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cm헌터-170화 (170/200)

170화. 서기백

거인병 전염을 우려한 백현의 말을 들은 서기백이 안타까운 얼굴로 대답했다.

“아쉽게도 저희는 거인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가요?”

“네. 수백 년간 연구했지만,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인으로부터 인간을 격리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거인병은 호흡기로 전염이 되니까 더욱 조심해야 했지요.”

서기백 대장의 말에 백현 일행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희망을 품고 왔는데 얻어갈 것은 없으니 허탈한 것이다.

“하지만 관련해서 아예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네? 혹시 치료법을 알고 계신 겁니까?”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거인병을 촉진하는 법을 알고 있지요. 그걸 개발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니까요.”

치료법이 아닌 촉진법.

“촉진법이라면 빠르게 거인이 되는 법을 말하시는 겁니까?”

“네. 이해가 빠르시네요. 들으신 적이 있나요?”

서기백의 질문에 김만철이 대답했다.

“네. 저희는 율리안 박사가 거인화한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죽음 직전 자신을 거대화시켜 방주를 지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김만철의 대답에 서기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럼 율리안 박사님은 현재 거인화 되어 계신 상태인가요? 의식을 유지 가능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텐데요.”

“아니요. 안타깝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미나야. 맞지?”

김만철은 자신에게 전달된 기억을 상기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미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율리안의 마지막 모습을 서기백에게 전달해주었다.

서기백은 미나에게 단편적인 기억과 시야를 공유받은 후, 놀라운 얼굴로 물었다.

“마인드 리딩?”

서기백의 입에서 미나가 지닌 능력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백현 일행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율리만 박사님이 이 능력의 사용자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저 말고도 많은 분이 알고 계시니까요. 사실 제가 놀란 것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그 자체입니다. 다른 분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십니까?”

그의 질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초면에 죄송합니다만, 능력 조절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능력 조절이요?”

“네. 능력의 과다 사용은 유전자 변이를 유발하고, 유전자 변이는 곧 수명의 단축을 의미하죠. 그런데 제가 아들 녀석에게 들은 바로는, 여러분은 능력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지 여쭙고 싶은 겁니다.”

서기백의 말에 아무도 정확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자유자재는 아니고 능력을 쓰면 피곤하니까, 저절로 조절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쩌다보면 한계를 잃고 폭주를 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에.”

“착용한 슈트가 미리 한계점을 알고 경고를 해주고요.”

백현과 아람이, 그리고 미나의 말에 서기백이 놀란 얼굴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슈트라면 능력자용 전투복을 말하는 거군요. 역사에 의하면 150년 전 미국에서 보급 받은 전투복에 해당 기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에 의해 이성을 잃은 거인들이 출몰한 후, 우리나라는 그들을 무찌르기 위해 미국에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특히 능력자용 전투복을 주로 원했는데 그때는 이미 전세계가 거인출몰로 몸살을 앓고 있던 터라 몇 벌 제공받진 못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기백의 말은 흥미진진했다.

율리안, 율리만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과거의 역사를 아우르는 그의 지식들은 백현 일행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혹시 말씀하신 그 전투복이 이곳에도 남아있나요?”

“아니요. 아쉽게도 능력자용 전투복은 이곳에 없습니다. 이곳은 본래 전투 목적이 아닌 생존 목적을 위한 기지 중 하나였으니까요. 거인은 본래 인간이었으므로 그들을 죽이기보다는 이성을 잃은 그들을 치료하고 공존하는 연구를 진행하던 곳이었죠. 국방과학 연구소는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서기백의 말에 김만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의도를 말해주니, 왜 공동구에 거인을 묶어 두었는지도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그래서 공동구에 거인을 살려두신 겁니까?”

“그런 이유도 있지만, 거인들은 서로 각자의 구역이란 게 있습니다. 주변에 거인이 있으면 웬만하면 구역 침범을 하지 않죠. 그래서 공동구에 거인을 잡아두면 다른 거인의 접근을 막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 또한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면서 거인들의 시선을 피한 채 여기에서 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갑니다. 서로 윈윈입니다.”

뭐가 윈윈인지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이들의 목적은 거인은 거인의 삶을 살고, 인간은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백현이나 만철의 입장에서 썩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인간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위이이잉, 위이이잉.

사이렌이 울리고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온한 휴게실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대장님! 거인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뭐라고?”

“제1구역인 국방과학연구소는 이미 뚫렸고, 제2구역인 공동구 지역으로 거인 8마리가 진입한 상태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비상전투태세 2단계로 상향 발령하고 무기 전부 지급해.”

