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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cm헌터-147화 (147/200)

147화. 율리안의 기억

미나는 율리안이 지쳐있음을 알았다.

인간들은 수백 년을 거인들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북쪽에서 점차 영역을 넓히는 거인.

의식조차 없이 파괴본능만 남은 거인들을 통제하지 못한 인간들의 방어선은 점차 뒤로 밀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저항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런 결과는 오지 않았을 텐데…….

날이 갈수록 거인들은 진화했다.

그들의 몸집이 커질수록 인간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군수물자는 조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무수히 많을 거라 생각했던 탄알도, 포탄도 결국엔 모두 소비되고 말았다.

그에 비해 거인들의 개체 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설상가상, 시간이 갈수록 거인들의 체내에서 텅스텐 함량이 늘어나 일반 무기에 대한 저항력이 점점 강해졌다.

거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크기가 커졌다.

소총으로 제압 가능했던 거인들이 12.7mm 철갑탄에도 저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율리안이 거인이 된 이유는?

미나는 왜 율리안이 거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읽었다.

유전자 오염 때문에? 아니면 왜?

* * *

잠시 후, 백현이 미나를 불렀다.

“미나야. 잠깐 이리 와 봐.”

“어?”

“율리안의 뒤쪽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 그리고 그 구멍 안쪽은 네가 직접 보면 좋겠다.”

율리안의 몸 뒤에 보이는 구멍. 그것은 엄청난 크기의 연료구였다.

그 안에는 이미 삭아서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인간의 뼈, 아니 거인의 뼈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내 생각이 맞는 거지?”

백현의 질문에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전기를 생산하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던 거야.”

김아람이 수북이 쌓인 거인들의 백골을 보며 내뱉었다.

“잔인해.”

얼마나 불태웠는지 살점 하나 남아있지 않을 뿐 아니라, 뼈가 다 시커멓게 탄화되어 있었다.

“잔인하지만, 난 이해해.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그들은 모든 신념을 버린 거야.”

백현의 말에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은 곧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주목해주세요. 미나가 다 설명해줄 거예요.”

“응.”

미나는 율리안이 죽기 직전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방주 내에 전기가 거의 떨어져가는 것은 알고 계실 거예요. 전기가 떨어지면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하죠.”

“그래.”

“방주 아래를 보시면 바퀴가 보일 거예요. 방주는 사실 스스로 이동할 수 있어요. 다만 저 거대한 크기를 움직이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죠.”

미나의 설명에 김만철이 되물었다.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거인들을 태웠다?”

“네. 제압한 거인들을 불태워 그 열을 에너지 삼아 방주를 움직이고, 방주 안에 있는 에너지 코어를 가동했어요.”

미나는 침을 삼킨 후 이야기를 이어갔다.

“군수물자의 고갈 때문에 인간들의 전선은 계속 후퇴했어요. 수십 년에 걸친 거인들의 침입과 등장에 인간은 저항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도망치고 또 도망치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죠.”

다음으로 백현이 말을 이어갔다.

“현재 우리가 있는 장소는 전라남도 여수입니다. 바다와 가까운 대한민국 영토의 끝이죠. 여수에서 제주도까지 인양선을 타면 약 24시간이면 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율리안 일행은 여수까지 방주를 끌고 왔던 거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너지가 고갈된 거죠. 미나야, 맞지?”

백현의 말에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역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어. 대단하네. 통찰력만으로 거기까지 분석한 거야?’

미나는 생각을 멈추고 일행들에게 상황설명을 이어갔다.

“오빠 말이 맞아요. 여수까지 후퇴한 상태에서 생존자는 율리안 외에 2명이 더 있었어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제주도로 후퇴하는 것. 그리고 제주도를 거인들로부터 사수하는 것.”

“결국엔 제주도를 지키고 그곳을 최후의 기지로 삼아 생존하는 게 목표였겠네?”

“응. 맞아. 오빠. 하지만 오빠가 예상하지 못한 게 있어. 제주도에서는 율리안 박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어.”

“뭐?!”

“지금도 안전한데 왜 우리가 사실상 실험실인 방주를 받아야 하냐며 절대 거부했던 거지.”

