에 힐끔 본 것이 다였다. 하지만 권명은 그때 임 소위가 조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손했다며 오만 가지 상상을 덧붙이고 있었다.

“그 새끼 그럴 줄 알았어! 널 훑어보더라니까?”

“그 사람 아니야!”

“그럼 누군데? 왜 말을 못 해?”

권명은 바람난 애인을 쥐 잡듯 잡는 연기에 심취한 듯했다. 대체 이 초콜릿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그치는 권명의 태도를 보니 겁쟁이 한 중위가 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조이가 어물쩍거리며 대답을 회피하자 권명은 조이가 들고 있던 초콜릿을 낚아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야!”

“안조이. 난 가이드 나눠 먹는 취미 없어.”

“뭐?”

이제는 조이를 숫제 음식 취급하고 있었다. 조이는 확 기분이 상했다. 저놈은 정말로 저 주둥이가 문제였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다시 저 입에서 얄미운 말이 흘러나왔다.

버럭 성질이라도 낼까 했으나, 태혁의 일로 가라앉은 마음에 화낼 기운도 나지 않았다. 조이는 그저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비좁은 참호에서 권명을 외면할 길은 고작 반대쪽으로 돌아눕는 것뿐이었다.

“안조이. 나 봐.”

조이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어깨를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지만 이를 꽉 물고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옆구리로 손이 들어와 마구 긁기 시작했다.

조이는 분명 화가 난 상태였지만 옆구리를 간질이는 손길을 견딜 수 없었다. 조이는 원래도 간지럼을 잘 타는 편이었다.

“가… 간지러워! 그만! 그마안!”

조이는 낚싯바늘에 걸린 문어처럼 온몸을 배배 꼬았다. 권명은 기어코 조이의 입에서 항복이라는 말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무지막지하게 긁어 댔다.

“하… 항복! 항복! 하아…….”

숨이 넘어 갈듯 항복이라고 외치는 조이를 내려다보던 권명은 자신이 가져온 초콜릿을 조이의 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넌 내 가이드잖아. 그러니까 내가 준 거만 먹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유치원생이나 할 법한 말이었다.

대부분의 에스퍼들은 매칭한 가이드에게 강한 소유욕을 느낀다고 들었다. 그것이 연애 감정에서 비롯되는 소유욕일 수도 있지만, 그 감정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주인에 대한 소유욕과 비슷한 것이었다.

내 주인이 나보다 다른 집 강아지를 더 예뻐하는 걸 견디지 못하는 감정. 어쩌면 권명도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너랑 매칭한 이상. 다른 짓은 안 해.”

조이는 한 중위에게 몰래 가이딩을 해 주던 일이 떠올랐다. 손 몇 번 잡게 해 준 게 다였으니 뭐 그리 찔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바람난 아버지가 밥 한번 먹은 게 다라고 소리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바람피우는 것도 유전이라고 하던데…….’

조이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 화해의 의미로 한 발씩 뺄까?”

“진짜 화해하기 싫다!”

권명은 조이의 질린다는 표정을 무시한 채, 반질반질한 얼굴을 무기 삼아 조이의 허리춤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더니 뭔가를 발견한 듯 소리쳤다.

“양말 어디 있어? 고추 얼면 어떡해! 넌 안 그래도 물이 많아서 잘 관리해 줘야 한다고!”

“뭐? 물……?”

“그래. 넌 구멍하고 자지에 물이 많잖아.”

권명은 진심으로 조이의 구멍과 고추가 걱정된다는 표정이었지만, 그 표정이 조이를 더 질리게 했다. 망할 놈.

* * *

며칠 뒤, 조이와 권명에게는 두 가지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훼림을 사수하던 S중대를 F중대로 교체한다는 소식이었고, 조이와 권명이 승진한다는 소식이었다.

지난번 4-4작전의 성공을 치하하는 것이었다. 권명은 별명대로 대위가 되었고, 조이 역시 중위가 되었다.

