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거짓말
“피 냄새요? 일단 나중에 분석하고 이동해요. 시간이 금이에요.”
백현의 말에 김만철이 고개를 저었다.
“야~ 백현!”
“네. 만철이 형.”
“너, 요즘 나 너무 무시한다?”
“아니에요! 형! 제가 좋아하는 거 아시죠?”
백현은 얼렁뚱땅 넘기려 한다.
“아~ 야야야. 좋아한다는 말 이런 거 하지 말고!”
“그럼 가요!”
강백현은 만철의 말을 끊고 이동을 계속했다. 미니맵의 제한시간은 하루 30분. 현재 남은 시간은 대략 18분밖에 없었다.
제한적인 고유권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이해하는 미나와 아람이가 백현의 뒤를 따랐다.
탁탁탁탁! 탁탁탁탁!
경쾌하고 빠른 발놀림.
그들은 자전거 전용도로를 지나, 동작역으로 오르는 오르막길을 향했다.
오르막길 옆에는 어떤 생물인지 모를 뼈들이 너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으……. 징그러워!”
“빨리 지나가자.”
“응.”
인간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개, 멧돼지일지도…… 아니, 분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백현은 그쪽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국방 과학연구소로 가서 현재 상황을 확인해보는 것뿐이다.
4호선 동작역.
강변으로부터 수십 미터 위에 설치된 다리와 그 위에 연결된 철도.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위태위태한 건물.
그 너머로 서울현충원이 보인다.
현충원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호국영령을 모시는 곳.
나라의 선조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단이 잘 정돈되어 있어서 백현이 자주 찾아왔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잔디가 다 죽어 있었다.
굳고 바르던 묘비의 비석들은 하나같이 부러지거나 넘어져 있고, 금붕어와 잉어가 노닐던 호수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한다.
그리고 그 뒤쪽에서 왼쪽 무릎을 양손으로 포갠 채 백현 일행에게 시선을 고정한 존재가 보인다.
바로 거인이다.
“미나야, 잠깐만…….”
“왜?”
“저기 거인은 좀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백현은 미니맵에서 녀석의 특이함을 발견했다.
《지성을 가진 13m급 1등급 거인 / ★★★★》
묘 관리인이었던 8급 공무원 문창국은 거인병에 걸렸으나, 자신의 고유 능력인 중독으로 거인병으로부터 이성을 지킬 수 있었다.
13m로 비교적 작은 거인이지만, 별은 무려 4개.
거기에 거인인데 이성이 있다니.
더구나 이름이 걸린다.
별의 개수는 강함을 뜻한다. 이 거인은 넷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백현은 그 녀석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빠! 그거 좋은 생각 아니야.”
“먼저 가. 뒤따라갈게.”
“오빠!”
“먼저 가!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오빠가 말했잖아. 같이 있기로. 빨리 가기로!”
“아니야. 저 거인은 내가 아는 친구야. 중학교 동창. 그러니까 먼저 가. 내 기억 읽고 먼저 가 있어.”
“아이 씨! 바로 따라와야 해. 위험하면 바로 도망가고!”
“응.”
백현은 미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미니맵에서 무엇을 보았는지와 그에 따라 자신이 판단한 결과, 그리고 자신이 왜 여기 멈추어야 하는지도.
미나는 백현의 기억을 읽고 모두에게 말했다.
“우리 먼저 이동해요. 길은 외워뒀어요. 혹시 모르니까 오빠의 기억을 모두에게 전달할게요.”
미나는 마인드리딩 능력으로 백현이 보았던 미니맵 정보 및 기억을 모두에게 전달했다.
정보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백현의 의도를 이해한 후, 이동하기 시작했다.
강백현은 현충원 묘지 앞으로 한발자국씩 걸어가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 거인은 다른 거인과 달리 눈동자에 힘이 있었다.
거기에 대화도 가능했다.
