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서로 다른 생각.
자신의 펫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자 거인 3명은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그런 거인들을 노리고 붉은 구체가 접근하자, 이들은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김아람은 그런 그들을 보며 이 경기의 끝을 생각했다.
이제 겨우 2번째 스테이지다. 아직 3, 4, 5 스테이지가 남은 시점에서 경쟁자는 무려 13명이 있다.
이들과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면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무조건 죽을 거야.’
김아람은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능력은 방어보단 공격 쪽이었다.
그동안 자신의 패배는 전부 자신의 방어능력 부족에 기인했다.
자신의 공격력이 기습으로 성공하거나 상대방의 예측을 크게 넘어섰을 때면 항상 승리를 얻어냈다.
하지만 방어부터 할 때는 언제나 패배했다.
선즉제인(先則制人).
초나라 항우가 은통을 제압할 때를 일컬어 쓰던 말.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는 뜻.
“기습이야. 무조건 기습하는 거야!”
김아람은 버키의 품에서 벗어나 다른 거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사전에 이를 전해 듣지 못한 버키가 당황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미나! 어디가? 어디 가는 거야?』
김아람은 버키의 품에서 벗어난 후, 염력을 이용해 공중을 활공하며 거인들의 약점인 눈을 노렸다.
시야가 보이지 않으면 거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김아람의 황당한 판단에 버키가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펫은 자고로 주인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 자의식이 너무 강한 김아람이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서로의 생존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버키가 화를 내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김아람의 생각이 버키에게 전달된 것이다.
김아람이 겪어왔던 기억의 이미지가 버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빠!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
“아니야. 바쁜 일도 없었는데! 우리 딸이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와야지.”
“파파! 최고!”
평범한 가정.
학교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 앞. 기다리던 아빠의 차량에 타는 김아람.
그리고 하늘에 보이는 미지의 물체.
“저게 뭐지?”
“비행기네. 비행기!”
“아니야. 모습이 다른데? 드론인가?”
“무슨 행사하나 보다. 그것보다 아빠! 일본은 언제 가?”
“일본? 일본은 왜?”
“할머니 편찮으시다며! 나도 이번엔 아빠 따라서 병문안 가려고.”
“그래. 조만간에 가자. 아빠가 비행기 표 끊어놓을게.”
“응!”
일상적인 생활을 보낼 뿐이었던 김아람의 모습이다.
그런데 갑자기 미지의 물체들이 발산하는 무언가에 의해 사람들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몸이 작아지니 핸들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교통사고가 나자 김아람의 아빠가 앞으로 튕겨나갔고, 김아람 또한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음에도 앞으로 튕겨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염력으로 가까스로 자신의 몸과 유리창이 부딪히는 충격을 면한 그녀가 쓰러지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김만철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년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버키는 김아람의 기억을 전달 받은 후, 그녀가 살아온 처절한 환경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지금 그녀가 움직이는 것은 생존하기 위해서였다.
약자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정면승부가 아니라 상대의 약점을 노리는 것뿐.
그녀는 작은 몸짓으로 생존을 위해 뛰고 있었고,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버키가 그녀의 행동에 동참했다.
김아람은 슬슬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몸을 허공에 띄우며 염력을 사용하는 것은 심한 체력고갈을 유발한다. 하지만 거대한 몸을 한 거인의 약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눈밖에 없었다.
‘적당히 조절해야 해. 힘을 온전하면서 향후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면 눈을 노리는 수밖에 없어.’
그러나 그녀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인의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몸을 강타하자, 김아람은 온몸이 찢어질 듯한 고통으로 감정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고통에 휩싸였기 때문일까?
고유 권능인 《폭주》가 발동되었다.
시야가 좁아지고, 힘의 조절이 어려워진다.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면 발동하는 고유 권능. 그 탓에 그녀의 모든 힘이 개방되고 말았다.
“죽어! 죽어버려! 죽어버리라고!”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친 김아람. 염력으로 거인들의 머리를 꺾어대기 시작했다.
두둑! 두둑! 두둑!
김아람이 손을 향할 때마다 거인의 목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며 목숨을 잃어갔다.
좁아지는 원 속에서 김아람의 폭주를 목격한 거인들이 힘을 합쳐 그녀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펫이 태양과도 같은 밝은 빛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차가운 얼음을 난사했다.
칼날과도 같은 날카로운 바람이 김아람을 향해 날아갔고, 불규칙한 크기의 부서진 바위들이 김아람에게 던져졌다.
폭주로 증폭된 염력은 대부분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역시나 그녀의 약점은 지속성이었다.
다양한 펫들이 그녀를 향해 돌진한다.
얼음을 내뿜을 수 있는 공작새와 불을 내뿜을 수 있는 펠리칸. 거기에 돌풍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검은 까마귀가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제 아무리 강력해도 염력이 모든 범위를 커버할 순 없다.