지난번 작전은 순전히 에스퍼의 힘으로 이뤄 낸 성과였지만, 조이는 관찰자 역할로 어찌 되었든 그 작전에 참여한 것이기에 승진하게 되었다. 전시 상황이기에 가능한 이례적인 승진이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하며 공을 잘 세울 만한 에스퍼와 페어를 이룰 것이라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다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어찌 되었든 조이는 그때의 다짐처럼 공을 잘 세울 만한 에스퍼와 짝을 이룬 것 같았다.

“안조이 중위.”

“그래. 권명 대위.”

조이는 장난치듯 권명의 말을 받아쳤다.

“근데. 그럼 우리 다른 곳으로 발령받는 거야?”

“아니. 발령 보류야. 특수부대를 신설한다나 뭐라나. 어쨌든. 한동안 여기서 푹 쉴 수 있다는 거지.”

훼림 근처의 작은 소도시에서 조이와 권명은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이와 같은 소위들은 소대장 업무를 하기에, 바삐 돌아다녀야 하지만 조이는 가이드라는 이유로 귀찮은 업무에서 모두 배제되었다.

조이가 하는 업무는 어떻게 보면 1인을 위한 전담 의무병과 비슷했다. 권명의 컨디션을 살피고 폭주하지 않도록 적절한 시기에 가이딩을 해 주는 일.

“넌 외출 안 해?”

조이는 다른 병사들처럼 권명이 외출하기를 바라며 물었다. 권명이 바빠야 조이도 개인적인 볼일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권명은 젖먹이 아기도 아닌데, 조이를 감시하듯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내가 어디로 외출을 나가?”

“아니… 그냥. 다른 병사들은 그러니까.”

“그 새끼들이야. 이거 한번 써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고.”

권명은 저질스럽게 허리를 움직이는 동작을 했다. 저렇게 직접 보여 주지 않아도 병사들의 외출 목적은 잘 알고 있었다.

“외출하고 싶어?”

“아니 뭐…….”

굳이 외출할 필요성은 못 느끼고 있었다. 그저 야전병원에 한 번 다녀와야 했다. 지난주부터 한 중위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진짜 끝내주는 곳을 발견했는데, 가 볼래?”

권명은 수도에서 나고 자란 탓에 대체로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보며 자란 도련님이었다. 그런 권명의 입에서 끝내주는 곳이라는 말이 나왔다. 조이는 드물게 그곳이 궁금했다.

“그래. 뭐.”

* * *

N48 구역으로 발령을 받은 후, 군부대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훼림을 사수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당연히 외출은 금지였다. 조이에게 북부는 맹렬한 추위와 폭격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S중대가 짧은 휴식을 취할 마을 투뤼는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아주 작고 예쁜 마을이었다. 대부분 단층, 높아야 2층짜리 건물이 대부분이었고, 고전적인 방법으로 집을 지은 듯했다. 수도의 미래 지향적인 건물을 통해 느낄 수 없었던 푸근함과 따뜻함이 이곳에서는 느껴졌다.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해. 「황혼」의 배경이 된 곳도 바로 여기야. 그 영화 봤지?”

아주 유명한 영화인 듯했으나, 조이는 「황혼」이라는 영화를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본 적 없다는 시늉을 하자, 운전하던 권명은 유령이라도 본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혼」을 안 봤다고? 그럼 「설원의 춤」은? 그것도?”

“응. 그렇게 유명해? 무슨 내용인데?”

“세상에.”

권명이 짧게 이야기해 준 바로는 사랑과 배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권위 있는 영화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나? 조이는 왜 이 영화가 7구역에서 상영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이 정쟁에 휘말려 배신을 당한 부분. 아마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을 간접 체험한 것일 테지만, 7구역에 있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7구역에 있는 반역자, 배신자들은 삶으로 매일같이 죗값을 갚아야 하는 이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모함을 받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조이의 아버지처럼. 만약 조이의 아버지가 그 영화를 봤다면 분노를 쏟아 냈을 것이다.