“네. 알겠습니다.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래. 같이 가지.”

경비대장 서기백은 놀란 얼굴로 허겁지겁 현장으로 향했다.

모니터링 화면 속.

공동구에 잡혀있던 거인이 울부짖고 있다.

그리고 그 거인을 뜯어먹는 거인들.

그것을 보며 서기백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왜 거인들이 거인을 잡아먹고 있는 거죠?”

“맞습니다. 원래 거인들은 아무것도 먹질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잖아요. 왜 동족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이거 조작화면 아닙니까?”

“아, 불쌍해. 어떻게 해! 쟤 어떻게 해!”

서로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은 사람들.

서기백이 통솔하는 부하들, 아니 이곳 거주민들은 거인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며, 거인이 거인을 잡아먹는 장면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만철이 황당한 표정으로 서기백에게 물었다.

“거인 막으러 안 가십니까?”

“그들은 본래 인간이었던 존재입니다. 그들을 죽이는 건 저희 양심에 위배되고, 그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행위를 저지르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들의 거주지가 위태위태하잖아요. 모두 다 부서지게 생겼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야죠.”

결국 할 수 있는 일이 감시, 모니터링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건물 안에는 그림이나 벽화들이 걸려있었다.

인간이 거인이 되는 그림. 거인과 뛰노는 인간의 벽화.

다른 것들도 거인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사실 백현도, 미나도, 만철도 여기 있는 모두도 그런 삶을 꿈꾼 적이 있었다.

방주 안에서의 삶이 그랬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절대적인 존재였던 율리만이 만들어낸 실험공간에 불과했다.

거인들의 생명을 담보삼아 전투장비를 만들고, 거인들을 4개 대륙으로 분열시켜 각자 대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거인들의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실험데이터를 쌓았다.

사실 율리만의 행동은 이곳 국방과학연구소의 사람들과 비슷하기도 했다.

거인을 관찰하고 실험한다는 측면에서 그랬다.

이들의 이런 행동은 방주가 왜 이곳에서 건조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총은 뭡니까? 왜 만들었습니까?”

“단순한 레이저입니다. 섬광으로 잠시 눈을 멀게 할 뿐 살상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설상가상, 거인들이 공동구에 있던 거인을 잡아먹은 후, 공동구 주변의 거추장한 테라스 등을 부수고 있다.

드르륵. 드르륵.

입구까지 진동이 전해오고 먼지가 일어났다.

공동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지하구역으로 연결되는 통로의 입구가 있었다.

거인들이 진입하기 충분한 크기의 입구였다.

그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는 거인들.

서기백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잘 달래서 돌려보낸다. 절대 거인들을 화나게 하지 마.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파괴하는 거인을 고작 레이저 총으로 회유할 순 없었다.

서기백과 그 부하들은 순식간에 인간의 거주지 입구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양보 없이 무차별로 접근하는 거인들.

백현과 일행들은 그 뒤쪽에서 기회를 엿보았다.

백현이 보호막으로 무기를 만들고, 김만철은 팔을 강화하고, 김아람은 공중에 떠올라 염력으로 거인을 막으려 한다.

서기백이 그런 일행을 말렸다.

“건들지 마. 괜찮아. 이 입구는 좁아서 못 들어와. 거인이 통과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어. 그리고 저들도 우리들을 먼저 해치지는 않아. 우리가 먼저 건들지만 않으면 절대 해치지 않아.”

과연 그럴까?

피 냄새에 반응하여 거인들은 흥분한다.

이제까지 얻은 정보로는 그랬다.

백현은 손을 내리며 일행들에게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의심스러웠지만 서기백의 말대로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니까 일단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미나가 소리 질렀다.

“아니야! 오빠! 막아! 막아야 해.”

“미나야.”

“거인들은 피에 반응하지만, 열에도 반응하고 우리가 내뿜는 이산화탄소에도 반응해. 한 가지로만 먹잇감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고!”

미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인들이 레이저 총을 가진 경비원들을 하나하나 낚아채며 잡아먹기 시작했다.

경비원들은 거인들의 눈을 멀게 하려고 쉴 새 없이 총을 쏘았지만, 거인들은 눈을 감는 것으로 쉽게 자신의 눈을 지킬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총을 쏘는 사람을 잡아먹으면 그만이었다.

“으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악!”

한 사람이 거인의 손에 잡혀 거인의 입으로 들어간다.

뽀드득. 뽀드득.

거인의 이빨 사이에서 잘근잘근 씹혀 분리되는 서기백의 부하들.

