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cm헌터-185화 (185/200)

185화. 라스트 페이즈

아직도 방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쉼 없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생존자인지 클론인지 구분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앞에 뜬 메시지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또각또각.

듣기 싫은 기계음.

그 기계음은 지구로 돌아가야 할 타임 리미트를 뜻했다.

거인들을 해치우는 게 라스트 페이즈.

어떻게 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다.

방주를 기준으로 좌측에는 슈트 자판기가, 우측에는 능력을 배울 수 있는 비법전서 자판기가 놓여 있다.

강백현은 무전기를 통해 동료들에게 말했다.

《아람아, 부모님하고 동생 슈트부터 먼저 챙겨드리고, 남은 포인트 있으면 네 능력에 투자해.》

백현은 아람이의 반응을 확인한 후 김만철도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만철이 형, 형도 가족부터 챙기세요. 모두를 챙길 순 없어요.》

《그래. 알았다. 윤수랑 선희 씨도 내가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마.》

《네. 그럼요! 전 걱정 안 해요.》

《그럼 됐고.》

이제 남은 것은 미나.

미나의 앞에는 김건우와 한태석이 기다리고 있다.

“미나야. 이게 어떻게 된 거니?”

“현재 방주 바깥에 나오신 거고, 지금 위치는 우주선인 것 같아요.”

“뭐? 우주선?”

“네. 아마도 거인병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으로 보이고요, 훗날 인간들의 반격을 대비해서 AI프로그램인 찰스가 지키고 있던 장소인 것 같아요.”

“찰스?”

“네. 저기 천장에 있는 홀로그램이요.”

찰스는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읊조리고 있었다.

곧 전투가 이어질 거고, 거기에서 승리해야 할 거라는 이야기.

그리고 해당지역으로 이동하는 수단은 당연하게도 빛의 기둥이다.

조그마한 빛의 기둥 수십 개가 우주선 안에 생성되어 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제한시간까지 여기 남아계시면 죽습니다. 여러분 목 뒤에 센서가 부착되어 있어요. 그걸로 여러분이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고, 저도 여러분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겁니다. 얼른 이동하세요!》

예전과 달리 찰스의 말이 협박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그가 적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페이즈 1, 페이즈 2, 페이즈 3를 거쳐 라스트 페이즈까지 이 모든 과정이 현재를 위한 과제였다는 것을 알았기에 백현과 미나는 아무 말 없이 전투 준비태세를 갖췄다.

포인트 중 일부를 사용해 김건우에게 슈트 하나를 선물하는 미나.

“건우 오빠, 무릎 강화 파츠예요. 생존률과 공격력을 올려줄 거예요.”

“그러지 않아도 돼. 난 이미 한 번 죽었기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해.”

“알아요. 알아도 내가 미안해서 그래요.”

그런 미나를 보며 눈을 치켜 올리는 강백현.

오빠의 촉이 제대로 발동했다.

“누구?”

“아르케에 있을 때 거주지에서 같이 생활했어. 내 목숨을 몇 번이고 살려준 사람이야.”

“아~ 그러세요? 미나 오빠 강백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저씨.”

“아, 네. 그래요. 백현 씨, 잘 부탁드립니다.”

강백현의 눈빛에서 미묘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여동생을 음흉한 남자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본능.

하지만 상대방은 그저 웃음과 겸손으로 상대할 뿐이어서, 백현의 방어본능이 갈 길을 잃고 표류하고 만다.

“미나야. 네가 떠난 이후 많은 일이 있었어.”

“네. 태석 오빠, 알아요. 오빠 기억 스캔했어요.”

“아~ 그래?”

“거인들 중 일부는 이제 방주 바깥의 상황을 알게 된 거죠? 그들도 과거엔 방주 바깥에 살았다는 것과, 그들의 조상은 결국 인간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 거죠?”

“그래. 거기에다 자신들이 이성을 되찾은 계기가 율리만에 의해서라는 것도 알았고, 율리만이 왜 각 구체들을 이용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모두 풀렸지. 다만, 거인 인구가 28만 정도 되다 보니까 혼란스러울 정세 때문에 모두에게 그 정보를 공개할 순 없었다나 봐.”

한태석의 말에 강미나가 말했다.