“인간인가? 꺼져라!”
“응. 인간이에요. 강백현이라고 합니다.”
“…….”
강백현은 녀석에게 접근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문창욱, 병현 초등학교, 병현 중학교를 나왔죠. 제가 아는 문창욱 씨가 맞나요?”
백현의 말에 거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넌 뭐지? 날 아는 인간이 존재할 리가 없는데? 합성종인가?”
합성종, 키메라. 그게 아니면 200년 전의 자신을 알 리가 없다. 아니, 만약에 합성종이라고 해도 자신을 알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터.
“문창욱, 나야. 백현이. 초, 중, 고 같이 다녔잖아. 고등학교 때 동생 때문에 자퇴한 날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지?”
“강백현? 강백현?”
강백현은 자신을 알아보는 거인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거인의 보랏빛 주먹이 강백현의 얼굴을 미트로 삼아 날아오기 시작했다.
지이이이잉.
강백현의 앞에 수 겹의 보호막이 생겨났다.
짜좌자자작! 쫘자자자작!
첫 번째 보호막이 깨지고, 두 번째 보호막이 깨지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보호막까지 깨지고서야 겨우 녀석의 주먹을 막아냈다.
거인의 주먹에서는 보랏빛 피가 흘러나왔다.
강백현은 흠칫한 얼굴로 뒤쪽으로 도약하며 소리쳤다.
“뭐야? 왜 갑자기 공격하는데!”
“접근하지 마. 접근하면 너도 저렇게 죽는다.”
거인의 보랏빛 피가 땅에 스며들자 식물이 순식간에 시들어 죽어버리고, 바위가 변색되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내 능력은 중독이었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능력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최고의 능력이었던 거야. 이렇게 이성을 가진 채로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넌 강백현 본인인가? 아니면 안드로이드? 키메라? 정체가 뭐지?”
거인 문창욱의 질문에 백현이 대답했다.
“키메라도, 안드로이드도 아니야. 그렇다고 그쪽이 생각하는 본인도 아니겠지만…….”
“그게 무슨 소리지?”
“네가 알고 있던 강백현하고는 다른 인물일 거야. 과거에서 왔으니까. 너하고는 달리 난 아직 21살밖에 안 됐으니까.”
“크크, 그게 안드로이드라는 거다. 이 멍청한 놈아!”
거인 문창욱의 주먹이 다시 한 번 백현을 향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현의 모습이 3개로 갈라졌다.
“뭐지? 능력이 2개라고? 오리지널인가? 내가 기억하는 넌 이미 백발의 노인일 텐데?”
“난 능력이 4개이고, 오리지널이 맞아. 내가 안드로이드라면, 안드로이드에 4개의 능력을 투자할 미친놈은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래?”
백현의 말을 들은 거인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나타났다.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럼 뭐지? 과거에서 왔다고? 그걸 믿으라고?”
“그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백현의 질문에 문창욱이 궁금한 점을 물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너랑 나는 몇 반이었지?”
“4학년 3반으로 교실은 3층 복도 끝에 있었지. 너랑 나는 짝꿍으로 맨날 여자애들한테 장난치다가 선생님한테 걸려서 화장실 청소 거의 고정으로 했었고.”
“큭! 맞네. 백현이 맞구나?”
“그래. 맞다니까?”
문창욱은 백현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과거에서 왔다라…….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순 없겠지. 분명 그런 연구를 하는 자가 있었으니까. 성공했다는 건가? 그런데 과거에서 여길 왜 온 거지?”
“미래에서 불러서 우리 세계의 인류는 모두 이곳으로 소환되었어.”
“크크, 결국 그렇게 된 건가?”
문창욱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무언가 아는 눈치, 그렇기에 백현이 다시 물었다.
“이곳 인류는 몰살될 위기에 처했다고 들었어. 실제로 난 네가 말한 키메라나 안드로이드 말고는 인간을 본 적도 없어. 혹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알고 있어?”