‘아버지…….’

술에 취하기만 하면 자신은 억울하다고, 누명을 쓴 것이라고 소리치던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조이는 고개를 흔들어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냈다. 조이는 아버지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조하를 실험실에 팔아넘긴 이상, 더는 조이의 아버지가 아니니까.

“차 세울까?”

권명은 시무룩한 조이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조이가 멀미라도 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조이는 침울한 얼굴을 숨기며 계속 가라고 손짓했다.

권명이 발견했다는 끝내주는 곳은 최근에 지어진 호텔이었다. 수직으로 높게 솟은 수도의 호텔과 달리, 이곳은 넓은 대지를 사들여 투뤼식 단층 건물로 객실을 꾸며 놓았다. 호텔이라기보다는 작은 마을처럼 보였다.

“들어가자.”

권명은 안으로 들어가자며 고갯짓을 했다. 조이는 쫄래쫄래 권명을 따라 들어갔다.

“밥? 아니면 온천?”

“온천부터 해 볼래.”

7구역에는 온천이 없었기에 조이는 온천부터 즐기고 싶었다. 목욕탕과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107호는 이쪽입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단층 건물로 들어섰다. 소박한 겉모습과 달리 실내 인테리어는 꽤 현대적이었다. 리모컨 하나로 커튼, 에어컨, 텔레비전, 그리고 온천수까지 작동시킬 수 있었다.

“아침에 꼭 테라스로 나가 보세요. 운이 좋으면 야생 사슴을 볼 수 있어요.”

직원은 이곳에서 흰색 사슴을 본 고객도 있다며 작은 먹이 주머니를 건넨 후 떠났다. 권명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모조리 걷어 냈다. 곧이어 조이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와!”

커다란 창문 너머로 눈 덮인 설산과 침엽수림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조이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훼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저 울창한 숲 사이로 흰색 사슴이 나타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권명 말대로 끝내줬다.

“온천은 이쪽이야.”

권명이 가리킨 투명한 문 너머에는 뜨거운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온천이 있었다. 수영장처럼 커다랗지는 않지만 2명이 몸을 담그기에는 충분했다. 조이는 당장이라도 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하지만 온천 초보자인 조이는 머뭇거리며 질문 하나를 내뱉었다.

“옷 입고 들어가는 거야… 아님…….”

“다 벗고.”

조이는 옷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그런데 벽 쪽에 몸을 기댄 권명은 그림을 감상하듯 조이가 옷을 벗는 걸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넌 안 벗어?”

“벗어야지.”

권명은 바지 단추를 살짝 풀어 헤친 후 또다시 조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조이의 몸에는 속옷 하나만 남아 있었다. 권명은 어서 마저 내리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조이는 어쩐지 조금 부끄러웠다. 여유로운 권명과 달리 온천이 처음인 조이가 너무 급하게 옷을 벗어 던진 것 같았다.

조이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속옷을 내렸다. 스르륵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는 속옷의 감촉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조이는 곧바로 온천으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권명이 조이를 붙잡았다.

“샤워 먼저.”

조이의 팔을 움켜쥔 권명의 손이 무척 뜨거웠다.

* * *

조이는 두 눈을 꽉 감고 뜨거운 물을 얼굴로 맞았다. 그사이 권명은 샤워 볼로 조이의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조이가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누군가 조이를 씻겨 준 적이 없었기에 퍽 낯설었다.

“내가 할 테니까 그냥 줘.”

조이는 샤워볼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권명은 보란 듯이 샤워볼을 등 뒤로 던졌다. 거품 묻은 맨손으로 조이의 몸을 이리저리 문질렀다. 권명의 커다란 손이 조이의 목, 어깨를 타고 내려와 조이의 가슴을 오랫동안 매만졌다. 만질 것도 없는 판판한 가슴을 여러 차례 쓸어내렸다.

