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활주로에서
최태우는 백현의 말에 낙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좋은 생각은 아니야.”
“왜요? 왜 가지 않아야 하는데요?”
말리는 최태우와, 빛의 기둥이야말로 과거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는 강백현.
“빛의 기둥을 통과한 이후 돌아온 사람은 없었어. 단 한 명도 예외는 없었지. 거인도, 사람도, 심지어 어떤 생물이라도 통과한 후에 다시 돌아온 건 없었지. 그걸 우리는 유사 블랙홀이라고 부른단다. 어느 것도 파괴하지 않는 것 같지만, 결국 어느 것도 돌려보내지 않지.”
강백현은 답답했다. 그래서 호소했다.
“그게 아니에요. 빛의 기둥을 통과하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요. 우리는 그 기둥을 통해서 과거에서 미래로 왔어요. 아저씨가 생각하는 블랙홀 같은 게 아니라, 공간과 시간을 이동하는 연결고리라구요.”
“그게 무슨…….”
새로운 해석, 새로운 개념을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한 최태우.
그런데 강백현과 같이 생사를 넘었던 다른 자들은 이미 백현과 같은 의견이다.
뒤에서 큰 소리가 나서 듣고 있었던 아람이가 미나에게 물었다.
“빛의 기둥이 있었으면 진작에 알려줬어야지. 미나야. 왜 말 안했어?”
“저도 몰랐어요.”
“율리안은 알고 있을 거잖아.”
“네. 3개월마다 생긴다면 그렇겠죠? 그런데 방주 밖에 있었던 율리안과는 달리 율리만은 알고 있었을까요? 방주 내부에 있을 때는 외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고 알고 있어요. 아…….”
미나는 자신의 말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주 안, 김건우와 함께 올라갔던 하늘 위.
그곳에서 보았던 방주 내부의 공간에서는 외부를 볼 수 있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어.”
“뭐?”
“율리만은 아마 처음부터 우리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을 거예요. 아~ 이거 제 이론이 다 깨지는데요?”
미나는 수수께끼가 풀렸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인데?”
“저는 처음에는 과거에서 미래로 온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너무나 의구심이 드는 거예요. 과거로 돌아가는 기술, 그리고 미래, 거기에 다차원 우주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아세요? 율리만은 그런 더미(쓰레기) 정보들을 저한테 제공했어요. 일부러 정리된 데이터가 아닌 복잡한 기억들을 저한테 전달한 거란 말이에요.”
“아~ 쉽게 좀 말해주라.”
미나의 말에 김만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미나는 여전히 흥분한 상태로 대화를 이어갔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얻은 정보가 모두 거짓일 수 있다는 거죠. 율리만이 만든 기둥을 통과한 우리가 빛의 기둥을 통과한 것과 같다면? 여기가 또 다른 페이즈라면?”
“잠깐! 잠깐! 이건 아니잖아! 우리가 페이즈 3까지 보내고 나서, 페이즈 4를 포기하고 탈출했어. 탈출한 곳은 방주였잖아. 방주에서 탈출한 곳이 여기고.”
“네! 그렇죠. 그런데 방주가 또 다른 페이즈였다면? 분기 루트로 다른 페이즈였다면?”
미나는 희망 섞인 얼굴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닐 수 있어요! 단순한 게임, 조작, 그럴듯하게 퍼즐을 맞춘 가상게임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게 제 결론이거든요?”
그러나 최태우가 미나의 희망을 박살내버린다.
“그럼 나의 존재는?”
“네?”
“네가 말한 가정에서 난 포함한 거니? 내가 살아온 세월이 다 거짓이란 거야?”
“…….”
미나는 최태우의 말에 반론하지 못했다.
‘율리만은 바깥세상을 모르고 있었던 건가? 아니, 애초에 그 가정 자체가 무의미해. 율리만이란 존재는 내가 맞는 걸까?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리고 백현 또한 미나의 주장에 반론하기 시작했다.
“미나야. 우리가 겪었던 거인들은 진짜였어. 에반, 앨버트 그리고 너랑 친분이 있다던 버키까지. 그들을 부정하진 않겠지?”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곤경에 닥치면 이게 현실이란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게 본능이다.
미나의 생각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그동안 부정하고 있었던 평행우주 이론들을 다시 한 번 처음부터 고민해봐야 했다.