더구나 날아다니는 김아람을 끝까지 추격하는 조류형 키메라들.
같은 원거리 공격이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던 김아람도 숫자로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피부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염력을 난사한 덕에 핏줄이 터지며 온몸이 붉게 물들었다.
김아람은 이후를 생각하지 않고 염력을 주변으로 난사했다.
약 3분 동안은 모든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절대 방어의 시간.
하지만 그건 결국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는 최후의 방법일 뿐이었다.
3분이 경과하자 엄청난 허무감이 밀려왔다. 머리가 텅텅 빈 것 같았다.
감정이 잦아들자 김아람은 주변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참으려고 했는데 결국 참지 못했다.
자신의 주변에 서성거리는 3마리의 펫 자신이 스스로 지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처럼 김아람은 지금 한계였다.
사방으로 뻗친 머리카락이 축 늘어진 게 그 증거였다.
김아람이 몸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자, 3마리의 펫이 협동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날아오는 세 마리에게서 뿜어지는 불과 물과 바람이 김아람을 정확히 덮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갑자기 붉은 구체가 녀석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아람은 낙하하면서 그 이유를 찾았다.
버키가 자신의 우월한 체력을 바탕으로 거인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체중을 실은 주먹을 복부에 날리고, 날카로운 손날로 목을 가격한다.
그렇게 4명의 거인을 제압한 버키가 공중에서 낙하하는 김아람을 받아냈다.
“버키!”
그리고 처음으로 버키의 입에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수고했다?”
“응. 수고했다. 수고했다.”
“수고했다. 응. 수고했다.”
버키는 김아람의 기억을 전해 듣고 어렴풋이 한국어를 흉내낼 수 있었다. 수년간의 기억이 한순간에 흘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승리의 요건이 하나 더 있었다.
“누군가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검은 구체가 없을 때, 거인의 룰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했다.”
버키의 말에 미나가 답했다.
“응. 맞아. 그건 미나가 전해준 기억이야.”
적정수의 거인이 처리되었는지 붉은 구체가 작동을 멈추었고, 두 번째 스테이지가 종료되었음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왔다.
주저앉아서 살아남았다고 안도하는 거인들.
그러나 이번 스테이지의 주역인 김아람과 버키는 경기장 상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50층에서 최상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가는 조그마한 헌터 한 명이 보인다.
상대의 기억을 조합하고 전달하며, 자신의 생각과 기억을 전달하는 것도 가능한 최강의 헌터.
고작 3cm밖에 안 되는 헌터가 아르케에서 벌어진 왕좌의 게임을 정리하러 가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김아람이 외쳤다.
“미나야! 힘내! 꼭 이겨!”
하지만 목소리가 작은 탓인지 강미나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버키가 김아람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미나야! 꼭 이겨. 우리도 금방 따라갈게.”
버키의 목소리는 상당히 컸다.
47층에서 50층, 무려 12m 이상 떨어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미나는 방긋 웃으며, 그들의 생존에 감사했다.
‘그래, 됐어. 된 거야. 언니가 살았으면 된 거야.’
자신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검은 구체를 제거하고, 붉은 구체를 다루는 바키우스를 끌어내야만 한다.
미나가 더욱 힘을 내어 달리는 속도를 올렸다.
끝내야만 하는 건 이번 싸움.
마스터의 목숨을 건 의지를 그대로 이어받은 강미나는 결의를 다졌다. 자신의 승리를 위해, 오빠와 만나기 위해!
* * *
강미나는 최상층으로 올라가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마인드리딩 레벨 4.
초감각이 최대화된 지금은 40m 이내의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손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위쪽 방향에선 그런 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성이 있는 생명체라 불리는 인간이나 그에 필적한 지능을 가진 거인들은 물론이고, 지능이 낮은 동물들도 생각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관련한 기척이 전혀 없으니 미나의 발걸음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이었다.
자신이 아주 잘 아는 자의 생각이 들려왔다.
《가야 해. 가야 해. 가서 전해야 해.》
작전조장 김건우의 생각.
그는 무슨 일인지 최상층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강미나는 그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최상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한 미나는 신경써서 깔린 카펫 위에서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는 김건우를 보았다.
“조장님? 건우 오빠?”
다행히 상처는 없어보였다.
그런데 걸음이 이상했다.
느릿느릿, 쭈뼛쭈뼛,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자세, 거기에 눈의 초점은 자꾸만 흐려졌다.
“미나야. 철수해. 모두 다 당했어. 철수해.”
“괜찮아요? 오빠! 다른 사람들은?”
“응. 다친 곳은 없어. 작전실패야. 그러니까 돌아가.”
김건우는 지배당한 채인 자신이 하는 말을 인식하고 있었다.
“몸과 말이 제어가 안 돼.”
“당연하지. 네 몸은 내가 지배하고 있으니까.”