“너 젖꼭지 섰어.”

권명의 말대로 조이의 가슴 위로 두 개의 빨간 점이 조금 도드라져 보였다. 정말이지, 눈치 없는 젖꼭지였다.

“나… 난 다 씻었으니까 먼저 나간다.”

조이가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전에 권명이 조이의 몸을 다시 끌어당겼다. 권명의 몸은 불구덩이에서 건져 낸 돌처럼 뜨거웠다.

“여기도 씻어야지.”

“으흐…….”

조이의 옆구리를 간질이며 뒤로 넘어간 두 손이 엉덩이에 닿았다. 한참 동안 마사지하듯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쓰다듬던 손이 둔덕 사이로 파고들었다.

“으읏!”

손가락 두 개로 그곳을 느릿하게 매만지자 주책맞게 조이의 앞이 조금씩 반응을 하려 했다. 깃털로 그곳을 간지럽히는 느낌이었다. 평소 거칠기 짝이 없던 권명의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은근하며 부드러운 손길이 강하게 매만지는 것보다 참기 힘들었다.

“그… 그만! 아흣!”

조이는 권명을 밀치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가 구멍 안으로 쏙 파고들었다. 조이는 벽처럼 막아선 권명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흘러내리는 물과 함께 안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조이의 내벽 어딘가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멀쩡했던 다리가 조금씩 부들부들 떨려 왔다.

“빨아 줄까?”

“…….”

조이의 앞은 어느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호기심이 조이의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충돌했다. 구음.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꽤 기분이 좋은데, 그곳을 입으로 애무한다면 어떨까?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무척 좋을 것이다. 조이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아?”

“…응…….”

조이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권명은 피식 웃으며 조이를 거울 쪽으로 밀쳤다. 그런데 권명은 조이의 몸이 거울을 보도록 휙 돌려세웠다.

‘이런 자세로도 구음이 가능한가……?’

조이는 처음인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잠자코 있었다. 등 뒤로 권명이 무릎을 꿇는 게 느껴졌고 조이의 볼기가 양쪽으로 쫙 벌어졌다.

‘이상한데……?’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위험신호를 감지한 입이 ‘잠깐’이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구멍 위로 혀가 닿았다.

“아아!”

고슴도치를 밟기라도 한 듯 깜짝 놀란 조이의 몸이 위로 덜컹거렸다. 권명은 조이의 몸을 거울 쪽으로 누른 채 구멍을 게걸스럽게 핥기 시작했다.

“아으… 거… 거길… 아읏!”

손으로 만기지만 해도 간지럽던 그곳에 부드러운 혀가 닿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길게 혀를 내밀고 주름진 그곳을 여러 차례 핥자, 그곳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눈치 없는 구멍은 조이의 의지에 반하며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반가워?”

권명은 조이가 아닌 구멍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조이의 온몸이 붉게 물들었다.

“그… 그만. 하앗!!”

주름진 겉면을 길게 핥던 혀가 이번에는 뾰족하게 세워져 구멍 안으로 파고들었다. 권명의 오뚝한 코가 엉덩이를 쿡 찌를 정도로 깊게. 내벽에 닿는 그 미끄러운 촉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커다란 방망이가 안을 쑤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쾌감이었다. 온몸이 아래로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아흣… 아읏…….”

조이의 성기는 어느새 배에 닿을 정도로 반응하고 있었다. 조이는 손을 내려 그곳을 만지려 했다. 조금만 만지면 정액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안 돼.”

하지만, 권명은 단호하게 조이의 손을 막아 냈다.

“뒤로만 가 봐.”

“시… 으흣… 싫어… 앞에… 하읏!!”

권명의 손이 조이의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귀두 앞부분을 틀어막는 걸 보니 쉽사리 가지도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아흣… 아… 아아!”

