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서로 다른 운명
백현은 슬픔에 잠겼다.
동생을 홀로 보냈다는 후회, 그리고 만철이 형을 잃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둘 중 하나는 해결된 것 같다.
“아, 백현아. 나 살아 있는 거냐?”
“어? 네. 어떻게 되신 거예요?”
“나도 모르지. 나 왜 살아 있냐? 영혼의 돌? 생명의 돌?”
“아니에요. 이번에는 다시 되살린 거 아니에요.”
그 해답은 맥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빛의 기둥을 통과하면 어떠한 상처도 회복시켜드려요, 즐거우셨나요?》
맥스의 저런 웃음이 지금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형. 진짜 죽은 줄 알았어요.”
“아, 응.”
그리고 미나에 의해 세뇌되었던 자들도 멀쩡하게 돌아온다.
“야~ 다 죽는 줄 알았다! 대단해! 그 아가씨 대단해! 혼자 거인 제압한 거잖아. 봤어. 봤어! 봤다고!”
미나에 의해 지워진 기억도 빛의 기둥을 통과하자 회복했고, 죽었을 줄 알았던 동료도 빛의 기둥을 통과하자 멀쩡하게 살아남은 것.
“죽은 사람도 살려? 맥스, 이렇게도 되는 거야?”
아람의 질문에 맥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네! 목 뒤 센서가 온전하고 주변 세포만 살아있다면 얼마든지 재생시킬 수 있습니다. 아~ 물론 목 뒤에 연결된 척수가 파괴되면 그 즉시 끝이겠지만요.》
모르고 있던 중요한 사실.
하지만 지금은 불필요한 정보가 되어버렸다.
미나는 대체 뭐하고 있을까?
미나는 과연 제로시우스라는 모선에서 ‘마더’라는 존재와 만났을까? 백현은 그것이 궁금해졌다.
* * *
미나가 도착한 곳은 모선 제로시우스의 내부였다.
모선 제로시우스는 다른 모선과는 전혀 달랐다.
‘도착했어. 여기가 최종 목적지야.’
첨단 기계와 장비로 가득한 이전의 우주선과는 달리 이 함선은…….
‘생체모함이었어?’
바닥도, 천장도, 외벽도 모든 게 생명, 유기체로 들어차 있다. 거기에 역한 냄새까지 난다.
생명체가 호흡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불순물들이 모선을 채우고 있었다.
미나는 코를 막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쪽으로 오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미나.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며 우주선을 지탱하는 섬유조직들을 목격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무서워하지 마. 이겨내야 해. 이겨내야 해.’
상상 이상이었다.
괴물의 내장 안에 들어왔다는 생각도 들었고, 곤충잡이 식물의 내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기이하고도 기괴한 내부공간이었다.
내부의 장기들은 인간이 숨을 쉴 때처럼 부풀었다 꺼지며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꿀렁꿀렁.
-불렁불렁.
-벌컹벌컹.
각기 다른 소리가 합쳐져서 생기는 불협화음이 귀를 괴롭힌다. 미나는 그래도 꾸역꾸역 다리를 앞으로 옮겼다.
《그래. 이쪽이야. 앞에서 좌측, 너를 기준으로 좌측으로 오면 돼.》
계속해서 들려오는 이질적인 목소리에 미나가 이끌리듯 발을 움직였다.
《그래. 여기야. 여기!》
쿵쾅쿵쾅.
쿵쾅쿵쾅.
미나는 발걸음을 멈춘 채,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기이한 목소리의 정체는 작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천 개까지 연결된 장기 중 하나였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심장이었다.
인간 크기만 한 심장.
그 앞에서 미나는 기가 찬 듯 주저앉았다.
폐부를 찌르는 피 냄새와 역겨운 조직들.
그것들을 조종하는 자는, 장기밖에 없는 이름 모를 생명체다.
“당신은 누구죠?”
미나의 질문에 심장 안에서 여성의 존재가 분리되어 밖으로 돌출되었다.
미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여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최초의 세포기반 AI. 이름은 ‘뉴런’이야.》
“세포기반 AI?”
《그래. 난 나의 기억을 신경세포 집합체인 엔그램에 저장시키지. 그리고 그 저장된 기억을 가지고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왔어.》
그녀의 대답에 미나가 질문을 쏟아냈다.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목적이 도대체 뭐죠? 이런 짓을 꾸민 것은 뉴런 당신이 맞나요?”
미나의 대답에 뉴런이 낄낄대며 웃었다.
《응. 맞아. 나야.》
여성의 모습을 한 뉴런의 대답에 미나가 기가 찬 듯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거죠? 당신은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면서요! 방금 전 그렇게 말했잖아요!”
