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cm헌터-135화 (135/200)

135화. 위대한 항로

거대한 화물선.

커다란 경적 소리와 함께 증기를 내뿜으며 바다를 가로지르던 신디아의 순례자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앨버트 님, 어떤 것부터 들으시겠습니까?』

함장의 말에 신디아 대륙의 황제 앨버트가 펫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떤 게 좋을까?』

강백현은 잠시 고민했다.

『나쁜 것부터. 좋은 것 들었다가 나쁜 소식 들으면 기분이 엿같거든.』

『나쁜 소식부터 듣자는데?』

앨버트의 말에 함장이 기관실에서 적외선 화면을 가리키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위대한 항로 앞에는 현재 고래 녀석들이 출몰해 있습니다. 항상 이맘때면 멸치 떼가 이곳 위대한 항로를 지나는데, 멸치는 고래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고래는 거인 세계에서 가장 큰 동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탄 화물선에 고래들이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겨우 고래들이 위협이 되나? 우리 화물선이 얼마나 큰데 그걸 신경 쓰지?』

앨버트의 질문에 함장보다 먼저 의견을 말하는 자가 있었다.

『고래들이 아니야. 개체수가 비교가 안 돼. 고래 떼지. 고래만 무려 2600마리. 그 경로에 있는 건 생명체든 아니든 모두 사라질 거야."

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맞습니다. 고래 떼가 멸치들을 다 먹을 때까지 위대한 항로를 지나갈 수 없을 겁니다. 그들과 부딪히면 아무리 신디아 최고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이 화물선이라도 무사하긴 힘들겠죠.』

함장의 말에 강백현이 끼어들었다.

『아르케의 기술력이었으면 충분히 가능했겠지만! 그 말 하려고 했죠?』

본심을 들킨 탓인가, 함장은 당황한 낯빛으로 동문서답을 했다.

『일단은 고래 떼들이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 기간이 약 25일 정도 되겠습니다.』

기술 격차는 단 시간에 극복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것은 가용한 자원을 이용하여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

알버트의 의견은 이러했다.

『25일은 안 돼! 그럼 돌아갈 때 식량이 없잖아. 물론 먹을 것은 물고기를 잡든, 아껴 먹든 하면 되겠지만 먹을 물이 떨어지면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그의 말에 강백현이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담수를 정화할 수 있으면 가능할 텐데……. 삼투압을 이용해서 염분을 뺄 수 있잖아.』

신디아는 기술이 부족하다. 경제적으로도 빈곤하다. 그러나 자존심만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강백현의 말은 간단하게 무시되었고, 앨버트와 함장 둘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쁜 소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이제 좋은 소식을 말씀드려볼까요?』

강백현은 이미 함장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미니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련한 전문 지식은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함장의 말을 기다렸다.

어차피 지금은 자신이 이야기해도 무시할 테니까.

『버마 해협으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뭐? 버마 해협으로 간다고?』

버마 해협은 원래부터 죽음의 해협으로 불리고 있었다.

어떤 생명체든 접근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생명체의 무덤.

『버마 해협은 위험한 항로잖아.』

출입이 제한되기는 했지만 큰 위험은 없는 위대한 항로와는 달리, 항상 포식자들이 우글거리는 곳. 황제를 제외한 그 어느 누구도 통과해본 적이 없다는 곳.

그런데 그 해협이 열렸다니?

『네. 버마 해협은 1년 중 310일은 태풍이 불어 절망의 해협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포식자들이 항상 상주해서 접근하는 모든 생명체를 잡아먹기에 죽음의 해협이라고도 불리죠.』

『그러니 당연히 피해야지. 거기로 어떻게 가?』

『그게 참 웃긴 상황입니다. 1년 중 55일밖에 없다는 맑은 날이 마침 오늘이고, 그곳에서 상주하는 포식자의 정체는 바로 상어고래거든요. 그 고래들은 지금 멸치 떼를 먹기 위해 위대한 항로로 왔고요.』

확실히 함장의 말 그대로였다.

강백현은 함장이 말하는 버마 해협 근처에 거대한 생명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니맵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이만큼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위대한 항로 대신 데이터 아일랜드로 갈 수 있는 지름길, 버마 해협이 열린 겁니다. 이제 폐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저한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앨버트는 제이미 함장의 말에 방긋 웃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그동안 놀려두었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제이미 함장!』

『네. 앨버트 님!』

『당장 버마 해협으로 기수를 돌려! 최대속도로 항해한다!』

『네!』

빵빵! 빵빵!

위대한 항로 대신 버마 해협으로 기수를 튼 화물선이 경적을 울리며 방향을 돌렸다.