권명의 뾰족한 혀는 성기의 움직임을 따라 하고 있었다. 혀뿌리가 닿을 정도로 깊숙이 파고들었다가 아쉽게 빠져나갔다. 조이는 점점 애가 닳았다. 구멍을 벌리던 혀가 빠져나갈 때마다 아쉬움에 조이의 구멍이 꽉 움츠러들었다. 조금만 더 큰 자극이 있다면 정액을 뱉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으… 더 넣어 줘! 아읏… 더……!”

“이렇게. 더?”

권명은 조이의 구멍으로 혀를 더 깊게 쑤셔 넣으며 물었다.

“아… 으읏… 아니… 아읏. 너… 네 거!”

“내 거? 자지?”

권명은 이 상황이 몹시 재밌는지 말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럼 벌려 봐. 그래야 넣지.”

조이는 스스로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수치스러움보다 커다란 물건이 아래를 마음껏 헤집는 그 감각이 더 그리웠다. 권명이 조이의 뒤쪽으로 바짝 붙었다. 뜨거운 불기둥이 조이의 엉덩이 위를 탁탁 때리고 있었다.

“더 벌려. 안 보여. 하아…….”

“읏… 더?”

조이는 좀 더 강하게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구멍으로 찬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벌어진 것 같은데 권명은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해 줘…….”

“하아… 안조이.”

기다렸다는 듯 권명의 성기가 파고들었다. 이미 풀어질 대로 풀어진 구멍은 이것을 원했다는 듯 커다란 방망이를 받아먹었다.

“아읏! 아아!”

조이의 양쪽 팔을 결박한 권명이 무식하게 성기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이런 자세로 관계를 가진 적은 처음이었다. 두 다리로 서 있었지만 권명이 팔을 놓는 순간 조이는 아래로 주저앉고 말 것이다.

권명 역시 꽤 오래 참았는지 움직임에 여유가 없었다. 배 속을 꽉 채우던 물건이 빠르게 빠져나갔다가 다시 ‘쿵’ 하고 아래로 파고들었다.

“아아! 아흐! 아흐흣!”

“하아… 안조이 눈 떠 봐. 하아. 지금!”

“하읏!”

조이의 눈앞에는 무척 익숙한 얼굴이지만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가 있었다. 붉게 물든 뺨, 눈물이 흐를 듯 젖은 눈가, 크게 벌어져 침을 흘리는 입. 조이가 모르는 얼굴이 거울 안에 있었다.

“하아… 넌 거울 보고 자위해도 잘 쌀 거야. 그렇지?”

“아아! 아! 거기 아흣!!”

권명은 가장 깊숙한 곳으로 쿵쿵 성기를 박아 넣었다. 성난 귀두 끝이 조이의 내벽 어딘가를 꾹 누른 후 떨어졌다. 그때마다 조이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눈앞이 흐려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흐느끼는 조이의 얼굴을 권명이 핥는 듯 응시했다.

“아! 아…! 안… 아흐읏……!!”

‘쿵! 쿵! 쿵!’ 거센 움직임에 조이의 성기에서는 힘없이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권명은 조이의 얼굴을 꽉 움켜쥐며 눈을 뜨라고 속삭였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이의 성기에서 오줌처럼 줄줄 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아… 아……!”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천 안이었다. 경직된 온몸이 나른하게 풀릴 정도로 뜨끈한 물이 피부에 닿았다. 권명은 조이의 어깨 위로 따뜻한 물을 끼얹으며 물었다.

“깼어?”

“응…….”

조이는 넓은 가슴에 기댄 채, 권명의 다리 사이에 앉아 있었다. 다 큰 성인이 하기에는 좀 쑥스러운 자세였다. 자세도 자세지만, 욕실에서의 일 때문에 조금 민망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조이가 거울을 보며 사정하는 모습이었다. 조이는 그저 아래에서 몰려오는 감각에 사정한 것이지만, 어쩐지 권명의 눈에는 나르시시스트처럼 자신의 모습에 취해 사정한 것처럼 보였을 것 같았다.