미나의 호소에 뉴런이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분명 인간들을 위해 노력했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난 인간들이 모두 죽기를 원해. 인간들이 모두 내 발밑에 있기를 바라지. 안타깝게도 난 인간들과 공존할 수 없어.》
“공존은 우리도 바라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이 하고 있는 행동 자체는 용서 받을 수 없어요. 진작에 치료제를 만들 수 있었던 거죠? 그것만 대답해 봐요.”
미나와 뉴런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승리자는 역시 뉴런이었다.
뒤쪽에서 갑자기 촉수가 튀어나와 미나의 척추를 노린다.
미나는 간신히 반응하며 몸을 피했다.
하지만 피해낸 촉수 뒤로 수백 개의 촉수가 뒤를 이어 덤벼왔다.
그리고 미나의 몸을 여기저기 뚫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아파, 아프다고!”
《만들어진 존재 주제에!》
뉴런은 방긋 웃으며 촉수에 박힌 미나의 몸을 내동댕이 쳐버렸다.
미나는 날개 능력을 써서 자신의 몸을 감싸 충격을 최소화했다.
하지만 충격을 전부 흡수할 수는 없었는지, 입 밖으로 피가 섞인 침을 뱉고 말았다.
《강미나라는 존재가 과연 너였을까? 아니면 얘였을까?》
뉴런은 순식간에 미나와 똑같이 생긴 존재를 옆에 만들어냈다.
미나와 똑같은 슈트를 입고, 똑같은 얼굴을 한 존재가 미나를 향해 소리쳤다.
“가짜 주제에!”
미나의 뺨을 때리는 만들어진 미나.
강미나는 황당한 얼굴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형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러자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더니 혈흔이 되어 사라지는 또 다른 미나의 모습.
뉴런은 이를 보고 방긋 웃으며 이번에는 다른 존재를 만들어낸다.
이번의 다른 존재는 백현이었다.
《미나야, 넌 못된 아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죽어야 해.》
“나한텐 이런 거 안 통해. 안 통한다고!”
강백현의 모습도 미나의 발차기 한 번으로 혈흔이 되더니 철퍼덕 바닥에 떨어진다.
바닥의 세포들이 떨어진 혈액을 흡수해서 다시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나가 아는 인물들이 계속해서 주위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 모든 인물들은 미나의 마인드 리딩 능력에 복종하고 다시 혈흔이 되어 바닥으로 사라졌다.
미나는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그만해요! 난 당신하고 싸우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과거로 돌아갈 방법이나 말해요.”
그러나 뉴런은 그녀의 말을 비웃었다.
《과거? 어떻게 돌아갈 건데?》
“그건 당신이 말해줘야죠. 당신이 말한 거잖아요. 당신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모든 사람한테 말했던 거잖아요!”
《타임머신 같은 게 있을 거라 생각하나 본데.》
“아닌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 너희들은 전부 만들어진 존재인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어졌다고. 아직도 이해 못해? 하긴, 제대로 된 인간도 아닌 너희들이 무슨 이해를 하겠어?》
뉴런은 피로 된 액체로 미나의 목을 감싸 안더니 다시 한 번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영혼의 돌? 생명의 돌? 웃기지 말라고 해. 난 너희들을 처음부터 다 만들어낼 수 있었어. 난 처음부터 너희들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었고, 처음부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게 만들 수 있었지.》
뉴런의 말에 미나는 머리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우리를 만들었다고요? 내 기억 모두 당신이 만들었다고요? 내 소중한 추억을 당신이 만들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만물을 창조하고 너희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면 어떻게 할 건데?》
미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부정할래요. 그리고 당신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당신의 생각을 지우겠어요.”
《마음대로 해 봐. 어차피 너희들은 죽게 되어 있어. 지구는 내 거니까.》
미나는 뉴런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굴렸다.
자신의 전투능력은 별 볼 일 없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뉴런에겐 뚜렷한 약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심장이다.
심장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장기이다.
그건 심장을 본체로 하는 듯한 뉴런에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미나가 날카로운 발차기를 날려 인간만 한 크기의 심장을 뚫었다.
그런데 뉴런은 어이가 없다는 듯 비웃고 말았다.
《킥킥킥킥, 킥킥킥킥!》
“뭐야! 도대체 뭔데?”
《설마 이게 약점이라고 생각한 거야? 심장을 없애면 나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였어?》
뉴런이 미친 듯이 웃어댔다.
이어서 그녀가 한 행동은 미나를 핏물로 가두는 것이었다.
착착착착!
심장이 위치한 공간의 내벽이 내려오며 밀실을 만들어냈고.
촤르르르륵!
심장을 가둔 밀실의 바닥이 핏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클론! 여기까지 온 건 참 대단해. 하지만 이건 알아둬야지. 넌 절대 날 이길 수 없다는 것.》
바닥의 핏물이 빠르게 응고되며 젤리 같은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미나는 허우적거리며 밀실에서 탈출하려 해봤지만 젤리 같은 핏물에 갇혀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다.
