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제이미 함장의 맹세
축제가 끝나고 제이미 함장은 앨버트에게 말했다.
『앨버트 전하, 잠시 시간 좀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요?』
『네. 12층에 창고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잠깐 시간을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이미의 말에 앨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함장. 같이 이동할까요?』
『아닙니다. 저 먼저 가 있겠습니다. 전하는 5분 뒤에 오시죠.』
제이미 함장이 나가고, 강백현은 머쓱한 얼굴을 한 앨버트를 보며 씩 웃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제이미가 부르는 호칭이 변했잖아.』
『호칭이 변했다고?』
『응. 못 느꼈어? 본래 널 앨버트 님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전하라고 부르잖아. 그 느낌 몰라?』
『거기까진 신경 못 썼네. 그런데 왜? 그게 웃을 일인가?』
강백현은 대답 없이 그저 미소로 일관했다.
타인의 행동이나 말투를 자세히 살피게 된 것은 미나 때문이었다.
미나의 병간호를 하며 생긴 버릇으로, 시시때때로 변하는 동생의 감정에 대응하려면 현재 기분이 어떤지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일종의 통찰력이 생겨났다.
제이미 함장은 오늘 앨버트의 연설을 듣고 앨버트를 황제로 받아들일 생각이 확실해진 듯했다.
『준비되셨습니까?』
나타샤가 문을 살짝 열더니, 앨버트에게 되물었다.
『응.』
『가시죠!』
12층의 창고.
‘STAFF Only’라고 쓰여있는 팻말이 인상적이었다.
창고 안에는 수십 년은 된 듯한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전하,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송구스럽지만 전하라면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하고 이곳으로 오시라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강백현은 앨버트의 머리카락 사이에 들어가 눈앞의 거인들을 관찰했다.
50대 선장에 백발의 60대 선원, 20대 요리사와 40대의 지배인까지. 신분을 막론하고 다양한 거인들이 모여 있었다.
강백현은 그들에게서 공통의 특징을 찾아보았지만 실패했다. 결국 앨버트의 머리카락에 숨어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전하, 사실 제 할아버지는 전하의 아버님과 마찬가지로 이 화물선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랬나? 미안하게 됐군.』
『아닙니다. 다 지나간 일인데요. 할아버지는 이 화물선의 초대 함장이셨습니다. 지금은 화물선이지만 50년 전에는 황족과 귀족을 위한 크루즈로 이용되고 있었죠. 일단 이쪽을 봐주시죠.』
제이미는 ‘STAFF Only’라고 쓰여있는 입구를 가리켰다.
『여기를 출입금지시킨 이유는 단 하나, 저희 선조들이 마지막 날 모여서 조촐하게 회식을 했던 장소가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앨버트의 질문에 제이미 함장이 답했다.
『저 또한 50년 전 선조들과 함께 위대한 항로를 다녀온 멤버였습니다. 그때는 겨우 5살배기 꼬마였죠.』
『데이터 아일랜드를 다녀온 적이 있다?』
『네. 정확히 말하면 입구까지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저는 배에서 내리진 않았으니까요. 물론, 그래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죠.』
앨버트는 제이미 함장의 사정을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기 있는 선원들은 전부 그 여정에서 가족을 잃거나, 아니면 그 여정에서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저희는 매 항해를 할 때마다 이곳에 모여, 선조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포도주와 말린 고기를 먹죠.』
『그래서 연회장에 포도주와 말린 고기를 제공한 건가? 그런 이유가 있었던 줄은 몰랐군.』
제이미의 말에 앨버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강백현은 마음이 먹먹해졌다.
거인들은 선조로부터 후대까지 이어져오는 유대감을 지켜내고 있었다. 삶과 죽음을 통해서 결코 잊지 않았다.
인간과 다르지 않은 거인들의 모습은 백현으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제이미는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비록 거짓이어도, 저희는 그런 말을 들었기에 잠시나마 그간 속으로 삭여왔던 울분을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
제이미 함장의 말에 앨버트가 자신의 코트를 건넸다.
있을 수 없는 일.
황제가 자신의 코트를 건네다니.
제이미는 앨버트 앞에서 참았던 눈물이 쏟아냈고, 그런 그에게 앨버트가 진심을 전했다.