“난… 저쪽 가서 앉을래.”

조이는 몸을 조금 일으키며 말했다. 하지만 권명은 조이를 순순히 놔주지 않았다.

“그냥 있어. 노천탕이라 추워.”

권명 말대로 꽤 추웠다. 탕에서 올라오던 뜨거운 수증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변해 갔다. 조이의 머리카락은 하얀 눈이 내린 것처럼 얼어 있었다. 조이는 고개를 돌려 권명의 머리를 확인했다. 조이처럼 권명의 머리에도 눈이 내려 있었다. 어쩐지 하얗게 변한 부분이 흰머리처럼 보여서 좀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너 몇 월생이야?”

“난 3월생이야. 형이라고 불러라.”

권명은 자신은 빠른 생이라며 거들먹거렸다.

“난 2월생이거든?”

“그럼 조이 형아네?”

“하?”

곰같이 커다란 놈이 형아 소리라니. 가만 보면 권명은 딱 막둥이 성격이었다. 그것도 귀하게 자란 막둥이. 사장이랑 나이 차이도 꽤 났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좋고 싫음이 아주 분명했다. 또 그걸 표현하는 데도 거침없었다. 저런 권명도 아쉬움이란 게 뭔지 알까?

“넌 아쉬운 게 있어?”

“아쉬운 거? 있지. 수도에서 신나게 놀아야 하는데 군대에 있잖아.”

“뭘 어떻게 놀아야 신나게 노는 건데?”

권명은 조이를 꽉 끌어안으며 귓가로 낮게 속삭였다. 제 딴에는 달콤한 소리라고 여기는지 모르겠으나, 듣는 조이의 입장에서는 소름 돋는 말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떡치는 거지.”

“으윽…….”

조이는 아까 욕실에서의 관계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는데, 그런 짓을 온종일 하고 싶다니. 아마 권명을 상대하는 이는 초주검이 될 것이다.

“넌? 뭐가 아쉬운데?”

늘 7구역을 벗어나고 싶었다. 가이드로 발현해 그곳을 탈출하는 것이 조이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하가 실종된 후 가장 후회했던 일은 수도로 향한 것이었다. 전쟁영웅 4등급. 대체 왜 조이는 그런 쓸데없는 것에 매달렸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후회했었다.

조이는 수도에 온 이후 경험하게 된 새로운 것들이 좋으면서도 마냥 좋아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조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 이제 그만할래.”

“갑자기? 왜?”

조이는 권명을 뒤로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조하를 떠올리자 모든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훼림에서 교전을 벌일 때는 그래도 이런 죄책감을 덜 수 있었는데, 이렇게 좋은 곳에서 좋은 것을 누리고 있는 지금은 죄책감을 덜 방법이 없었다. 조이는 내일은 기필코 한 중위를 만나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온천을 끝내고 조이와 권명은 식당으로 향했다. 조이는 사실 입맛이 없었지만, 권명은 땀을 뺐더니 배가 고프다고 난리였다.

“조이 형아도 수고했으니까 잘 먹어.”

“으윽!”

권명은 조이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며 말했다. 대체 에스퍼에게 가이딩이란 어떤 걸까? 가이드는 필요 없다고, 가이딩은 받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하던 권명이 저렇게 돌변하다니.

가이드인 조이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에스퍼도 아닌 조이가 이런 관계를 계속 이어 가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권명과의 그 짓은 꽤 잘 맞는 편이었다. 뜨거운 살 기둥이 아래로 파고들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조이를 괴롭게 하는 모든 것들이 그 순간은 파도에 쓸려 가는 모래처럼 멀어졌다.

“조금 기다려야겠는데?”

“어?”

