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소중한 사람
백현의 기억 속 아버지는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백현이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훌륭한 사람. 아빠처럼 존경 받는 사람.”
“아빠는 존경 받는 사람이 아닌데? 그냥 사장님일 뿐인데?”
“아니야. 형우 아저씨가 아빠는 존경 받는 사람이랬어.”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이 기억나는 건 왜일까?
백현의 아버지는 항상 따뜻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럭무럭 자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
그 눈을 보고 있으면 항상 평온해졌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괴물은 도대체 뭐지?
녀석은 식칼을 든 채 다가오며 말했다.
“왜? 무서워서 몸이 안 움직여? 그런 거야? 『아빠는 그럴 리 없어! 아빠가 날 죽일 리 없어.』 그래서 쫀 거야?”
남자의 식칼이 강백현의 가슴을 푹 찔렀다.
칼날이 쑤욱 들어갔다.
백현의 아빠를 쏙 닮은 남자는 상대의 죽음을 확신하고 조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180도 회전했다.
땅이 위를 향하고, 하늘이 아래를 향한다.
딸깍!
‘어?! 어?! 어?!’
남자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더니, 중력에 의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남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백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죽은 거야?’
옆으로 돌아간 풍경에는 목에서 피분수를 터트리며 쓰러지는 자신의 몸이 있었다. 그리고 상대의 손에는 어느 새 자신이 사용했던 식칼이 들려있었다.
남자는 머리만 남은 채로 강백현에게 물었다.
“이해할 수 없군. 네겐 가장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나?”
강백현이 식칼을 들고 걸어오며 질문에 대답했다.
“맞아.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은 아빠였어. 분명 그랬지.”
씁쓸한 표정을 짓는 강백현. 백현은 알면 알수록 녀석들이 불쌍해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날 죽였지? 너희 인간들은 원래 이렇게 못하잖아. 소중한 존재는 못 죽이잖아.”
“외모가 똑같다고 해서 같은 사람일 리가 없잖아? 너희는 도대체 뭘 테스트하려는 거야? 이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하는 건데?”
“…….”
“대답을 못하겠다는 거야? 그럼 너한텐 볼일 없어.”
강백현이 미련 없이 식칼을 들어 굴러다니는 얼굴을 찔렀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아빠와 똑같은 모습이던 머리가 액체로 변하여 바닥에 고이고 말았다.
백현은 사람 목숨을 애들 장난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는 녀석들에게 질려버렸다.
페이즈 1부터 지금까지 저들은 항상 인간을 핍박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간만이 아니라 거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데이터 아일랜드, 녀석은 어떤 데이터를 모으는 걸까?
이제까지 모은 데이터로 뭘 하려는 걸까?
그때 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버트의 목소리였다.
『사부님! 왜 이러세요? 사부님!』
앨버트의 앞에 그의 사부가 보였다.
한때 신디아 대륙 최강자였다는 그의 사부가 앨버트를 향해 목검을 겨누고 있었다.
『앨버트! 넌 아직 멀었어. 나를 이기지 못한다면 여기를 빠져나갈 수가 없을 거야.』
『사부님, 검은 동료를 지킬 때만 휘두르며, 동료에게 겨누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거인의 룰에도 위배되지 않습니까?』
사부의 목검은 날카로웠다.
검의 끝이 앨버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결과, 앨버트의 뺨에서 피분수가 흘러나왔다.
그때 강백현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쟤는 네가 알고 있는 사부님이 아니야. 나타샤! 날 던져줘!』
『응.』
나타샤가 백현을 손에 움켜쥐고 앨버트의 사부가 있는 쪽으로 힘껏 던졌다.
강백현은 녀석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검은 구체로부터 빼앗은 식칼이 정확히 녀석의 눈을 찔렀다.
조그마한 식칼이지만, 상대의 시야를 빼앗기엔 충분했다.
『빨리 마무리해!』
『아……. 응.』
앨버트의 다리가 상대의 목을 강타하자, 녀석의 머리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더니 곧 이어 움직임을 멈춘다.
쉬리릭!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거인의 몸체를 이루었던 물질이 검은 액체로 변화했다.
겨우 승리한 앨버트를 보며 나타샤가 물었다.
『앨버트님!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설마 추억팔이 하신 건 아니시겠죠?』
『벌써 다 처리한 거야?』
『그럼요. 금방 끝냈죠.』
강백현은 그런 나타샤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루살이가 나와서 스스로 죽은 거잖아. 딱히 한 것도 없으면서.’