날개를 꺼내봐도 끈적이는 핏물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미친 듯이 다리를 움직이며 타격을 가해도 녀석이 입는 데미지는 거의 없는 듯 했다.
《설마 이렇게 쉽게 속아 넘어가리라곤 생각도 못했어. 하긴, 만들어진 존재니까. 나를 의심하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이렇게 설계했으니까. 너는 나를 몰랐을 테지만, 어딘가 이상하지 않았어? 모순이 있었잖아.》
그런데 그 순간, 뉴런의 태도가 급변했다.
《뭐지? 너 뭐야! 도대체 정체가 뭐야!》
미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건만, 뉴런이 당황하며 밀실의 내벽을 해제해버렸다. 핏물이 틈 사이로 빠져나가며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가 되어 비명 소리를 냈다.
심장 고동에 맞추어 벌렁거리던 외벽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하나 둘 말라붙기 시작했고, 그때 미나의 몸에서 무엇인가가 분리되었다.
미나의 몸에서 빠져나온 것은 놀랍게도 아는 인물이었다.
“율리만 박사님?”
율리만의 등장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뉴런이 촉수를 뻗어 공격했지만, 율리만은 아메바처럼 두 개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합쳐진 후 대화를 이어갔다.
《난 처음부터 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 그런데 마지막까지 조마조마했지. 들키면 어쩌나 하고 말이야. 방주 안이라면 몰라도, 바깥에서라면 내 존재를 들키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거든.》
“네?”
《영혼의 돌이나 생명의 돌로 다시 한 번 살아난 사람들은 다 내 아메바 세포와 결합되어 있어. 애초에 부활의 원리가 그러하니까. 그리고 그 세포에는 균이나 선충, 곰팡이, 바이러스 그리고 잡초를 죽이는 살균제 성분을 결합해 놓았지.》
율리만은 형체를 잃고 가느다랗게 부서져가는 뉴런을 보며 마지막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뉴런은 어쩌면 나로부터 태어난 존재……. 내가 아메바 형태가 되어 차원의 이동이 가능했듯, 미나 당신도 나처럼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동안 이용해서 미안해요.》
“율리만 박사님.”
율리만 또한 뉴런처럼 말라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에요. 세포벽에 농약이나 다름없는 성분을 함유하고 살아가는 건 나한테는 끔찍한 고통이었어요. 하지만 결국 난 뉴런이란 존재를 지울 수 있었고, 이건 인간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큰 계기가 되겠죠.》
“박사님…….”
《그러니까 뉴런을 죽이고, 평화를 찾아줘요. 그리고 과거는 잊어줘요. 수백 년간의 끔찍했던 삶을 당신들이 똑같이 겪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미나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율리만은 완전히 메말라 이윽고 석상처럼 변해버렸다.
하지만 뉴런은 아직 죽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바둥바둥 애를 써본다.
잔류물질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격벽을 치고, 공기 중에 퍼진 살균성분을 제거하기 위해 혈액으로 안개를 뿌린다.
하지만 그건 결국 자살행위.
이제까지 우주선 안쪽을 뒤덮고 있던 유기체가 메마른 분말이 되어 떨어지고, 그 자리에 우주선 본연의 내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율리만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예롭게 산화했다.
그리고 그건 뉴런의 제거를 뜻했다.
그때 어디선가 동료들이 달려왔다.
백현과 만철, 그리고 아람이었다.
“미나야! 괜찮아? 괜찮은 거야?”
“아……. 어떻게 왔어?”
“말했잖아. 모든 거인이 제거되면 우주선은 모선으로 움직인다고. 모든 우주선이 여기 모선으로 모이고 있어.”
백현은 사라져가는 먼지 사이로 꿈틀거리는 존재를 느꼈다.
하지만 그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었다.
“이긴 거니? 다 끝난 거야?”
“응. 이제 모든 게 끝이야. ……근데, 오빠.”
“어?”
“만약 오빠가 7성급 거인을 죽였으면 오빠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뭐야! 그런 걸 왜 물어!”
미나는 율리만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율리만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뉴런의 제거였다.
뉴런을 제거하면 거인을 치료할 수 있고, 거인을 치료하면 인간이 다시 번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죽지 않았던 백현이 이 자리에 왔다면, 과연 그는 뉴런을 죽일 수 있었을까?
뉴런의 패배 원인은 단 하나였다.
자만심.
7성급을 달성한 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던 결심.
그게 그녀를 패배로 몰아넣은 것이다.
미나는 눈물을 흘리며 동료들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거인을 죽여서 참 다행이라고.
자칫 다른 사람이 왔더라면 율리만의 반격은 없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