과거와 미래. 시간 여행에 대한 것은 너무나 많은 변수를 만들어낸다.
그로 인해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다수 생겨나고, 그걸 정형화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생겨난다.
하나의 행동에서 생기는 수많은 결과들.
그걸 고민하던 미나에게 백현이 말했다.
“미나야. 고민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일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자고.”
“응.”
“인간들이 살고 있는 제2경비구역, 계룡시로 간다.”
“알았어.”
“다들 쉬시죠! 많이 쉬셔도 좀 더 쉬셔야 합니다. 이제 에너지 부족 때문에 거인 사냥을 해야 할 것 같거든요. 식량도 거의 다 떨어졌고요.”
백현은 제주도에서 받은 감자 꾸러미를 바라보았다.
바싹 마른 감자.
칩 모양으로 소금에 절여진 감자가 일행들에게는 유일한 식량이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고, 한바탕 소동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이 났다.
강백현은 통제실로 돌아와 최태우에게 물었다.
“어때요? 에너지가 부족하진 않을까요?”
“계룡시까지라면 충분할 게야. 처음부터 계룡으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서울 들렀다 오느라고.”
“어쩔 수 없죠. 그땐 정보가 없었으니까요. 제가 아까 자료 찾아보니까 계룡시에는 활주로가 있더라구요. 착륙하는 데는 문제없을 거예요.”
“그래? 레이더에는 아직 잡히지가 않네. 한번 봐줄래? 15분 뒤에 도착할 것 같거든.”
“네! 알겠습니다.”
강백현이 미니맵을 펼쳐 통제 화면에 보였던 활주로 위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활주로 위에 거인들이 깔려 있습니다.”
“몇 마리?”
“8성급 하나에 6성급 셋, 거기에 나머지 다수입니다.”
“근처 다른 활주로는?”
“서산 공군비행장이나, 청주항공 방향으로 틀어야 합니다.”
“너무 멀잖아.”
“그렇죠.”
“포기해야 하나? 다른 곳 비상착륙은 너무 위험한데? 한강에 착륙한 것처럼 넓은 강이라도 있다면……. 아람이의 도움을 받아서 어찌저찌 될 텐데.”
“아니에요. 계룡시에는 한강처럼 넓은 강은 존재하지 않아요. 여기 무조건 활주로에 착륙해야 합니다. 이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5분만 저한테 시간을 주세요.”
“어떻게 할 건데?”
최태우의 말에 강백현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비행중인 방주의 출입문을 여는 강백현.
그러자 기압차로 인한 충격은 없었다.
출입문이 열렸지만 백현의 빈틈없는 보호막이 작동하고 있어서 문제가 없었던 것.
강백현은 기체 밖으로 나가 출입문을 닫고 공중을 활공하기 시작했다.
아래에는 8개체의 거인들이 똑바로 보였다.
강백현에게서 분리되는 4개의 환영.
환영인데도 실체가 있는 녀석들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다.
스스로 만든 보호막 파편으로 긁어내는 것이다.
강백현은 분신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을 전했다.
그러자 분신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들고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동서남북.
네 갈래로 흩어지는 거인들.
피 냄새에 이끌린 거인들이 4명의 분신들을 쫒아갔다.
강백현은 바닥에 착지한 후 상공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비행선이 활주로에 착륙하기 위해 선회하는 중이었다.
‘다행이다. 작전 성공인가? 분신의 피도 냄새는 같으니까 이끌리는 거야.’
그런데 거인의 움직임이 묘했다.
거인의 팔이 늘어나고. 입에서 불을 쏘고.
주먹이 바위처럼 변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거인은 짧은 거리이지만 순간이동까지 한다.
팍! 팍! 팍! 팍!
순간이동 하는 거인이 분신 중 하나를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강백현과 똑같이 생긴 분신 하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살려줘! 으아아아악! 살려줘! 이건 너무하잖아!”
강백현의 분신이 자신과 똑같은 분신을 또 한 번 만들어낸다.
처음 만들어진 분신보다 확연히 운동신경이 떨어진다.
거인의 주먹에 순식간에 보호막이 찌그러진다.
분신의 분신들은 태어나자마자 순간이동하는 거인에게 목숨을 잃어버린다.
