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사관학교 (1/16)

1. 사관학교

사관학교의 첫인상은 부드러움이었다. 붉은 건물 위로 초록색 담쟁이덩굴이 무성하여, 어쩐지 박물관이나 학교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물론 이곳이 학교는 맞으나, 1년 동안의 짧은 교육 후 전방으로 배치될 살인 무기를 키워 내는 곳이기에 일반적인 학교로 보기에는 어려웠다.

‘살인 무기를 양성하는 이곳에 부드러움이라니.’

“1370번 신입생?”

“예… 예! 안조이입니다.”

“흠. 따라와라.”

교관은 조이의 초라한 행색을 훑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교관을 따라 교정 안으로 들어서니, 군복을 입은 사관생도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 사관학교를 보며 느꼈던 당혹스러움이 여진을 만들어 냈다. 살인 병기를 키워 내는 곳의 생도들은 봄 햇살을 만끽하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이에게는 저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좀 더 경직되거나 살벌한 곳이라 예상했으나, 이곳에 있는 생도들은 마치 귀부인이 키우는 애완동물 같은 모습이었다.

사냥개처럼 훈련받을 필요 없이 적당히 아양을 떠는 것으로 충분한 카나리아나 고양이.

“새로운 생도인가 보죠?”

“그래.”

“제가 안내할까요?”

“학교장께 안내해야 한다. 쓸데없는 짓 말고 비켜.”

교관은 안내를 자처하는 생도를 밀어냈다. 밀쳐진 것이 무엇이 그리 웃긴지 생도는 실실 웃고 있었다. 조이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저런 플러팅이 익숙하지 않으나, 무슨 의미인지 정도는 알았다.

수도로 오기 전, 조이는 7구역에 있는 유일한 도서관에서 수도에서 발간되는 주간 신문을 찾아봤었다. 수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신문에서 연재되는 통속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연재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건대, 보수적인 7구역과는 달리 수도에서는 동성끼리의 연애나 결혼이 퍽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신문 한쪽에는 동성 커플을 대상으로 하는 저금리 대출 광고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조이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금방 적응할 수 있으리라.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조이의 꿈속에 등장하던 이들은 포근한 살결 대신 조금은 딱딱한 근육을 지닌 자들이었으니까.

“신입생. 이곳이다.”

“네… 네!”

조이는 서둘러 교관을 따라 교장실로 들어섰다.

“반 학기를 놓쳤으니 더욱 매진해야 할 거네.”

“예.”

학교장은 조이의 신상정보를 확인하며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학교장이라고 하여 흰머리가 무성한 노인을 생각했건만 조이의 아버지보다도 젊어 보였다. 에스퍼니 가이드니, 일절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흠.”

조이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올까 조마조마했다. 나쁜 꼬임에 넘어간 것이라 할지라도 조이의 아버지는 반역자였다. 한참을 서류를 넘겨 보던 학교장의 입에서는 동생에 대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동생이 있다고?”

“예. 남동생입니다.”

“흐음. 아직 발현은 안 했고? 아깝군.”

학교장은 반역자의 피에서 충실한 동제국의 군인이 된 형제의 사연이라면 퍽 재미있었을 것이라며 아까워했다. 전쟁선전물로 사용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용당하는 역할이라면 지긋지긋하지만 익숙했다. 아버지에게 벌써 20년째 이용당하며 살지 않았던가. 고작 사진 몇 장 찍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오그라드는 구호를 외치는 일이 뭐 그리 대수일까. 저런 일로 동생을 수도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백 번이든 할 것이다.

설사 선전물로 이용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조이는 기필코 동생을 이곳으로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지독한 도박 중독자인 아버지 곁에서 이제 겨우 10살이 된 동생이 홀로 얼마나 버티겠는가. 조이는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졸업하여 공을 세워야만 했다.

전쟁영웅 4등급을 받을 경우 가족 중 한 명을 수도로 데리고 올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려면 큰 공을 세워야 하는데, 가이드의 역할로는 큰 공을 세울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공을 잘 세울 만한 에스퍼와 짝을 지어야 했다. 조이는 한가롭게 누워 있던 생도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저들과 달리 조이에게는 확고한 목표가 있으니까. 한가로운 저들과 조이는 다르니까.

* * *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조이가 뼛속 깊숙이 배운 것은 아는 척하기와 적당히 넘기기였다. 7구역에서 10년을 보낸 조이의 눈에는 온통 낯설고 새로운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다. 이곳에서 조이는 더 이상 7구역의 쥐새끼가 아니니까.

조이는 가끔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7구역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조이가 아니라, 동제국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군인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길가에 삐쭉 솟은 돌부리를 쉽게 발견하고는 했다. 조이는 그런 존재였다.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조이는 아는 척하기와 적당히 넘기기라는 기술을 사용해야 했다. ‘난 너희와 다르지 않아. 나도 너희와 같아.’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이곳에 있는 가이드들에게 7구역이란 인간이 살 수 없는 끔찍한 악의 소굴이며, 짐승의 구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제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군인이 탄생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7구역 놈들은 짐승이나 마찬가지야. 돌도끼나 쥐여 줘야 한다고.”

“그렇지. 반역자에. 범죄자들. 그놈들한테 들어가는 세금이 다 아까워.”

“그래도 그놈들 나름대로 역할은 있지. 총알받이. 낄낄”

“…….”

“가만. 조이는 몇 구역 출신이라고 했지?”

“어…? 난 4구역.”

조이는 7구역에 대한 그들의 격앙된 반응에 얼떨결에 거짓말하고 말았다. 범죄자와 반역자의 유배지인 7구역에 대한 혐오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조이는 자신이 4구역 출신이라고 말했다. 수도로 향하는 길에 자기부상열차를 타기 위해 잠시 들렀던 그곳. 관광도시답게 유독 화려한 곳이었다.

혹시라도 4구역에 대해 더 깊게 물어볼까 걱정했으나, 생도들은 4구역에서 보냈던 여름휴가에 대해 앞다투어 이야기하느라 조이의 출신에 대해서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거짓말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무사히 넘어가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거짓말이라는 것은 눈밭에 굴리는 눈덩이와 같았다. 조금씩 그 크기를 더해 가기 시작했다. 조이는 이내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들은 조이의 연애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이에게 애인이 있는지, 지금까지 몇 명을 만나 봤는지 등등. 조이로서는 당혹스러운 질문이었으나, 이런 대화에 익숙해져야 했다.

보수적인 7구역과 달리 연애나 섹스는 이곳에서 평범한 대화 주제 중 하나인 듯했다. 수도에서 평범한 사람이 되려면 이런 대화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했다.

조이의 짧은 인생에 친구나 애인이라고 불릴 만한 이들은 없었다. 삶이 고달프고 괴롭기에 진득하게 관계를 이어 가는 것이 더없이 어려웠다. 고된 노동 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죽음과 같은 숙면이 더 필요했으니까.

조이는 이런 대화로 우정을 쌓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응할 생각이 있었다.

“그럼 조이 너는 2명 사귀어 봤다는 거네?”

“으응…, 그렇지.”

“얼마나? 얼마나 오래 사귀었어?”

“1년.”

거짓말이 술술 튀어나왔다. 다음에도 이 질문에 똑같은 답을 해야 할 텐데. 조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생도 중 하나가 이번에는 얼굴이 벌겋게 익을 만한 질문을 던졌다.

“박는 쪽? 아니면 박히는 쪽?”

조이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잊고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조이가 아는 관계라면 지저분한 골목에서 온몸이 결박된 채 서너 명에게 아래를 뚫릴 뻔한 일이었다. 야간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변을 당했다. 놈들은 반항하는 조이를 흠씬 두들겨 팬 후 하의를 벗기려 했다.

온몸에서 비명이 터져 나올 듯 괴로웠다. 꽉 막힌 입으로 덧없는 비명을 지르려던 그때, 조이를 구해 준 이는 마왕의 주인이었다. 7구역에서 보기 드문 에스퍼. 반쯤 미쳐 버려 군에서도 포기한 돌연변이.

그자가 조이를 구해 주었고, 그날부터 조이는 마왕이라는 술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7구역에서는 기사에도 나오지 못할 사건이었다. 그날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 갔지만, 후유증을 남겼다.

성관계에 관심을 가질 만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조이는 쉽사리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날의 악몽이 떠올라서 망설여졌고,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첫 관계를 맺을 만한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있는 이라고는, 미치광이이거나 주정뱅이였다.

“조이 넌 어떤 취향이야? 나 아는 사람 많아.”

“난… 우수한 에스퍼가 좋아.”

“우수한 에스퍼? 진짜 군인이 다 됐다!”

다들 낄낄거리며 조이의 대답을 웃어넘겼다. 조이는 진정으로 우수한 에스퍼를 만나고 싶었다. 그것도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에스퍼.

“에스퍼 중에 실력이 가장 좋은 애는 누구야?”

“지금은 태혁!”

“저 중에 있어?”

조이는 농구를 하는 에스퍼 무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다행히도 공놀이를 하는 놈들 중 태혁이 있었다. 스쳐 지나가도 에스퍼임을 알아차릴 만큼 덩치가 좋은 놈이었다. 돌발행동이라고는 조금도 해 본 적 없는 듯 단정한 얼굴이었다.

“쟤가 그렇게 입맛이 까다롭다며?”

“왜?”

“지금까지 퇴짜 놓은 가이드만 한 트럭이라더라. 지금이야 잘나가는 거지 솔직히 권명 있을 때는 그렇게 두각을 드러내지도 못했잖아.”

권명은 또 누구인가. 조이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들어보니, 태혁은 처음부터 눈에 띄는 에스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신입생 시절 가장 잘나가던 에스퍼는 권명인데 그놈은 벌써 차출되어 최전방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벌써 보직을 받았다고?”

“응! 걔네 집안 자체도 빵빵하고. 솔직히 조기교육이다 뭐다 받고 온 티가 나더라. 막 진단을 받은 에스퍼가 그렇게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건 처음 봤어.”

“그럼 태혁은? 걔 실력은 어때?”

“좋지. 다음에 보직을 받고 떠날 예비 1번이 저놈이야.”

조이는 사냥을 하는 맹수처럼 태혁을 바라봤다. 저놈이구나. 날 4등급 전쟁영웅으로 끌어올려 줄 놈이. 조이는 그날부터 태혁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정말로 조이를 4등급 전쟁영웅으로 이끌어 줄 만한 에스퍼인지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듣기로는 권명이라는 에스퍼가 가장 실력이 좋다고 했으나, 그는 이미 보직을 받고 전쟁터로 떠났다. 퍽 아쉬웠다. 염력을 기가 막히게 다룬다고 했는데, 만약 조이가 조금만 더 일찍 사관학교에 입학했더라면 마주쳤을 수도 있었다.