선원들은 기관실에 내려가 엔진룸에 연료인 벙커씨유를 최대치까지 집어넣었다.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선원 일부를 돌려 석탄으로 움직이는 보조엔진까지 가동했다.

그러자 화물선은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전진했다.

제이미 함장의 올바른 판단에 앨버트 황제의 결심이 더해져 항해기간을 43일에서 29일로 줄일 수 있었다.

깊은 밤.

앨버트는 너무나 커져버린 의무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과연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도 서지 않고, 위대한 지도자의 길에 자신이 적합한지도 의문이었다.

『이게 올바른 걸까?』

『세상이 멸망한다잖아. 뭘 그렇게 고민해. 이미 충분히 많은 자들이 널 따르고 있고, 아무 불평불만 없이 지내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반역이잖아. 황제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 용서받을 수 있을까?』

『걱정도 팔자다. 그리고 이게 어떻게 반역이냐? 황제의 자리를 빼앗긴 황족 대신 네가 나라를 되찾은 건데 당연히 황제가 돼야지. 설마 에반한테 미안한 건 아니지?』

강백현은 앨버트의 침실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몸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그건 슈트의 능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

강백현은 분신을 소환해 2:1로 맞서 싸우고 있었다.

분신들은 노련한 백현의 움직임에 감탄하며 소리쳤다.

『와! 이건 반칙이잖아.』

『맞아. 슈트빨! 슈트빨!』

『왜 이렇게 말이 많아진 거야. 내가 말하는 대로 움직여. 분신 1, 너는 왼쪽에서 공격해오고, 분신 2, 너는 내 시야 바깥에서 공격해 봐.』

『오케이! 간다!』

그러나 미니맵을 사용해 분신의 공격 방향을 가볍게 파악하는 강백현. 본체의 승리였다.

그렇게 한 차례의 수련을 끝낸 후인데도 앨버트는 여전히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이 사람들은 왜 왔을까? 무려 700명이잖아. 반란으로 황권을 잡은 내가 믿음직스러워서 따라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자리를 마련해 봐. 한 달이란 기간 동안 무거운 분위기만 이어졌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좀 가벼운 분위기를 조성해도 좋을 것 같아.』

『가벼운 분위기? 어떻게?』

『술이라도 한잔하게 해준다든지, 운동회를 하든지. 사기를 높일 방법이야 다양하잖아.』

* * *

다음 날 저녁.

앨버트는 강백현을 재우고는 홀로 기관실을 찾았다.

불시의 방문임에도 당황하지 않고 거수경례를 올리는 제이미 함장과 론 부함장.

그들은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24시간 교대하며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들의 근무태도를 확인한 앨버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앞으로 3일이면 도착인가?』

『네. 그런데 이 늦은 밤에 어쩐 일이십니까?』

『버마 해협은 무사히 통과한 거지?』

『네. 맞습니다. 이제 곧 얕은 연안이라 속도를 줄이고 있습니다. 섬에 접근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접근해볼 생각입니다.』

『그래. 내가 온 건 다름이 아니라, 오늘 하루는 성대한 파티를 열까 해.』

『파티 말씀이십니까?』

『그래. 제법 많이 달려왔잖아. 먹는 것도 부실하고 제대로 준비도 못했는데 시간은 가고 있으니 사기도 떨어질 법도 해서. 하루 정도는 성대한 파티를 해도 좋지 않을까 싶군. 그대의 의견은 어떤가?』

앨버트의 말에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좋습니다. 드레스 코드는 어떤 게 좋겠습니까?』

『턱시도로 가지. 턱시도가 없으면 자신이 입을 수 있는 가장 멋지거나 예쁜 복장으로.』

『네. 알겠습니다.』

앨버트가 나가고 함장과 부함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파티라니, 괜찮은 겁니까?』

『뭐, 나쁘진 않겠지. 때마침 사기도 떨어졌고.』

* * *

앨버트의 지시로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위대한 여정에 함께 나선 지원자들은 평상시 먹던 주먹밥 대신 말린 고기와 포도주가 저녁 식사로 제공된다는 말을 듣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함장과 선원들의 드레스 코드는 제복.

나머지 지원자 700여 명의 복장은 턱시도와 드레스.

지원자들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복장으로 갈아입고 11층과 12층에 준비된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생각보다 분위기는 좋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함장님?』

『음.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어.』

함장과 부함장은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바다를 등지고 호수에 뜬 백조의 연기를 하는 무용가들이 분위기를 띄웠다. 그들의 연기에 맞추어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웨이터들이 포도주와 함께 말린 고기들을 손님들에게 내놓자, 손님들은 분위기에 취해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찢어지게 가난해 일말의 사치도 부려본 적이 없는 그들이기에, 말린 고기와 포도주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전부터 흠모했습니다. 페이트! 내 사랑을 받아줄래요?』

아름다운 여성 거인에게 휴지로 장미꽃을 만들어 고백하는 남성형 거인이 있는가 하면.

