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제2경비구역
일단 자리를 피하긴 했지만, 미나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순 없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정답은 율리만에게만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동면 때문에 깨울 수도 없고, 깨운다고 해서 그녀가 제 정신일까도 의문이었다.
모든 에너지를 짜내고 짜내 방주를 지키려던 그녀를 부정하거나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시간의 흐름 속에 던져진 자신이 그녀가 이루려던 계획을 알아버린 지금, 타임 패러독스와 같은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할 뿐이다.
의자를 눕혀 창가를 바라보고 상념에 빠진 미나 곁에 아람이 접근했다.
“언니.”
“응. 만철 아저씨, 결국 선희 언니랑 결혼했더라. 둘은 결국 잘될 운명이었나 봐.”
“그래요?”
“응. 웃기지? 사진 보고 깜짝 놀랐어. 디지털 사진 파일 속에 조금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김만철 아저씨하고 선희 누나, 그리고 두 분을 꼭 닮은 아들까지, 진짜 행복해 보이더라.”
아람이의 말에 미나가 고개를 돌렸다.
“언니가 무슨 말 하려고 저한테 온 건지 알아요. 하지만 대답 못 해줘요.”
김아람의 궁금증은 자신이 누구랑 결혼하는지에 대한 것.
“왜?”
“타임 패러독스 때문이에요.”
“타임 패러독스?”
“네. 사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요. 하지만 미래의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과거의 자신이 알아버리는 것은 굉장히 많은 모순과 가정을 만들어내요. 전 이제까지 그걸 막으려고 율리만 박사가 저인 것을 비밀로 했어요. 사실 율리만 박사는 다른 합성 생명체와 결합된 키메라이기에 온전한 저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아무튼 그의 행적은 저를 어떤 길로 인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율리만이 되어야 된다고, 제가 그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고민이에요.”
“그걸 선택하는 건 전적으로 네 문제잖아.”
“맞아요. 하지만 제가 의도적으로 율리만을 거부하다가 세계가 멸망하면요? 율리만이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우리 모두가 죽게 된다면요? 그래서 전 율리만에게 직접 물으면 안 돼요. 제 미래를 알아서도 안 되고요.”
“그래. 알았어. 그럼 하나만 묻자.”
“뭔데요?”
“나, 결혼은 해?”
“네?! 지금까지 말했잖아요. 자기 미래를 알면 안 된다니까요!”
미나가 화를 내자, 김아람이 안되겠다는 듯 자리를 뜨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됐어. 그렇게 알려주기 싫어? 누구랑 결혼하는 거 말고, 결혼하는지 안 하는지만 알려달라니까.”
“안 돼요! 안 돼.”
김아람은 목적 달성에 실패하곤 핀잔을 늘어놓았다.
“어휴~ 까칠해! 저건 누가 데려가나!”
“언닛! 아~ 진짜.”
“알았다니까! 안 묻는다니까!”
김아람이 떠나고, 강미나는 속이 상한 듯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심각한데, 다른 사람은 저리 태평할 수 있다니.
* * *
시간이 지나 목적지를 정한 방주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백현은 최태우와 토의한 끝에 사람이 생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들었던 제2경비구역 쪽으로 향했다.
제2경비구역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백현이 서기백으로부터 들었던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미니맵을 열어보았을 때 생존자가 있었기 때문.
반면, 제3경비구역이라고 알려진 곳은 거인들에게 점령된 상태였고 주변에 인간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생존자가 있는 건 확실한 거지?”
최태우의 질문에 백현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제 권능인 미니맵에 지금까지 오류는 없었어요.”
“그나저나 신기하구나. 신기해. 어떻게 미니맵이란 능력은 전체를 비출 수 있는 걸까? 아무리 유전자 편집 기술이 뛰어나다 해도,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인간은 도대체……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는 거지?”
백현은 최태우의 추측에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글쎄요. 최태우 아저씨의 그 붉은색 진흙 같은 피부가 저한테는 오히려 신기한데요? 건조해지면 단단해질 수 있고, 습기만 제대로 공급되면 죽지 않고 평생을 살 수 있잖아요.”
“내가 그 말 하려는 게 아니잖아.”
“네. 알아요. 사실 전 제가 가진 능력과 권능들을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거든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머리 복잡할 일은 없겠지. 하지만 우리같이 ‘사’ 자 들어간 직업들은 기본적으로 그게 안 된단다. 무언가를 분석하고 해석해야 직성이 풀리지. 일단 자동모드로 돌려놓았다. 항속거리는 최대 400km. 그쪽에 도착하면 잔여에너지가 4% 정도 남을 거야. 거기 도착해서는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게다.”
최태우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야죠. 방주의 에너지가 고갈되면 방주 안쪽에 살고 있는 수많은 분들이 목숨을 잃게 되니까요. 저도 최선을 다해야죠.”
“그래. 피곤할 텐데 쉬어. 동생이랑 실랑이 하느라고 밤도 샜잖아.”
“아저씨도 저랑 동생 모니터링 하느라 밤 새셨잖아요. 아저씨부터 쉬세요.”