‘물론, 마주친다고 해서, 페어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훈련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서도 조이의 머릿속에는 온통 태혁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제 겨우 초급 훈련을 마친 조이지만, 어떻게 하면 에스퍼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들어 보니, 연애하듯 가이드와 에스퍼가 페어가 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할 때 보았던 생도처럼, 눈을 찡긋 감는 플러팅을 해야 할까?

조이는 작고 귀엽지도 않은 자신이 태혁을 향해 눈을 찡긋거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꽤 못 볼 꼴이었다. 안 그래도 인기가 많은 녀석이라는데, 괴상한 취향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이런 플러팅에 넘어갈 리 없지.

조이는 베개를 고쳐 베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혁에게 작업을 거는 자신의 모습은 뚝딱거리며 어색할 게 뻔했다.

‘에휴 징그러워. 잠이나 자자.’

조이는 눈을 감고 한쪽으로 몸을 뉘었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그때, 조이의 귓가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삐익- 삐익-

“생도들에게 알립니다. 모든 가이드 생도들은 지금 당장 1층으로 집결합니다. 집결!”

조이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삑삑거리는 경보음과 함께 방 안을 밝히는 붉은빛이 불길하게 반짝거렸다.

* * *

조이는 서둘러 1층으로 향했다. 1층에는 이미 꽤 많은 생도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그들 사이로 완벽한 복장을 한 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부터 긴급 매칭 프로그램에 투입된다. 1병동으로 이동한다. 이동!”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긴급 매칭 프로그램에 투입된 것은 처음이었다. 가이드는 대부분의 에스퍼를 치료할 수 있지만, 유독 상성이 잘 맞는 이들이 있었다.

군에서는 에스퍼에게 최대한 상성이 잘 맞는 가이드를 붙여 주는데, 긴급 매칭 프로그램이 가동됐다는 말은 매칭된 가이드가 전사했거나, 아니면 매칭된 가이드로도 치료할 수 없는 중상을 입었다는 의미였다.

최전방으로 보내진 군인 중 하나가 폭주하여 이곳까지 실려 온 것이었다. 서제국의 1중대와 혼자의 몸으로 대적했다고 하는데, 상성이 잘 맞는 가이드를 찾지 못해 지금은 거의 반송장인 상태라나 뭐라나.

망가진 에스퍼 따위는 조이에게 관심 없는 주제였다. 하지만 조이를 포함한 모든 가이드는 매칭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했다.

망가진 에스퍼의 성능이 꽤 좋았는지, 군에서는 그 고물을 고쳐 보겠다고 아등바등했다. 조이는 순서를 기다리며 폭주한 에스퍼에 대한 소문을 더 들을 수 있었다.

“쟤가 그 유명한 권명이라며?”

“입학하고 3개월 만에 발령받았다는 그 에스퍼?”

권명이라면 조이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태혁이 두각을 드러내기 전까지 사관학교에서 가장 뛰어난 에스퍼로 손꼽히던 생도였다.

조이는 그 밖에도 권명에 대한 다양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가이딩을 극도로 싫어하는 돌연변이. 그럼에도 무지막지한 힘을 자랑하는 천재. 조이와 같이 스무 살인데 벌써 5등급 전쟁영웅이고, 이번 작전만 성공하면 4등급으로 승격할 예정이었다는 것 등등.

조이는 기회의 냄새를 맡았다. 저 안에 있는 놈이야말로 조이를 단번에 전쟁영웅 4등급으로 끌어올려 줄 에스퍼였다. 물론 살아날 경우의 일이지만. 조이는 아까와 달리 이 일에 전력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1370번 입장.”

조이는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방 한쪽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고, 그 안에는 밤중에 이 소동을 일으킨 주범이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다.

폭주했다고 하기에 흉측한 모습일 것이라 여겼으나,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꽤 반질반질한 낯짝이었다. 옆모습뿐이지만 이마에서 코끝으로 떨어지는 선이 오뚝하니 볼만했다. 어쩐지 정면이 궁금해지는 얼굴이었다.

몇 해 전 7구역에서도 대히트를 쳤던 드라마 주인공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곱상한 얼굴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 연예인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조이였지만, 오만 가지 물건에 그 배우의 얼굴이 찍혀 있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삑.

-1370번 준비.

조이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교관의 말대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찰흙으로 손자국을 만들어 낸 것처럼 홈이 파인 기구가 놓여 있었다. 증폭기였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증폭기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목이었다. 조이는 그 위에 양손을 맞춰 올려놓았다.

-개방.

조이는 에너지를 불어 넣는 상상을 했다. 증폭기 사용을 알려 주던 교관은 명상하듯 생각을 비우라고 했지만 조이는 기도를 해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조이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살려 내고 싶다. 구하고 싶다.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저 시체를 살려 내고 싶다는 열망을 쏟아부었다.

-1370번, 가이딩을 멈추고 퇴실하라.

조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가이딩을 마쳤다.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 더 간절하게 가이딩을 했으니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으리라. 조이는 기대감에 차 투명 유리 너머의 군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아…….”

역시 조이의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조이는 곧바로 연습실로 달려갔다. 가이딩 프로그램에 접속해 날이 밝아 올 때까지 연습에 몰두했다. 기회를 날려 먹은 것이 어쩐지 실력 때문인 것 같았다.

땀에 흠뻑 젖은 조이는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향했다. 이가 달달 떨릴 때까지 차가운 물을 맞았다. 꽤 오랜 시간 집중한 탓에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것 같았다. 오래 사용한 텔레비전이 열을 뿜어내듯.

샤워를 마친 조이는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룸메이트인 기해가 기숙사로 돌아와 있었다. 기해는 조이를 발견하더니 쪽지를 건넸다.

“이거 봐 봐.”

“이게 뭐야?”

“너한테 전화 왔었다고 하던데?”

“나?”

“응. 꽤 급하다고 했던 것 같아.”

조이는 서둘러 기숙사 휴게실로 달려갔다. 조이에게 이런 전화를 걸 만한 이라면 동생뿐이었다. 지난번 편지에 이곳 휴게실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동생은 낯선 사람과는 말도 섞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그런 녀석이 이곳까지 전화를 걸었다면 분명 긴급한 일일 것이다. 신호음이 꽤 오래 들려왔지만, 응답은 없었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우려했던 대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조이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려 봤다. 물어볼 것도 없이 아버지와 관련된 사건이 떠올랐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형……?]

“그래. 전화했었다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형…, 형아…. 흐윽…….]

동생은 울먹이더니 기어코 울음을 쏟아 냈다. 조이는 진정하라며 동생을 위로했으나 불길함을 참을 수 없어 손톱을 물어뜯었다. 강하게 물어뜯은 손톱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휴지를 찾아 상처를 지혈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할 정도의 소식이 전해졌다.

이번에도 아버지였다. 평소에도 카드놀이를 좋아하긴 했으나, 이번처럼 대형 사고를 친 적은 없었다. 집을 날려 먹다니. 패륜아라고 손가락질받더라도 아버지를 신고해 감방에 집어넣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몰라…. 흐윽…, 이 집에서 나가야 한대…. 형…….]

“하아…….”

[어떡해 형? 나 무서워…. 흡…….]

“지난번 기차역에서 줬던 돈 있지? 일단 그 돈으로 놈들을 내보내. 큰돈은… 내가 일단 좀 더 알아볼게.”

[흐윽…, 형…, 나…….]

조이는 동생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기를 움켜쥔 조이의 팔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조이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7구역을 떠나는 열차에 몸을 실은 후 7구역과의 인연이 흐려졌다고 여겼었다. 조이는 지금 수도에 있고, 그때와 다른 신분으로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구질구질하고 끈질긴 끈이 기어코 조이를 따라왔다. 조이의 발목에 칭칭 감겨 있는 7구역의 꼬리표가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조이는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대체 그리 큰 돈을 어디에서 얻는다는 말인가.

“하아…, 진짜…….”

조이는 다시 샤워실로 향했다. 찬물이라도 맞아야 했다. 정신이 번쩍 나도록. 방법을 찾아야 했다. 큰돈을 구할 방법을.

* * *

“훈련비를 미리 달라는 말인가?”

“예…. 집에… 급한 일이 좀 생겨서…….”

“1370번 생도. 이곳은 은행이 아니네. 급한 돈이 필요하다면 은행으로 가야지. 쯧쯧.”

안 그래도 조이를 못마땅해하던 교관은 조이의 부탁에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조이는 한 번 더 방법이 없는지 물었으나, 교관의 태도는 단호했다. 조이는 한숨을 내쉬며 교관실 문을 닫아야 했다. 곧이어 등 뒤로 조이를 험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7구역 출신이란. 쯧쯧. 제국의 군인이 돈이나 구걸하고 다니니 원.”

조이는 빠른 걸음으로 교관실을 벗어났다. 앞으로 받게 될 훈련비를 미리 지급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다니. 밝은 태양 아래서도 어두운 동굴을 헤매는 것처럼 암담했다.

“후우…….”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늘 조이만 보면 7구역 출신임을 상기시키던 교관이 조이를 호출했다. 교관은 조이를 교장실로 데려갔다. 교장실 안에는 교장 대신 어깨와 가슴팍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장교와 고급스러운 양복을 걸친 중년 신사가 있었다. 교관은 친근하게 다가와 조이를 소개했다.

“말씀하신 1370번 생도입니다. 초급 과정 중에서도 10위 안에 드는 실력입니다. 소장님께서…….”

“나가 보게.”

교관은 소장에게 살가운 말투로 조이를 소개했으나, 소장은 단호하게 나가 보라고 말했다. 교관은 남아 있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소장의 말에 뒤로 물러서야 했다. 늘 오만한 태도로 생도들을 대하던 이가 이렇게 저자세로 굴복하는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앉게.”

조이는 소장과 중년 신사 앞에 앉았다. 소장은 차분히 차를 마셨고, 그의 옆에 있는 중년 남성은 조이를 관찰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물건의 가치를 살피는 상인의 눈이었다.

조이에게는 익숙한 눈빛이었다. 늘 아버지는 조이의 성장을 바라볼 때면 저런 눈빛을 하고는 했다. 약간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표정. 조이를 값으로 환산하는 눈빛.

“매칭 프로그램에 참여했다지?”

“예? 예. 그렇습니다.”

