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붉은 자들의 도시
지하로 가는 계단을 보며 미나가 김만철에게 제안했다.
“만철 아저씨는 아람이 언니랑 윤수하고 같이 여기 남아줘요.”
“뭐?”
“누군가는 방주를 지키고 있어야 하잖아요. 윤수는 금방 깨어날 거예요. 그때 아빠가 옆에 없으면 힘들어할지도 모르니까요.”
“아, 그래. 알았다.”
두 명이나 기절해 있지만, 윤수가 깨어나면 둘 다 치료받을 수 있기 때문에 미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최형우에게 물었다.
“같이 가실 수 있죠?”
“가야지.”
“네. 들어가요.”
붉은 피부를 한 사람들을 보며 강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안됐어. 정말 안됐어. 이들은 사람도 아닌 거야?’
《★★ 록맨 Rock Man》
- 거인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을 변이시킨 사람들.
※ 거인병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오감을 잃었다. 에너지원으로는 열을 사용하며, 자신의 몸이 15℃ 이하가 되면 신체활동이 정지된다.
백현은 방주를 나온 뒤에도 나타나는 미니맵의 정보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보는 도대체 누가 주는 거야?’
풀리지 않는 의문점.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방주 바깥으로 나와도 능력을 똑같이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계단 밑으로 내려가자 커다란 공간이 보였다.
“아, 더워.”
“조금 더울 겁니다. 저희는 특정 온도 이하로 내려가면 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초봄인 경우 되도록 실내 온도를 18도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15도 아니고요? 15도 이하면 활동이 정지된다면서요.”
백현의 질문에 최태우가 대답했다.
“여러분들은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으니 저희 약점을 속일래도 속일 수 없군요. 네 맞습니다. 활동이 정지되죠. 그래서 지금 같은 날씨에는 낮에만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고, 밤이 되면 여기 지하 거주지로 이동합니다. 물론 여기도 초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버틸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지하라도 추운 겨울이면 13도 이하로 떨어지거든요.”
계단 끝까지 내려가자 깊은 균열을 가로지르는 다리 너머에 바위로 된 문이 서 있었다.
다리를 건너려면 바위로 된 문을 열어야 하는데, 여는 방법이 가관이었다.
수많은 바위구멍.
거기에 붉은 인간들의 주먹을 넣어 비틀면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열린다.
“안 아파요?”
“그럼요. 오감을 잃은 저희들에게 고통이란 없습니다.”
“고통을 못 느낀다고요?”
“아예 못 느끼는 건 아니고 많이 둔감합니다. 목이나 머리 부분이 아니면 사실 거의 못 느낀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다만, 공포는 느낍니다. 무한한 생명이라고는 하나 부서지는 순간 끝나거든요. 사실 아까 염력을 쓰던 아가씨가 조금만 더 높은 곳에서 저희를 떨어뜨렸다면 저희는 다 죽었을 겁니다.”
백현은 김아람을 떼놓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희를 왜 받아주시는 겁니까?”
“에너지가 필요하셔서 온 것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최태우의 말에 강백현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동생인 강미나가 씩 웃었다.
“내가 다 설명해줬어. 우리가 처한 상황과 위기. 그리고 오해들까지.”
“아-아.”
강백현은 미나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마인드 리딩 능력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어떤 상황이 와도, 어떤 위기가 와도 진짜 편한 능력 같았다.
문이 열리자, 다시 바위로 된 다리가 보인다.
바위로 된 다리를 지나자, 진흙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붉은 인간들이 갑자기 진흙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뭐하시는 겁니까?”
“치료하는 겁니다. 진흙을 받아들여 현무암 합성능력을 높이는 거죠. 피부에 바르는 연고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거인들은 피부가 갈라진 부분에 진흙을 끼얹더니, 각자 다른 동료들의 상처를 보살펴주기 시작했다.
인간이었지만 인간이 아니게 된 자들.
그들의 생활방식은 충격적이었지만 백현은 내색하지 않았다.
‘물고기 인간들하고 똑같아.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진화했듯, 이들도 여기 환경에 적응하려고 진화했을 뿐이야.’
다만 다른 점은, 이들은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
대화가 통한다는 점에서 물고기 인간들과는 달랐다.
진흙을 끼얹은 무리들이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걸어갔다.
거주지는 그냥 흙으로 된 집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공간이었다.
흙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그 물이 떨어지는 흙집에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뭐하는 겁니까?”
“관절이 굳으면 움직이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촉촉하게 유지하기 위해 수분을 공급하는 겁니다. 하루에 한 시간은 저렇게 해줘야 생명활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최형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강백현도 마찬가지였다.
“거인병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했다고 했죠?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만 했습니까?”
“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인이 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이성을 잃는 게 두려웠으니까요. 그래서 괜찮습니다. 거인이 되어 이성을 잃고 동료를 죽이고 잡아먹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저희에겐 생각보다 큰 문제입니다. 이제 곧 촌장님 집에 도착할 겁니다. 힘들어도 조금만 더 참고 걸어주세요.”
최태우의 말에 최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겐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최형우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은 백현이한테 맡기자. 못 배운 내가 말하는 것보다는 백현이가 더 나을 게야.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죽은 줄 알았던 마누라, 자식들이 방주에 살아있을 터였다.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역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이 어린 친구들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최형우는 마음을 굳혔다.
최형우의 생각을 읽은 미나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야. 후후. 내가 너희들 처음 봤을 때는 둘 다 꼬맹이였는데 많이 컸네, 많이 컸어.”
“아니에요. 아저씨.”
“후후후, 후후후.”
최형우는 아이들 뒤에 서서 최태우가 안내하는 촌장의 집으로 걸었다.