다른 분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불에 타 죽고, 거인의 늘어난 팔에 붙잡힌 채 손아귀에서 터져 죽고. 바위처럼 단단해진 주먹에 찍혀 죽기도 한다.
백현이 만들어낸 4명의 분신들이 순식간에 전멸하고 말았다.
강백현은 착륙 중인 비행선을 바라보았다.
트랜스폼 기능으로 변신하는 비행선.
전투능력은 제로.
활주로에 내리기 위해 바퀴를 뺀 후, 미끄러지듯 끼이익 소리와 함께 속도를 늦추었다.
뒤에 낙하산이 펴지는 것은 덤이다.
강백현은 사방을 보며 기도를 올렸다.
‘제발! 제발! 제발 오지 마! 오지 마!’
동서남북 사방으로 유도된 거인.
백현은 거인들이 활주로로 돌아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방주는 무사히 착륙을 마쳤지만 주위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강백현이 소리를 질렀다.
“빨리 위장! 투명하게 만드세요! 투명하게!”
가만히 멈추고 있을 때는 위장모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주.
에너지가 소모되지만 지금은 당장이라도 해당 기능을 가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사람이 내릴 수 있으니까.
다행히 최태우는 백현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방주의 외형을 주변과 동기화시켰다.
마치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듯 모습을 감추는 방주.
그러나 먼지가 문제다.
자욱한 먼지가 깔리자, 백현 또한 자신의 몸을 활주로 옆 갈대밭에 숨겼다.
콩닥콩닥.
세차게 가슴이 뛰었다.
백현의 걱정대로 사방으로 갈라졌던 거인들 중 일부가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킁킁. 킁킁.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고, 백현의 미니맵에는 거인 중 둘이 접근하는 것이 보인다.
‘젠장, 좀 더 멀리 끌어냈어야 하는 건데!’
미니맵으로 거인이 향하는 방향에 방주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마 방주 위치가 들킨 거야?’
분명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미묘했다. 거인이 접근하는 방향이 방주에서 조금 비틀어져 있었다.
백현은 미니맵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거인이 향하는 곳, 직선상에 저수지가 보인다.
‘물을 먹는 건가?’
생각해 보니 거인의 메커니즘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었는데 그걸 놓친 것.
물은 마시는지, 활동 에너지는 어떤 방식으로 얻게 되는지 그러한 것들.
킁킁, 킁킁.
비산된 먼지 사이로 거인의 거대한 그림자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백현은 안심했다.
갈대밭 안에 있으면 자신이 걸릴 일은 없을 터.
거인은 이제 저수지 방향으로 이동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방주를 완전히 비껴가고 있으니까.
백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가정해보았던 사실 중 하나였다.
거인은 생각보다 멍청하고 단순하다.
그래서 활주로에 착륙 후 위장을 했는데도 분간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닭의 IQ와 비교해 봐도 거인이 높다고 단정할 수 없을 정도.
킁킁. 킁킁.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거인.
‘그래. 빨리 지나가! 넌 8등급이니까 그냥 보내줄게. 내가 봐준 거야. 알지? 가라니까!’
그런데 거인의 킁킁 거리는 소리가 백현의 옆에서 딱 멈춘다.
백현은 긴장했다.
거인의 발바닥에서 나는 지독한 썩은내가 백현의 주변에 가득했다.
그런데 그 썩은내가 더욱 독해진다.
킁킁. 킁킁!
킁킁! 킁킁! 킁킁킁!
그리고 함께 들려오는 거인의 콧소리.
백현은 미니맵을 다시 열었다.
거인과 자신 사이의 거리는 고작 0m.
백현이 당황한 채 시선을 올린다.
거대한 그림자가 백현의 시야를 막고 있다.
녹색으로 된 거대한 천장이다.
굴곡 있는 얼굴.
약 10m는 될 법한 거인의 얼굴이 백현과 마주하고 있다.
커다랗고 길게 뻗은 코.
그 밑에 수염이 났고 콧물이 흘러내린다.
백현이 기겁한 채 뒷걸음질 쳤다. 그때 자신의 붉은 다리가 보였다.
슈트를 입은 백현의 다리에 분신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진한 피가 묻어있던 것.
백현이 기겁하며 즉시 보호막을 둘렀으나, 8등급 거인은 가소롭다는 듯 보호막을 간단히 벗겨내고는 백현을 먹기 위해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