“내 놔! 내놓으라고!”
2개의 인격.
조윤정한테 당한 김건우는 지배당한 인격과 본래의 인격이 철저하게 분리된 상태였다.
지배당한 인격은 김건우의 인격을 바탕으로 2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었다.
본래의 인격인 김건우는 상대를 막고 싶었지만, 마음의 벽으로 철저하게 격리된 상태였다.
몸을 제어하는 권한은 반대편에 있었으니, 지금의 김건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울부짖는 것뿐.
조윤아가 지배 능력으로 만들어낸 김건우의 인격이 본래의 김건우를 비웃었다.
“크크크,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한 놈!”
“그만! 그만!”
지배당한 인격은 명령을 이행했다.
조윤아의 명령은 단순했다.
동료들에게 철수하라고 전하라는 것.
그리고 자결하라는 것. 이 두 가지.
방금 미나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2번째 명령인 자결을 실행할 때였다.
지배당한 인격이 벨트에서 날카로운 칼날을 꺼내드는 게 느껴졌다.
김건우는 마음의 벽 안에 갇힌 채 소리쳤다.
‘살고 싶어.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그럼에도 또 다른 인격은 날카로운 칼날을 자신의 목에 가져갔다.
김건우는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하지 마! 안 돼! 안 돼! 적어도 미나 앞에서는 죽지 마! 죽지 말라고! 안 돼! 제발! 제발! 제발!’
자신이 자결하려 하자, 강미나의 당황한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표정도 보였다.
김건우는 자신의 운명에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한심한 놈! 이게 내 최후란 말이야?’
죽음 직전,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통증과 고통, 모든 오감이 차단된 기분이었다.
‘끝이구나. 죽은 거구나.’
무(無).
아무것도 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자아의 끝.
그건 죽음.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목소리, 아니, 지배당한 인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야! 김건우!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뭐라고?”
그리고 갑자기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같은 레벨 4라서 지배당한 인격을 끄집어내진 못했어요. 이제부터 오빠 혼자만의 싸움이에요. 그러니까 이겨요! 이겨서 죽지 마요! 절대 죽지 않기예요! 네?!”
김건우의 마음 속.
굳게 닫혔던 마음의 벽이 걷히고, 지배당한 인격이 당황한 표정으로 김건우를 향해 외치고 있다.
“다가오지 마! 다가오지 마 인마!”
김건우는 강미나가 만들어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돌진하는 김건우.
그는 숙련된 동작으로 녀석의 몸에 손을 찔러넣어 심장을 꺼내들었다.
“으으으으! 으으으으으!”
자신과 똑같이 생긴 지배당한 인격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사라진다.
김건우의 눈이 다시 떠졌다.
그리고 통증 때문에 신음을 내뱉었다.
“으-으으으.”
팔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져온다.
부러진 팔. 그리고 엎어져있는 자신의 몸.
“건우 오빠, 오빠가 지배 능력에 질 가능성도 있어서 자결하지 못하도록 팔하고 다리 한쪽을 부러뜨려놨어요. 이겨서 다행이에요.”
“미나야. 돌아가자. 다른 동료들은 다 죽었어. 마스터와 합류해서 싸워야 해.”
“지금의 마스터는 오빠잖아요.”
강미나의 가라앉은 말투에 김건우가 말했다.
“미나야. 갑자기 왜 그래?”
“장명훈 씨는 저를 위해 희생하셨어요.”
“희생이라니?”
김건우에게 장명훈의 마지막 모습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강미나가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걱정 말아요. 장명훈 씨의 유지는 제가 받들 거예요. 그러니까 오빠는 돌아가요. 오빠를 기다리는 동료들이 많아요. 나! 꼭 이기고 돌아올 테니까 오빠는 오빠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맡아줘요.”
그 말을 끝으로 혼자 떠나는 강미나.
그런 그녀를 향해 김건우가 외쳤다.
“야! 강미나! 혼자 못 이겨!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미안. 오빠. 나, 오빠 기억 읽고 나서 조윤정이 얼마나 무서운 상대인지 알았어. 나 말곤 아무도 못이기는 것도 알았고. 그러니까 나 말곤 안 돼. 이 방법밖엔 없는 거야.”
미나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는 조윤정과 바키우스가 있는 사무실 입구로 달려갔다.
김건우는 단단히 화가 난 채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팔과 다리가 부러진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다.
“강미나! 야! 강미나!”
미나는 김건우의 외침에 응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사무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건너편에 바키우스와 조윤정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그래. 내가 이겨야 해. 지금 아니면 시간이 없어.’
한계돌파.
30일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필살기.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지금은 물러설 수 없는 상황.
미나는 자신의 앞에 뜬 퀘스트를 보며 율리만에게 생각을 전달했다.
‘율리만 박사님, 항상 제가 희망이라고 했죠? 그래요. 그 말 믿어볼래요. 믿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