다른 집보다 커다란 집이 보인다.
고깔처럼 생긴 흙집.
그 안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붉은 인간이 보인다.
“촌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들어오게. 저들은…….”
살색 피부를 본 촌장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인간이 있었던 건가? 백신을 개발한 거야?”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율리만 박사의 방주 프로젝트가 성공한 모양입니다.”
미나의 기억을 전달받은 최태우의 말에 촌장의 입에서 고함이 흘러나왔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거인들을 정화시키는 데 성공했단 말이야? 그 거인들을 정화시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촌장의 말에 강백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희는 방주에서 나온 사람들이 맞습니다. 다만 정화된 거인이 아닌, 과거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정확히는 유전자 오염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강백현의 대답에 촌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삐그덕삐그덕.
고개는 돌아가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바위처럼 고정된 채, 상체만 움직일 수 있는 촌장.
일행이 이를 눈치챈 듯하자 최태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촌장님은 다리를 잃은 상태로 50년을 살고 계십니다. 거인에게 잃으셨죠.”
“아-.”
촌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는 증명은?”
촌장의 말에 백현이 자신의 앞에 반투명한 막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촌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백현과 미나, 그리고 최형우를 바라보았다.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저희가 인간이라는 증명이 되겠죠. 과거 인간들은 모두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요.”
“과거에서 왔다면서 역사에 대해 왜 이렇게 잘 알고 있지?”
촌장은 궁금증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강미나의 능력에 의해 금방 해소되었다.
“으으으으. 아아아아.”
수많은 기억들이 촌장의 머릿속으로 입력되기 시작했다.
미나의 어릴 적 기억부터 시작해서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여과 없이 촌장에게 전달된다.
미나는 기억을 전달한 후 촌장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혼란스러우실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율리만 박사의 의지를 이어받은 사람으로서 이곳의 평화를 획득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에너지가 필요하다?”
“네. 기왕이면 식량도요. 방주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인류에게는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살 곳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건 불가능해.”
“알고 있습니다. 촌장님의 기억을 읽고 제주도도 결코 안전한 장소는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미나의 대답에 강백현이 소리쳤다.
“미나야!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긴 아무것도 없어. 방주 사람들을 살릴 만한 에너지원이 하나도 없어.”
“미나야! 그럼 여기 올 이유가 없었잖아.”
“나도 몰랐지. 율리만이 다 아는 건 아니잖아.”
미나의 대답에 강백현이 입을 다물었다.
촌장은 미나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을 비교하며 그들에게 해답을 내놓았다.
“방주는 그대로 두면 돼. 방주 안에서는 자급자족이 가능하잖아.”
“하지만!”
“그리고 너희들이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율리만의 협조가 필요한 거고. 안 그래?”
촌장의 말에 강백현이 당황했다.
“율리만의 협조가 필요하다니? 미나야!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당장이라도 율리만은 우리를 과거로 돌려보낼 수 있었어. 지금도 그렇고.”
“뭐?”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안 할 거야. 이곳 세계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절대 우리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야.”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에 강백현과 최형우가 눈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강미나는 확고했다.
“비록 1/3이지만 율리만은 내 인격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제일 잘 알아. 율리만은 절대 이곳 세계를 버리지 않아. 이곳을 살리기 위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어. 자신의 몸이 아메바와 합성되는 것도 받아들였어.”
강백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자, 미나의 목소리는 차츰 격앙되어 갔다.
“그런 상태로 오빠를 살리고 싶어서, 나와 오빠가 행복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고! 이런 지옥 같은 삶이 아니라 행복한 세계에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했는데, 내가 걔를 어떻게 배신해! 어?”
미나의 호소에 강백현은 마음이 상했다.
“미나야. 처음부터 나한테 얘기했으면 좋았잖아.”
“처음부터 이야기했으면? 오빠는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어. 분명이 율리만과 싸워서 그녀를 죽이더라도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겠지. 안 그래?”
미나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그랬을지도 모른다.
미나와 달리 항상 이성적인 판단을 중시하는 자신이니까.
“그래. 알았어. 흥분하지 마.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해해. 그럼 지금이라도 율리만을 설득할 순 없는 거야?”
차분하게 말하는 백현의 말에 미나가 대답했다.
“에너지를 확보해서 움직이면 돼. 코어에너지를 충전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 그 전에 거인들을 다 물리쳐야겠지만…….”
백현은 미나가 아직도 소설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그렇지가 않은데…….
최형우는 남매의 다툼에 고개를 저었다.
위로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나서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강백현이 미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미나!”
“어.”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 네 오빠는 나야. 네가 항상 말했잖아. 공주를 지킬 왕자가 올 거라고. 그게 바로 나라고!”
“오빠…….”
“앞으로 함께 의논하고 함께 풀어가자. 촌장님? 그래서 생각하신 방법이 무엇인가요?”
백현의 질문에 촌장이 오른쪽을 가리켰다.
고깔 모양의 집 오른편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섬의 가운데 불룩 솟은 산과 분지.
그리고 섬을 둘러싼 바다의 모습.
그건 제주도를 뜻하는 그림이었는데, 그 밑에 붉은 인간들이 모여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늘에 있는 것은…….
“제주도를 지배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익룡일세. 거인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의 생명체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제주도에 서식구역을 정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지. 그 녀석들을 처리하면 너희가 원하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오래된 키메라종은 순도 높은 합성 텅스텐을 몸에 지니고 있으니까.”
촌장의 대답에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희가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거인들을 죽여 그들의 몸 안에 든 텅스텐을 추출해 코어에너지를 얻어야 해요. 코어 에너지만이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