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율리만 섬
미나는 결국 언성을 높이는 김아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바보! 왜 울어? 애기도 아니고.”
뺨을 어루만지며 우는 강미나.
그리고 그런 그녀를 꼭 안아주는 김아람.
그런 모습 때문일까?
동료들은 아무도 미나를 탓하지 않았다.
“언니. 엉엉! 언니! 나 사실은 무서웠어.”
“바보! 혼자 짊어지려니까 무섭지.”
“미안해. 언니. 정말 미안해.”
김아람은 미나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들 놀랬잖아. 모두한테 사과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언니의 말에 큰 목소리로 사과하는 강미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넘기는 동료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미나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한편, 한태석은 기억이 지워졌었다는 것을 알고 단단히 화가 난 버키를 설득하는 중이었다.
『내가 쟤를 죽여야겠지? 어? 아닌가?』
『조금만 참으십시오. 버키 님, 딱 사춘기 시절이지 않습니까?』
『사춘기?! 그게 뭐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합니다. 하루에도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시기죠. 거인들도 다 그런 시기 겪잖아요?』
『그럼 네가 대신 죽을래?』
『히익!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니야. 네가 대신 좀 맞자! 그래야 정신 차리지!』
* * *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사람들은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 내용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거주지의 이주.
그동안 인류는 지하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습기에 가득 차 숨이 막히는 빌라였다.
이에 지하의 땅굴에서 벗어나, 버키가 머무르는 지니어스 타워로 약간의 인원이 이주를 실시한 바 있었다. 모두의 평이 좋아서 현재 거주지에 머무르는 인원 전부를 이주시키자는 제안이 나왔다.
결과는 물론 만장 일치였다.
현재 마스터는 공석이었기에 한태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일본 거주지에서도 지니어스 타워에 입주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총 몇 명이죠?”
“37명입니다.”
“생존자가 그것밖에 안 됩니까?”
“네. 열악하죠. 그래도 중국보다는 낫습니다.”
“그래요. 받는 걸로 하죠. 중국 쪽도 연락이 온 상태인가요?”
“네. 중국 쪽 거주지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총 14명입니다. 받아주기만 하면 꼭 사례하겠다고 합니다.”
“조건 없이 받아주는 쪽으로 진행해요.”
“네. 알겠습니다.”
내용이 종합되면, 강미나가 버키에게 허락을 받는다.
『라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난 상관없어. 난 인간들이 여기서 살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둘째는 차기 마스터의 선출이었다.
사실 김건우가 맡는 게 베스트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클론.
생전의 김건우가 미나에게 마스터 자리를 맡겼다고는 해도, 미성년자인 미나가 지금의 인원들을 이끌고 가기는 무리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투표로 차기 마스터를 정하기로 했다.
차기 마스터로 선출된 사람은 놀랍게도 최형우였다.
“나?!”
“네. 형님이 하셔야죠. 제일 나이 많으신데요.”
“난 그런 거 못하는데?”
“이제부터는 하셔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형우가 마스터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묵묵한 성격에 남을 배려하는 사교성, 거기에 남들에게는 없는 인생 경험과 연륜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조에서 사람들과 골고루 친하게 지냈던 최형우는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과도 별 간극이 없었다.
초등학교 경비원으로 일하며 생긴 넉넉한 인품이 그를 마스터의 자리에 오르게 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의제.
율리만 섬으로 가는 멤버 정하기.
미나는 단호했다.
“저는 가겠어요. 오빠가 거기에 있어요.”
미나의 말에 김만철이 되물었다.
“함정이라면?”
“함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함정이라도 할 수 없고요.”
김만철은 머뭇거렸다.
“만철 씨, 내 걱정 하지 말고 다녀와요.”
이제는 배가 상당히 불러있는 정선희가 머뭇거리는 김만철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강미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는 여기 남아요. 이제 죄책감 안 가지셔도 돼요.”
“미안…….”
김만철은 더 이상 정선희에게서 멀리 떨어질 수 없었다. 뱃속에서 커가는 아이, 그리고 이제는 아들로 여기는 윤수의 존재가 의무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남아요. 내가 가면 되잖아.”
“김아람…….”
“와! 측은한 눈으로 보는 거 봐. 아저씨! 내가 아저씨 이긴 거 알죠?”
“어?”
“아저씨, 결승전에서 나한테 힘도 못 쓰고 졌잖아요. 기억 안 나요?”
