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생존자들
폭포수 같은 물에 김아람을 제외한 모두가 생쥐 꼴이 되었다.
김아람은 염력으로 물을 멈춘 채 고압적인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쪽에서 들려온 말이 가관이었다.
『거기 여성분! 무균실에 입장하시려면 제독하고 들어오셔야 합니다. 다시 한 번 투하할 테니 이번에는 막지 마세요.』
“잠시만요!”
김아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전기를 한쪽으로 빼놓고는 기다렸다.
결국 김아람도 폭포수를 뒤집어 쓴 채 생쥐 꼴이 되었고, 그제서야 막혔던 문이 열렸다.
문 안에는 수많은 실험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균실 입장 전, 복장을 갈아입어주시겠습니까. 지금 입고 계신 옷 위에 걸쳐 입으시면 됩니다.』
남자 탈의실과 여자 탈의실로 구분된 곳.
일행은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미나가 여전히 저들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기에 일단은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실험복으로 환복한 후에야 이곳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미나는 그제야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아…… 후손들이구나.’
“안녕하십니까? 백동훈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예나라고 합니다.”
실험복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했다.
『안녕하세요!』
“일단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강미나는 미소를 지으며 일행에게 말했다.
“안전해요. 가도 돼요.”
“그래.”
미나가 안전하다면 안전한 것.
마인드 리딩의 힘을 익히 알고 있는 동료들은 미나를 믿고 그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커다란 에어커튼이 그들을 맞이했고, 에어커튼을 지난 뒤 앞서 나온 두 사람이 자신들의 실험복을 벗었다.
30대 초로 보이는 남자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
그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복장은 벗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김만철이 손을 들어 말했다.
“기존 옷은 다 벗어뒀는데 그럴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다 벗으셨어요?”
“네.”
“어? 어쩌지? 아까 안내 못 받으셨어요? 위에 걸쳐 입으셔도 된다고 했는데.”
“아, 이런.”
김만철은 혼자 멀뚱멀뚱 주변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실험복을 벗고 나니 원래의 복장인 슈트가 보이는데, 자신만이 실험복이 있던 장소에 슈트를 벗어놓고 온 것이다.
“다시 가서 가져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
* * *
김만철이 옷을 갈아입고 돌아오자, 2명의 남녀가 자신들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미나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저희들은 안드로이드. 만들어진 생명체입니다.”
“네?”
“인간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죠. 생존기간은 약 6개월로 그리 길진 않다고 합니다.”
일행들은 다들 놀란 눈으로 미나와 두 명의 남녀를 번갈아보았다.
“저들의 말이 맞아요. 놀랍게도 영혼의 돌과 같은 원리고요.”
“영혼의 돌이요? 그게 무슨 뜻이죠?”
“아, 저희들만 아는 용어인데…….”
미나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든다.
그들을 향해 아람이가 입을 열었다.
“나도 여러분과 같은 안드로이드였어요. 맞지 미나야?”
“네. 언니.”
“나도 그렇지. 일단은 영혼의 돌로 되살아났으니까.”
김만철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들의 말에 백동훈이란 안드로이드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보다시피 제 기반이 되는 분은 인간이셨습니다. 여러분들과 같은 한국분들이죠.”
“아, 아.”
“저희가 만들어진 첫 번째 목적은 식량의 조달이었습니다. 거인들이 지배하는 지상으로 가서 주인님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식량을 확보하는 게 저희의 임무였죠.”
백동훈의 말에 역시 안드로이드인 김예나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저희의 주인님들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고, 이제 더 이상 저희들도 기능을 지속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런가요?”
미나는 그제서야 왜 그들의 기억에서 다른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니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주인님은 그 말과 함께 생명기능이 정지되셨으니까요.”
미나는 씁쓸한 얼굴로 김예나에게 물었다.
“주인님을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네.”
안드로이드 김예나가 일행을 한곳으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냉동된 상태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보인다.
동면을 취한 것이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과 같았다.
단지 더 크기가 컸을 뿐.
“주인님들은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부활할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저희에게 그 방법을 찾으라고요. 하지만 저희로선 방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미나는 냉동된 두 사람의 기억을 훑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들의 기억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설마!’
율리만의 기억, 그리고 이 둘의 기억에서 이어지는 묘한 접점.
미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율리만은 이 둘의 기억을 읽은 적이 있었어. 그리고 나도 그렇고.’
미나는 그 둘의 기억을 통해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방법을 깨달았다.
‘영혼의 돌은…… 내가 만든 거였어.’
비밀은 간단했다.
박진석의 능력과 윤수의 능력을 합치는 것이다.
죽은 자를 움직여 세우고, 윤수의 치료 능력으로 회복시킨다.
‘윤수가 치료 레벨 4가 되면 대상의 자가 치유 기간이 6개월까지 늘어나. 그때까진 모든 생명활동이 가능한 거고.’
그러나 지금 세계에서 죽은 자를 다시 세울 자는 없다.
박진석이 없는 한 망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눈치 빠른 사람이 있었다.
“미나야.”
“네?”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
“네 언니.”
김아람은 강미나를 데리고 둘만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다른 이들은 우려 섞인 표정을 했지만, 김아람은 여자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고 둘러대고는 미나만을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갔다.
“미나야. 율리만 박사가 너라고 했잖아.”
“네.”
“율리안은 그럼 백현이야?”
“네?”
“사실대로 말해줘.”
“언니, 갑자기 왜 그래요?”
미나의 말에 김아람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망상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난 지금 네가 무서워.”
“언니…….”
“네가 소설 쓴 거 아니야? 작아지는 소설 쓰고, 그걸 사람들 기억에 심고, 다 그런 거 아니냐고.”