저녁 시간대에 딱 맞춰 나온 탓에, 식당 안은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권명은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후,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사이 조이는 물끄러미 어둑어둑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하얗게 내리는 저 눈을 훼림에서 맞았었는데, 지금은 이런 따뜻한 곳에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니…….’

급변한 환경이 부쩍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유리창 너머로 조이에게 다가오는 인물이 보였다.

“조이?”

“어…? 태혁아!”

“맞구나. 뒷모습 보고 혹시 했는데.”

“여긴. 어떻게?”

그 순간 태혁의 뒤로 얄미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조이는 안 그래도 입맛이 없었는데 말 그대로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조이 넌. 권명이랑 같이 왔어?”

조이를 바라보던 태혁의 눈이 뒤쪽을 향했다. 어느새 권명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조이의 어깨를 감싼 권명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이는 어쩐지 답답한 기분에 권명의 팔을 살짝 밀어냈다. 권명의 눈썹 한쪽이 삐쭉 솟았다. 심기가 불편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권명의 기분을 챙겨 줄 여력은 없었다.

“손님.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식사하러 온 거야?”

“어.”

“그럼 합석해.”

“그래.”

권명은 조이의 의견도 묻지 않고 합석을 제안했다. 조이는 이 자리가 정말 불편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북부 요리는 뜨거운 것이 특징이었다. 애피타이저부터 모든 음식이 따뜻했다. 매서운 추위에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도 이런 따뜻한 음식을 먹는다면 금세 몸이 녹을 것이다. 냄새도 꽤 근사했지만 조이는 도통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태혁과 함께 있는 한솔의 모습 때문이기도 했고, 권명 때문이기도 했다. 이번엔 또 무슨 연기를 하는 건지 권명은 조이에게 음식을 먹여 주려 했다.

“아- 해.”

“내… 내가 그냥 먹을게.”

“아!”

징그러워 죽겠다. 대체 왜 저렇게 안 하던 짓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억지로 음식을 받아먹었다. 살살 녹는 고기가 어쩐지 질기게만 느껴졌다.

“권명이랑 페어가 된 거였구나.”

“어? 어…….”

“나 말고 누구랑 하겠어. 매칭률이 92%던데. 너네는?”

한솔은 기다렸다는 듯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조이를 보며.

“우리는 65%.”

“나쁘지 않네.”

조이는 한솔의 얼굴이 꽉 구겨지도록 자존심 상할 말을 내뱉고 싶었다. 넌 2순위였고, 난 매칭률이 70%였다고. 하지만 그 말은 한솔뿐만 아니라 태혁에게도 상처가 되는 말이기에 애써 눌러 담았다.

태혁은 권명과 한솔이 나누는 대화에 관심이 없다는 듯 식사만 노려보고 있었다. 조이는 그런 태혁이 신경 쓰였다.

“근데 오늘은 촬영을 안 하나 보네?”

“뭔 촬영?”

“태혁이가 군 모델이 되었거든. 육군 대표로!”

“흐음.”

“12일에 방송된다니까. 꼭 봐. 조이 너도.”

뻔뻔한 놈. 친근한 척 이름을 부르는 게 가증스럽게 그지없었다. 저놈이었다. 조하의 마지막 편지를 버려 버린 놈이. 태혁이 어떻게 나올지는 궁금하지만, 조이는 절대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열불이 나는데, 그 모습을 어떻게 보겠는가.

식사를 마무리하며 누가 결제를 할 건지를 가지고 작은 소동이 있었다. 태혁은 자신이 내겠다고 나섰으나, 권명은 끝끝내 모든 식삿값을 자신이 지불했다.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조이로서는 당연히 권명이 내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객실은 이쪽에 예약한 건가?”

“아니. 우린 식사만 하러 온 거야.”

“하룻밤 머물다가. 온천욕 하기 꽤 좋더라고. 그렇지 안조이?”

“어? 어… 좋더라.”

