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cm헌터-172화 (172/200)

172화. 피난

열다섯의 거인이 거주지 주변에서 죽은 인간들을 포식하고 있었다.

먹잇감을 차지하기 위해 으르렁 거리는 거인들의 울음소리.

미나가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잔인해.”

그동안 거인들과 격리되어 살아온 사람들.

그래서일까? 거인의 잔인한 행동을 보면서도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거인은 인간과는 다른 종이라고.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폐쇄합시다! 문을 닫아요!”

사람들은 앞다투어 대피소의 문을 닫았다.

철문이 내려온다.

그 앞에는 거인이 된 서기백 대장의 시신이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아빠! 아빠!”

서기백 대장의 아들이 눈물을 흘렸다.

“준영아. 이리 와.”

서준영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 그녀는 11살의 준영이를 안아주며 위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엄마! 엄마! 아빠 구해내! 아빠 살려내!”

아직 어린 마음에 엄마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아들.

그런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 아무 소리 없이 꼭 안아주는 엄마였다.

이를 보며 강백현이 입을 열었다.

“준영아, 너희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해. 준영이 살리려고 희생하신 거야.”

“아니야! 아빠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그리고 강백현의 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강백현에 대한 서준영의 호감도가 33 하락했습니다.》

강백현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아……. 상처를 줬나?’

때로는 진실보다 거짓이 올바를 경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준영아, 너희 아빠는 곧 돌아오실 거야. 치료제만 구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실 수 있을 거야.”

미나의 말에 엄마의 품에서 뒤돌아보는 소년.

서준영은 미나를 보며 되물었다.

“흑흑, 치료제 만들 수 있어? 거인들 치료할 수 있어?”

“그래. 누나가 만들어줄게. 준영이 위해서 만들어줄게. 대신 울지 말아야 해. 엄마가 슬퍼하시잖니.”

강미나의 말에 서준영이 눈물을 닦고 말했다.

“알았어. 누나가 치료제 만들어준다고 했다. 약속이야!”

“응. 그럴게.”

서준영의 엄마이자 서기백의 아내는 미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김희연입니다. 질문이 늦었네요. 누구시죠? 못 보던 얼굴인데…….”

“외부에서 온 방문객입니다. 저희는 방주를 끌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방주요? 율리안 박사님이 만든 방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미나는 대답 대신 기억을 전달했다.

그러자 김희연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기억들.

그리고 미나가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김희연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믿을 수 없어요. 과거에서 왔다고요?”

“하지만 이미 납득하고 계시잖아요. 제가 마인드 리딩 능력을 사용하고, 율리만 박사님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요.”

김희연은 왜 강미나가 자신에게 기억을 전달했는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촉진제가 필요하신 건가요?”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 본능이 촉진제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미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옆에서 듣고 있던 강백현이 동생의 말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촉진제가 필요하다니?”

“촉진제는 김희연 박사님 댁 지하에 보관되어 있어. 그 기억을 보니까 내가 그걸 확보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어.”

“미나야! 간신히 빠져나왔잖아. 저기 안 보여? 사람들 불안해하는 거 안 보여?”

“하지만 거인을 막을 수 있는 건 우리들하고 촉진제를 써서 거인이 된 분들뿐이야. 실제로 서기백 대장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고 거인들을 물리쳤잖아. 그러니 그 소중한 샘플은 우리가 꼭 손에 넣어야 해. 연구자료도 다 훼손됐잖아. 지금 우리 손을 봐. 다 빈손이잖아. 아무것도 없잖아. 이대로 방주에 못 돌아가!”

미나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최악 중 최악.

촉진제는 분명 인간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율리안 박사도, 그의 동료들도 최후에는 그 촉진제를 사용하여 동료들을 구했다.

만약에. 혹시 만약에.

거인이 된 상태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만큼 능력이 증폭된다면?

잠시 동안이지만, 일발역전(一髮逆戰).

한순간에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물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약이지만, 죽을 위기에서 한 명의 희생으로 모두를 구할 수 있는 병기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미나의 말에 김아람이 끼어들었다.

“촉진제를 제조하면 되는 거 아니야?”

김아람의 질문에 서준영의 엄마, 김희연 박사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촉진제는 화학물질이 아니라 생물병기예요. 특정 유전자를 배양한 거죠.”

“유전자를 배양했다고요?”

“네. 배합식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걸 개발한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미나 씨는 알겠지만, 이 촉진제를 개발한 사람은 바로 율리만 박사님입니다. 저는 그녀의 조수였고요. 전 그 방주 안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김희연의 말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율리만의 조수였다니.

강미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오빠, 박사님 집 어디인지 보낼 테니까 미니맵으로 안전한지 확인 좀 해줘.”

“응.”

백현은 미니맵으로 서기백 대장의 집 부근을 확인한 후 쓴웃음을 지었다.

“곧 거인들이 들이닥칠 거야.”

“가야 해. 김희연 박사님을 모시고 가야 샘플을 꺼낼 수 있어.”

“박사님을 모시고 가면 위험하잖아. 우리끼리 다녀오자.”

“안 돼. 그게 안 되니까 하는 말이지!”

김희연 박사가 미나를 거들어서 이유를 설명했다.

“홍채인식과 지문인식을 둘 다 하지 않으면 촉진제는 꺼낼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강제로 꺼내게 되면 내부에서 화재가 일어나 소거됩니다.”

“어쩔 수 없네. 미나야. 모시고 가자.”

“응. 박사님, 죄송해요. 저희한테 그 샘플은 목숨보다 소중할지도 몰라요.”

“아닙니다. 미나 씨. 기꺼이 도와드려야죠. 율리만 박사님은 저한테 항상 말씀하시곤 했어요. 언젠가 이 촉진제가 너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가지고 있으라고요.”