- 오로로로! 오로로로!
‘너도 잘한 거 없거든? 단순한 놈! 가장 소중한 게 겨우 생선이었냐?’
페이즈 2가 어이없이 끝나고, 바로 페이즈 3가 시작되었다.
《히든페이즈 3, 진실의 철창》
이제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슬슬 진짜 목적을 알려드릴 때가 온 것 같군요. 해당 생물을 죽이세요. 성공하면 출입구가 열립니다.
페이즈 3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와 함께 거대한 진동이 섬 전체에 울려퍼졌다.
지이잉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거대한 철창이 올라왔다.
백현은 앨버트의 어깨에 올라 끝없이 올라가는 철창을 바라보았다.
황당했다.
앨버트의 몸 크기를 훌쩍 넘는 크기.
엄청난 두께의 철기둥.
그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르릉. 그르르릉.
거친 울음소리에 백현은 철창 안쪽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동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형태가 너무나 인간을 닮았다.
두 개의 팔, 두 개의 다리, 팔과 다리에 듬성듬성 나 있는 털까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인 녀석의 크기는 앨버트를 압도했다.
거인보다 큰 거인. 피부색은 파란색인 앨버트와 달리 녹색이었다.
녹색 인간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이건 너무하잖아.』
앨버트보다 커다란 거인, 거인의 키는 무려 10m가 넘었다.
녀석은 엄청 흥분한 상태였다.
철장 안에 갇혀 산 지 오래된 듯 많이 야윈 모습.
햇빛이 너무 따가워 양팔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거대화 능력인가?』
『아니야. 그랬다면 내 능력의 봉인도 함께 풀렸겠지.』
백현의 손에서는 여전히 보호막이 생성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거대한 몸집을 가진 거인은 아무 능력도 쓰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앨버트가 당황하며 말했다.
『믿기지가 않아. 백현, 넌 우리를 볼 때 이런 느낌이었던 거야?』
너무나 거대한 크기에 압도된 앨버트가 뒷걸음질 쳤다.
나타샤도 마찬가지.
고작 1.6m의 거인 앞에 10m 이상의 초거인이 등장했으니 당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초록 거인은 눈앞의 앨버트와 바다사자 오로로를 보자 광분하며 철창을 흔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초록 거인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지능이 너무 낮았고 패턴은 단순했다.
먹이가 보이면 먹는다.
졸리면 잠을 잔다.
화가 나면 고함을 지른다.
기분이 좋으면 웃는다.
단순한 패턴 때문일까? 두려움은 오히려 배가 됐다.
‘지능이 없으니까 오히려 더 무서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초록 거인은 광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쉬지 않고 철창을 흔들며 눈앞의 앨버트와 바다사자 오로로를 향해 침을 흘려댔다.
거인의 손에서 철창이 오래 버틸 것 같지가 않았다. 철창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 그걸 보며 앨버트가 의견을 냈다.
『일단 중앙으로 뛰자.』
『중앙? 거기에 뭐가 있는데?』
『출입구가 있다는 소릴 너도 같이 들었잖아. 나타샤! 뛰어! 도망쳐!』
『네. 앨버트님!』
앨버트의 지시에 모두가 중앙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가도 평평한 땅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쿵쿵쿵쿵.
강백현은 너무나 두려웠다.
난생 처음 보는 초거인.
아파트 3층 높이 크기의 거인은 지상에서 가장 세다는 코끼리나, 하마, 코뿔소보다도 컸다.
더구나 녀석은 성격이 매우 포악했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카카카카오오-우. 카카카카오우-우.》
녀석이 결국 철장을 벌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보더니 앨버트와 나타샤가 있는 쪽으로 거침없이 뛰기 시작했다.
『나타샤! 내 뒤로 도망가!』
『앨버트님!』
『도망가서 전해. 무기 들고 들어오라고. 펫은 대동하지 말고, 무기 들고 다들 섬으로 들어오라고. 그동안 내가 버틸 테니까! 버틸 테니까!』
앨버트는 일단 자신이 시간을 끌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강백현이 소리 질렀다.
『바보 같은 놈, 여기서 도망치면 검은 구체가 죽이잖아. 몰라?』
『아, 생각 못했어.』
앨버트는 초록거인을 유인했다.
그러나 녀석은 앨버트의 도발에 넘어오지 않았다.
곧바로 나타샤를 향해서 뛰기 시작했다.
나타샤는 당황해서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나타샤보다 초록 거인이 5배는 빨랐다.