김아람의 핀잔에 김만철이 핏줄을 세웠다.
“야! 그건 봐준 거야.”
“한번 해볼까요?”
“해볼래?! 해 봐?!”
“또 질 거면서!”
“어휴! 이것 봐라. 기어오르네?”
둘의 대화에 뒤에서 진지하게 보고 있던 정선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사람들도 김아람과 김만철의 티격거림을 보며 즐거워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싸우고 다녔던 둘.
나이 차이는 16살, 그럼에도 남매처럼 별것 아닌 일로 다투는 두 사람의 케미가 사람들에게 웃음을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한바탕 웃음을 짓던 사람들 중 하나가 일어났다.
그는 한태석, 정보조장이었던 그는 현재 작전조와 정보조가 통합된 정보작전팀장의 직위에 있었다.
“나도 갈게. 미나야. 혼자 짊어질 생각 하지 마.”
“됐어요. 태석 오빠는 남아야죠. 핵심인물인데……”
“아니야. 궁금했어. 율리만의 존재가 뭔지, 실제로는 어떻게 생겼는지 그런 것들. 그리고 세상이 멸망한다는데, 여기 남아서 뭘 하겠어?”
여자 둘에 더하여 한태석이 참여의사를 밝히자, 다른 사람의 손도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야. 너는 남아야지.”
“네?”
김만철이 자리에서 일어선 한태석을 뒤로 당기며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네가 한 말이 걸린다. 세상이 멸망한다는데, 여기 남아서 뭘 하냐고? 날 저격한 거 아니야?”
“만철이 형한테는 선희 누나가 있잖아요. 남아 계세요. 아무도 뭐라고 안 해요.”
“아니. 아니. 아니야.”
김만철이 정선희를 바라보았다.
정선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만철의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다녀와요. 대신 다녀와서 우리 정식으로 결혼식 해요.”
“응.”
김만철과 김아람, 강미나가 뭉쳤다.
그러자 한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아, 만철이 형! 아무래도 나도 갈래요.”
“야! 넌 남아야지.”
“괜찮아요. 새로운 마스터 최형우 아저씨도 계시고, 이제 더 이상 여기서 싸울 일은 없잖아요. 네?”
『다 정해진 건가?』
인간들의 대화를 위에서 지켜보던 버키가 말했다.
그러자 한태석이 대답했다.
『네. 다 정해졌습니다. 멤버는 여기 이 4명입니다.』
『그럼 10분 뒤 옥상으로 모이지. 우리 쪽은 나랑 바키 단둘만 갈 거니까.』
『네.』
지니어스 타워의 주인이 된 버키가 동생 바키에게 말했다.
『만철이 데려와.』
『응.』
바키는 반가운 얼굴로 한 손으로 김만철을 들어올렸다.
오랜만에 만난 주인과 펫.
바키는 율리만 섬으로 가기 위해 먹을 것들을 잔뜩 챙겨 옥상에 있는 탈것에 싣기 시작했다.
김만철이 떠나고, 김아람과 한태석, 강미나가 슈트를 챙겨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박윤수가 엄마인 정선희에게 칭얼거렸다.
“엄마!”
“어?”
“왜 또 아빠 혼자 보내?”
“혼자 아니야. 누나들도 같이 가잖아.”
“엄마, 우리도 가야지! 우리도 가야 하잖아.”
박윤수의 말에 정선희가 아들을 타일렀다.
“엄마 뱃속에 윤수 동생 자라고 있어. 그러니까 윤수도 동생 곁에 있어 주자. 알겠지?”
“시러! 아빠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단 말이야.”
그의 말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최형우가 윤수에게 말했다.
“윤수야. 아빠한테 마지막 인사만 하고 올까?”
“응!”
“아저씨…….”
“애가 좋아하잖아. 잠시 작별 인사만 시키고 올게.”
“고마워요.”
“응.”
최형우가 거대화 능력으로 자기 몸의 부피를 키웠다.
그리고 박윤수를 한손에 안고 뛰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여 옥상에 준비된 하늘을 나는 차량으로 뛰어오른 최형우.
배기통을 밟고, 차 뒷범퍼를 붙잡아 차량에 탑승했다.
먼저 탄 동료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마스터가 오시면 어떻게 해요?”
“윤수가 아빠한테 작별하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지.”
