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죽음
6성 거인을 제압하자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7성급 거인이 자신의 전매특허인 번개 능력을 봉인하고 몸 주변에 보호막을 둘러친 탓이다.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 어떠한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
두 개가 격돌했을 때의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창이 이길 수도 있고, 방패가 이길 수도 있다.
아니면 무승부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방패와 방패가 부딪힌다면 100이면 100, 무승부가 날 것이다.
지금의 상황이 그랬다.
백현은 7성급 거인이 활성화시킨 방벽을 어찌할지 몰랐다.
아람이의 염력도, 미나의 마인드 리딩도, 심지어 김만철의 강화 능력도 지금은 하등 쓸모가 없다.
“이대로 시간 끄는 거 아니야?”
거인이 방어태세에 돌입하자 불안해하기 시작하는 일행.
그렇다고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대처가 불가능하다.
차라리 몸을 단단하게 하거나 형태가 변하는 것이라면 타격이 들어갈 때까지 때려보기라도 하겠는데, 거인이 만들어낸 보호막 자체가 백현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사이즈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5분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대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방어를 하는 거인. 이쪽에는 그것을 뚫을 창이 없는 상태.
백현이 보호막을 날카로운 드릴 형태로 바꾸어 일점 돌파를 시도해보았지만 무의미했다.
백현의 보호막으로는 거인이 만들어낸 방벽을 뚫을 수 없다.
그게 이치.
“아가씨! 끝났어?”
“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야?”
그때 잭슨 일행이 도착했다.
마이콜을 잃고 시름에 빠져 있던 그들이었지만, 원흉인 6성급 거인이 제거되자 다시 희망을 찾고 전장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끝이었다.
7성급 거인은 가드를 굳힐 뿐, 인간과 전투해 줄 마음이 없다.
“끝났네! 오오오! 살았네! 살았어. 300포인트 미만인 사람 없지? 다들 이상 없지?”
“진짜 끝난 겁니까?”
제한시간은 30분. 30분이 지나면 빛의 기둥이 열리고 우주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환호성을 지르는 잭슨 일행과 달리 백현 일행은 우울하기만 하다.
“저 새끼들 도대체 뭐야! 하는 것도 없이 쳐 웃기만 하고!”
평소 무덤덤한 김만철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형, 저쪽엔 관심 끄고 거인 공략할 방법이나 찾아봐요. 이렇게 시간 끌면 미나 혼자 6성급 모함으로 분류될 거예요. 이산가족 되게 생겼다구요!”
백현은 6성급 거인을 자신이 마무리할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라면 미나와 영영 헤어질지 모른다.
“백현아, 다시 한번 땅굴 파볼까?”
“그 방법은 이미 시도해봤잖아.”
거인의 방벽을 뚫지 못한다면 땅굴을 통해 방벽 안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하지만 백현과 아람이 능력을 동원해 땅굴을 파보았지만, 지면이 단단해서 30분이라는 시간 내에 거인에게 접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미나의 표정이 이상했다.
“미나야, 방법이 떠오른 거지? 무언가 방법이 생긴 거지! 어?”
미나는 백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왜 머뭇거리는데! 이야기해 봐.”
“오빠가 옛날에 물었지? 사람을 죽일 수 있냐고. 아니,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미나의 물음에 백현이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대답은 너도 알잖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을 치를 경우가 있다.
그 희생이 지금까지의 결과이기도 했다.
“알았어. 후회 안 할게. 오빠는 끝까지 내 편인 거지?”
“그래. 처음부터! 세상이 두 쪽 나도 난 네 편이야.”
백현의 말에 미나가 마인드 리딩 능력을 가동했다.
그 어떤 때보다도 강력하게 미나의 능력이 발동했다.
마이콜을 잃고 11인에서 10인이 된 잭슨 일행.
그들 10인의 전사가 강한 암시를 받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우라는 암시. 암시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기억조차 잃고 움직였다.
병사들이 난동을 피우며 달려들었다.
그들은 미나의 지시대로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거인에게 타격을 가한 것은 자폭능력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이 능력을 소유했던 5성급 능력자 자니는 이제까지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자폭능력으로 거인의 방벽에 돌진했다.
커다란 폭발음에 놀란 거인의 시선이 폭발한 흔적으로 향했다.
거인의 보호막은 멀쩡한 상태 그대로였다.
하지만 미나가 만들어낸 10명의 병사들은 끊임없이 능력을 난사하며 거인의 시선을 끌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얼음으로 방벽을 얼려버리거나, 단단한 바위를 연성해 방벽 자체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실제 작전은…….
미나가 노린 것은 처음의 폭발을 통해 만들어낸 지하통로였다.
폭발로 생긴 커다란 웅덩이와 흙먼지가 거인의 시야를 가로막아 순간의 틈이 생겼다.
미나는 의식을 잃은 10인의 병사들을 조종하며 만철에게 말했다.
“빨리 방벽 안으로 들어가요!”
“아, 응.”
한 사람이 죽었다. 미나의 능력으로 비롯된 파괴였다.
김만철은 처음으로 미나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미나의 능력이 자신에게 향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미나의 말 한마디면 자신의 목숨도 저렇게 될 수 있다.
미나뿐만 아니라 김아람도 마찬가지다.
기억을 조작하거나 거짓기억을 집어넣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미나의 다른 면모.
미나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백현은 다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로 미나에게 말했다.
“내가 시킨 거야. 강미나! 울지 마! 넌 잘못한 거 없어.”
“오빠, 미안해. 나,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진짜 마지막까지 이것만은 안 하려고 했는데!”