돈을 구할 생각에 반쯤은 잊고 있었던 그 일이 떠올랐다. 최선을 다해 가이딩했으나 부족함만 느꼈었던 그 사건. 소장이 앞으로 꺼낼 이야기가 그 반시체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아까운 인재네. 그 사고만 아니었다면 동제국에서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 예…….”

“소대 하나는 우습게 해치우던 에스퍼였네. 지난달에 있었던 D구역 탈환 작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지. 참으로 아까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 아…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야기가 빠르겠구먼.”

소장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듯 대화를 이어 갔다. 막 본론을 꺼내려던 그때. 소장의 옆에 있던 신사가 입을 열었다.

“그놈. 아비 되는 사람이네.”

점점 이 대화의 실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조이는 침착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나뿐인 아들이네. 도와주시게.”

중년 남성은 아들을 살리기 위한 마음이라며 조이 앞으로 봉투를 건넸다. 흐릿하게 보였던 형체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간접 가이딩으로 반시체는 깨어나지 않았었다. 그 때문에 매칭 결과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또한 궁금하다고 알려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돈 봉투까지 들고 와서 부탁할 정도라면 조이와 그자의 상성이 꽤 잘 맞는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렇게 비밀리에 대가를 지불하며 부탁하는 일이라면 간접 가이딩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과거에는 가이딩 목적으로 가이드와 에스퍼의 밀접접촉이 강행되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가이드의 인권 문제가 불거지고 증폭기의 보급으로 더 이상 가이드는 치료 목적으로 에스퍼와 밀접접촉을 할 필요가 없었다.

군에서는 대신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의 연애를 꽤 묵인하고 조장하기 시작했다. 들은 말에 의하면 밀접 가이딩은 간접 가이딩과는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이며 강력하다고 했다.

조이가 반시체와 상성이 잘 맞는 가이드라면, 밀접접촉으로 잠자는 왕자를 깨울지도 모른다. 밀접접촉 가이딩. 이들이 원하는 것은 조이가 반시체와 성교하는 것이었다.

* * *

조이는 망설여졌다. 오래전 때때로 조이의 단잠을 깨우던 악몽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날 밤 조이는 긴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고, 상황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푼돈이나 받아 가던 놈들의 인내심이 드디어 그 끝을 보였다. 조이는 이번 주까지 무조건 돈을 마련해야 했다. 결국 조이는 중년 신사가 건넨 두툼한 돈을 돌려줄 수 없었다.

“1370번 생도.”

“예.”

“나와라.”

조이는 짐을 챙겼다. 옆에 있던 기해는 무슨 일이냐고 작게 물었다. 조이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았으나 어깨를 으쓱하며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이는 수업 도중 교관을 따라나섰다. 교관은 조이가 소장과 나눈 대화를 무척 궁금해했다. 소장이나 되는 자가 어찌하여 사관학교까지 행차하여, 초급 가이드를 만나는 것인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조이를 바라보았다. 더러운 쥐새끼를 보던 시선보다는 나았다.

교관은 은근슬쩍 조이에게 물어봤으나 조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까발려 봐야 좋지 않은 이야기였고, 교관의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 보기 좋았으니까.

조이는 당연히 지난번 가이딩을 했던 병실로 갈 것이라 예상했으나, 교관은 조이를 교장실로 데려갔다. 교장실 안에는 젊은 남자와 교장이 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교장에게 짧게 인사를 건넨 후 벽 쪽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저…, 어디로 가는 거죠……? 아직 훈련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학교장과의 면담 중으로 알고 계시면 될 것 같네요.”

그 반시체가 정말 대단한 집안의 아들이긴 한 모양이었다. 학교장과의 면담이라니. 조이는 헛웃음이 나왔다.

조이는 이 일을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여러 가지로 이득이 더 큰 일이었다. 아버지의 일도 해결할 수 있었고, 이 일로 반시체가 일어나 군으로 복귀한다면 어쩌면 조이도 발령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에 자존심을 세울 정도로 고고한 자아는 없었다. 7구역에 발을 디딘 후 조금씩 깎여 가던 자존심이 이제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이번에는 의사가 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를 따라간 병실은 지난번에 본 곳과는 다른 곳이었다. 의심이 많은 조이는 자신을 실험체로 삼으려고 이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의사는 그 표정을 읽은 것인지 안심하라고 말했다.

“불안정한 에스퍼를 치료하는 특실입니다. 혹시라도 폭주하면 안 되니까요.”

반시체는 여전히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의사는 반시체의 상태를 가볍게 체크한 후, 방 한쪽을 가리키며 욕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거. 안에 설명서 있으니 충분히 숙지한 후 사용하세요. 혹시 질문이 있다면 인터폰 사용하시고요.”

조이는 의사가 주고 간 물건을 열어 보았다. 단번에 미간이 구겨졌다. 딜도와 젤이었다. 성 경험이 전무한 조이지만 딜도와 젤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이런 물건은 7구역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기차역 건너편에 있는 어두운 골목은 7구역에서 유명한 홍등가였다. 마왕의 사장을 따라 500실링이나 외상으로 술을 먹고 자취를 감춘 주정뱅이를 잡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저런 물건을 진열한 성인용품점을 여럿 보았었다.

조이는 순진하게, ‘저 막대기가 참 고추 같네요.’라며 키득키득거렸는데, 사장은 피식 웃으며 그 용도가 맞는다고 했었다.

그 후, 조이는 저런 물건을 사용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은 현실로 이어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과 돈이 없었다.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잠을 자야 했고 다음 날이면 역겨운 냄새가 나는 밀랍을 녹여 양초를 만들어야 했으니까.

“후…….”

조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이는 아주 큰 돈을 받았다. 아버지가 날려 먹은 집을 구할 돈.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일을 해야 했다. 당연한 규칙이었다. 그 일이란 것이 비록 커다란 딜도로 구멍을 벌리고, 죽은 듯 잠든 시체의 성기를 쑤셔 넣는 일이라 할지라도.

몸을 씻고 나온 조이는 딜도와 튜브를 손에 들었다. 딜도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끔찍하게도 컸다. 이렇게 클 필요가 있을까?

조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딜도 위에 젤을 쭉 짜냈다. 손가락 하나로 딜도 겉면에 젤을 펴 발랐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미끄덩거리는 촉감이 불쾌했다.

이제 딜도가 준비가 되었으니 쑤셔 넣을 차례였다. 조이는 두리번거리다 의자를 발견했다. 의자 팔걸이에 양다리를 올리자 제법 높이가 있었다.

누군가 이 장면을 훔쳐본다고 상상하니 아찔했다. 변태가 따로 없었다. 가운을 걸친 채 양다리를 쩍 벌리고 구멍을 쑤시는 변태. 그것도 반시체 앞에서.

“으윽…, 싫다.”

일반적인 딜도와 달리 앞부분이 뾰족한데도 도통 구멍을 파고들지 못했다. 조이는 크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힘을 주고 꾹 밀어 넣었다.

“아윽!!”

사냥꾼을 발견한 초식동물처럼 구멍이 꽉 움츠러들었다. 조이는 손잡이를 움켜쥐고 한참 동안 숨을 골라야 했다. 언젠가 읽었던 통속소설에서는 넣자마자 사정을 했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조이가 잘못 넣은 것 같았다. 억지로 벌어진 구멍에서 말도 못 할 통증이 올라왔다.

“읏…, 하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멍 속에 처박힌 불쾌한 물건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딜도를 앞뒤로 움직이며 구멍을 풀어 주었다. 미끄덩거리는 젤에 이완제가 추가된 것인지 조이의 구멍은 조금 더 느슨하게 낯선 침입을 받아들였다.

“으윽…….”

격렬한 삽입도 아니었건만, 딜도를 물고 있는 구멍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실망스러웠다. 첫 경험이란 것이 그렇듯, 허황되고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조이는 폭죽놀이처럼 펑펑 쾌락에 물든 모습을 상상했었다. 무척 기분 좋은 일일 것이라 예상했건만 그저 불편하고 아팠다.

“으흐윽!”

깊게 박혀 있던 물건이 빠져나가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느덧 조이의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조이는 이마를 훔치며 반시체에게 다가갔다.

반시체가 된 지 벌써 이 주일이 지났는데, 여전히 덩치가 산만 했다. 일반적인 싱글 침대가 이리 작아 보이다니. 조이는 물끄러미 반시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잠자는 숲속의 왕자는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꽤 반반한 얼굴이었다.

“야. 권명.”

조이는 깊은 잠에 빠진 에스퍼를 불렀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살짝 흔들어 보아도 반시체는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조이는 권명이 가슴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 내렸다. 얇은 병원복 위로 도드라진 근육이 보였다. 도저히 환자처럼 보이지 않는 몸이었다.

조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 권명의 하의를 내렸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고 그곳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반시체의 몸은 의외로 따뜻했다. 손바닥으로 기분 좋은 온도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온도와는 별개로 손안에 잡힌 물건은 꽤 묵직했다.

“이건… 뭐야……?”

잠들어 있는 성기가 어린아이 팔뚝만 했다. 조이도 수컷이니 성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았다. 공중 화장실이나 목욕탕을 사용할 때면 같은 성별의 성기가 눈에 들어올 때가 있었다.

생긴 건 제각각이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성기였다. 하지만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방망이? 야구 빠따? 혹시 돌연변이인 이유가 성기 크기 때문일까? 조이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수컷의 성기를 감상하고 있다니.

조이는 좁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반시체의 골반 옆에 무릎을 대고 섰다. 놈의 덩치가 꽤 커서 무릎을 대고 설 공간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후…….”

크게 숨을 내쉬며 조이는 반시체의 하체 위로 엉덩이를 내렸다. 딱딱한 딜도와는 달리 발기하지 않은 말랑한 성기는 입구를 파고들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 거대한 성기를 조금이라도 발기시켜야 할 것 같았다. 조이는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내려 반시체의 성기를 꾹 눌렀다. 엉덩이 골을 따라 길쭉한 살 기둥이 스윽스윽 스치도록 허리를 흔들었다.

고요한 병실에서는 살과 살이 맞닿는 질척한 소리만 들려왔다. 엉덩이 밑으로 꾹 눌려 있던 성기가 점점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조이는 손을 내려 성기를 만져 보았다.

“다 죽어 가는 게 이걸 잘도 세우네.”

잘된 일이었다. 물렁물렁한 걸 좁은 구멍에 넣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놈을 넣는 게 나을 테니. 조이는 최대한 하체에 힘을 빼고 성기를 조금씩 쑤셔 넣었다.

“으윽.”