미나의 말에 백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더 있었다.

“그래도 율리안의 동료들은 방주를 제주도로 이동시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들에겐 방법이 있었죠.”

“방법?”

“응. 자신의 몸을 거대화시키는 거야. 거인이 되는 거지.”

“그런 게 금방 가능할 리가 없잖아.”

“특정 촉매를 사용하면 인간의 몸을 순식간에 거인화하는 게 가능했어. 거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잠시 동안은 이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방주를 부수려던 거인을 막을 수 있었던 거예요.”

미나의 말에 백현이 방주 옆에 기대어 있는 거인의 사체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스스로 거인이 된 거였어. 방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거인이 되었던 거야.’

미나가 설명을 이어갔다.

“2명의 동료들은 촉매를 써서 자신의 몸을 거대화시켰어요. 그리고 방주를 인양선에 올려놓고는 소리쳤죠. 실험체들을 살리라고. 우리가 추격하는 거인들을 다 처리하겠다고.”

“그래서 막았어? 막은 거야?”

“아니요. 율리안의 동료들은 거인들한테 잡아먹혔어요. 처음에는 곧잘 저항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이성을 잃어버리자 효율적인 전투를 할 수 없게 되었죠. 그 다음은 뭐, 저쪽을 보면 아실 거예요.”

공장만 한 크기의 앙상한 뼈다귀가 콘크리트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1km 밖에서 봐도 뚜렷하게 보이는 인간 형태의 뼈.

50m 크기의 거인의 골격 중 갈비뼈와 무릎 부분이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다.

다른 동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쪽 허리가 동강난 거인의 골격이 콘크리트 건물 위에 반쯤 걸쳐져 있고, 부러진 목뼈는 따로 떨어져 땅 위에 거꾸로 놓여 있었다.

“그런데 율리안 박사는 왜 거대화 한 거야? 동료가 희생했다며!”

“맞아 오빠. 그런데 인양선을 움직이려면 에너지가 필요했어. 원래 인양선은 연료가 있으면 스스로 바다로 움직일 수 있었지. 그런데 인양선의 동력이 부족했던 거야.”

“뭐?”

“거인에 저항한 게 몇 년인데? 기름은 진작 다 썼어. 인양선의 연료인 벙커씨유는 군인들이 이미 다 빼냈지. 그래서 율리안은 육지에 있는 거인들로부터 방주를 보호하고자 스스로 거인이 되어 인양선을 옮긴 거야. 거인이 되면 힘이 생기니까. 일시적이지만 방주를 육지로부터 떨어뜨릴 힘이 생기니까.”

모든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 하나의 의문만이 남아 있었다.

“그럼 왜 구멍 앞에서 죽은 거지?”

“율리안은 스스로의 몸을 불태워서 에너지화하려고 했어. 그런데 소각장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이성을 잃을 거라는 걸 알았지. 그래서 방주가 자기 때문에 부서질까 봐 자살한 거야. 저길 봐요! 율리안의 모습을!”

미나의 말에 모두가 율리안을 쳐다보았다.

H형강이 거인의 관자놀이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율리안은 스스로 목숨을 포기했어. 율리만의 실험이 자신으로 인해 실패하지 않도록 마지막 희망을 걸면서.”

율리안의 얼굴에는 선명한 눈물자국이 있었다. 그걸 보며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까지 인류의 희망을 위해 싸웠던 율리안을 위해 묵념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미나는 희망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주도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어요. 그건 인양선의 연료를 대신할 에너지 자원을 투입하는 거죠. 그리고 그 자원은 바로 여기에 준비가 되어 있고요.”

미나가 율리안의 시체를 가리켰다.

“모두 힘을 합쳐서 율리안의 시체를 잘라 소각장에 집어넣으세요. 그리고 그 시체를 불태워 에너지를 얻으면, 그걸 연료삼아 우리는 제주도까지 갈 수 있을 거예요.”

미나의 말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현이 보호막을 날카롭게 만들어 시신을 부위별로 잘라냈고, 김만철은 잘린 부위를 받아 뒤쪽의 소각장 구멍으로 집어넣었다.

김아람도 염력을 이용하여 잘라낸 부위를 소각장 구멍으로 옮겼다.