“우리도 그럴까? 태혁아?”

한솔은 태혁의 대답을 기대하는 것 같으나, 태혁은 무뚝뚝하게 돌아가자고 했다. 콱 막혀 있던 가슴이 조금은 시원해졌다. 삽시간에 구겨진 저 표정을 보니.

‘고소하다!’

예약한 객실로 돌아가는 내내 권명은 말이 없었다. 아까의 이상한 연기는 집어치우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잘 생각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 조이는 자꾸 ‘아’ 해 보라는 권명을 보며 두드러기가 나는 줄 알았다.

“들어가.”

“난 어디서 쉬어?”

“어디서 쉬긴. 여기에서지.”

황당한 질문을 내뱉은 이유가 있었다. 아까와 달리 방 안이 요상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는 백조인지 고니인지 새 모양으로 수건이 접혀 있었고, 그 옆으로 빨간색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또한 방 한쪽에는 나갈 때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향초와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치 신혼부부를 맞이하는 장식 같아 보였다.

“이건…….”

“난 먼저 씻는다.”

어쩐지 권명의 말투가 딱딱했지만, 조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반대쪽 욕실에서 뽀득뽀득 양치를 하고 얼굴을 씻었다.

“피곤해. 먼저 잔다.”

권명은 무심하게 이불을 걷어 냈다. 꽃잎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새 모양의 수건도 툭 아래로 떨어졌다. 조이는 수건 인형을 들어 올려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왜 저러지?’

이쯤 되니 조이도 권명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조이는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네 사람은 거뜬히 누울 법한 더블 침대 끄트머리에 조이는 작게 몸을 말았다. 옆에 누운 권명은 자세가 불편한지 계속 이리저리 뒤척거리고 있었다. 마치 물어봐 달라는 신호 같았다.

“잠이 안 와……?”

“…….”

조이의 물음에도 권명은 말이 없었다. ‘씨익씨익’ 거칠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고 권명이 벌떡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권명은 침대 끄트머리에 누워 있는 조이를 쭉 끌어당겼다.

“왜…! 왜?”

“너. 분명 말했어. 나 가이드 나눠 먹는 취미 없다고.”

“내가 무슨 음식이냐! 너 말 그렇게 하지 마!”

“너야말로 간 보지 마. 네 에스퍼는 나야.”

권명은 조이의 얼굴을 꽉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네 에스퍼는 나라고. 태혁인가 뭔가 하는 그놈이 아니라. 대체 그놈한테 무슨 미련이 남은 거야?”

“미련은 무슨! 그리고 아파! 놔!”

권명이 움켜쥔 턱이 아파 왔다. 아프다고 인상을 찌푸리자 이번엔 권명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윽!”

“똑바로 대답해. 네 에스퍼가 누구야?”

“윽… 너지 누구야!”

권명은 조이의 입에서 정직하게 ‘권명’이라는 답이 나올 때까지 조이를 몰아붙였다. 진짜 지랄맞은 성격이었다. 머리털이 다 뽑히는 줄 알았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권명의 지랄맞음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조이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권명은 먼저 돌아간다는 메모를 남겨 놓은 채 사라졌다.

조이는 메모를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과거에도 권명은 이렇게 사라진 적이 있었다. 생존 훈련을 마치자마자. 폭주 직전에 맺은 관계가 적지 않게 충격이었던지 아무런 말도 없이 기숙사로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때와 달리 메모를 남기고 사라졌지만 지난밤 권명이 보였던 예민한 반응이 떠올라 괜스레 기분이 찝찝했다. 조이는 그동안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겨 왔던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권명이 내보이는 소유욕. 조이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에스퍼의 소유욕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지난밤 태혁과 한솔의 관계를 살펴보며 조금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 신호였다.

‘혹시……?’

순간 조이의 머릿속으로 그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조이는 머리를 뒤흔들며 그 생각을 떨쳐 냈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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