『조쉬! 나랑 같이 춤 출래?』

『좋지! 세리안.』

세미 정장을 입은 여성형 거인이 키 크고 잘생긴 남성형 거인에게 춤을 제안하기도 했다.

남녀 구분 없이 서로의 마음을 열어놓고 자유롭게 대화하는 거인들.

연애가 아니더라도, 친구와 함께 우정을 나누거나 동료들과 함께 사우나에서 땀을 빼는 이들도 있었다. 따로 마련된 휴게실에서 담소를 나누며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 녀석들도 있었다.

단 하루,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잔이 끝나갈 무렵 선내에는 앨버트의 목소리가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여러분들, 신디아의 새로운 황제가 된 앨버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지금 위대한 여정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데이터 아일랜드, 우리 거인들의 역사가 기록된 곳이자 모든 비밀을 간직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틀 뒤면 우리는 그곳에 착륙합니다.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모두 빈 잔에 포도주를 채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잔에 포도주가 채워졌다.

기관실에 있는 선원들도 알콜 없는 음료를 잔에 채우며 동료들과 마음을 함께 했다.

《50여 년 전, 에셀 황제께서는 신디아 대륙 최초로 위대한 여정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때 저희 할아버지인 앨버튼 남작도 에셀 황제님과 함께였죠.》

50년 전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모두가 숙연해졌다.

《50년 전 우리는 제대로 된 준비도 못한 채 여정을 떠났고, 단 5%만 살아나왔습니다. 그 5%는 섬에 내리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죠. 에셀 황제와 일부 황족과 귀족, 그리고 배의 운항에 필요한 필수 선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앨버트가 절대 언급하지 말아야 했던 첫 번째 항해를 거론하자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역대 황제들은 백성들을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온존하기 위해 부하들을 방패로 삼아왔죠. 우리는 노예같이 살아왔습니다. 아니, 우리 선조는 노예처럼 살아왔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그 때문에 목숨을 잃으셨고,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고아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여러분들을 위험한 여정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죽을지도 모르는 그 섬에 함께 가자고 하고 있습니다.》

백현은 앨버트의 연설을 들으며 왜 그가 고민했는지 깨달았다.

동족의 목숨이 달린 일.

자신의 결정에 의해 수백 명의 거인들이 죽을지 모른다.

《배에서 내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려운 분은 여기 남아 있어도 됩니다. 단, 이것 하나만은 약속드리겠습니다. 저는 에셀 황제와는 다릅니다. 저 앞에 수많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제가 먼저 앞으로 나서겠습니다. 제가 먼저 앞서 나가 위험과 부딪히겠습니다.》

앨버트의 말에 백성들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만약 모든 시련이 끝나면 백성들이 전부 다 빠져나올 때까지 저는 섬을 나오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만약에 절 믿고 따라주실 분이 여기 있다면, 저와 함께 율리만 섬으로 갑시다. 더 이상 끌려다니지 말고 우리의 자주권을 되찾읍시다. 저와 함께하시겠습니까?》

앨버트의 연설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정적이 흐르자 앨버트는 당황했다. 나를 따르는 자가 이렇게도 없는 건가? 그럼 이자들은 여기 왜 탔지? 무엇 때문에? 단순히 배가 고파서? 아니면 뭐지?

순간의 찰나, 여러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그때, 갑자기 잔과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 여성 거인이 행동에 나섰다.

그건 바로 나타샤 블랙이었다.

나타샤가 앨버트의 말에 응답했다.

《동의합니다!》

나타샤의 외침에 주변 동료들 모두가 와인잔을 높이 올리며 응답했다.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건배사로 변해버린 연설.

그 끝맺음은 앨버트의 어깨에 올라있던 백현의 차지였다.

《마시자! 마셔! 마셔!》

강백현이 마이크에 대고 대학교 OT 때처럼 멘트를 치자 거인들이 왁자지껄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백현의 말을 똑같이 따라했다.

《마셔! 마셔! 마셔!》

포도주를 쭉 들이켠 거인들.

그 중 하나가 신디아 대륙의 황제 이름을 외친다.

《앨버트! 앨버트! 앨버트!》

그러자 거인들이 전부 황제의 이름을 따라 불렀다.

《앨버트! 앨버트! 앨버트! 만세! 앨버트! 만세!》

만세 합창과 함께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축제가 끝났다.

신디아 대륙의 백성들은 황제가 자신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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