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데이터 아일랜드의 비밀
강백현이 과거라는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과거로까지 와서 우리를 데려왔다고? 과거로 갈 기술이 있다고 해도, 과거를 바꾸면 미래도 바뀌는 거 아니야? 우리한테 왜 이런 실험을 하는데?』
『그게 말처럼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처음에는 타임 패러독스를 염두에 두었지만, 타임 패러독스는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한 장면이 바뀐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왔던 미래가 바뀌진 않아요. 그저 새로운 갈래의 미래가 펼쳐질 뿐이죠. 그걸 여러분들은 평행우주라고 부를 겁니다. 다른 말로는 패럴렐 월드라고도 하죠.』
강백현은 율리만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율리만의 외관이 동생인 미나만 아니었다면 당장 주먹을 날렸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진정해야만 했다.
『그럼 우린 뭐야? 너희한테 이용당한 거야? 그런 거야?』
『이용당했다면 이용당한 거겠죠.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달리 보면 멸종위기에서 구해줬다는 말도 맞을 것 같네요.』
강백현은 분노가 치밀었다.
인간들을 도구처럼 생각하는 율리만의 생각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율리만은 그런 강백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그 분노의 감정, 익히 예상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각오는 했습니다만, 조금은 진정해주십시오.』
『진정하게 생겼냐고! 내 동생 얼굴이나 뒤집어쓰지 마, 이 망할 새끼야!』
강백현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율리만을 타격하고자 도약했다. 그러나 앨버트가 강백현의 도약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앨버트! 뭐하는 거야?』
『기다려 봐. 율리만, 당신은 우리들을 수백 년간 지배하고 있었어요. 도대체 이유가 뭐였죠?』
앨버트의 질문을 들은 율리만이 자신의 외관을 미나가 아닌 백발의 남성으로 변형시켰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들은 저와 율리안 박사의 실험에 말려들었습니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방주 바깥은 초대형 거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니까요.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표본이 필요했습니다. 당신들의 피와 머리카락 등 신체를 이용하여 슈트를 개발하고, 유전자 덩어리로 능력을 전달할 수 있는 두루마리를 만들었습니다. 키메라를 만들었으며, 제 유전자와 합쳐서 제 명령을 따르는 구체들을 만들었죠.』
백발 남성의 말에 앨버트가 오열했다.
『도대체 왜? 그냥 여기 살면 되잖아요. 방주면 안전한 거 아닌가요?!』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40일 후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축소한 공간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겠지만, 더 이상 자가발전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인공태양도 인공강우도 내리지 않는 죽음의 공간이 될 겁니다. 일단 저의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율리만이 구체를 통해 녹색거인을 보여주었다.
강백현과 앨버트가 쓰러트린 그 거인이었다.
『당신들이 쓰러트린 거인은 1등급 거인입니다. 키 10m짜리 초소형 거인이죠.』
『초소형?』
강백현은 율리만이 보여주는 거인의 크기에 입을 다물었다.
《거인 등급표》
15m 이하 : 1등급.
15m 이상 20m 이하 : 2등급.
20m 이상 25m 이하 : 3등급.
25m 이상 30m 이하 : 4등급.
30m 이상 40m 이하 : 5등급.
40m 이상 50m 이하 : 6등급.
50m 이상 70m 이하 : 8등급.
70m 이상 100m 이하 : 9등급.
100m 이상 : 10등급.
100m가 넘는 거인들이 있다고? 그들을 상대하라고?
강백현은 당황스러웠다.
『저것들을 어떻게 상대하라고! 미친 거 아니야?』
『네. 확실히 미쳤습니다. 저는 율리안 박사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승리를 위해 평생을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저와 율리안 박사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했습니다. 위족으로 움직이는 단세포생물 아메바와 저의 원래 몸을 합쳐 키메라가 되어버렸죠. 당신들이 저를 부정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 진심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메바 세포와 결합한 키메라.
