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cm헌터-175화 (175/200)

175화. 비밀

미나의 말에 최태우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나?”

“네. 저예요.”

“너 설마 알고 있었던 거니?”

“촉진제 말씀이세요? 유전자 검사로 알아내신 거죠?”

붉은 피부의 바위인간인 최태우가 미나를 노려보았다.

“원심분리기를 이용해 촉진제의 성분을 분석해보니 최형우 아저씨의 유전자와 다른 한 명의 유전자가 들어가 있었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할 수 있겠어?”

“좋아요. 대신 비밀로 해주시는 거예요.”

“들어보고 결정할게.”

“네. 알겠어요. 촉진제는 최형우 아저씨의 유전자로 만든 게 맞아요. 정확히는 최형우 아저씨의 거인화 유전자와 아람 언니의 폭주 능력이 합쳐진 거죠.”

미나의 대답에 최태우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넌…… 누구야?”

“강미나입니다. 정확히는 율리안의 의지를 받아들인 미나죠.”

강미나의 대답에 최태우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미나는 방긋 웃었다.

“당장 기억을 지울 생각은 없어요. 저도 털어놓고 싶어졌거든요.”

미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나도 사실은 몰랐어요. 촉진제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구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니란 걸 알았어요. 최태우 닥터가 발견한 촉진제 유전자가 최형우 아저씨 것만 아니었어도 전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을 거예요. 촉진제가 최형우 아저씨의 유전자로 배양해 만든 거란 이야기는, 결국 실험체였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걸 실험한 사람이 나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나잖아요! 율리만이 나니까."

"미나야."

"내가 과거로 가서 이 빌어먹을 미래를 만들어내야 한다고요! 인간들을 실험체로 만들어야 하는 거라고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강미나는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런 미나를 혐오스럽게 쳐다보는 최태우.

그러나 최태우의 표정을 보고도 강미나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제가 먼저일까요? 아니면 율리만이 먼저일까요? 닥터는 아세요? 최태우 닥터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강미나. 나는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모르는 게 정상이에요. 아무도 몰라야 해요. 이 끔찍한 역사를 반복해야 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아무도 몰라야 해요. 그게 정상이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먼저인지, 율리만이 먼저인지. 내가 율리만이 되는 건지, 아니면 율리만이 날 조종한 건지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고요!”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지금의 미나도 마찬가지였다.

율리만이 먼저인지 아니면 강미나 자신이 먼저인지 모른다.

율리만에게 조종받던 자신.

율리만에게 선별적으로 기억을 전달받은 자신.

율리만의 부하, 크로커의 음모에 의해 죽은 부모.

크로커 또한 율리만에게 기억을 조작당한 것은 아니었을지, 이제까지 생각했던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과연 내가 과거로 가면, 율리만이 했던 그대로 행동하는 건가?

아니면 이곳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야 하는 건가?

나는 과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난 몇 번째 강미나지?

뫼비우스의 띠.

평행우주 이론.

다중우주론.

대체우주론.

브레인 충돌가설.

끈 이론.

수많은 가능성과 전제조건.

과거에서 미래로 끌려온 미나는 절망스러운 상황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나 어떻게 해야 해요? 내가 뭘 해야 해요? 난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건가요?”

미나는 자신이 겪는 모든 상황이 아람의 예측대로 되어가는 것을 보며 스스로를 비웃고 있었다.

“미나야. 정신 차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는데, 넌 강미나야.”

“거인의 촉진제를 만든 것도 나였고, 방주를 만든 것도 오빠와 나였고, 모든 게 나였어요. 나에게 작은 세상의 공주님 이야기를 속삭였던 것도 나였고, 이곳 미래로 데려온 사람도 나였다구요. 율리만이 나라고요! 율리만이 나고, 내가 율리만이라고요!”

미나는 절망했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한마디와 함께 앞으로 손을 내민다.

“그 비밀은 잊어줘요. 나만 알고 있을래요. 나만 알고 있어야 해.”

미나가 기억을 지우기 위해 손을 뻗자 최태우가 뒷걸음질 친다.

그러나 미나는 이미 자신이 모든 것을 안고 가기로 결심했다.

결국 최태우가 낙심한 듯 제자리에 서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최태우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쾅쾅! 쾅쾅! 쾅쾅쾅쾅!

결계에 갇혀버린 미나의 주먹이 부딪히는 소리.

자신의 주변에 깔린 보호막의 존재에 미나는 절망하고는 주저앉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백현이 최태우에게 부탁했다.

