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바깥 세계
윤수를 달랜 최형우가 말했다.
“윤수야. 할아버지는 이제 가야 해.”
“어?”
“윤수는 거인 아저씨랑 같이 엄마한테 돌아가. 알겠니?”
“왜?! 어디 가는데?”
최형우의 말에 강백현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윤수는 여기 남는 게 좋겠다.”
하지만 미나의 생각은 달랐다.
“오빠, 아니야. 우리 옆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해.”
“뭐?”
“율리만의 자율통제기능이 곧 정지할 거야. 이곳 세계는 곧 암흑으로 뒤덮일 거고 큰 혼란이 올 거야.”
“하지만!”
“선희 언니는 내가 이쪽으로 데려오도록 말해놓을게.”
미나는 거인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윤수의 능력을 확인했다.
그리고 바깥으로 데려가길 원했다.
그가 있어야만 전투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
누구도 다치지 않아야 하기에, 이를 위해서는 윤수가 꼭 필요했다.
“윤수야. 어떻게 할래?”
“엄마는?”
“데려올게. 약속해.”
“그럼 갈래.”
“그래. 잘 생각했어. 오빠, 됐지?”
미나의 설득에 모두가 동의했다.
“다 가는 거죠?”
“그래.”
3cm의 작은 통로를 통해 사람들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율리만의 모든 시련을 이겨낸 생존자들.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회오리 모양으로 된 원형 철창.
하지만 굳게 닫혀 있다.
“아마 여기가 입구인 것 같아요. 미니맵에 바깥으로 연결된 게 보여요.”
백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의 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익숙한 노랑머리, 서양인의 체구. 페이즈 1이 끝나고 처음 접했던 사람, 바로 찰스였다.
“찰스? 찰스잖아!”
미지의 언어로 말하는 찰스.
녀석은 익살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밑에 뜨는 자막.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신 여러분들, 정말 대단합니다. 모든 페이즈가 끝났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모든 튜토리얼을 끝내고 진정한 영웅의 길로 향하게 됩니다. 준비되셨습니까?》
찰스의 말에 윤수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준비됐어요!”
《후후, 그럼 바로 여러분들을 태초의 전장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저희 3cm 헌터 육성 프로젝트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여러분께 맡깁니다. 여러분들은 진정한 히어로입니다.》
찰스의 목소리가 끝나고 미나가 말했다.
찰스의 언어와 같은 언어.
「찰스, 그동안 고생했어요.」
미나의 말에 찰스가 답했다.
곁에 선 동료들은 미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찰스의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막 덕분이었다.
「아닙니다. 율리만 님이 계셔서 그동안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율리만 님의 의지를 이어가실 강미나 헌터의 무궁한 발전과 생존을 기원합니다. 부디…… 저희 유태인과 게르만 족도 살아남는 세계를 구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꼭 그렇게 할게요.」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찰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오리 모양으로 된 원형 철판이 안에서 밖으로 회전했다. 그리고 커다란 통로를 개방했다.
워터파크에서 타는 것과 같은 미끄럼틀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기만 지나면 바로 바깥이에요. 잠깐만요. 다들 제 앞에 서세요.”
“어?”
미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통로 옆 조작기에서 거인어로 말했다.
『엑세스 코드.』
그러자 여성의 음성을 한 기계음이 답변했다.
『엑세스 코드 접속 완료. 최종 페이즈를 통과 후 얻은 엑세스 코드를 말씀해주십시오.』
미나는 기계음의 말에 대답했다.
『엑세스 코드 쓰리센티미터헌터.』
『엑세스 코드 쓰리센티미터헌터 확인.』
슈트와 배낭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엑세스 코드 보상으로 슈트 No.55가 제공됩니다.』
『엑세스 코드 보상으로 3일 생존 키트가 제공됩니다.』
미나는 슈트를 받아내며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뭐해요? 저 따라해요. 『엑세스 코드.』”
『엑세스 코드!』
미나의 발음을 똑같이 따라하는 사람들.