사람이 죽자 사람들이 혼비백산,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서기백은 이제까지 거인이 먼저 공격하는 것을 경험한 일이 없었다.

그에게는 거인들의 공격성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과 함께 후퇴하기 시작하는 서기백.

그러자 김아람이 그들을 염력으로 한쪽 벽에 밀어붙이며 버럭 화를 냈다.

“도망치지 말고 방법을 생각해요. 우리끼린 저 많은 거인들을 다 정리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들은 거인을 죽이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럼 바깥으로 쫓아 보낼 방법이라고 생각하라고요! 지금 도망치면 거주지는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냐고요!”

김아람이 윽박질렀지만, 그들로서는 대책이 없었다.

그때 김만철이 뛰어나가며 강화된 주먹으로 거인의 목덜미를 타격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치 않았다. 거인의 손바닥이 공중에서 방향을 전환할 수 없는 김만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걸 강미나가 날개 능력을 이용해 구해냈다.

강백현은 보호막 파편으로 거인들을 타격하며 서기백에게 당부했다.

“일단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대피해주세요. 최대한 막아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대피가 끝나면 거주지로 거인들을 유인해 지구전으로 돌입하겠습니다. 더 좋은 생각 있나요?”

“아- 거인들을 죽이는 건 살인행위나……”

강백현은 아직도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서기백을 발로 차 버렸다.

슈트에 의해 강화된 강백현의 발차기에 서기백이 주룩 뒤로 밀려났다.

“그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거인의 생명을 인간의 생명하고 동일한 잣대로 놓지 마세요. 우린 멸종위기에 처했고, 거인들은 이 세계의 약육강식 피라미드에서 가장 위에 있는 생명체입니다. 인간들이 자비를 베풀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강백현의 말에 미나 일행 모두가 동의했다.

“오빠, 지금은 버티는 게 우선이야.”

“그래.”

“나도 도울래.”

백현 일행은 한 명도 빠짐없이 거인들을 상대했다.

거인들의 주먹을 막고, 그들의 얼굴이나 복부 등을 타격하며 거주지로 통하는 입구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러나 미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빠, 이곳에는 전투용 무기가 하나도 없어.”

“무기가 없어?”

“응. 총도 저 섬광 레이저 총이 전부고, 다른 것은 개발도 안 했어.”

결국 거주지로 거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8마리의 거인 중 해치운 거인은 고작 하나.

백현일행은 모든 체력이 고갈된 상태로 건물 안쪽으로 도주해 숨었다.

“어떻게 해! 못 막았어.”

“사람들은 왜 도주를 안 하는데! 피할 곳이 없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저걸 봐. 답답해 미치겠다.”

지하에 숨어 거인과 공존할 수 있는 사회가 다가오길 꿈꾸던 사람들.

그렇게 수십, 수백 년간 세뇌당한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그들은 앞에 있는 동료가 거인에게 잡아먹혀도 오히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잡아먹는 거인들의 행동을 차마 현실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로 지금의 폭력이 멈추기만을 바라는 사람들.

답답한 인간들이 하나하나 죽어나가고 있다.

잘못된 믿음과 신념은 무섭다.

죽음 앞에서도 애써 초연한 듯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당면한 사실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나가 말했다.

“오빠, 여긴 가능성이 없어. 탈출하는 게 좋겠어.”

“하지만 미나야. 이분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잖아.”

“하지만 우리도 한계잖아. 슈트를 봐.”

슈트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

여기서 더 싸우면 슈트는 망가지고 만다.

“슈트가 망가지면 우리는 거인병에 노출되겠지. 이분들도 이미 거인병에 다들 노출되었을 거야. 거주지가 개방되었다는 건 그런 의미니까. 희망이 없어.”

미나의 말에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윤수는 울기 시작했고 그런 윤수를 김만철이 달랬다.

아람이는 건물 밖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죽음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거인의 숫자가 늘어났다.

하나, 둘, 셋, 전부해서 여섯.

입구에서 침투한 일곱 거인과 갑자기 새로 등장한 여섯 거인들.

그들이 서로의 생사를 걸고 싸우기 시작했다.

백현의 얼굴에 비통한 표정이 걸렸다.

새로 등장한 거인은 휴게실에서 만났던 서기백 대장을 비롯한 그의 부하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 최후의 절규가 흘러나왔다.

《이성을 붙들고 있는 동안 저희가 거인들을 처리하겠습니다. 이제 세상은 변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거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아닙니다.》

촉진제를 투여하여 거인이 된 사람들.

그들의 최후의 저항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