세포 하나하나에 데이터를 저장하는 기술.
본래는 인간이었던 자신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단세포 생물에 자신의 기억을 저장하고 그것을 배양하며 결합과 분리를 반복, 수백 년을 살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죽은 인간이 몇 명인데,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다.
『네가 죽인 인간들은? 너 때문에 죽은 인간들은 어떻게 할 건데?』
그때 율리만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갑자기 밖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율리만이 두 사람을 행성처럼 생긴 구체가 있는 곳으로 다시 이끌었다.
행성이 회전하며 유리벽 안의 얼음이 녹고 있었다.
그 얼음 안쪽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결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
거기에서 강백현은 죽은 동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복자 할머니, 김진철 아저씨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죽은 자들은 제 아메바 세포와 결합시켜 동결시켜놓았습니다. 지금은 전력이 얼마 남지 않아 이들을 되살릴 수 없겠지만, 제주도에 도착하면 필요한 전력을 얻을 수 있겠지요.』
『다 살릴 수 있다고?』
『네. 전 이미 2018년 기준으로 70억 모든 인구에게 제 아메바 세포를 침투시키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홀로그램 메시지는 제 아메바 세포가 지원하는 생존 보조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텅스텐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외에는 충분히 생존 프로그램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지금 백현이 있는 곳은 노아의 방주.
그가 보는 게임시스템 같은 능력은 율리만의 아메바 세포가 지원하는 생존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거인들은 텅스텐 때문에 홀로그램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검은 구체를 활용해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통제했던 거고.
『이 모든 게 잘 풀리면 지구로 돌아온 여러분들은 모두 원래대로 되돌려서 보내드릴 생각입니다. 물론 제 임의의 판단으로 허락 없이 여러분들을 데려온 것은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단 한 번만 절 믿어주신다면 모든 게 끝난 후 여러분들을 과거로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의 미래를 지켜주세요.』
어떻게 보면 율리만 이 자식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었을까?
녀석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백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체를 알면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설마 미나는 아니겠지? 아니야. 묻지 말자.’
율리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세포 생물과 합성한 키메라일 뿐.
그래. 거기까지다.
그러나 물어볼 것이 한 가지 남았다.
『크기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네. 그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다만 유전자 오염 때문에 안전한 장소에서 슈트를 입는다는 전제 하에만 가능합니다.』
『그래. 알았어. 믿을게.』
죽은 사람들을 보았을 때의 고통을 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되살려서 다시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백현은 안도의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율리만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납득하게 된 것은, 상대가 조금이나마 인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앨버트는 그렇지 않았다.
앨버트가 율리만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율리만이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앨버트! 뭐하는 거야?』
강백현은 앨버트를 향해 소리 질렀다.
앨버트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애당초 우리는 실험체였다는 거잖아. 우리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거잖아!』
쓰러진 율리만은 3개로 분리되었다.
강미나의 모습도 있고, 할아버지의 모습도 있고. 갓난아이의 모습도 있었다. 그러다 3개의 분리된 신체가 이내 하나로 합쳐졌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나의 상체, 거기에 하체는 누군지도 모를 아이의 모습을 한 율리만이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진정하지. 앨버트! 나한테는 너희들은 자식 같은 존재였어.』
『자식 같은 존재? 지랄 떨지 마! 40일 뒤에 우린 어떻게 되는데? 넌 처음부터 인간의 생존만 생각한 거잖아! 우리는? 우리 20만 거인들은?』
풀리지 않는 오해.
하지만 그를 막아서는 존재가 있었다.
『그만해요!』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에 앨버트가 움직이질 못한다.
거대한 거인뿐 아니라 많은 수의 인간들이 보였다.
강백현은 그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했기에 시선을 돌려 목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미나? 미나야?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응. 오빠 잠깐만!』
미나가 마인드 리딩 능력으로 앨버트의 정신을 황폐화시켰다.