김희연은 남편을 잃었다는 슬픔보다도 자신의 의무를 우선시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반대를 했다.

“백현아, 넌 쉬어.”

“네?”

“너 그 몸으로 절대 안 돼!”

“만철이 형.”

“나하고 둘이 간다. 미나 너도 안 돼. 너희들보다는 신체적 능력이 뛰어난 내가 가는 게 맞아. 그리고 박사님을 모시고 가야 한다면 더더욱 내가 가는 게 맞고.”

김만철은 둘을 말린 후 김희연 박사에게 말했다.

“제 등에 업히세요.”

“네?”

“바로 모셔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막 정신을 차린 윤수가 고개를 젓는다.

“아빠! 가지 마.”

“괜찮아. 윤수야. 아빠 믿지?”

하지만 강백현이 생각하기에도 김만철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미나는 쉽게 지쳐버린다.

아람이는 어딘가로 이동했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데 불리한 점이 있다. 염력을 쓸 수 없으면 무력해진다.

반면 김만철은 쉽게 지치지 않고 모든 밸런스가 균형 잡혀 있다.

다만 걱정되는 건…….

“형, 제가 왜 걱정하는지 아시죠?”

“그래. 이번에는 안 죽어. 걱정 마. 고집도 안 피울 거고 위험하면 바로 빠져나올 거야. 아무리 촉진제가 중요해도 사람 목숨보다는 안 중요할 테니까.”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그래. 허락해줘서 고맙다.”

김만철이 강백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김희연에게 등을 가져다 대었다.

“아드님께 한 말씀 하십쇼.”

“네. 준영아, 엄마 금방 집에 다녀올게. 걱정하지 마.”

“응. 알았어.”

대피소의 문이 열리자, 김만철이 김희연을 업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공중을 활공하는 김만철의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

일행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곧 대피소의 문이 닫히며 시야에서 사라진 두 사람이었다.

김만철에게 업힌 김희연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그나저나 아직 싸우고 있군요.”

김희연은 자신의 남편이 새로 등장한 거인 열다섯과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서기백은 영리하게도 히트 앤 런,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건물의 지붕이나 부서진 벽재를 집어 던져 거인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이다.

“네. 정말 용감하십니다. 오래 만나 뵙진 못했지만 정말 훌륭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네. 그것 때문에 결혼했죠. 빨리 가요. 저기 앞 골목에서 왼쪽 방향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지붕을 밟으며 뛰어오르는 김만철.

그 등에 업힌 김희연은 만철을 자신의 집으로 인도하면서도 서기백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여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치료제 연구를 했어야 했는데…….’

* * *

김만철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 덕분에 비교적 빨리 김희연과 서기백의 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집 지하, 김희연의 서재가 있는 곳은 먼지가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불을 켜고 서재로 내려간 김희연은 눈앞의 금고를 바라보았다.

금고 앞에는 스크린이 달려 있다.

스크린 위쪽에 홍채를 인식하는 부분이 번쩍인다.

그리고는 화면 중에는 손바닥 모양의 표시가 보인다.

거기에 자신의 오른손을 내미는 김희연.

그러자 홍채 OK. 지문 OK.라는 메시지가 출력되며 딸깍하는 소리가 들린다.

금고 안에는 캡슐 모양의 촉진제가 보였다.

그 옆에는 촉진제를 끼워 넣을 수 있는 주사 키트도 있다.

그걸 가방에 챙긴 김희연이 김만철에게 입을 열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다시 김만철의 등에 업혀서 집 안에서 빠져나온 김희연.

김희연은 그 상태로 거대해진 남편의 몸을 바라보았다.

서기백은 아까와는 달리 거인들과 싸우지 않고 있다.

그러더니 갑자기 죽어있는 인간들을 먹기 시작했다.

거인화의 부작용.

그걸 본 김만철이 김희연에게 당부했다.

“눈 감고 잊으십쇼.”

“네. 알겠어요. 흑흑……. 알고 있었는데, 촉진제 쓰면 저렇게 되는지 알고 있었는데…….”

김만철은 김희연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서기백은 아내의 슬픔을 알지 못한 채로 죽은 강아지, 죽은 고양이, 죽은 인간을 닥치는 대로 섭취한다.

어째서일까?

김만철의 가슴 속에 아련한 감정이 밀려왔다.

분명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 여성인데 왜 이렇게 측은한 마음이 들까?

지켜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다.

무사히 대피소로 돌아온 김만철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고생하셨어요.”

“아니야. 박사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행히 촉진제는 얻었다.

하지만 김만철은 씁쓸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김희연 박사를 보자 한숨이 흘러나온다.

김만철이 뒤돌아서자 강미나가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니, 그냥 박사님을 어디서 본 것 같아서. 그런 것만 같아서.”

“그 마음 이해해요.”

“이해한다니?”

“말해도 되나 모르겠네요.”

“모르겠다니! 저 여자가 뭔데? 나한테 뭐길래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건데?”

미나는 김만철의 추궁에 결국 진실을 말했다.

“아저씨는 김희연 박사님의 조상이에요.”

“뭐?”

“이쪽 세계에서 김희연 박사는 김만철 아저씨의 후손이에요. 그러니까 아저씨의 그 마음, 저는 아마 본능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나저나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미나가 뒤쪽을 가리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한 채 울부짖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하다.

희망을 전부 잃어버린 사람들 수천 명이 대피소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긴! 거인들을 쫒아내야지. 그리고 삶의 터를 되찾아줘야지. 안 그래?”

김만철의 말에 김아람이 나섰다.

“모처럼 간만에 의견이 맞았네. 제가 생각이 있거든요. 다들 들어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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