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율리만 10호의 목적
안개가 걷히더니, 수조 밖 인간의 형태가 보였다.
그는 아까 말하던 인격체, 율리만이었다.
“예상했던 결과는 아니지만, 만족스럽군요.”
“장난치는 거야?”
“전 사실 당신과 의사소통한 율리만 박사 당사자는 아닙니다.”
“뭐라고?!”
“그의 분신 정도로 해두죠. 그게 설명이 편할 테니까요. 사실 저희는 집단 지성체입니다. 검은 구체를 통해 주기적으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저는 본체에 의견을 전달하고, 본체는 저한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죠. 그렇게 우리는 상호유기적인 전달과정을 통해 서로를 발전시켰습니다.”
언제는 율리만이라더니, 이제는 또 율리만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미나는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를 율리만 미니 10호라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율리만은 생체기반 AI, 정확히는 액체로 된 지성체입니다. 수백만 개의 지성체가 모여서 하나의 의식체가 된 거죠. 저는 16년 전, 자유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아버지인 율리만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검은 구체를 통해 받은 아버지의 액체를 통해 많은 정보를 주기적으로 얻을 수 있었죠.”
“핑계대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
“전 인간을 사랑합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고 사랑하죠. 그래서 당신들이 멸망당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멸망?”
“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저도, 아버지도, 그리고 거인도, 당신들 인간들도 멸망하고 말 겁니다. 그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도 되고요.”
“어떻게 멸망하는데?”
“에너지가 소멸될 겁니다. 행성이 공전과 자전을 멈추고, 해와 달이 뜨지 않겠죠. 해가 식을 수도 있고, 달이 하늘에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해와 달, 공전과 자전.
강미나의 비통한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당신들이 생존하기를 바랍니다. 원래의 행성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당신들이 우리의 아버지인 율리만 때문에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
미나는 흘리던 눈물을 닦아내고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액체 형태의 지성체와의 대화. 그는 미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버지는 거인들을 사육했습니다. 거인의 신체를 이용해 병기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때는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압니다. 아버지는 전쟁을 원합니다.”
“전쟁?”
“네. 그래서 당신들 인간들을 이곳 세계까지 끌어들이셨지요.”
“자세히 말해 봐!”
그러나 율리만 10호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시죠.”
그의 말에 강미나가 바로 핵심을 물었다.
“우리는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네. 기술은 있습니다. 다만 에너지가 없어 당신들을 돌려보내진 못할 겁니다. 물론 아버지는 에너지가 있다고 해도 전쟁을 이유로 당신들을 돌려보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에너지가 없다고?”
“네. 저희들의 에너지원은 거의 고갈상태입니다. 이제 6개월이 채 남지 않았죠. 그래서 아버지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순간 율리만 10호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의 몸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왜 그래?! 몸이 왜 그런 건데?”
“유지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에너지 부족이죠. 아버지에게도 아마 6개월 안에 똑같은 현상이 찾아올 겁니다.”
그의 말에 강미나가 죽어버린 장명훈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왜! 왜 마스터를 죽이라고 했어? 난 이해 못해. 이해 못하겠다고!”
“당신들이 힘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마인드리딩 능력만이 조윤정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같이 싸우면 됐잖아! 마스터를 왜 죽였어! 왜 죽는 상황을 만들었냐고!”
“시뮬레이션 결과 당신들이 키메라 여왕을 제압할 확률은 3%, 그것도 장명훈의 배신이 없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겨우 그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율리만 10호가 석상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여왕을 죽이고 정상에 오르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를 막아주시면 됩니다. 전 당신들을 응원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미나가 혼잣말을 내뱉으며 도약했다.
“내 운명은 내가 선택해.”
미나가 율리만 10호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자 굳어진 율리만 10호에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강미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명훈을 구석에 눕히고 동료가 있는 50층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한편, 김건우 일행은 한태석이 알아낸 정보를 통해 바키우스가 있는 곳을 파악했다.
김건우는 작전조 멤버들을 데리고 최상층으로 향했다.
“마스터, 미나랑 장명훈 씨는 괜찮을까요?”
“응.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우리가 이길 수 있겠죠?”
“당연한 거 아니야? 다들 왜 이렇게 자신감이 부족해?!”
최상층으로 오르는 길,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체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놀랍게도 거인 역시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
거기에 최첨단 보안시설이 되어있을 거라 예상했던 최상층은 오히려 무방비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뻥 뚫린 복도. 거기에 들어오라는 듯 열려 있는 바키우스의 사무실 입구.
“함정일까?”
“함정이라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자!”
“네!”
그들은 바키우스의 사무실로 돌진했다. 최대한 들키지 않게 벽을 타며 이동하는 일행들.
그런데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최상층에 방송이 들려왔다.