『엑세스 코드 쓰리센티미터헌터!』
그러자 그 사람들에게도 슈트와 생존 키트가 제공되었다.
“갈아입어요. 슈트를 안 입으면 유전자 변이에 노출될지도 모르니까 꼭 갈아입어야 해요. 호흡만으로도 오염되니까요.”
“아-아. 응.”
슈트는 기존의 것과는 달리 심플한 형태였다.
“이거 다른 게 뭐야?”
“목 뒤쪽 경추 부분을 눌러주실래요?”
“경추?”
“네.”
사람들이 손을 목 뒤로 가져다 댔다.
그러자 갑자기 슈트가 얼굴 부분까지 늘어나더니, 얼굴 앞에서 투명한 안면보호대가 내려왔다.
얼굴을 감싸는 나노유리 안면보호대.
시야를 확보하고 외부의 공기를 차단하는 중요한 장비였다.
“공기정화장치가 추가되어 있어요. 이걸 걸치고 있어야 DNA 오염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어요. 만약 슈트가 손상되면 오염에 노출될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요.”
“폭발하진 않는 거지?”
“네. 폭발은 없어요. 없을 거예요.”
“응.”
슈트를 다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영락없는 헌터들.
“이제 내려갈까요?”
“그래. 가자!”
김아람과 강미나, 박윤수와 김만철, 최형우와 강백현.
그들이 미끄럼틀처럼 생긴 통로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구간 구간을 지날 때마다 각 통로가 색을 띠면서 미약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10분 정도 내려가자 드디어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 따스한 태양의 기운이다.
통로를 빠져나온 일행들은 자신이 빠져나온 노아의 방주를 바라보았다.
엄청난 크기.
“우리가 살고 있었던 곳이 바로 저곳이었어?”
“맞아. 생각보다 크지?”
백현의 시야에 거대한 돔형으로 보이는 거대한 물체가 천문학적인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백현의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강백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미나야! 너도?”
“응. 다들 그 느낌 아시죠?”
“아-아. 온다!”
“다들 떨어져! 떨어져요!”
강백현은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작아졌을 때 모든 옷이 훌렁 벗겨졌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지금도 같은 상황이 올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는 것.
남자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나 옷이 찢어지면 민망한 상황이 연출된다.
더구나 강백현의 옆에는 김아람도 있었다.
‘아람이한테는 절대 보여주면 안 돼.’
그건 김아람도 마찬가지였다.
‘아! 어떡해! 어떡해!’
역시나 몸집이 커지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런데 다행히 백현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들의 몸을 감싼 슈트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부피의 확장에 슈트가 비명을 내질렀지만 다행히 신체의 면적만큼 무난히 늘어났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좁은 간격으로 있다 보니 서로 부딪히기 시작한 것.
1제곱미터도 되지 않는 공간에 있던 5명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커지자 민망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악!”
“으-미안! 미안!”
“윤수야 괜찮니?”
넘어진 그들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돌아온 거야?”
“원래 크기로 돌아온 것 같은데요?”
“우와!”
몸이 커진 후의 세상은 확실히 달라보였다.
까마득한 하늘이 이제는 손만 닿으면 닿을 것만 같고, 매일 곤충이나 동물들과 마주칠까 조심스럽게 움직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노란 하늘. 매캐한 연기와 미세먼지. 땅 위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생명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 무서워요.”
“윤수야. 괜찮을 거야.”
“무서워. 아빠! 아빠 안아줘!”
윤수가 김만철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가린다.
윤수는 무엇을 보고 놀랐을까?
돌처럼 굳어진 석상이 있었다.
크기 50m는 넘어 보이는 석상이었다.
자세히 보니 석상은 오랜 세월이 지난 거인의 시신이었다. 방주 옆에 몸을 기댄 채 죽어있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석상처럼 굳은 얼굴에는 안도한 표정이 역력했다.
왜? 도대체 왜?
그러고 보니 방주를 지탱하고 있는 바닥의 끝이 보였다.
인양선 위에 올라와 있는 방주.
그리고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보이는 부러진 크레인.