미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분명 자신이 아닌 율리만 박사의 짓이다.
그런데 율리만의 1/3은 자신이다. 윤수와 자신의 결합체, 거기에 아메바라는 특수한 세포가 더해진 것.
“언니……, 나랑 율리만이랑 같다고 생각하지 마요.”
“그래. 알아. 지금은 아니겠지. 그런데 역사가 반복되는 거 아니야? 우리가 겪었던 일을 네가 반복시키는 거 아니야? 확신해? 넌 확신하냐고?”
“언니! 아람 언니!”
미나는 언니의 말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람이는 가차 없었다.
“언니가 왜 너한테 이런 말 하는지 잘 기억해. 그리고 실수하지 마. 나는 과거를 반복할 생각 없어. 또 다른 내가 세상에 시시덕거리며 살아가는 것도 싫고. 알겠니? 난 나야. 나를 대체할 건 없어.”
“알았어요. 언니. 우리 이런 싸움 그만해요. 나 언니하고 싸우고 싶지도 않고, 이 지독한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도 않아요. 우리 모두 똑같잖아요.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미나의 말에 김아람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 마음 잘 알았어. 하지만 내 경고는 진짜야. 그리고 난 클론이지만, 클론이 아니기도 해. 난 내가 김아람 그 자체라고 생각하니까.”
김아람이 떠나고, 강미나가 초라한 모습으로 주저앉았다.
분명히 자신에게 작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공주님이라는 내용을 알려준 것은 율리만이 맞았다. 그래서 아람 언니에게 해줄 말이 없었던 그녀였다.
한때 인간들이 잔혹하게 죽고 죽이는 세상을 바랬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더욱 더 자신이 의심스럽다.
거기에 냉동된 두 사람의 기억이 자신에게 영혼의 돌 제작법을 가르쳐주었다.
필요한 인간은 둘.
박윤수와 박진석.
두 부자의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죽은 자를 일정 시간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를 알아차린 김아람의 의심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김만철이 미나에게 다가왔다.
어째 이야기를 대충 듣고 있었던 눈치였다.
“미나야.”
“네. 아저씨.”
“다들 네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어. 너랑 율리만은 다른 존재잖니? 안 그래?”
“네. 맞아요.”
“그래. 일어나렴, 여기서 떠나자. 더 이상 얻을 건 없어.”
“네.”
돌아가는 길, 안드로이드 2명이 손을 흔들었다.
“정말 여기 남으실 건가요? 저희와 함께 움직일 생각은 없으신가요?”
“네. 저희 주인님이 부탁하신 걸 이룰 때까지 여기서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는 인간이 아닙니다. 실험에 의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저희를 불쌍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강미나는 여기 냉동된 두 사람이 윤수의 능력과 박진석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그랬던 거야.’
돌아가는 길, 최형우가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는 미나와 아람을 보고 이상한 듯 물었다.
“둘 다 표정이 왜 그래? 싸운 거야?”
“아니에요.”
“아니긴 뭘 아니야. 아람아.”
“네. 아저씨.”
“내 마음 알지? 우리 원래 지구로 돌아갈 때까지 싸우지 말자. 과거로 돌아가면 다 같이 모여서 삼겹살도 구워먹고, 치킨도 시켜먹고, 아람이 좋아하는 스테이끼도 구워먹고.”
“스테이끼?”
“그래. 스테이끼! 스테이끼!”
60대인 최형우의 발음에 피식 하고 웃음이 튀어나온 김아람.
“아저씨! 완전 웃겨. 할아버지 아니랄까 봐 스테이끼래!”
“기분 풀렸지? 다들 올라가자!”
“네.”
방주에서는 백현이 자가 복구중인 방주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백현이 동생 미나에게 물었다.
“잘 갔다 왔어? 표정이 왜 그래?”
“오빠, 나 피곤해.”
“그래? 좀 쉬어. 어차피 12시간은 못 움직인다. 별거 없었지?”
“응. 특별한 건 없었어.”
“그래.”
그리고 김만철이 들어온다.
“백현아, 별일 없지?”
“네. 저야 별일 없죠. 아저씨, 무전기는요?”
“어? 아! 챙겨왔지.”
“네. 감사해요.”
“감사는 뭘!”
그리고 김아람과 최형우가 돌아왔다.
“백현아 고생했다.”
“아니에요. 고생하셨어요. 아람이 너도 고생했다.”
“응. 백현아!”
“응?”
“아니야. 나중에 말할게. 미나 관련해서, 그리고 너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
“그래? 지금 말해도 되는데.”
“아니야. 마음 좀 정리 되면 말할게.”
“그래.”
그런데 그때, 갑자기 통제실에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아, 3km 바깥에서 접근하고 있어요. 30m짜리 5등급 거인이에요.”
“그래? 내가 처리하고 올까?”
“아니요. 같이 가요. 제 보호막이 도움이 될 거예요.”
최형우의 질문에 강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런데 김아람이 고개를 저었다.
“넌 일단 통제실 지키고 있어. 여기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나랑 아저씨랑 처리하고 올게.”
“미나도 같이 보낼게. 만철 아저씨도.”
“아니야. 아저씨는 미나나 위로하라고 해. 형우 아저씨랑 내가 해결할 테니까.”
“무전기 가져가요.”
“그래.”
최형우와 김아람이 거인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거대화된 최형우와 그의 어깨에 탄 김아람.
이때까지만 해도 강백현은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다.
김아람과 최형우면 믿을 만한 조합이었으니까.
그런데…… 30분 후, 무전기에서 김아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백현아! 아저씨가! 아저씨가!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