“후후, 우리 바위 인간들은 잠 안 자도 돼. 잠은 그저 습관일 뿐, 잠을 잔다고 인간일 때처럼 뇌세포가 이물질을 제거하고 지친 뇌를 회복하는 것도 아니니, 굳이 잘 필요는 없어. 쉬고 있어. 문제 생기면 부를 테니까.”
최태우의 말에 강백현이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좀만 쉬겠습니다.”
뒤쪽.
항공기의 퍼스트 클래스와 비슷하게 마련된 비교적 사생활이 확보된 공간.
백현은 블라인드 커튼을 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목마름을 축였다.
오랜만에 슈트를 벗고 샤워를 하는 강백현.
계속 생사를 넘나들어서일까? 예전과는 달리 거울에 잔근육들이 보인다.
쉬지 않고 움직인 탓에 따로 트레이닝을 하지 않았음에도 운동선수와 크게 차이나지 않을 정도의 근력을 갖게 되었다.
‘최태우 아저씨의 말도 확실히 맞아. 어떻게 내가 수백 km가 넘는 곳의 정보도 볼 수 있는 거지? 아무리 유전자 편집 기술이 들어갔다고 해도 이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잖아.’
그러고 보니 거인을 죽였을 때 나오던 정보도 이상했다.
기여도에 따른 포인트 분배.
이제 와서 포인트가 무슨 소용이고, 기여도는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강백현은 자신의 뺨을 꼬집어보았다.
통증이 밀려왔다.
‘게임은 아니야. 현실 맞아. 가상현실이 이렇게 리얼할 순 없어. 사람들이 죽는 장면도, 사람들의 행동들도 인공지능이나 NPC 프로그래밍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반응들이었어.’
미친 듯이 현실적인 배경과 미친 듯이 인간적인 사람들의 태도.
현실이 아니라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인 거인의 모습. 거기에 바위 인간인 최태우 아저씨의 행동이나 치밀한 설정을 볼 때 절대 게임은 아니었다.
그리고 게임이라면 마인드 리딩이란 능력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동생인 미나가 실시간으로 분석한다고? 나랑 똑같은 메커니즘일 텐데?
강백현은 고민하다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샤워를 마쳤다.
‘역시 난 생각을 안 하는 타입이야.’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자신의 몸을 유심히 쳐다보는 강백현.
그런데 목 뒤가 이상하다?
붉게 부어오른 목 뒤를 만져본 백현은 의구심에 빠졌다.
‘언제 이렇게 다친 거지? 윤수가 치료해줬을 텐데……’
슈트를 입고 있어서 몰랐었는데, 알고 보니 한눈에 봐도 표시가 날 정도로 붉게 부어올라 있다.
‘잠깐!’
백현이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보며 목 뒤 통증이 있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의 옛 친구가 죽었을 때, 기여도에 따라 포인트를 얻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통증이 있었던 부위가 여기였다.
‘거인을 죽이면 포인트를 얻고, 통증이 생긴다?’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샤워실 밖으로 나왔다.
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사람은 아람이뿐.
최형우 아저씨를 죽인 거인.
그리고 그 거인을 죽인 아람이.
아람이 또한 같은 상처가 있다면? 그게 있다면?
비행선으로 바뀐 방주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백현은 슈트를 내려놓고 비행선 내부에 있는 흰색 가운으로 갈아입은 후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아람이를 찾았다.
“아람아! 들어가도 돼?”
“어. 들어와.”
퍼스트 클래스와 같은 시설.
블라인드 커튼을 열면 바로 개인공간이다.
김아람은 백현이 흰색 가운만 입고 들어오자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야! 미쳤어?”
“어?!”
“왜 가운만 입고 들어와!”
백현은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복장 자체가 오해할 수 있었던 것.
“아니, 그게 아니고!”
“빨리 나가! 나가라고~ 아니! 예고도 없이 지금 뭐하는 거야! 아니! 예고해도 내가 거절해! 미쳤어? 술 먹었어?”
“아니, 술이 어디 있다고 술을 먹어. 오해야.”
“일단 나가! 옷 갈아입고 이야기해!”
“슈트 세탁해서 그래. 그러지 말고 뒤만 잠깐 돌아줄래? 확인할 게 있어서.”
강백현의 말은 더욱 더 오해를 불러왔다.
“변태! 갑자기 왜 그래?! 안 나가면 소리 지른다! 응?”
“아람아!”
아람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염력으로 강백현을 밀어냈다.
그 덕분에 가운이 훌렁 벗겨졌다.
“으아아아악! 변태! 뭐하는 거야!”
다행히 팬티는 입고 있었던 백현은 재빠른 동작으로 가운을 입으며 말했다.
“아람아, 오해고! 일단 옷 갈아입고 올게.”
“짜증나! 아~ 진짜 나한테 갑자기 왜 그러는데!”
“아~ 미안!”
한숨을 푹 쉬며 밖으로 나온 백현, 그런데 밖에서는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다 나와 있다.
퍼스트 클래스와 같은 시설이라고 하지만, 방음은 거의 안 되는 공간이다.