“그래요? 으이구! 또 만철이 형 좋다고 작별인사까지 하러 왔어?”
한태석은 박윤수의 행동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윤수는 바키의 품에 있는 김만철에게 소리쳤다.
“아빠!”
“응. 윤수야!”
“나 아빠랑 같이 갈래!”
“어?! 안 돼! 넌 엄마랑 있어야지.”
“싫어. 아저씨가 이제 내 아빠 됐는데, 또 다시 떨어지기 싫어.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
강미나는 윤수의 마음이 진심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를 속이고, 떼를 썼구나.’
“안 돼! 돌아가! 형우 아저씨! 아니 마스터! 윤수 다시 데려가주세요.”
“…….”
하지만 최형우는 김만철의 재촉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이미 윤수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데려가주세요.”
“…….”
최형우는 진지한 얼굴로 한태석에게 말했다.
“태석아.”
“네. 아저씨, 아니 마스터.”
“내가 생각해봤는데, 네가 가면 거인들하고 대화는 누가 하니?”
“네?”
“거인 말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잖아.”
“아, 그거야 일본분들도 있고, 중국분들도 있고, 보디랭귀지라도 하면 어떻게든 통하니까…….”
“응. 아니야. 전투능력도 없는 네가 굳이 율리만 섬으로 갈 필요는 없지. 네가 윤수보다 할 줄 아는 게 더 없을걸?”
“잠시만요! 잠시만요!”
최형우가 거대화한 상태로 한태석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투포환을 던지는 자세로 한발 물러서더니, 온 힘을 다해 한태석을 차량 바깥으로 집어던졌다.
“으아아아아아악!”
한태석이 바깥으로 내팽개쳐지자, 최형우가 강미나에게 말했다.
“미나야. 버키인가 바퀴인가! 빨리 출발하라고 해.”
“알았어요.”
강미나는 박윤수에게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물었다.
“윤수! 너 후회 안 해?”
“응! 누나랑 같이 갈 거야.”
“알았어. 그 말 후회하기 없기야.”
“응!”
강미나는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사지를 헤쳐 나온 멤버들.
김아람, 김만철, 최형우, 강미나, 거기에 박윤수까지.
5명의 멤버가 버키와 바키가 함께 하늘을 나는 자동차에 탑승해있다.
『버키님! 출발하시죠!』
『응!』
자율주행에 따라 차량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직진코스.
코스는 지도 바깥에 있는 데이터 아일랜드. 일명 율리만 섬.
차량이 출발하자 윤수가 방긋 웃었다.
“출발! 출발!”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든 대륙의 대표가 율리만 섬으로 향한다.
율리만 섬에서 이어질 위대한 지도자가 겪을 시련.
그들은 세상의 끝을 확인하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 * *
10년 뒤, 아르케의 어느 허름한 건물 밑 땅속에 있는 인간들의 거주지.
꼬마 윤수와 몸이 바뀐 청년 윤수가 개미굴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미나가 있었다.
“누나, 나 죽기 싫어! 방법 좀 알려줘. 누나가 마스터잖아.”
“윤수야. 말했잖아. 그때 우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싸웠으면 이런 결말은 없었어.”
“알아! 나 때문에 백현이 형도 죽고, 아빠도 죽고, 엄마도 죽고 다 죽은 거 다 알아! 하지만 이대로 죽고 싶진 않단 말이야.”
“윤수야, 이거 가져가.”
미나가 건넨 것은 폭탄.
“싫어. 싫어! 싫어! 누나, 나 더 살면 안 돼? 안 돼?!”
“윤수야. 너도 알잖아. 누나가 널 굉장히 아낀다는 거. 네가 안 가면 다 죽어. 그러니까 가야 해. 누나가 항상 말했잖아. 윤수 넌 우리들의 영웅이니까 꼭 살아남아야 한다고.”
미나는 가슴 아픈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아직 15살밖에 안 된 청년에게 페이즈 3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생존자들을 살리라는 명령을 내린 것.
“알았어. 누나 말대로 죽을게. 내 결정이 백현이 형도 살리고, 엄마도 살리고, 아빠도 살리는 거라면 그렇게 할게.”
“그래. 고마워.”
잠시 후, 청년 윤수가 사라진 자리에는 꼬마 윤수가 나타나 있었다. 꼬마 윤수를 보며 미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됐어. 이제 첫 번째 단추를 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