살짝 발기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입구에 걸린 귀두가 좁은 구멍을 아프게 벌려 댔다. 조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더 엉덩이를 내렸다.

“윽…, 아파…….”

반만 발기한 물건이 파고드는데도 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다.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이 아파서 빼내지도, 그렇다고 더 깊게 넣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를 잡고 있었다. 권명의 복근을 짚고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잡으려던 순간, 조이의 무릎이 침대 밑으로 쑥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악!!”

조이는 재빨리 침대 난간을 부여잡았으나 이미 커다란 살 기둥이 조이의 구멍 속으로 파고든 후였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주먹을 넣고 내장을 휘젓는 기분이 이러할까.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배 속 가득 품은 탓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으윽…, 아파…. 으흑…, 너무 아파…….”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조이였으나, 찔끔 눈물이 흘러나왔다. 태어나서 구멍 안쪽이 얼얼하게 아픈 것은 처음이었다.

조이는 한참 동안 아래에서 올라오는 이물감을 견뎌야 했다. 조금씩 얕은 숨을 내쉬며 미끄러진 다리를 끌어 올렸다. 그 순간 살 기둥 끝이 조이의 내장 속 어딘가를 꾹 눌렀다.

“하읏!”

야릇한 신음 소리와 함께 조이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조이의 입에서는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빠듯하게 벌어진 입구에서는 여전히 찢어질 듯한 고통이 올라왔으나, 내장 속 깊숙한 곳에서는 찌릿한 감각이 피어났다.

얕은 숨을 내쉴 때마다 안쪽이 자극되어 낑낑거리는 강아지 같은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하흣…, 읏…….”

어쩐지 성기가 점점 더 커지는 기분이 들었다. 구멍 안에 풍선을 넣고 바람을 넣은 것처럼. 조이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얄팍한 배 위로 거대한 방망이의 흔적이 솟아났다.

“흐읏. 이… 이상해!”

조이는 외계 생명체를 배 속에 품은 기분이었다. 영화에서처럼 멀쩡한 배를 갈라 괴생명체를 빼낼 수는 없으니, 빨리 가이딩을 끝내야 했다.

“하아…, 흐읏. 시체야…, 윽…, 일어나라.”

조이는 크게 숨을 내쉬며 기도했다. 시체야 일어나라. 살아나라. 돈값을 해라. 등 오만 가지 주문을 외웠다.

삐걱삐걱 침대가 움직이는 소리와 조이의 주문이 뒤섞였다. 어느덧 조이의 엉덩이가 위아래로 흔들리며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으윽…, 흐읏…….”

두툼한 귀두가 번번이 그곳을 자극할 때마다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피가 보일 듯 붉게 벌어진 구멍이 꽉 움츠러들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조이는 목적을 잊은 채 허리를 흔들었다.

처음 느껴 보는 것이지만 조이는 알 수 있었다. 쾌감이었다. 꿈속이나 헛된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감각.

“아윽! 아흐…, 조… 조금만 더. 하흣…….”

조이는 반시체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더 격렬하게 엉덩이를 흔들었다. 조이의 엉덩이 사이로 성난 살 기둥이 한 뼘쯤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살과 살이 맞닿은 질척한 소리는 퍽퍽 볼기를 때리는 소리로 변해 갔다.

조이는 가이딩도 잊은 채 아래에서 올라오는 그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두툼한 귀두가 안쪽을 쿡 찔러 올 때마다 머리가 하얗게 타 버릴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어딘가에 도달할 것 같았다.

조이는 무아지경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조금씩 층을 쌓아 가던 그 느낌이 정점에 다다른 순간이 왔다.

“아앗!!”

조이는 재빨리 성기를 부여잡았다. 하마터면 반시체한테 정액 샤워를 시킬 뻔했다. 조이는 엉덩이가 쏙 들어갈 정도로 구멍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성기 위로 돋아난 핏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내 뜨겁게 내벽을 자극하던 성기에서도 정액이 흘러나왔다. 거친 숨을 내쉬며 거대한 방망이가 완전히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하아…, 하아…….”

조이는 삐걱거리던 침대에서 내려왔다. 두 다리가 바닥에 닿자마자 힘이 풀려 침대 난간을 잡고 버텨야 했다. 온몸이 땅으로 꺼질 듯 나른했다. 정말 좋았다.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하아…….”

숨을 고르며 잠시 기다리는데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조이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반시체를 바라보았다.

‘응?’

조금 전 시체가 눈을 뜨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짙은 바다 같은 눈을 본 것 같은데.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 * *

“하읏! 하아…. 아으…, 아흐윽!”

붉게 열이 오른 성기에서 뿌연 물이 쏟아져 나왔다. 가슴을 들썩이며 손안에 담긴 우윳빛 액체를 바라보았다. 샤워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함께 뒤섞인 액체는 조금씩 색이 흐려지더니 물과 함께 씻겨 내려갔다.

“하아… 하아…….”

조이는 자위를 끝마치고도 부족함을 느꼈다. 지난번 밀접접촉 후 생긴 이상 현상이었다. 아무리 성기를 매만져도 후련하지 않았다. 내장 속을 파고들던 그 성기의 느낌이 잊혀지지 않았다.

조이는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구멍에 가져다 댔다. 커다란 방망이를 머금었던 구멍은 그사이 작게 오므라들어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는 것도 버거웠다. 한참을 매만진 끝에 흘러내리는 물과 함께 중지가 구멍 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읏!”

축축하고 습한 구멍을 이리저리 돌리며 탐색했다. 머리끝을 하얗게 태우던 그 감각을 되살려봤다. 하지만 도통 조이의 손가락으로는 그 감각을 재현할 수 없었다.

“하아…, 됐다. 그만하자.”

조이는 아쉽게 샤워를 마치고 축 젖은 속옷을 무지막지하게 빨았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밀접접촉 후 조이의 성기는 몽정과 자위를 번갈아 가면서 쉴 틈 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꿈속에는 악몽처럼 등장하던 어두운 골목 대신 병실이 등장했고, 그날 느꼈던 황홀함이 재현됐다. 그런 꿈을 꾼 날이면 자는 도중에 정액을 쏟아 내고는 했다.

7구역에서의 힘겨운 삶을 벗어난 후 조이는 처음으로 쾌감에 눈을 뜬 것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속옷은 여전히 불쾌했지만, 그날의 기억이 그리 나쁘게 각인된 것 같지는 않았다. 조이를 강제로 억압하고 꿰뚫는 것이 아니라, 조이가 스스로 움직이며 기쁨을 찾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꿈 말고도 조이의 불안함을 대변하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간절한 가이딩보다는 자위에 가까운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혹여 간절함이 부족해 돈값을 제대로 못 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 때면 중년 신사가 돈을 다시 돌려 달라고 하는 악몽을 꾸었다.

권명의 목숨값으로 받은 돈은 이미 7구역으로 보내졌고, 아버지의 도박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이제 와서 다시 돌려줄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조이를 두렵게 했던 악몽이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다. 밀접접촉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반시체가 깨어났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멀쩡하게 걸어서 돌아다닐 정도라고 했는데, 반시체는 사관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그 후 부쩍 가이드 반을 기웃거린다고 하기에 조이는 혹여 권명이 상성이 잘 맞는 가이드를 찾고 있는 게 아닐까 기대했었다. 그런데 가이드를 찾는 게 아니라 강간범을 찾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강간…범?”

“어! 권명 위에서 실컷 즐기다 간 변태를 찾고 있대.”

“변태……?”

“응! 미친놈이래! 아픈 애 위에 올라타서 신나게 자위하다가 휙 사라졌대!”

“미… 미친놈!”

조이는 그런 미친놈은 당장 감방에 처넣어야 한다며 맞장구를 쳤다. 물론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일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조이 말고 다른 누군가가 권명을 급습한 것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권명이 확성기처럼 떠드는 말이 어쩐지 기시감을 자극했다.

“그 변태가 뭐라더라? 시체야 일어나라. 돈값을 해라? 뭐 이런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나?”

“푸우웃!”

“윽! 뭐야 조이!”

“주… 주문?”

“어. 또라이가 또라이 짓 한 거지. 근데 진짜 누굴까?”

조이는 턱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주스를 닦아 냈다. 하얀색 셔츠가 엉망이 됐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이는 그날의 일을 곰곰이 다시 떠올려 봤다. 조이의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조이는 침대에서 내려오던 중 낯선 눈동자를 보았었다. 짙은 바다 같은 눈동자. 그저 착각이라고 여겼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아니다…. 아… 아니야!’

* * *

그 후 조이는 권명을 피해 다녀야 했다. 곱상한 얼굴의 왕자님은 꽤 거친 놈이었다. 지나다니는 가이드란 가이드는 모조리 멱살을 잡아 얼굴을 확인하고는 했다. 아직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하여 전장으로 복귀할 수 없다던 것치고는 무척 건강한 모습이었다.

“나한테 몹쓸 짓을 하고 토낀 놈을 찾고 있어! 자진 신고하면 살려는 준다. 근데 나중에 걸리면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야! 거기 너!”

“네… 네?!”

“대가리 들어 봐!”

겁에 질린 가이드는 놀란 사슴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조이와 똑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었다. 조이는 재빨리 몸을 낮춘 채 반대쪽으로 엉금엉금 움직였다.

“썅. 머리 색깔이 왜 똑같은 거야! 가!”

“가… 감사합니다.”

한껏 겁을 집어먹은 가이드는 감사할 일이 아닌데도 감사하다며 절을 했다. 권명은 닥치는 대로 생도들의 멱살을 잡아 얼굴을 확인한 후 통과시켜 주었다.

권명의 시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후, 조이는 서둘러 반대쪽 통로로 달려갔다. 권명과 페어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까딱하다가는 강간범으로 몰리게 생겼다.

아깝게도 권명은 에스퍼 후보에서 제외되어야 했다. 결국 조이를 4등급 전쟁영웅으로 만들어 줄 후보는 태혁이 유일했다.

조이는 스토커처럼 태혁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에스퍼 수업에 몰래 숨어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 외에 태혁이 식사를 할 때나 운동을 할 때면 몰래 그 모습을 훔쳐보았다.

태혁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던 조이는 태혁에 대한 첫인상을 수정해야 했다. 재미없고 로봇 같다고 느꼈는데 태혁은 꽤 노력파였다. 체력 단련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성실했다.

타고난 재능이 아닌 노력으로 그 능력을 키워 낸 것 같았다. 조이는 태혁에게 좋은 자극을 받고 있었다. 조이도 저렇게 되고 싶었다.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저렇게 차근차근.