초록거인이 나타샤의 머리끄덩이를 잡더니 이리저리 휘둘렀다.
나타샤는 단 한 방에 걸레짝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나타샤-. 나타샤-.』
나타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거인 특유의 푸른 피가 흘러나왔다.
『이대로 두면 나타샤는 죽고 말 거야. 얼른 거인을 무찌르고 지혈을 해야 해.』
『어떻게 거인을 무찌르라고?』
그때 2.5m 크기의 바다사자 오로로가 땅바닥에 배를 튀기며 거인에게 접근했다.
물가가 아닌 지형이라 바다사자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녀석은 두려워하면서도 필사적으로 거인에게 대항했다.
『오로로! 도망가! 너라도 도망가. 도망가라고! 인마!』
하지만 오로로는 계속해서 초록거인에게 대항했다.
거인의 발을 물고 놓치지 않는 오로로의 패기는 인정할 만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초록거인은 오로로를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그 위로 도약했다.
그리고 체중을 실은 팔꿈치를 바다사자의 몸에 내리쳤다.
- 빠각!
부드러운 바다사자의 몸체에서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려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오로로의 얼굴이 순식간에 뭉개진다.
빠드득빠드득.
초록 거인이 오로로의 갈색 피부를 파란 이빨로 물어뜯었다. 그러자 오로로의 피부가 찢어지며 안에서 엄청난 양의 기름과 피가 흘러나왔다.
오로로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미 팔꿈치 공격에 당한 탓에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 오로로로로. 오로로로로.
밝기만 했던 녀석의 울음소리가 힘없이 울렸다.
- 오로로로로, 오로로로로.
앨버트는 으르렁거리며 녀석을 향해 돌진하려 했지만, 갑자기 백현의 발차기가 자신의 뺨을 때리는 바람에 발걸음을 멈췄다.
『정신 차려!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니야.』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이대로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데?』
강백현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피지컬 차이가 엄청났다. 자신이 능력을 쓸 수 있더라도 녀석을 이길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처음에는 녀석의 입이나 코를 통해 장기에 침입하는 것도 생각해봤다.
악어인간을 처리할 때 그렇게 했으니까.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더구나 지금 녀석의 크기는 악어인간의 5배는 된다.
신장만 무려 10m.
앨버트조차도 녀석에겐 갓난아이만도 못한 크기.
그때, 백현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그래. 그거야. 이거야.’
강백현은 앨버트에게 작전을 설명했다.
『뭐?!』
『이건 원래 이 방법밖에 없는 걸 거야. 능력의 봉인, 거기에 정상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초대형 거인의 등장. 하지만 정말 그럴까? 율리만이라는 녀석이 정말 답도 없는 시련을 내렸을까?』
『그래. 네가 말한 방법밖에 없어. 그것밖에 없겠어. 하자. 하자고!』
앨버트가 달음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망치는 앨버트를 향해 초록 거인이 추격에 나섰다.
이를 보며 강백현이 웃었다.
‘역시 머리가 좋아야 해. 단순하면 죽는 거야.’
히든 페이즈 1. 가시 함정.
해당 구간에서 강백현이 재빠르게 역산을 시작했다.
소수가 무엇인지 구별하고, 해당하는 칸을 바로바로 알려주는 백현의 지시에 앨버트가 자신이 밟아야 할 칸에 정확히 발을 딛는다.
초록 거인은 소수의 개념을 몰랐다.
칸이 녹색, 빨간색, 파란색, 회색으로 구별되어 있는데도 아무 의심 없이 아무렇게나 발을 내디뎠다.
《쿠웨엑! 쿠웨엑!》
갑자기 발바닥에서 올라오는 마그마와 같은 열기.
《쿠에엑? 쿠에엑?!》
곧이어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지독히도 차가운 냉기.
《쿠루루루룩! 쿠루루루루룩!》
이어서 어떤 피부라도 녹여버릴 맹독의 기운이 발바닥에 퍼지기 시작했다.
촤라락촤라락! 거인이 회색 칸을 밟을 때마다 발밑에서 금속 가시가 뚫고 나온다.
엄청난 고통에 초록거인이 울부짖었다.
몇 번을 울부짖었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앞으로 쿵 하고 쓰러진 거인의 신체가 불타오르고 얼어붙었으며 독이 퍼진 상태로 금속가시가 수십 번 넘게 찌르고 빠지길 반복했다.
결국 강백현과 앨버트는 히든페이즈 1, 가시함정을 이용하여 초록거인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히든페이즈 3, 진실의 철창을 클리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