크레인을 이용해 인양선 위에 방주를 올린 것으로 짐작되는 상황.
방주를 올린 사람은 50m가 넘는 저 거인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거인의 얼굴을 본 최형우가 놀란 얼굴로 강백현에게 물었다.
“백현아. 강 사장님 아니니?”
“아빠요?”
“그래. 이목구비가 똑같잖아. 저 눈썹, 입, 코 아무리 봐도 너희 아버지잖니!”
그런데 미나가 말을 돌렸다.
“저분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아니라니! 똑같은데?”
미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빠가 아니라 오빠예요. 백현 오빠. 미래의 백현 오빠라구요.’
* * *
미나는 5살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해외출장을 다녀온 아버지가 사온 인형.
남자, 여자 바비 인형.
그들은 이란성 쌍둥이로 남자의 이름은 율리만, 여자의 이름은 율리안이었다.
“미나야! 아빠가 인형 사왔다!”
“응! 오빠! 아빠가 인형 사왔어. 인형놀이하자!”
“귀찮은데!”
“히잉! 놀아줘! 놀아줘! 놀아줘!”
“귀찮다니까!”
백현은 원래 인형놀이를 싫어했다.
그런데 혼자 놀면 재미없다며 울고 있는 동생을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같이 놀아줘. 로봇 사줄게.”
“아빠! 로봇 말고 자전거.”
“그래. 자전거 사줄게. 동생이랑 사이좋게 놀아야지!”
“응. 알았어.”
9살의 백현은 어쩔 수 없이 동생과 놀게 되었다.
“오빠가 얘 꾸며줘. 난 얘 꾸밀게.”
“내가 왜 여자 인형을 꾸며야 되는데?”
“내가 남자 인형을 좋아하니까 그렇지. 대신 드레스는 나 줘. 오빠는 턱시도 줄게.”
“야! 여자가 드레스 입고, 남자가 턱시도 입는 거야.”
“아니야! 그건 내가 정해. 오빠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미나가 언제나처럼 떼를 썼기에, 백현은 여자 인형에 턱시도를 입혔다.
“이제 결혼식!”
“어?”
“빨리 맹세해.”
“뭘 맹세해?”
“그거 있잖아. 율리안은 평생 율리만을 지켜주겠다고!”
“반대 아니야? 율리만이 율리안을 평생 지켜야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 * *
피식 하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어찌 보면 자신과 다른 차원의 존재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실험체 삼아 여기까지 끌어왔던 것.
인간을 증오하고 싫어했던 자신과는 완전 반대였던 두 존재를 생각하며 미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한테 그런 기억을 심어준 건가요? 율리만 박사님!’
그러나 이 모든 비밀을 미나는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다.
끔직한 경험과 역사를 모두와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오빠, 여기 위치가 어디야?”
미나는 미니맵 능력이 있는 백현에게 물었다.
“여수.”
“여수?”
“응. 전남 여수 지역이야. 여수 부둣가에서 600m 정도 떨어진 해상에 위치한 곳 같아.”
“멈췄어. 원래 방주는 지금 제주도에 도착했어야 해요. 그래서 전력을 공급받았어야 하는데! 왜 멈춘 거지?”
슈트를 입은 미나가 죽은 거인의 몸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죽은 자의 기억을 훑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김아람이 미나를 도왔다.
“가만히 있어. 내가 올려줄게.”
“네 언니.”
김아람의 도움으로 미나는 50m 크기로 커진 거인의 머리까지 올라갔다. 뇌를 향해 손을 뻗어 죽은 자의 기억을 엿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 멈춰버렸는지 알게 되었다.
율리안은 최후를 앞두고 모든 에너지를 써서 방주를 제주도로 보낼지, 아니면 남은 에너지를 전부를 사용해서 생존에 필요한 전력을 충전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도망이 아니라 생존을 택했어? 율리안 씨. 아니 오빠!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왜 그랬던 거야?’
미나는 자세한 경위를 알아보기 위해 율리안의 기억을 다시 한 번 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