하지만 조이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가 또다시 사고를 치기 전에 동생을 7구역에서 빼내야 했다. 다음에는 집뿐만 아니라 동생까지 팔아 버릴지도 모르니까.

‘빨리 발령을 받아야 해. 하루빨리.’

태혁은 권명을 제외하면 가장 우수한 에스퍼였다. 다음 학기를 끝으로 발령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미 가이드 사이에서는 태혁을 향한 물밑 작업이 시작되었다. 태혁에게 초콜릿 같은 군것질거리를 바치는가 하면, 태혁이 보일 때마다 그의 앞에서 옷을 벗어 던지거나, 픽픽 쓰러지는 가이드도 있었다.

조이는 그들의 두꺼운 안면 가죽에 대고 진지하게 손뼉을 쳤다. 누군가 조이의 머리에 총을 대고 ‘태혁에게 끼를 부려!’라고 명령하지 않는 한 하지 못할 짓이었다.

“그래서. 오늘 에스퍼끼리 파티를 한다고?”

“응. 태혁도 간다는 것 같아.”

조이는 고급 정보를 주고받는 생도들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미간에 주름이 지어질 정도로 집중했다.

‘안조이! 집중해!’

정신계 에스퍼의 발령을 축하하는 파티라고 했다. 최근 최전방에 나가 있는 정신계 에스퍼의 실종 사고가 빈번하여, 이례적으로 정신계 에스퍼의 발령이 빨리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조이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한참 동안 귀를 기울인 끝에 파티 장소를 알아냈다.

‘클럽이라…….’

클럽이라면 조이도 뭔지 알았다. 술집하고 비슷한 곳이라고 들었다. 술집이라면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좋은 장소였다. 철벽 방어를 자랑하는 태혁도 술이 들어가면 좀 노글노글해질 테지.

술 취한 자들이 얼마나 빠르게 흐트러지는지는 조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마왕에서 자주 보던 모습이었다. 독주 한 잔이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두 잔이면 슬슬 목소리가 커졌다. 세 잔이면 이때부터는 처음 본 사람도 십년지기 친구처럼 어깨동무를 했다.

조이는 어설픈 플러팅 대신 자신이 얼마나 가능성 있는 가이드인지 태혁에게 각인시킬 생각이었다. 조이는 이번 1차 평가에서 8위를 차지했다. 제국사와 전쟁사에서는 평범한 점수를 받았지만, 증폭기 사용에 있어서는 뛰어난 점수를 받았다.

반 학기 늦게 입학한 것을 고려한다면 눈부신 성적이었다. 태혁에게 자신의 가능성을 어필한 후, 장래에 발령을 받거든 페어로 선택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태혁과 페어가 되는 흐뭇한 상상을 하며 클럽으로 향하던 중, 포악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조이에게는 악몽처럼 들려오던 목소리, 매일같이 자신을 강간한 범죄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소리치던 자. 권명이었다. 조이는 재빨리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사관학교 내에서 통신구 사용은 금지였으나, 놈은 그것을 버젓이 들고서 통화하고 있었다. 꽤 기분 나쁜 소리를 들은 것인지 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조이는 얼떨결에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북부? 난 안 가! 그 사람 말 한마디면 내가 죽을 뻔한 그곳으로 다시 튀어 가야 한다는 거야?”

[…….]

“내가 왜?! 형의 망령을 잡고 싶은 거면 7구역으로 가라고 해! 난 안 가!”

놈은 거칠게 소리를 치더니 한 손으로 통신구를 박살 냈다.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죄 없는 담벼락을 쿵쿵 내려쳤다. 조이는 한참 동안 고함을 지르고 난리를 피우던 권명이 사라질 때까지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어휴! 저 성질머리……!”

조이는 앞으로 더더욱 권명을 피해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말본새를 보니 잡혔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또한 통신구를 손아귀에 넣고 깨부수는 모습은 어떻고.

염력이 주특기라고 들었는데 저 손아귀 힘은 무엇이란 말인가. 맨손으로 소도 때려잡을 놈이었다. 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쿵쿵 귀를 때리는 음악 소리와 함께 요란한 조명이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거렸다. 조이는 촌스럽게도 이 낯선 모습에 잠시 충격을 받았다.

전력 공급이 형편없어 아직도 양초를 태우는 7구역과 달리 이곳은 전력이 넘쳐흐르는 듯했다. 또한 마왕에서 주로 듣던 음침한 클래식이 아닌 기계 음악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조이의 앞에는 교미하는 뱀처럼 엉겨 붙어 춤을 추는 이들과 온몸으로 술을 마시는 이들이 보였다.

‘7구역의 목사들이 경종의 의미로 외치던 소돔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신문물에 충격을 받은 조이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혼자 왔어?”

조이보다 살짝 작은 녀석이 조이에게 엉겨 붙었다. 취한 듯 눈이 정상이 아니었다. 조이는 주정뱅이를 무시하려 했으나, 녀석은 먹이를 발견한 문어처럼 조이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귓가로 뜨끈한 열기가 묻어나는 숨결이 느껴졌고, 술이 필요하냐는 물음이 들려왔다.

마침 목이 탔는데 잘됐다. 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정뱅이는 조이의 어깨를 매만지며 바텐더에게 소리쳤다.

“그거로 두 잔!”

대체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주문을 받은 바텐더는 하얗게 거품이 올라온 맥주 두 잔을 건넸다. 조이는 수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대단한 술을 마시게 될 거라 기대했건만 맥주였다. 맥주는 7구역에서도 흔한 술이었다.

“뭐. 잘 먹을게.”

“자자. 마셔! 쭈욱!”

맥주를 받아 들려는데, 주정뱅이가 조이의 술에 뭔가를 떨어트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술 취한 놈 같지 않은 날쌘 동작이었다. 하지만 놈은 모를 것이다. 조이의 재빠른 눈치를.

가이드로 발현되기 전까지 조이는 아침마다 신문사에서 일을 했었다. 빠른 속도로 인쇄되는 신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색상이 흐려지는 순간 재빨리 잉크를 충전하는 일이었다. 둔치로 태어났으나 10년간의 고된 노동이 조이를 눈치가 빠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어? 너 쟤 알아?”

“어디? 누구?”

조이는 대충 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주정뱅이가 고개를 뒤로 돌리는 순간, 조이는 맥주잔을 바꿔 치웠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맥주잔을 매만졌다.

“태혁 말하는 거야?”

“태혁? 어디? 네가 쟤를 어떻게 알아?”

주정뱅이는 놀랍게도 태혁을 먼저 알아보았다. 놈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함께 수업을 듣는 한솔이라는 가이드와 조이의 목표물인 태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솔은 2구역 출신의 가이드로, 태혁과 페어를 이룰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생도였다. 오늘 이 클럽에 태혁이 나타날 것이라는 소문을 한솔 역시 들은 모양이었다.

“아주 절친한 친구지! 같은 반이야.”

“같은 반……?”

그 말은 이 주정뱅이도 에스퍼라는 말이었다. 에스퍼는 하나같이 태혁이나 권명처럼 우락부락하게 커다란 놈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작은 에스퍼도 있다니, 좀 놀라웠다. 의외라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약 먹은 듯 풀려 있던 눈이 새초롬하게 떠졌다.

그도 아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그다지 에스퍼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난 육체파가 아니라 그래. 그것보다 왜 안 마셔? 짠 할까?”

작은 에스퍼는 조이의 눈치를 살살 살피고 있었다. 놈의 얕은수에 헛웃음만 나왔다. 그래. 짠 하자. 그 약이 무슨 약인지 이제 두 눈으로 확인해 보자.

“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에스퍼는 갓 태어난 노루 새끼처럼 주저앉았다.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피식피식 웃는 게 보통 맛이 간 게 아니었다. 미련 없이 놈을 버리고 태혁과 한솔이 이야기를 나누는 곳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그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이곳은 프라이빗석입니다. 초대받으신 분들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초대받은 사람이 초대한 사람은요?”

“……?”

조이는 왔던 길을 돌아가, 테이블 밑을 뒤졌다. 제집처럼 누워 있는 주정뱅이를 끌어 올렸다. 주정뱅이는 보기보다 무거웠다. 춤을 추자며 달라붙는 인간들을 헤치고 문지기 앞으로 다가갔다.

“됐죠?”

조이는 문지기를 지나치자마자 작은 에스퍼를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조이는 늘 그렇듯 멀찍이 서서 기회를 노렸다. 태혁과 한솔은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지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한솔이 잠시라도 자리를 비워야 말이라도 걸 텐데.’

마침내 한솔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조이는 한솔의 눈치를 살피며 태혁에게 건넬 종이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조이의 가능성을 단번에 보여 줄 비장의 무기. 조이의 성적표였다. 막 태혁에게 접근하려는데, 한솔이 술잔을 들고 태혁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어?”

그 순간 한솔이 잔에 뭔가를 똑 떨어트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노루 새끼가 조이에게 먹이려 했던 것과 비슷해 보였다. 저 약의 효과라고 해야 할지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었다.

‘저런 덩치를 어떻게 끌고 가려고 약을 먹이지?’

조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당장 달려가 ‘약 탄 술이야!’라고 소리쳐야 할까? 그랬다가는 한솔을 필두로 한 가이드들에게 욕이나 실컷 얻어먹을 것이다. 한솔은 가이드 사이에서 꽤 힘을 발휘하는 놈이었다. 그렇다고 내 몫이 될지도 모르는 태혁을 저렇게 방치하란 말인가?

조이는 태혁을 향해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맥주잔을 받아 든 태혁은 한솔의 뒤에서 마임을 하듯 뭔가를 마시고 ‘깨꼬닥’ 죽는 척하는 조이를 이상한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눈치 뭐야……?’

태혁은 뛰어난 에스퍼지만, 눈치가 좀 없었다. 조이가 보내는 강력한 신호를 도통 알아먹지 못했다. 아무래도 오래 살 팔자는 아닌 것 같았다. 무적의 에스퍼라지만 저렇게 경계심이 없어서야. 태혁은 조이의 경고에도 한솔이 건넨 술을 꿀꺽꿀꺽 마셔 댔다

‘헙! 어떻게 하지?’

기회는 역시나 주정뱅이가 제공했다. 바닥과 하나가 될 듯 누워 있던 노루 새끼가 벌떡 일어나더니 태혁에게 달려들었다. 토를 할 듯 입을 쭉 내밀고 ‘우웩’거리는 불쾌한 소리를 냈다.

한솔은 기겁을 하며 떨어졌고, 태혁은 주정뱅이를 데리고 클럽 뒷문으로 향했다. 조이는 재빨리 그 뒤를 밟았다.