이어서 버키가 주먹으로 앨버트의 복부를 타격해서 그 움직임을 봉쇄했다.
강미나는 앨버트를 기절시킨 후, 강백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야. 건강하네.”
“응. 너도.”
할 말은 많았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강백현은 미나의 뒤에 보이는 친근한 얼굴에 눈물을 흘렸다.
박윤수와 최형우 아저씨.
“엉아! 엉아!”
“그래. 윤수야.”
“백현이, 건강해 보이네.”
“네. 아저씨도요.”
거기에 김만철.
“백현아, 괜찮지?”
“네! 형!”
“이제 형이라고 불러주는 거냐?”
“넵!”
그리고 김아람도.
“잘 지냈어?”
“그래.”
“혼자서 여기까지 온 거야? 대단하다. 대단해.”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 아! 아람아, 너희 엄마, 아빠도 다 살아계셔. 여기 주변을 봐!”
백현이 유리벽 안에 빼곡히 들어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들 곁으로 검은 구체들이 접근, 찾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를 보여준다.
최형우 아저씨의 아내는 구체의 행성을 기준으로 45m 아래에, 아람이의 어머니는 구체를 기준으로 위쪽 50m 지점에 있었다.
김만철의 형인 김진철과 형수인 윤진옥은 행성구체 바로 옆에 있었고, 그의 친아버지는 제일 하단인 지하 400m 지점의 유리벽 안에 동결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검은 구체가 보여주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편, 미나는 율리만에게 다가갔다.
『왔니?』
『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마인드 리딩을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미나. 그녀는 율리만이 이제껏 왜 자신을 조종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거죠?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죠?』
『그래. 난 미래예지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네. 미래에서 왔으니까요.』
『응. 근데 참 의외였어. 난 네가 그렇게 반응할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당신의 생각을 진작부터 읽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더라도 좋은 방법이 많았을 거예요.』
『내가 아는 건 이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네. 이해해요. 율리만 박사님, 당신은 또 다른 패럴렐 월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미나의 말에 율리만이 다시 미나의 모습으로 변했다.
『1회차에서의 율리만은 데이터 아일랜드에 누군가가 오기를 계속해서 기다렸어. 하지만 끝내 오지 않았고, 결국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한 방주는 기능을 멈추었지.』
율리만의 설명에 미나가 보조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10년 후, 한 여자와 청년 하나가 찾아오죠.』
『그래. 꼬마 윤수랑 너.』
『네. 그리고 저는 서서히 죽어가는 율리만에게 빌겠죠. 윤수가 배운 능력으로 과거를 되돌리자구요. 윤수가 가진 과거의 자신과 신체를 바꾸는 능력에 당신이 가진 거대한 에너지, 그리고 제가 가진 타인의 생각을 읽는 마인드 리딩 능력.』
『그래. 나는 너이기도 하고, 윤수이기도 하고, 율리만이기도 해. 3명의 인격결합체니까.』
알 수 없는 둘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미나는 율리만의 기억을 통해 미래의 미나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3명의 인격을 섞어서 만들어진 율리만은 변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인간을 다시 한 번 몰살시켰다.
다만 그때와는 달리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 채로.
마인드 리딩 능력을 통해 죽은 자들도 새로운 몸으로 기억을 옮겨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역할은 이제 끝났네.』
미나와 율리만 박사.
엇갈렸던 역사가 드디어 한 곳에서 만났다.
미나는 이 시련 자체가 수백 년간 축적한 지식을 자신에게 전달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네. 고생하셨어요. 당신의 기억이 저한테 전해졌으니, 이제 모든 걸 저에게 맡기세요.』
『응. 기나긴 시간이었어.』
율리만은 방긋 웃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모습을 액체로 돌려 구체의 행성에 흡수시켰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구체.
그걸 보며 강미나가 일행에게 당부했다.
“이제 곧 외부로 나가게 될 거예요. 슈트 꽉 끼워 입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