『먼저 가겠다는 말, 거짓 아니에요. 제이미 함장, 난 이제까지 그대들의 마음을 의심했어요. 그대들도 나와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이라는 것을 간과해버렸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할게요. 제이미뿐만 아니라 모든 분들을 대신해서 나 앨버트가 제일 먼저 율리만 섬에 들어갈 겁니다. 단 한 명도 희생시키지 않을 겁니다.』
황제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제이미. 그리고 선원들.
그중 60대 백발의 선원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황제의 진면목을 확인한 후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전하, 율리만 섬의 출입구는 중앙에 있습니다.』
『중앙?』
『네. 저는 50년 전, 배 안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나팔수였습니다. 나팔을 불어 황제의 명령을 선봉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죠. 그들은 출입구를 발견하면 검은 연기를 피우기로 했어요. 생존자의 수에 맞추어 검은 연기의 개수를 늘리기로 했습니다.』
『계속 해봐요.』
『이틀이 지나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섬 중앙 부분이었습니다.』
『아, 출입구를 찾는 데 성공했군요.』
『네. 하지만 에셀 황제는 배에서 내리지 않았습니다.』
『네?』
『생존자가 겨우 10여 명 남짓이었거든요. 270명이 내렸는데 검은 연기는 겨우 하나였습니다. 10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증거였죠.』
『설마!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내리지도 않았다고요? 그게 50년 전의 진실인가요?』
백발의 선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디아에서 시도한 최초의 여정은 270여 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끝났다.
성과는 입구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뿐이었다.
제이미는 선원의 말을 듣고 그날의 기억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50여 년 전의 여정의 실패가 황제의 단순한 변심 때문이었다니.
강백현은 그들의 말을 듣고 미니맵을 통해 율리만 섬을 훑어보았다.
다른 것은 전부 볼 수 있는데 율리만 섬만은 미니맵에 잡히지 않았다.
‘텅스텐이야. 그래서 그런 거야.’
텅스텐. 미니맵이 확인할 수 없는 유일한 금속.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금속.
‘역시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어.’
* * *
이른 아침, 데이터 아일랜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호초로 이루어진 수많은 섬들이 주변에 널려있고, 섬 위에는 무수한 갈매기와 바다새들이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아기 새들이 시도 때도 없이 보채자 어미 새들은 쉴 새 없이 새우나 가재 등 작은 먹잇감을 물어왔다.
그런 조류를 노리는 동물도 많았다.
이곳에 사는 뱀은 도망가는 새들을 한 번에 죽이기 위해 강한 독성을 지니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독을 머금은 독니에 한 번만 걸려도 그대로 죽게 된다.
조류들은 천적을 피해 절벽 위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지만, 그런 보금자리는 새끼가 발을 한 번만 잘못 디뎌도 죽는다는 위험이 있다.
그런 먹이사슬은 어디나 존재한다.
바다 속이든, 하늘 위든, 땅 위든, 땅 속이든.
심지어 용암 속에서도 박테리아들이 서로를 잡아먹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곳이 있었다.
모든 게 금속으로 만들어진 섬.
그런 섬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앨버트는 화물선의 트레일러 위에 서서 망원경으로 목표 지점을 바라보았다.
『백현! 네가 확인해 봐. 저거 다 금속 맞지?』
섬은 회색 빛깔을 띠고 있다.
지면이 너무나 반듯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충분히 믿을 만한 섬이 망원경 너머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섬의 재질은 모두 텅스텐이야.』
『텅스텐?』
『응. 텅스텐은 능력을 쓰지 못하게 만들지.』
강백현은 텅스텐으로 만들어진 공간에 있어본 적이 있었다.
페이즈 3가 끝나고 율리만에 의해 천사와 악마의 게임이 펼쳐졌던 엑스트라 페이즈 2. 분명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백현은 저 섬이 지극히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지구로 가는 길이 앞에 있으니까.
미나를 괴롭히던 원흉이 바로 앞에 있으니까.
『난 한번 말한 건 지키는 타입이야.』
『그렇겠지. 넌 나하고 비슷하니까.』
앨버트의 말에 강백현이 대답했다.
그러자 앨버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난 전혀 몰랐는데?』
『나, 엄청 정의롭거든?! 갈까?』
『그래. 가자!』
앨버트가 함장에게 신호를 보냈다.
화물선으로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얕은 연안.
선원들이 화물선에 밧줄로 연결되어 있는 보트를 내리기 시작했다.