“우웩! 우에엑!”

주정뱅이는 내장을 토해 낼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토악질을 하더니, 기절하듯 주저앉았다. 태혁은 그제야 약 기운이 몰려오는지 머리를 부여잡았다.

“태혁?”

“누구…, 윽…, 하아…….”

우등생인 조이는 향정신성 약물에 취한 에스퍼를 구해 낼 방법을 기억해 냈다. 무슨 약인지는 모르나, 저리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걸 보면 보통 독한 약이 아니었다.

“안조이야.”

“안 좋냐고……?”

“가는귀가 먹었냐? 난 안조이고, 널 구해 줄 사람이야! 기억해!”

조이는 최면을 걸듯,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지에 대해 실컷 떠든 후 태혁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그 어떤 상처든, 가장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은 점막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조이는 태혁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두통 때문인지 미간을 찌푸렸지만, 여전히 반듯한 얼굴이었다. 손으로는 사내다운 턱선을 매만지며, 눈으로는 도톰한 입술을 노려봤다.

“기억해. 난 안조이야.”

“안…조…이…….”

태혁은 최면에 빠진 듯 조이의 이름을 느릿느릿하게 불렀다. 조이는 그 위로 꾹 입술을 눌렀다. 보들보들한 입술의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조이는 이제 조용히 속으로 기도를 올릴 생각이었다.

늘 그렇듯 근본 없는 주문을 외우려 하는데, 그 순간 조이의 허리를 감싸 안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읍!”

두 눈을 감은 태혁이 조이의 입술 사이를 벌리며 파고들었다. 조이는 낯선 접촉에 멍하게 입술을 벌리고 말았다.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입 안 구석구석을 탐하던 낯선 존재가 노크하듯 온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으흠.”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통속소설에서 묘사하듯 종이 울리거나,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이 아니었다. 아래로, 지하로 끌어당기는 아찔함이었다. 멀쩡하던 다리에 힘이 풀리며 점점 더 태혁의 몸 위로 허물어졌다. 고작 입술이 닿았을 뿐인데도 조이의 몸이 속절없이 달아올랐다.

온몸이 뜨거웠고, 잠자다가도 말썽을 일으키곤 하던 조이의 물건이 열기를 더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래가 발기할지도 모른다. 조이는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 냈다.

“하읍…, 잠… 잠깐……. 하아…….”

가쁜 숨을 내쉬며 태혁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조금 더 힘을 줘 밀어내려는데, 반작용하듯 태혁의 팔이 더 강하게 조이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흐물흐물하게 풀린 가랑이 사이로 태혁의 단단한 허벅지가 끼워지며 조이의 물건을 자극했다.

강하게 조이를 끌어안을 때마다 단단한 허벅지에 눌린 물건에서 찌릿한 쾌감이 피어났다.

“아윽…, 하아…, 아흡.”

태혁은 조이의 목 뒤를 꽉 움켜쥐고 조이의 입술이 한계까지 벌어지도록 파고들었다. 질척한 소리. 가쁜 호흡. 온몸을 휘감는 열기.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정신이 흐릿해지는 순간, 태혁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하아…, 아흐…, 하아…….”

가슴을 부풀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는 조이의 앞에는 어느덧 맑아진 눈동자가 조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던 입술이 이번에는 울림을 만들어 냈다.

“안조이.”

* * *

“조이! 안조이!”

잠결에 룸메이트인 기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높여 조이의 이름을 부르던 기해는 아예 침대 위로 올라와 조이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긴급 훈련이래! 빨리 일어나!”

초급 훈련이 끝난 후 실전 훈련이 시작되었다. 실전 훈련은 보통 규칙적인 시간에 이루어지지만, 종종 긴급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자다가도 실습장으로 뛰쳐나가야 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조이는 서둘러 훈련실로 달려갔다. 가벼운 체력 단련 후 실전 훈련이 시작되었다. 증폭기를 등에 메고 부상당한 에스퍼를 이송하는 훈련이었다. 눈앞을 가로막는 장해물을 뛰어넘거나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야 했다.

꽤 어려운 훈련이지만, 조이는 그사이 이 훈련을 수십 번도 넘게 반복하고 있었다. 첫 훈련을 받을 때와는 달리 어느새 익숙하게 총과 증폭기를 사용했다.

조이는 요즘 무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권명은 2구역으로 훈련을 떠났기에, 그가 확성기처럼 떠들던 강간범에 대한 소문도 한결 줄어들었다. 7구역에 있는 동생에게도 안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조이의 팔자인지, 조이를 바라보는 몇몇 가이드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치료할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조금은 깊어진 그 입맞춤을 누군가 훔쳐보기라도 한 걸까?

훈련을 마친 조이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번 동생에게 당부한 일이 있기에 그 일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사장님한테 물어봤어?”

[물어봤는데. 사장님이 잘 모르겠대.]

“정확하게 다시 물어봐. 조금이라도 느껴지는 게 있는지.”

[응. 알았어. 근데 여기 사장님 좋다? 아침도 챙겨 줘.]

“챙겨 준다고 하면 거절하지 말고 잘 먹어. 거긴 그래도 식재료를 정상적인 걸 쓰잖아.”

[형아는? 거기도 밥을 줘?]

“어. 엄청 맛있는 거 줘. 그러니까 너도 기도라도 해. 가이드나 에스퍼가 되게 해 달라고.”

조이는 동생에게도 돌연변이로 발현할 싹이 있는지 궁금했다. 7구역에서 그런 걸 확인해 줄 이는 사장이 유일했고, 다행히도 동생은 사장과 아주 가까이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사장은 골목에서 어떤 파장이 느껴져 가까이 다가가니 조이가 서너 명에게 결박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 조이는 가이드로 판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사장은 돌연변이의 싹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 때문에 조이는 혹여 동생에게도 그 파장이 느껴지지 않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사장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으나, 조이는 동생이 가이드나 에스퍼로 발현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에스퍼였고, 아버지도 어찌 되었든 가이드였다. 돌연변이는 유전법칙을 벗어난다고 듣긴 했으나,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알아본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생도는 돌연변이의 후손이었다.

어쩌면 전쟁영웅 4등급 없이도 동생을 수도로 데려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이는 드물게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에게는 별 볼 일 없는 일상과도 같은 평온함을 조이는 늘 꿈꿔 왔었다.

수도로 동생을 데려오는 흐뭇한 상상을 하며 걷던 중 조이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거센 충격을 받고 나가떨어졌다.

“악!”

“뭐냐?”

조이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 권명이었다. 2구역으로 훈련을 떠난 이 망할 종자가 어떻게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조이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먼저 지나가라는 표시로 벽 쪽에 바짝 붙었다. 권명은 걸음을 떼더니 조이의 앞에 멈춰 섰다.

“너. 고개 들어 봐.”

“…….”

조이의 목이 겁에 질린 자라처럼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권명은 무 뽑듯 조이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그 거친 움직임에 조이는 아프다고 소리치며 권명을 밀어냈다.

“아! 아파!”

조이는 인상을 쓰며 권명을 노려보았다. 권명의 눈동자는 짙은 바다색이었다. 그날 눈이 마주친 게 맞았다. 조이의 눈이 사정없이 떨려 왔다. 그런 조이의 얼굴을 놈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이는 어쩐지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닿지 않았음에도 파장이 느껴지는 듯했다.

“너. 따라와.”

“…….”

권명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으나, 조이는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등 뒤로 무지막지한 힘이 느껴졌다. 권명은 조이의 뒷덜미를 잡아채서는 빈 창고로 질질 끌고 갔다. 그러고는 창고 바닥에 조이를 내동댕이쳤다.

“아악!”

“너지? 강간범. 새끼야 좋았냐? 어?”

역시 권명은 조이를 알아본 것이었다. 바짝 다가와 조이를 위협하는 권명에게 두려움을 느꼈으나, 원래 겁 많은 개가 사납게 짖는 법이었다. 조이는 큰소리로 반격했다.

“뭐… 뭐? 강간범? 말조심해! 씨… 씨발!”

“씨발?”

권명은 음산하게 웃으며 씨발이라고 되물었다. 씨발은 너무 강했나? 조이는 떨리는 눈을 애써 감추며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권명은 그 모습에 조금도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오히려 조이의 멱살을 잡아 왔다. 낭패였다.

“크윽!!”

“허리 흔들던 게 수준급이더라? 그렇게 좋았냐? 다 죽어 가는 사람 위에서 그 지랄을 할 정도로?”

“조… 좋아? 야! 나도 너 싫었어! 네 거 크기나 하지! 뭐 난 좋았는 줄 알아?”

“하? 그런데 시간을 하셨어요?”

“시간? 이게 기껏 살려 줬더니! 살려 준 사람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

“퍽이나. 네가 왜 날 살려! 변태 새끼야!”

“누구보고 변태래!”

조이는 꽥 소리를 질렀다. 권명 놈 성격이 더럽다고 듣기는 했으나, 말투는 더 사나웠다. 시간. 변태. 강간범. 조이로서는 평생 들을 일 없던 치욕스러운 단어였다.

“나도 하기 싫었거든? 너네 아빠가 하-도 애원해서 큰맘 먹고 해 준 거지!”

“뭐?”

조이의 말에 권명의 표정이 더없이 험악해졌다. 조금 전까지 사납게 노려보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섬뜩한 표정이었다. 조이의 멱살을 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조이의 숨통을 틀어막을 것처럼.

“윽…, 이것 좀 놔! 수… 숨 막혀!”

“너. 똑바로 말해! 누가 애원을 해?”

“너… 너네 아빠라고 했어! 진짜야!”

조이는 비굴하지만, 지금이라도 싹싹 빌어야 하는 건 아닐지 고민했다. 조이의 멱살을 꽉 잡고 흔들던 권명이 조이를 밀쳤다.

“콜록. 콜록.”

내던져진 조이가 목을 매만지며 권명을 노려보았다. 권명은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뒤돌아서더니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내 거센 욕설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씨발!!”

욕설과 함께 낡은 책상과 의자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권명이 염력을 사용한다고 듣기만 했지, 이렇게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으… 으윽!!”

조이는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혹여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의자에 머리라도 맞았다가는 바보가 된 채 7구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뭔가가 부서지고 부딪히는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려왔다. 조이는 더 꽉 귓가를 틀어막았다. 둔탁하게 물건이 부딪히는 소리와 쨍그랑하고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끝이 나고,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조이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세상에……!”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을 것이다. 폭격이라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온전한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창고를 이렇게 만든 권명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무서운 놈!”