“아저씨,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응. 그러마.”

“고마워요. 동생과 단둘이 이야기해볼게요.”

최태우가 떠나고 미나의 주변에서 보호막이 걷혔다.

강미나는 펑펑 울며 백현에게 말했다.

“왜 그랬어! 오빠! 왜 그랬어?”

“기억 안 나?”

“뭐가!”

“소설 속 공주님은 왕자님이 지켜줄 거라고. 그리고 그 왕자님은 오빠라며.”

“하지만 이건 소설이 아니잖아! 현실이잖아. 현실이잖아.”

강미나가 달려와 강백현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백현은 그런 동생을 안아줄 뿐이었다.

“잠시 나갈래?”

“응.”

방주 바깥.

오빠의 손을 잡자, 백현이 보호막 파편을 바닥삼아 방주의 꼭대기로 미나를 안내했다.

미나는 한강 위에 떠 있는 방주 위에서 앉은 채로 백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난 이제 뭘 해야 돼?”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무슨 말이 그래? 오빠는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면서. 내가 율리만이라고. 오빠는 율리안이고.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면, 우리는 율리안, 율리만이 되어 행동할 거야. 그들처럼 행동하고 그들처럼 사람들을 실험할 거야. 과거의 우리들을 미래로 데려와서 실험쥐처럼 굴리고 죽는 것을 지켜볼 거야.”

“미나야.”

백현의 진지한 어투에도 불구하고, 미나는 자신의 못된 상상을 말로 담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모니터링하면서 쓸모 있는 능력들을 가진 자들은 얼음캡슐에 담아 미래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보관하며 말하겠지. 『드디어 원하던 능력을 얻었네. 이렇게 하면 이성을 잃지 않은 거인들을 만들 수 있네. 이렇게 하면 슈트를 만들 수 있고, 이렇게 하면 능력을 배울 수 있네.』 이런 말을 하며 사람들을 실험할 거야. 오빠도 내가 그럴 거라는 걸 알잖아. 그러면서도 날 두둔한다고?”

씁쓸한 남매가 어둑어둑해진 한강 위에서 무심하게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그래. 두둔해. 널 다치지 않게 할 거야. 네가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넌 내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그렇지만 난 실험할 거라고. 미래를 구한다는 목적 하나로 과거 사람들을 제물 삼을 거야. 난 괴물이야. 난 그렇게 될 거라고.”

“미나야. 난 알아. 네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을.”

“오빠……. 아람이 언니가 말했어. 내가 세상을 망칠지도 모른다고.”

“아니야. 오빤 널 믿어.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널 믿을 거고.”

“아~ 다른 이야기해.”

둘은 밤새 대화를 나누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함께했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인천 월미도 바이킹에서 안전장치 밑으로 떨어질 때 백현이 미나의 손을 붙잡았던 이야기.

미나가 좋아했던 최종훈 이야기.

미나가 즐겨먹던 마약 떡볶이 이야기 등.

아주 평범했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 병원 있을 때, 오빠가 판타지 소설 건네줬잖아. 이거 읽으면 기분 좋아질 거라고. 그것 때문에 소설에 푹 빠진 거 알지?”

“그게 내 탓인가?”

“오빠 탓이지. 오빠 때문에 세상 이렇게 된 거잖아. 오빠가 맨날 멸망한 세계, 아포칼립스물만 가져다주니까 내가 이런 소설 쓴 거잖아.”

“아~ 그거야 책방 아저씨가 추천해준 게 그 책이었으니까 너한테 빌려다 준 거지. 그리고 설마 알았겠냐? 네가 로맨스 소설은 안 보고 판타지 소설만 볼지! 그것도 잔인한 것만 잔뜩!”

부모님을 잃은 교통사고 후의 이야기들.

정신과 진료를 빼면 둘이서 평범하게 생활했던 이야기다.

“오빠가 잔인한 소설들만 가져다주니까 내가 성격 완전 버렸잖아. 오빠 때문에 하루에도 매일매일 미칠 것 같아. 책임져! 오빠 때문에 나 시집 못 가면 어떻게 할 거야? 응?”

“너 시집 안 가도 돼. 같이 살면 되잖아.”

“됐어. 내가 오빠랑 왜 살아? 미쳤어? 맨날 마약 떡볶이나 사오면서.”

“마약 떡볶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바보.”

“오빠, 엄청 찐따였던 거 알지?”

“장난해? 네가 더 찌질했거든? 맨날 판타지 소설에만 빠져 있어가지고 완전 히키코모리였잖아.”