가운을 주섬주섬 챙겨입으며 나오는 백현을 보며 김만철이 핀잔을 늘어놓았다.
“백현아, 취했냐?”
“오해예요.”
“아니야. 난 이해한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나중에 아람이한테 사과해라.”
“아~ 오해라니까요!”
그런데 옆에서 윤수가 묻는다.
“아빠, 형아 뭐 잘못했어? 형아 왜 옷 벗었어?”
“윤수야. 크면 말해줄게.”
“알고 싶어! 알려줘! 알려줘!”
“윤수는 아직 어려서 안 돼.”
그걸 굳이 다 대답해주는 김만철, 그리고 그걸 보며 화내는 강백현.
“아~ 아니라니까! 미나야! 미나야! 빨리 와서 설명 좀 해줘.”
다행히 미나가 있어서 오해가 풀렸다.
강백현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친절한 강미나.
이때만은 정말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동생 모드다.
미나에게 기억을 전달받은 아람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처음부터 잘 말했으면 좋았잖아. 다짜고짜 문 열고 들어오면 당연히 오해하지!”
“들어간다고 미리 말했잖아. 너도 허락했고.”
“아~ 됐어. 다음부터 조심해. 안 그러면 그땐 콱!”
김아람의 말에 갑자기 백현이 자신의 주변에 보호막을 펼치고, 그걸 본 김만철이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하면 완전 잡혀 살겠네.”
하지만 그 말은 아람이를 더 화내게 할 뿐이다.
“누가 누구랑 결혼한다고 그래요?! 아저씨도 혼나고 싶어요?”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김아람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일단 나도 확인해볼게. 목 뒤는 확인 안 해봤어.”
“그래.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아니야. 됐어. 사과할 필요 없고, 다음부터 미안할 행동 안 하면 돼.”
“응. 그럴게.”
백현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김아람도 민망했는지 블라인드 커튼을 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울을 확인해보는 김아람.
그녀는 곧 황당해하는 표정과 함께 모두의 앞에 나타났다.
“나도 있어. 붉게, 그리고 동그랗게 생긴 흉터. 있어.”
김아람이 목 뒤를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강백현 또한 자신의 목 뒤 부어오른 형태를 보여주었다.
같은 무늬, 같은 크기, 거기에 같은 부위.
원형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목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황당해하는 동안, 김아람이 자신의 생각을 모두에게 공유했다.
“설마……. 우리 아직도 실험당하는 중인 거야?”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건 강미나뿐.
“언니, 율리만은 저한테 그런 정보를 준 적 없어요.”
“그럼 율리만한테 물어보자. 물어보면 되잖아.”
미나의 말에 강미나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힘들 것 같아요. 방주는 한번 나온 자는 다시 들어갈 수 없어요. 저희 몸을 작았던 예전으로 다시 축소할 수 있는 기술이 없거든요. 그런 능력도 없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해야 율리만하고 연락할 수 있는데?”
“그건 율리만 측에서 이쪽으로 먼저 연락을 줘야 할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먼저 연락할 방법은 없어요.”
“그럼 율리안은 어떻게 율리만하고 연락할 수 있었는데? 둘은 서로 연락할 수 있었잖아.”
“아니요. 율리안과 율리만은 방주를 운영할 때부터 서로 연락할 수단이 없었어요. 계획한 대로 움직였을 뿐…….”
그렇게 말하다보니 미나 역시 혼란스러웠다.
‘잠깐. 계획한 대로 움직였다고 하면, 율리안과 율리만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내가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거야? 원래는 결국 방주가 파괴되는 걸까? 아니면 그럴 만한 무슨 모종의 이유가 있었던 걸까? 그걸 알아내야 해! 우리들의 미래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데?’
미나의 생각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자신들의 미래를 알고 있었던 율리안과 율리만, 정확히는 강백현과 자신.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우주는 하나.
인과관계.
평행우주는 처음부터 없고 단 하나의 시간축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미나와 백현은 일단 율리만과 율리안의 행동을 반복해야만 한다.
최소한 필요한 순간까지는.
‘오빠하고 내가 율리안과 율리만이 되어야만 해. 과거로 가서 이 모든 것 상황을 만들어야만 하는 거였어. 이제부터 그 이유를 알아내면 돼. 그때가 언제가 될까?’
강미나가 말을 하다 말고 혼자 멍한 표정을 짓자, 강백현이 불렀다.
“강미나! 왜 갑자기 멍해?”
“어?”
“아마도 거인을 잡으면 포인트가 오르고, 그 포인트를 통해 능력을 올릴 수 있는 것 같아. 이건 과거의 페이즈 때와 같잖아. 그렇다면 만약에 우리가 능력을 더 올리고 싶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누구랑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이거 어쩌면 빛의 기둥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강백현의 질문에 통제실에 있던 최태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백현아, 그건 아마 시기가 돼야 할 게다.”
“네? 시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는 걸 말하는 거 아니니? 3개월에 한 번씩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잖아. 그걸 우리는 빛의 기둥이라고 하지.”
최태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예요! 거기로 가야 해요! 언제예요? 그때가 언제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