조이는 엉망으로 변한 창고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기숙사로 달렸다.

* * *

다음 날, 잔잔하던 물가에 조약돌이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듯, 교정에 큰 파장을 일으킬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중심에는 조이가 있었다. 그 소문은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조이는 진실은 시인했고 거짓은 부정했으나, 그 누구도 조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7구역 출신인 조이가 몸을 팔아 입학했다는 소문이었다.

“더러워. 4구역?”

“거짓말쟁이!”

“수준 떨어지게 몸을 팔아서 입학이라니. 7구역 출신이 그렇지.”

조이에게 살갑게 다가와 인사하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었다. 조이는 7구역 출신인 주제에 뻔뻔하게 4구역 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한 양치기 소년이었고, 몸을 팔지 않았다는 말은 그 누구도 믿어 주지 않았다.

조이는 빠르게 고립되었고, 생도들의 괴롭힘이 뒤따랐다. 조이의 물건은 늘 어디론가 사라졌고 조이와 함께 훈련을 받을 상대를 찾을 수 없었다. 며칠째 기해는 조이와 함께 쓰던 기숙사로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룸메이트 변경을 요청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7구역 출신인 조이에게 크게 실망한 것 같았다.

식사며 훈련이며 항상 짝을 이루던 이가 사라지니 조이는 부쩍 말수가 줄었다. 생도들의 괴롭힘보다도 대화를 나누고 일상을 나누던 이의 부재가 조이를 더 힘들게 했다.

점심시간, 조이는 마지막으로 배식을 받아 가장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어디서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7구역 냄새 나.”

한때 친근하게 이야기도 나눴던 한솔은 큰 목소리로 조이를 조롱했다. 화살처럼 마음에 콕콕 날아와 박히는 말이었다. 조이는 애써 날카로운 말을 무시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막 국을 떠먹으려는데 조이의 식판 위로 신발이 날아왔다. 폭탄 터지듯 음식물이 조이의 얼굴까지 튀어 올랐다.

“하하하.”

조이의 꼴이 꽤 즐거운 모양인지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꽉 물린 입술이 파르르 떨려 왔다. 조이는 꽉 움켜쥔 손으로 턱선을 타고 흐르는 국물을 훔쳐 냈다. 국그릇에 담긴 실내화를 들어 올려 힘껏 내던졌다. 조이를 비웃는 한솔을 향해.

음식물로 축축하게 젖은 실내화가 한솔의 가슴팍에 더러운 흔적을 남기며 떨어졌다. 조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 냄새 이제 너한테도 나겠네?”

곧바로 조이를 향해 욕설과 고함 소리가 쏟아졌다. 조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가슴에서 부글부글 끓는 물이 넘쳐흘렀다. 억울함에 소리치고 싶었다. 험한 욕설이라도 실컷 내뱉고 싶었다.

“하아…….”

하지만 변명도 욕설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조이가 진실을 소리쳐도, 그 누구도 조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테니까. 뭔가가 콱 막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희망으로 가득 찼던 이곳이 점점 견딜 수 없는 7구역과 닮아 가고 있었다.

조이는 그저 하루빨리 보직을 받기를 기도했다. 그럼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조이의 바람처럼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2차 평가가 시작되었다. 개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던 1차 평가와는 달리, 2차 평가에서는 단체 훈련과 합동 훈련을 받게 된다. 실제 전투 현장을 재현한 세트장에서 워봇을 상대로 훈련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또한 평가 항목 중에는 시너지 항목이 추가되어, 임시로 페어를 이루는 에스퍼와의 합을 평가하게 된다. 1차 평가보다 2차 평가의 비중이 훨씬 더 높았다. 이전 훈련보다 더욱 잘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첫 테스트는 가이드 단체 훈련이었다. A팀과 B팀으로 나누어져 최종 생존자가 많은 팀이 승리하는 서바이벌 훈련이었다.

가이드는 에스퍼처럼 무지막지한 힘을 휘두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전장을 누벼야 했다. 전투 중 폭주할지도 모르는 에스퍼를 가까이에서 살펴야 하기 때문이었다. 조이는 훈련용 총을 쥐고 세트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후우…….”

조이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세트장 문이 열리자, 조이는 재빨리 달려 나가 적군의 몸에 훈련용 총알을 박아 넣었다. 훈련용 총알은 당연히 살을 뚫을 위력은 없으나 통증은 있었다.

삑!

-1770번 훈련생 탈락.

알람 소리가 끝나자마자 조이는 자신의 옆으로 총알이 날아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상할 정도로 적군의 수가 많았다. 아마 조이가 떨어진 곳이 적군 영토인 모양이었다. 조이는 서둘러 숲으로 달렸다.

조이의 등 뒤로 총알이 날아왔지만 조이는 날쌔게 요리조리 몸을 피했다. 그때 조이의 레이더에 아군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이었다. 등 뒤로 꽤 많은 적군이 따라오지만 조이는 아군 쪽으로 적군을 유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이는 더 빨리 다리를 놀리며 등 뒤로 다섯 명이 따라오고 있으니 함께 처리하자고 소리쳤다.

“다섯 명이 따라오고 있어! 적군이야!”

그런데 눈앞에 등장한 아군이 하필 식당에서 실내화를 던졌던 놈이었다. 한솔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총알을 장전했다.

“아!”

총성과 함께 조이의 몸이 휘청거렸다.

“누가 적군이야? 너 같은 새끼가 우리한테는 적이지. 더러워.”

“야 쏴!”

같은 편인 생도들이 조이를 향해 마구잡이로 총알을 발사했다. 조이 역시 반격하려 했으나,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훈련용 총알이라는 것은 알지만, 온몸에 실탄이 박힌 듯 아팠다.

막을 틈 없이 쏟아지는 총알 세례에 조이는 온몸을 작게 말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해!”

“더러워. 퉷!”

조이에게 총알을 난사하던 생도들은 총알이 떨어지자 조이의 몸 위로 침을 뱉으며 떠나갔다. 총알보다 더 큰 아픔이었다.

7구역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원망스러웠다. 묻어 두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왜 하필 아버지는 반역을 꾀할 원로장의 편에 선 것일까? 왜 어머니의 명예와 조이의 미래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베팅한 걸까? 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땅에 얼굴을 처박았다.

-미션이 종료됩니다. 남은 생도들은 복귀하십시오.

한참 동안 누워 있던 조이의 귓가로 미션이 종료된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조이는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온몸이, 또 마음이 완전히 지쳐 버렸다.

* * *

간단한 치료를 받은 후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 안은 유독 텅 빈 느낌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기해의 짐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조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기해가 짐을 챙겨 간 모양이었다.

조이는 입학 후 처음으로 살갑게 다가와 준 기해에게 어찌 되었든 거짓말을 한 것이기에 사과할 생각이었다. 기해가 돌아오거든. 그런데 그런 기회조차 조이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기해가 사용하던 텅 빈 침대와 책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새로운 룸메이트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스포티한 크로스백 하나만 딸랑 들고 나타난 이는 조이가 아는 이였다. 권명이었다. 지난번 창고에서의 일 이후로 권명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조이는 부쩍 의기소침해져 기숙사에 처박혀 있었고, 그 탓에 권명과 마주칠 일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다시 만나게 되면 단번에 멱살을 잡아 오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권명은 크로스백을 바닥에 던져 놓고는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늘 기해가 쓰던 곳이었다. 체구가 자그마한 기해와 달리 커다란 권명이 그 자리에 누우니 작은 기숙사가 더욱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려는데 권명이 말을 걸어왔다.

“7구역 출신이라고?”

조이는 소문으로 이미 퍼질 대로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조이의 출신을 되묻자 울컥 화가 났다.

“그래! 7구역이다. 뭐!”

권명은 발작하는 조이를 보며 피식 웃더니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새끼. 발작은. 7구역은 어떠냐?”

“어떻긴 끔찍하지.”

“7구역에도 에스퍼가 있다며?”

“어. 한 명.”

“만나 본 적 있어?”

“지겹게 봤지. 사장이니까.”

권명은 7구역에 있는 에스퍼에게 관심이 가는지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조이가 그 에스퍼와 일을 했다고 하자 무슨 일을 했는지, 얼마나 일을 한 것인지 등을 물었다. 조이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권명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방적인 질문과 답변이라 할지라도.

“순전히 자기 기분에 따라 장사를 했어. 5실링 하던 술이 10실링일 때도 있고. 그리고…….”

그러다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순간이 왔다. 단 며칠 동안 고립되었을 뿐인데, 조이는 그사이 이런 평범한 대화가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조이는 애써 권명의 눈을 피하며 소리쳤다. 약한 모습은 죽어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나… 나 먼저 씻는다.”

“맘대로.”

조이는 어색하게 소리치고는 욕실로 향했다. 또다시 눈가가 시큰해졌으나 애써 울분을 눌러 담았다.

‘7구역 출신이 고작 이런 일에 눈물을 보인다니.’

울컥하는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뜨거운 물을 맞았다. 몸에서 뜨끈한 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즈음, 샤워를 마쳤다. 조이는 늘 그렇듯 하얀 수건으로 하체를 가린 채 밖으로 나갔다.

샤워가 길어졌는지 그사이 권명은 잠이 들어 있었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참으로 반질반질한 낯짝이었다. 굳이 때를 빼고 광을 내지 않아도 될 얼굴이긴 하지만, 그래도 씻고 자야 하지 않을까 싶어 권명을 깨울 생각이었다.

“야. 권명.”

잠귀가 어두운지 조이의 부름에도 권명은 여전히 꿈나라였다. 조이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권명의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그 순간 자고 있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아악!”

언제 잠이 들었냐는 듯 벌떡 일어난 권명이 조이를 뒤로 밀쳤다. 보기 좋게 나자빠진 조이는 황당함과 시원함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황당함을 느꼈고, 하체를 두르던 하얀 수건이 흘러내려 시원함을 느꼈다.

권명의 시선이 곧바로 조이의 가랑이 사이에 박혔다. 이내 권명의 입에서 꽥꽥 고약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변태 새끼가! 왜 벌거벗고 지랄이야!”

“뭐… 뭐! 씻으라고 깨운 거야!”

조이는 하체를 주섬주섬 가리며 ‘이건 실수고!’라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권명은 치한을 만난 것처럼 조이를 노려보았다. 조이는 권명의 행태가 괘씸했다. 기껏 생각해서 깨워 주었건만.

‘흥! 다시는 깨워 주나 봐라!’

* * *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그 사람의 생활 패턴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었다.