“괜찮아요. 거인들의 도움은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들이 바깥세상으로 나오면 혼란만 더욱 커질 뿐이에요. 이로서 율리만의 계획은 명확해졌네요. 결국 거인도 인간이고, 인간도 거인일 뿐인데 이런 세상을 만들어낸 것을 평생 후회하며 살았겠죠.”

“그래. 지금도 후회할 거야. 또 다른 과거에서 인류를 끌고 와서 전쟁을 치루는 거잖아.”

이해력이 빠른 한태석은 이미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거인과 대화할 수 있다는 그의 장기가 여기서 드러났다.

남은 시간 15분, 장비를 준비하고 떠나야 할 시간.

홀로그램 찰스가 일행들을 자꾸 재촉했다.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여러분께 제공된 초보자용 장비는 방어에 크게 도움이 안 됩니다. 그 초보자용 장비는 여러분 목 뒤에 심어둔 나노입자로 만든 것이긴 한데, 외관상만 그럴듯하지 아무런 보호 역할을 못합니다. 얼른 포인트 사용하셔서 슈트 구입해주세요. 슈트를 입어야 신체능력도 향상되고 방어력도 증가합니다.》

미나는 모든 채비를 갖춘 뒤 오빠에게 물었다.

“자신 있지?”

“응. 거인들 상대는 우리가 제일 많이 해 봤잖아. 그런데 미나야. 나 한 사람만 더 찾고.”

“누구?”

“최복자 할머니.”

“아-.”

최복자 할머니가 뇌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병마와 사투를 벌이면서도 엑스트라 페이즈에서 마지막까지 백현과 미나를 위기로 몰아갔던, 예지능력이 있는 할머니였다.

때마침 강백현은 방주에서 나오는 할머니를 발견한 참이었다.

“미니맵에 포착됐어. 5분이면 다녀올 거야.”

“응.”

강백현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 최복자 할머니를 찾았다.

6개월의 삶.

그녀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피를 토하고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헤헤. 헤헤헷.”

최복자는 피를 토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할머니! 윤수한테 데려갈게요. 정신 차리세요. 할머니! 할머니!”

그런데 최복자는 죽음 직전의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할머니! 할머니!”

“괜찮아. 이게 내 마지막 모습이었어. 어떻게 해도 내 마지막 모습은 항상 이거였지.”

최복자는 결국 세상에 나온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운명을 달리했다.

야속하게도 최복자의 죽음 직후 방주에서 나오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최복자 할머니의 남편인 박일동 할아버지였다.

“어이쿠! 할멈! 할멈! 청년! 우리 할멈 왜 이래? 어? 갑자기 피를 왜 토하는 거야?!”

박일동 할아버지는 페이즈 1에서 사망했기에 강백현을 기억하지 못한다.

강백현은 당황한 채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할멈! 눈을 떠! 눈을 뜨라니까?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어? 할멈! 할멈!”

상황을 멀리서 지켜 본 미나가 강백현에게 생각을 전달한다.

《오빠, 시간 얼마 안 남았어.》

할 수 없이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숨기는 강백현.

박일동 할아버지는 부인의 죽음에 오열하고 있었다.

죽음은 또 그들을 찾아온다.

거인과의 혈투를 앞두고 인간들은 계속해서 방주 바깥으로 소환되고 있었다.

강백현은 찰스를 불렀다.

“찰스! 찰스!”

그러자 또 하나의 찰스가 생성되어 백현의 앞에 등장했다.

《부르셨습니까?》

강백현은 찰스에게 말했다.

“우린 살 수 있는 거지? 또 다 죽는 건 아닌 거지? 이게 끝은 아닌 거지?”

《정답은 이미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찰스의 무덤덤한 말에 강백현이 주먹으로 땅을 찍었다.

분노의 감정이 차올랐다.

죽음의 전조가 다시 어른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나가 그런 백현을 설득하고 있었다.

“오빠, 지금 출발 안 하면 목 뒤의 센서가 폭발할 거야. 그렇게 되면 오빠의 자가치료 능력하고 윤수의 치료 능력으로도 감당이 안 될 거야.”

“알았어.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

강백현이 다시 바닥을 딛고 일어나 가까운 빛의 기둥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미나가 따라 걷는다.