백현의 질문에 문창욱이 대답했다.
“20년 전에는 있었지. 그땐 나도 인간들 편에 서서 싸웠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군.”
“뭐? 모르겠다니?”
“난 네 편에서 같이 싸웠다. 넌 유전자 조작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비약적으로 늘렸었지. 그래서 난 너를 잘 알아.”
생명을 늘린다는 말에 강백현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내가? 미래의 내가?”
“그래. 생명을 늘리는 건 성공했지만, 결국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계는 거인화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었지. 하지만 나처럼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수십 년 간 네가 실험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세포와 정보, 기억, 거기에 신체 데이터를 제공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했지. 방주는 어디 있지?”
방주에 대해 알고 있는 문창욱. 그래서 다시 한 번 백현이 확인했다.
“방주를 어떻게 알지?”
“당연한 거 아닌가? 방주를 지키는 역할이 바로 나였는데? 아, 그러고 보니 백현이란 이름이 오랜만에 듣긴 하네. 넌 네 현재 이름을 알지.”
“내 이름?”
백현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분명 별개의 존재이지만 궁금했다.
“그래. 율리안.”
“뭐?”
“율리안. 방주를 알고 있다면 이 이름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다시 한 번 말해줄래? 내 이름이 뭐라고? 율리안이라고?”
“그래. 너는 율리안, 네 동생은 율리만. 다들 왜 넌 여자 이름을 쓰고 네 동생은 남자 이름을 쓰냐고 물어봤지만, 너희 남매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지.”
강백현은 이름을 알게 된 충격보다는, 자신의 운명이 방주를 이끌기 위해 인양선의 연료가 되는 것이었다는 충격에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몰랐나 보군. 하지만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네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네 동생이 연구에 성공했다는 것이니까.”
거인 문창욱의 말에 강백현이 시선을 올렸다.
“연구에 성공했다니? 내 동생 미나가 무슨 연구를 했는데?”
“그건…….”
문창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그림자가 백현과 문창욱을 덮쳤다.
뽀각! 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거인 문창욱의 허리.
강백현은 위를 쳐다보다 크게 놀라더니, 썩은 물이 고인 호숫가로 뛰어들었다.
아작아작.
거인이 거인을 먹기 시작한다.
문창욱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허무한 말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피를 흘리면 먹잇감이 되는 걸 알면서도 대화에 취해 있었다니, 내가 방심했군.”
뽀각뽀각.
뽀각뽀각.
40m짜리 거인이 문창욱을 아작아작 씹어먹는다.
문창욱은 저항할 수 없었다.
10m짜리 거인의 운명.
피를 흘리면 죽는다.
거인들이 순식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강백현은 호수에 몸을 숨긴 채 친구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거인들은 가차 없었다.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물어볼 게 많았는데…….
그런데 거인 문창욱이 죽자 백현의 목 뒤가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진동과 통증이 수반되었다.
“으으, 아흡.”
그리고 익숙한 홀로그램 문구가 떠올랐다.
《지성을 가진 13m급 1등급 거인(★★★★☆)을 물리쳤습니다.》
《전투참여 보상으로 156Point를 획득합니다.》
강백현은 깜짝 놀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니맵을 켜서 하늘 방향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고도 2km, 고도 3km, 그리고 고도 5km. 그런데 그 위는 검색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아무 화면도 잡히지 않는다.
‘설마…… 설마……, 여기도 방주야?!’
믿기지 않는 사실.
방금은 거인을 죽이자 포인트를 획득했다.
이 모든 게 지구에서의 ‘페이즈’ 때와 똑같은 상황이다.
‘거인을 죽이면 포인트를 얻는다. 그렇다면 아람이도 포인트를 얻은 건가?’
의문이 거듭된다.
강백현은 친구의 죽음을 뒤로 하고 자신이 겪은 현상을 김아람에게 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