하나하나 분해되는 거인의 시신을 보며 미나는 율리만의 죽음 그 당시의 기억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

마지막 순간, 율리안은 관자놀이에 H형강을 찔러 넣으며 생각했다.

‘미나야. 모든 것은 너한테 맡길게. 먼저 가서 미안해.’

***

백현 일행은 율리안의 조각난 시체를 연료구에 전부 투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미나가 백현을 향해 말했다.

“나머진 오빠한테 달렸어.”

“뭐? 나한테 달려?”

“오빠가 배운 능력 있잖아. 율리만 박사님이 물려주신 능력.”

백현은 그제야 자신에게 『조종』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렉산더와의 전투 이후 검은 구체가 토해낸 두루마리에 담긴 능력이었다.

‘맞아. 이걸 왜 준 거지?’

백현의 시야에 강화유리로 된 특정한 공간이 보였다.

바로 인양선을 움직일 수 있는 통제실이었다.

‘설마 여기까지 예측했던 거야?’

강백현은 자신의 보호막을 타고 조종석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김아람이 몸을 띄워서 강백현을 따라왔다.

통제실 안에 따라 들어온 김아람이 강백현에게 물었다.

“백현아.”

“응?”

“너 조종할 수 있어?”

“아마도 그럴 거야.”

강백현이 조종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백현의 시야에 통제실 안쪽 기계의 사용방법이 죽 나열되기 시작했다.

‘필요한 모든 정보를 열람할 수 있어. 이곳 통제실도 예외는 아니야. 이 능력에는 미래문명 기계에 대한 모든 설명서가 담겨 있는 거야.’

백현은 일단 조종 능력이 알려주는 대로 빨간색의 소각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작동한 지 너무 오래됐는지, 소각 버튼이 작동을 하지 않았다.

“작동해야 해! 저걸 태워야 제주도로 갈 수 있어!”

김아람은 백현의 말에 다시 물었다.

“다른 버튼은 안 돼? 꼭 그것만 눌러야 해?”

“응. 소각 버튼은 이 버튼이 맞아. 그런데 작동이 안 돼! 어떻게 해야 하지?

“이유가 뭔데?”

김아람의 질문에 백현이 시야 한편의 글자를 읽기 시작했고, 곧 작동이 되지 않는 이유를 파악해냈다.

“불을 붙이려면 가스가 필요한데, 그게 없는 것 같아. 발화를 위해서는 스파크도 일으켜야 하고.”

“그럼 어떻게 해?”

“가스 대용으로 불을 피울 만한 것을 찾아야지. 저걸 어떻게 태우지?”

강백현의 말에 김아람이 또 한 번 물었다.

“태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어?”

“태우기만 하면 되는 거냐고! 가스 필요 없어?”

김아람이 다그쳤다. 그러자 강백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불만 붙이면 돼.”

“알았어. 그 정도는 나 혼자 할 수 있어. 내가 태워볼게.”

김아람이 통제실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는 몸을 띄운 채로 한껏 정신을 집중했다.

‘한 점에 공기를 압축해.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압축하는 거야.’

공기를 압축시켜 열을 만들어낸다.

이제 그 열을 고스란히 율리안의 조각난 시체에 전달해야 했다.

쉬운 것 같지만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일.

김아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짜내기 시작했다.

먼저 좌우로 팔을 크게 벌렸다.

염력을 이용하여 공기를 붙들어놓고 양팔을 좁히며 해당하는 공간으로 공기를 압축하는 것이었다.

강백현은 김아람의 활약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단해! 공기를 압축해서 열을 만든다고? 생각도 못했어.’

김아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공기를 엄청난 밀도로 압축했고, 결국 율리안의 시체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장작처럼 활활 타오르는 거인의 사체.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모두는 환호성을 질렀다.

“움직인다! 움직여! 제주도로 갈 수 있어!”

모두의 협력으로 제주도로 가는 길이 열었다. 인양선이 움직이자 미나가 활활 타오르는 율리안의 사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율리안 박사님, 하늘나라에서 부디 편히 쉬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랑 오빠한테 맡겨요. 우리가 인류를 구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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