김만철과 김아람은 아직 가족을 설득하는 중.

다른 동료들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빛의 기둥을 통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니까.

죽게 되니까.

이윽고 시간이 0분이 되자, 그들의 머리 위로 숫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잔여포인트였다.

슈트와 장비, 능력을 구입할 수 있는 포인트지만, 지금은 생명을 연장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매순간 숫자가 하나씩 사라진다.

1분의 가치가 포인트 1이다.

김만철이 얼굴이 굳어진 채 형과 아버지, 그리고 형수님을 데리고 빛의 기둥을 통과했다.

“얼른 가요! 포인트가 0인 형하고 아버지, 그리고 형수님은 제한시간이 지나면 바로 죽음을 맞이할 겁니다. 얼른 통과해야 해요!”

“만철아.”

“얼른! 빨리! 머뭇거리지 말고 슈트 입으시고요. 이동하셔요! 아버지! 자폭 능력은 절대 사용하지 마시고요. 형수님도 흡혈 능력 사용 자제해주세요. 그거 위험하니까.”

“아--.”

“그리고 형이 뿜는 화염, 체력 소모 진짜 심하더라. 형 그거 쓰면 금방 지치니까 웬만하면 쓰지 마. 일단 내가 강조할 부분은 여기까지고, 얼른 슈트 갈아입으세요. 그거 입으면 웬만하면 안 죽으니까.”

* * *

김아람도 자신의 아빠 료스케를 보며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파파! 파파! 다이조부? 다이조부데스요네? (아빠! 아빠! 괜찮지? 괜찮은 거죠?)”

“나니 싯데르요? 아니, 갑자기 왜 일본어로 그러는데? 근데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우리 딸하고 집에 가고 있었는데……”

김아람이 아빠의 죽음을 떠올렸다.

운전하던 중 갑자기 작아지던 아빠는 언덕길 내리막길에서 앞으로 튀어나가 유리창에 부딪히고 말았다.

상상하기도 싫은 아빠의 사망 장면.

그 자리에서 김아람은 혼절했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 아빠의 몸은 주유소에서 나눠주는 100원짜리 휴지조각 한 장에 덥혀 있었다.

“아빠, 능력이 뭐야?”

“능력?”

“아빠 옆에 창 있잖아. 아빠 시선에 게임하는 것처럼 옆에 창이 있을 거야. 거기에 능력명이 적혀 있을 거고.”

료스케가 아람이의 말에 방긋 웃었다.

“아빠가 꿈을 꾸나 보네.”

“응? 꿈 아니야! 꿈 아니니까 제대로 대답해!”

김아람은 답답한 말을 하는 아빠 료스케를 설득했다.

그러자 료스케가 방긋 웃는다.

“다운사이징 레벨1.”

“어?”

“다운사이징 레벨1.”

료스케는 신기한 듯 자신의 창을 들여다본다.

자신과 똑같은 홀로그램의 동작을 따라서 배를 두 번 쳐본다.

그러자 료스케의 크기가 3cm로 줄어들었다.

“어라? 아람? 아람짱?! 아람?!”

갑자기 줄어든 신체사이즈에 당황한 료스케.

그런 아빠를 보며 김아람이 차분하게 말했다.

“능력 해제! 해제하면 돼. 홀로그램 보고 똑같이 따라 해서 해제해.”

“응!”

료스케가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그의 능력은 다운사이징, 즉 축소다.

김아람이 쓴웃음을 지으며 율리만이 남아있을 방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율리만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기회는 없다. 율리만은 아직도 방주 안에 있으니까.

김아람의 뒤쪽에는 엄마와 동생이 서로의 손을 붙잡고 기다리고 있다.

아람이가 지시한 대로 슈트로 갈아입은 엄마와 동생.

“아람아! 이거 꼭 입어야 해?”

“응. 입었으면 나 따라와.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엄마! 제한시간 몇 분 남았다고 나와?”

“3분! 근데 이거 아직도 꿈이니? 현실 아니지? 나 왜 이러니?”

“엄마! 꿈 아니야. 동민아, 너도 얼른 슈트 입어. 안 그러면 누나한테 혼난다?!”

아람이는 자신의 머리 위 숫자가 7이나 하락한 것을 보며 가족을 서둘러 빛의 기둥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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