“알아. 무서웠잖아. 혼자 떨어질까 봐 두려웠던 거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맡겨. 제로인가 제로시우스인가 하는 모함에 가서 내가 다 해결할 테니까.”
강백현이 전신을 날리며 방벽 안으로 파고들었다.
거인은 안에서 날뛰는 김만철과 김아람 때문에 방벽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투명한 방벽은 보호막을 응용한 강력한 능력이었지만, 내부에서의 공격은 대처할 방법이 없다.
“걱정하지 마요! 방벽을 회수하지 않는 한 거인은 번개 능력을 쓸 수 없어요.”
좁은 범위에 가둬놓고 번개 능력을 쓰면 자신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즉, 자살행위라는 것.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7성급 거인의 손에서 번개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차르르르륵!
순식간에 번개가 주변에 퍼졌다. 백현은 예상이 빗나간 것을 깨닫고 주변에 보호막을 펼쳤다.
일단 자신의 몸에 씌우고, 만철과 아람이를 찾아 고개를 돌리는데, 이미 상황은 종료된 상태였다.
김만철의 온몸에서 그을음이 피어오른다.
“아저씨!”
“아-람아.”
“뭐 한 거예요!”
“살아-남아. 도망쳐.”
자신을 위해 몸을 날려 번개를 막아준 김만철 덕분에, 아람은 얕은 상처를 입은 것 외에는 무사할 수 있었다.
결국 김만철은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김만철은 이 거인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별 7개짜리 7성급 거인, 무려 10등급으로 신장만 100m를 넘는 거인이다.
그래서 지체 없이 몸을 날린 것.
“바보같이 지금 뭐한 거냐고!”
김아람은 자신의 주변이 거인의 번개로 쑥대밭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김만철이 몸으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자신 또한 그렇게 되었을 터.
하지만, 대신 만철은 이미 생명을 소진하고 말았다.
타버린 피부 속으로 흰색 뼈가 드러나 있고, 다부진 근육은 이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제 막 보호막 안으로 진입한 미나가 주저앉아 눈물을 터트렸다. 김아람은 그걸 보고서야 김만철의 죽음을 깨달았고 이내 분노에 사로잡혔다.
죽음과 삶 앞에서 초연해지겠다고 맹세했던 아람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몸을 불사르겠다는 의지가 피어올랐다.
엄청난 체중을 지탱하고 있던 거인의 다리가 흔들거렸다.
100m 신장의 거인은 균형을 지탱하고자 버텨보지만, 폭주한 아람이의 염력은 이러한 거인의 힘을 상회했다.
엄청난 체중의 거인이 쓰러지자 거대한 먼지폭풍이 일어났다.
백현은 이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보호막으로 거인의 급소를 노렸다.
목, 목만 날리면 거인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한다.
그런데 거인의 목은 생각보다 훨씬 두툼했다.
“안 잘려! 왜 안 잘리냐고!”
백현은 자신의 능력으로 거인에게 생채기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 결과는 동료의 죽음이었다.
백현을 인식한 거인이 손바닥으로 정확하게 타겟을 노렸다.
백현은 보호막을 펼친 채 막아보았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갈라지는 보호막 안으로 다시 보호막을 펼치고, 또 다시 갈라지는 보호막 안에서 또 하나의 보호막을, 그 안에서 또 보호막을 겹쳐 까는 백현.
그러나 부서지는 보호막 파편이 백현의 얼굴을 가르고, 몸을 찌르고, 폐부를 찌른다.
강백현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죽음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거인의 공격이 갑자기 멈추고 말았다.
거인의 커다란 손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상황을 압도했던 거인 자체가 존재를 감추고 만 것이다.
백현은 미니맵을 통해 거인이 정말로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거인.
혹시 거인에게 승리한 것일까?
그렇다면 MVP는?
놀랍게도 미나가 차지하게 되었다.
강미나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죽기 직전인 아람과 김만철을 질질 끌고 빛의 기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폭주한 아람이를 멈춘 것은 미나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거인을 죽인 것도 미나였다.
미나 혼자 그 거인을 어떻게 죽였을까?
상상이 가질 않았다.
백현은 간신히 일어나 거인이 있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거인 대신 전라의 남자가 평안한 얼굴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그 얼굴만은 방금 전 7등급 거인과 유사했다.
백현의 귀에 미나의 말이 들려왔다.
《오빠의 혈액으로 만든 치료제를 사용해서 거인의 능력을 봉인했어. 치료제로 다시 작아지던 중인 거인은 나 혼자서도 제압할 수 있었어.》
‘미나야.’
《내가 모선으로 갈게. 오빠는 남아서 치료제를 만들어. 그게 여기 사람들이 앞으로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야.》
‘야! 강미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강백현의 생각을 읽고 있으면서도 미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김아람과 목숨을 잃은 김만철을 빛의 기둥, 즉 원래 있던 우주선으로 돌려보내는 것.
김만철과 김아람을 빛의 기둥으로 밀어넣은 미나가 손을 흔들며 백현에게 마음을 전했다.
《오빠, 그동안 고마웠어.》
작별의 인사처럼 들린 탓에 백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자신과 미나는 똑같이 빛의 기둥을 통과해도 전송되는 위치가 달라진다.
미나는 모선 제로시우스로 가게 될 것이고, 백현은 기존의 우주선으로 이동할 것이다.
이제 최초로 7성을 달성한 그녀의 어깨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백현은 미나가 빛의 기둥을 통과하는 장면을 허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빛의 기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