예를 들면 권명의 자위가 그러했다. 놈은 꼭 조이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가장 먼저 욕실을 차지했다. 대체 아침부터 정액을 몇 번이나 쏟아 내는 건지, 얇은 문틈으로 꽤 오래 그 소리가 들려왔다. 권명은 기나긴 자위를 끝낸 후에야 욕실을 양보했다.

어쩐지 녀석이 실컷 즐기다 나온 그곳에서 몸을 씻는 것이 불쾌했다.

“야. 그런 건. 좀. 주말에 몰아서 해.”

“뭘?”

“그거 말이야. 대체 왜 아침부터 그 짓을 이렇게 오래 하냐고! 다음부턴 내가 먼저 씻을래.”

“하? 너 딸 친 곳에 나보고 들어가라고?”

“나… 난 그런 거 안 해!”

조이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적어도 조이는 조용히, 홀로, 빠르게 해치웠으니 놈이 알 리 없었다.

“팬티 닳아 없어지겠더라. 그거나 좀 어떻게 해 봐. 그럼 나도 참아 보고.”

‘눈치 빠른 새끼.’

권명은 조이에게 도통 관심이 없는 듯했는데, 아침마다 속옷 빨래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조이는 다음 날부터 축축한 속옷을 철저하게 감추었다. 옷장 문고리에 걸어 두던 하얀색 팬티를 꼬박 삼 일 동안 숨겨 둔 후 조이는 권명에게 눈빛을 보냈다.

‘자! 봐라! 난 해결했다!’

권명은 조이의 유치한 표현 방법을 피식하고 비웃더니 아침마다 기나긴 자위를 하던 습성을 딱 끊어 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잘된 일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

권명의 자지가 수시로 발기해 있었다. 놈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듯 무심했으나, 조이는 그렇지 못했다. 자꾸 발기해 있는 그 물건에 시선이 꽂혔다. 대체 왜 저렇게 수시로 발기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권명 앞에서 알짱거리는 이라면 내가 유일한데, 혹시 나를……?’

“뭘 변태처럼 쳐다봐! 눈알 안 치워?”

조이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나 때문인 건 아닌 모양이었다.

* * *

합동 훈련이 시작되었다. 가이드와 에스퍼가 동시에 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교관은 랜덤으로 가이드와 에스퍼를 추첨해 임시 페어를 배정했다. 조이는 번호표를 뽑은 후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 중앙에는 훈련을 중계해 줄 커다란 스크린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둥그렇게 의자가 있었다. 조이는 출입구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넌 몇 번이야?”

“난 1번.”

하나둘 모여든 생도들이 서로의 번호를 확인하며 대기실에 착석했다. 조이의 주변만 제외하고. 조이한테 무슨 병균이라도 있는지, 조이의 주변으로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서러웠다.

‘내가 얼마나 깔끔한데…….’

옆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이는 무시하기로 했다. 안 들리는 척 스크린에 집중했다. 고만고만한 실력의 가이드와 에스퍼의 훈련이 계속됐다. 우등생인 조이는 그들이 놓친 부분에 집중하며 스크린을 응시했다.

“권명이다!”

합동 훈련의 백미인 권명과 한솔의 차례였다. 그들은 적군의 장군을 암살하는 시나리오를 받았다. 게이트가 열리자 권명은 빠른 속도로 튀어 나갔다. 뒤이어 한솔 역시 달려 나갔으나, 에스퍼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권명은 홀로 비처럼 공격을 퍼붓는 적군 앞으로 다가갔다. 빠르게 날아오던 포탄이 맞바람을 맞은 듯 그의 앞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조이는 훈련을 중계하는 스크린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비단 조이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권명의 원맨쇼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커다란 스크린 가득 권명의 얼굴이 담겼다. 두려움 따위는 느껴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피어오른 순간, 권명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뻗어 나갔다. 공기를 잡아채듯 꽉 쥔 주먹이 보이지 않는 뭔가를 끌어당겼다.

그 순간 공격을 퍼붓던 적군의 전차가 보이지 않는 줄에 이끌리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향을 잃은 포탄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고, 부들부들 떨리던 포신이 하나둘 땅에 처박혔다.

삐익-

긴급 알람이 울렸다. 이 소리가 들리면 멀쩡한 에스퍼는 곧바로 바닥에 드러누워야 했고, 가이드는 증폭기를 사용해 가이딩을 해야 했다. 실전처럼 에스퍼가 다칠 경우 언제 어디서든 가이딩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기 위해 추가된 설정이었다.

하지만 권명은 알람 소리를 무시한 채 타깃인 장군을 태운 군용차량을 추격했다. 우뚝 솟은 침엽수 구역으로 달아나는 장군을 향해 권명은 거침없이 총알을 발사했다.

그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총구에서 불을 뿜으며 날아간 총알이 우뚝 솟은 나무를 유연하게 피하며 최종 타깃의 목덜미에 꽂혔다. 기가 막힌 기술이었다.

권명은 이런 고난도의 기술을 쓰고도 좀처럼 지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실패를 의심하지 않은 듯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삑!

테스트가 종료되자, 훈련을 중계하던 스크린에는 권명과 한솔의 성적이 띄워졌다. 권명의 이름이 1위에 랭크됐다. 반대로 권명과 페어를 이룬 한솔은 하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조이는 입을 가린 채 미소를 지었다.

‘아휴. 고소해.’

권명도 비호감이지만, 더 비호감이 한솔의 추락이 깨죽을 먹은 듯 고소했다.

개인점수 이후 종합점수 역시 집계됐다. 최종 종합 점수에서 그 둘은 좋지 않은 성적을 받았다. 가이드와 에스퍼의 합이 최악이었다. 초보자인 조이가 보더라도 함께 있어서 얻을 수 있는 시너지란 없어 보였다.

“근데 권명은 이번에도 가이딩을 안 받네?”

“그러게. 가이딩을 거부했다더니, 그 말이 맞나 봐.”

조이는 권명에 대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이 역시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이었다. 가이딩 알람이 떴는데도 권명은 가이딩을 받지 않았다. 가이딩 알람을 무시한 게 비단 오늘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조이.”

그때 조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태혁이 조이를 부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태혁은 조이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안조이. 맞지?”

“어…? 어…….”

“난 3번인데, 넌 몇 번이야?”

조이는 몇 번이냐는 물음에도 물끄러미 태혁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태혁과 조이 사이에는 운명적인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태혁도 3번이라니. 조이는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모조리 보여 주리라 다짐했다.

이번 훈련은 단순한 합동 훈련이 아니었다. 발령을 받기 전 조이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구애의 무대였다.

쓰윽-

게이트가 열리며, 전투 현장을 본뜬 세트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조이와 태혁은 곧바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번 임무는 적군의 보급을 막는 것이었다.

태혁은 적군의 보급품을 불태울 커다란 화력구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조이는 소총과 증폭기를 등에 메고 뒤따라 달렸다. 권명이 타고난 재능이라면 태혁은 후천적 노력으로 재능을 키워 낸 자였다. 태혁은 모든 것을 매뉴얼에 따라 움직였다.

조이의 가이딩이 태혁과 상성이 잘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페어로서 합은 잘 맞는 것 같았다. 백지상태인 조이 역시 교관이 주입한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었다.

삐익-

또다시 가이딩 알람이 들려왔다. 조이는 능숙하게 증폭기를 꺼냈다. 두 개의 선을 뽑아내 태혁의 몸 위에 붙였다. 가장 좋은 위치는 심장 가까이였다. 곧바로 증폭기 위에 손을 올렸다.

“가이딩 시작!”

조이는 실전처럼 정신을 집중했다. 늘 그렇듯 살리고 싶다. 구하고 싶다는 열망을 담았다. 떠들썩한 현장음이 사라지고 오직 태혁과 조이 단둘만이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조이를 감싸던 따뜻한 기운이 조금씩 태혁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요란하게 울리던 사이렌 소리가 그치자 조이는 가이딩 도구를 챙겼다. 고요하던 적막이 벗겨지고 시끄러운 현장음이 다시 귓가를 때렸다. 가이딩이 모두 끝났음에도 태혁은 조이를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뭐 해?”

“어…? 출발…하자.”

태혁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커다란 화력구를 다시 어깨에 짊어진 채 앞장서 달렸다.

* * *

무사히 보급로를 차단하고 복귀했다. 큰 실수 없이 시나리오대로 한 것 같았다. 태혁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조이는 지쳐 물병을 딸 힘도 없었다.

“하아…, 지친다.”

“고생했다. 물.”

조이의 지친 표정을 알아차린 태혁이 물을 건넸다. 조이는 문뜩 태혁도 조이가 7구역 출신임을 아는지 궁금했다. 가이드 반뿐만 아니라 에스퍼 반까지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으니 어쩌면 태혁 역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친절을 베풀어 준 태혁에게 감사했다. 잘은 모르지만 태혁은 조이의 출신에 따라 선택적으로 친절을 베풀지 않을 것 같았다.

“성적 나온다.”

태혁은 턱짓으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이번 훈련에서 조이는 꽤 고득점을 받았다. 이렇게 된다면 목표하던 대로 2차 종합 평가에서 3위에 오를지도 모른다. 아직 남은 테스트가 하나 더 있지만.

지금까지의 훈련은 어찌 되었든 세트장에서 이루어진 훈련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진짜처럼 보였지만 진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은 테스트는 진짜였다. 동제국 영해에 있는 인공 섬에서 벌어지는 생존 테스트가 남아 있었다. 그 테스트는 말 그대로 생존력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보급품이 끊기고, 극한의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강인한 정신력으로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를 보겠다는 것이었다.

조이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테스트였다. 2차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수록 보직을 받을 확률이 올라가고, 또한 좋은 성적이 있어야 태혁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합동 훈련이 끝나고, 조이는 태혁에게 가이드들이 그렇게 구애를 하는데 왜 거절한 것인지 물었다.

‘사람들은 연애 감정으로 가이드를 선택하는 것 같은데. 나한테는 위험한 생각 같아. 전쟁터에서는 무엇보다도 냉철한 판단이 중요한데, 그런 판단이 흐려질지도 몰라.’

‘그럼 넌 가이드를 선택하는 기준이 뭔데?’

‘실력. 날 살려 줄 실력.’

태혁은 야박할 정도로 공과 사를 구별했다. 조이는 그날의 입맞춤이 태혁이 페어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태혁은 홀린 듯 조이에게 입을 맞췄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태혁에게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었다. 오직 실력. 아쉽지만 키를 쥐고 있는 자는 태혁이었다. 조이는 오직 실력으로 당당히 태혁의 옆자리를 꿰차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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