『앨버트님! 같이 가겠습니다.』
『전하!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앨버트가 탄 보트에 훌쩍 올라탄 나타샤와 함장 제이미.
앨버트는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제이미는 이제 나이가 55. 그를 전장에 데려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제이미 함장은 남아야죠. 함장이 떠나면 함선은 누가 지킵니까?』
『그건 부함장에게 맡겨두었습니다. 어차피 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전하와 뜻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약하지 않습니다. 나름 바다에서만 50년을 넘게 보냈거든요.』
앨버트는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제이미가 저렇게까지 말하자, 그의 펫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제이미는 화물칸에 있는 자신의 펫을 호출했다.
손가락을 대고 휘파람을 불자 제이미의 펫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달려왔다.
앨버트는 녀석의 귀여움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이미 펫이 바다사자였어요?』
『네. 녀석이 귀여워 보이긴 하지만, 바다에서 녀석을 이길 녀석은 상어 말고는 거의 없습니다. 얼마나 강하면 이름이 바다사자겠습니까?』
제이미가 자신의 펫과 함께 보트에 올랐다.
바다사자가 얼마나 무거운지 보트가 휘청거렸고, 커다란 몸집 덕분에 더 이상 탈 자리가 남질 않았다.
화물선에 실은 보트는 겨우 40개.
각 보트당 정원은 펫의 크기에 따라 3~5명이 한계.
700여 명 중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일부뿐이다.
나머지는 보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앨버트는 그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서 움직였다.
나타샤가 보트에 달린 디젤엔진의 시동을 걸었고, 운전은 제이미가 맡았다.
부르르릉. 엔진의 팬이 돌아가고, 각 보트가 섬에 상륙했다.
앨버트와 의지를 함께할 거인들이 펫과 함께 섬에 올랐다.
잔잔한 파도와 차가운 금속 바닥의 만남.
미끌거리는 텅스텐 재질 바닥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거인과 펫.
강백현은 자신의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은 상황에 긴장을 거듭했다.
『조심해야 할 거야.』
『응. 그래야지.』
『그냥 말하는 거 아니야. 진심이야. 여기에서 펫은 하등 쓸모가 없으니까. 모든 능력이 봉인됐거든.』
그랬다.
하늘을 나는 펫을 타고 섬 안에 들어온 거인들이 갑자기 능력을 잃은 펫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주인과 계약관계로 연결된 펫이 이성을 잃고 주인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누가 명령도 없이 따라오라고 했지? 지시 내리기 전까지는 화물선에서 내리지 마! 나타샤! 제이미! 빨리 통제 해!.』
『네, 전하.』
강백현은 혼란스러워하는 주변 거인들을 보며, 자신과 같이 보트를 타고 온 앨버트와 나타샤, 제이미한테 당부했다.
『이곳에선 펫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주인이 얼마나 펫과 유대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이곳을 통과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판가름 날 거야.』
백현의 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데이터 아일랜드에 입장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주어졌던 모든 능력을 잃습니다.》
《지혜와 용기로 당신이 위대한 지도자임을 증명하세요. 그 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한 펫을 가진 자가 여기서는 목숨을 잃는다.
펫과 강한 유대감을 가지지 못한 자는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다. 오히려 동료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강백현의 말을 들은 앨버트가 미리 준비한 신호탄을 쏘았다.
붉은색 신호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후퇴.
보트를 타고 들어오던 거인들이 뱃머리를 돌려 화물선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제이미 함장은 이성을 잃은 바다사자를 달래느라 열심이었다.
나타샤가 앨버트에게 물었다.
『후퇴는 어떤 의미이시죠?』
『소수만 간다. 검증된 소수. 나타샤, 그리고 나. 이렇게 둘이 되겠지.』
그러자 제이미가 방긋 웃으며 앨버트에게 말했다.
『이거 너무 얕잡아보인 것 같군요. 제 펫인 오로로는 단지 배가 고픈 것뿐이었습니다. 달래주고 밥 먹고 오라고 했으니 10분만 기다려주시면 바로 합류 가능합니다. 오로로! 밥 먹고 와!』
제이미 함장의 말에 바다사자가 대답했다.
〈오로로로로! 오로로로로! 오로로로!〉
기묘한 울음소리와 함께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바다사자.
백현은 예상외의 전개에 긴장한 채로 주변 상황을 시야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