“오빠도 정상은 아니었거든?”

미래와 과거.

그 둘을 이어주는 추억이 함께하자, 결국 심각했던 미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말았다.

“들어가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생각하면 되잖아.”

“또! 또! 또! 뭐가 그렇게 긍정적이야?”

“나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왜 벌써부터 걱정해? 그리고 뭐가 일어날지 알면 대처하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으이구! 내가 왜 저런 오빠를 뒀는지 모르겠다.”

미나의 말에 백현의 이야기는 밤새 이어졌다.

때마침 칠흑 같은 어둠이 걷히고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침이 밝아온 것이다.

미나와 백현은 한강 위에 뜬 방주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는 거인들을 바라보았다. 남매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나와 백현의 얼굴에는 그동안 있었던 걱정과 근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절대 끊어지지 않을 친남매의 우애만이 남았다.

“내려갈까?”

“응.”

“조심해. 떨어진다.”

“알았어~ 능력 조절이나 잘해.”

보호막을 발판 삼아 내려가는 남매. 그들은 통제실과 연결된 입구에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통제실 안쪽, 윤수를 제외한 일행들이 충혈된 눈을 한 채 모여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남매에 깜짝 놀라 통제실의 모니터를 끄는 최태우.

그걸 본 백현이 최태우에게 물었다.

“아저씨, 뭐하고 계세요?”

“어? 아니, 그냥 뭐.”

“뭐하고 계셨냐니까요? 질문이 어려웠나요? 아람이 넌 뭐했어?”

백현의 질문에 아람이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뭘 하긴, 그냥 모여 있었지.”

더욱 수상한 사람들.

그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흩어지려는데 백현이 눈치를 채고 말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백현은 능숙한 조종 능력을 발휘하여 꺼졌던 모니터를 다시 켰다.

모니터가 비추는 장면은 미나와 백현이 있던 장소.

그걸 본 백현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다 듣고 있었어요?”

“아-응. 그래. 다 들었지.”

“언제부터요?”

“……어젯밤부터.”

“그럼 다들 안 자고 지금까지 듣고 있던 거예요?”

황당해하는 백현의 질문에 김만철이 말했다.

“아니, 다들 안 잔 건 아니고, 윤수는 재웠지.”

대답이 짧다. 그래서 더 캐물었다.

“아니, 그럼 윤수 빼고는 다들 저랑 미나 이야기 엿듣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자 최태우가 곤란한 듯 대답했다.

“그래. 뭐 중요한 이야기니까, 내가 깨워서 다들 같이 들었지. 잘 풀린 것 같은데? 안 그래?”

“아……. 그렇긴 한데. 아니! 아니! 이건 아니잖아요. 어디부터 들었어요? 어디부터 들었는데요? 저희 가족사를 처음부터 다 들었다고요?”

간밤에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전부 해버린 백현과 미나.

그래서일까?

김만철이 멋쩍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래. 백현이 너 초등학교 3학년 때 오줌 싼 이야기도 했고, 미나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남자친구한테 차이고 얼굴 할퀸 이야기도 들었지.”

“아~! 그걸 엿듣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아니! 너희 둘이 사고 칠까 봐 그런 거지. 애당초 너희가 잘못한 거 아니야? 심각한 표정 지어가면서 바깥에 나가면 당연히 걱정되지. 안 그래? 안 그러냐고!”

그의 말에 미나가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됐어. 미나 네 걱정은 잘 알았고, 그 상황이 오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아람이가 할 말 있대.”

김아람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나 때문에 그렇게 스트레스 받고 있는 줄은 몰랐지.”

김아람의 말에 김만철이 언성을 높였다.

“그게 다야?”

“아~ 진짜! 나 이런 거에 약하단 말이에요.”

“그래도 제대로 해.”

“알았~어요.”

김아람이 미나를 직시하며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말했다.

“미나야. 내가 말이 좀 심했나 봐.”

“아니에요. 언니. 저야말로 미안해요.”

“고마워. 그리고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언니. 괜찮아요.”

“근데 미나야!”

“네?”

“너 거짓말 했더라.”

“뭐가요?”

“이 USB!”

김희연 박사가 김만철에게 건넨 USB.

“봤어요?”

“응. 나랑 결혼한 거 아니던데? 어떻게 된 걸까? 자세히 설명을 요구해도 되겠니?”

김아람의 목소리 끝이 올라가자, 강미나가 멋쩍은 웃음으로 마무리하며 자리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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