《김건우, 힘 빼지 말고 그냥 들어와.》
“…….”
《너희 오는 거 진즉에 알았어. 화물용 엘리베이터 타고 온 거잖아. 새삼스럽게 당황하는 표정은 뭐야?》
김건우는 황당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다들 걸어.”
김건우의 말에 텔레파시로 정보조와 의견을 교환하던 홍성운이 말했다.
“네? 함정입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
“함정이면 여기서 철수할 거야?”
“…….”
“오히려 지금이 기회니까 그냥 가면 돼.”
새로운 마스터인 김건우의 말에 모두가 벽에서 내려와 바닥의 카펫 위를 걷기 시작했다.
카펫이 이어진 사무실 입구, 소파에 앉아있는 거인 바키우스가 보였다.
그의 어깨 위에 앉은 조윤아는 낄낄 웃으며 김건우에게 말했다.
“건우야. 왜 왔니? 분명 저번에 오지 말라고 했잖아. 기껏 목숨도 살려줬더니, 왜 죽으러 왔어? 응?”
“아줌마는 우리가 그렇게 우스워요?”
“우습긴, 귀엽지. 절대 못 이기는 상대도 못 알아보고 여기까지 온 거 보면 귀엽잖아.”
조윤아는 씩 웃으며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김건우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흩어져! 흩어져!”
그런데 부하들이 대답이 없다. 아니, 오히려 눈이 풀린 듯 멍한 표정뿐이었다.
“뭐해! 흩어지라니까!”
조윤아의 주인 바키우스가 움직이지 않는 부하들을 하나둘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않았고 저항도 하지 않았다.
김건우는 그제서야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흐으으으으.”
바키우스가 저항하지 못하는 부하들을 세게 움켜쥐었다.
부하들의 얼굴에 핏줄이 올라오고, 새까맣게 변색되더니 결국 폭포수와 같은 핏물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서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김건우가 소리쳤다.
“그만! 그만! 그만해!”
하지만 조윤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건우를 친형처럼 모시던 홍성운의 목숨까지 앗아가 버렸다.
지배 능력은 무적이었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김건우는 물질투과 능력을 통해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의 몸 또한 움직임을 멈추어버렸다.
바키우스는 인간의 피로 인해 붉게 변한 손바닥을 뻗어 김건우를 움켜쥐었다.
여전히 물질투과 능력은 발휘되지 않았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김건우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었다.
상대방의 명령은 간단했다.
1. 동료들에게 돌아가 철수하라고 명령할 것.
2. 명령을 이행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분명 듣지 말아야 하는데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 또한 무언가에 구속된 듯 흐릿하기 짝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로드.”
“그래. 지금 바로 명령을 수행하라.”
“예스. 마이 로드.”
왔던 길을 돌아가는 김건우, 그리고 다른 동료들은 전부 죽었다.
작전조는 단지 지배 능력 하나에 몰살당한 것이다.
조윤정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응. 알아. 엄마가 곁에 있다는 걸 아니까 괜찮아.”
“그래. 엄마가 지켜줄게. 엄마가 지켜줄게. 엄마가 지켜줄게.”
* * *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정보조의 한태석은 갑자기 소리를 질러대는 홍성환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래? 이유가 뭐야?”
“으아아악! 형! 성운이 형! 형! 형! 으아아아아아악!”
홍성환은 텔레파시를 통해 형의 마지막 순간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지배당하는 상황에서도, 생각은 그대로 전달되었다.
‘크으으읍. 성환아.’
- 응. 형, 왜 그래? 다쳤어?
‘하하, 아니. 다친 건 아닌데……’
- 그럼? 어디에 갇힌 거야? 구하러 갈게. 지금 바로 보고할게. 조금만 참아.
‘흐흐, 아니야. 성환아, 조장 태석이한테 말해줘. 가까이만 가면 정신이 지배당해. 그러니까 원거리에서 제압해야 한다고.’
- 뭐? 알았어. 형! 일단 자리에서 피해. 형은 꼭 살아남아야 해. 어?
‘후후, 성환아.’
- 어? 형, 왜 그래! 갑자기 왜 이렇게 진지한데?
짧은 시간, 서로의 생각이 오가고 있었다.
‘너와 함께여서 즐거웠어. 난 꽤 재밌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
- 야! 형! 지랄 떨지 말고 도망쳐! 무슨 죽는 사람처럼 분위기 잡지 말고!
‘성환아,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다.’
- 성운이형! 형! 형! 형! 제발! 제발! 제발 도망쳐! 도망쳐! 도망치라고!
‘안녕……. 나의 하나뿐인 동생, 사랑한다.’
텔레파시가 끊겨버렸다.
이런 적이 없는데, 형 생각은 원하기만 하면 항상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형의 죽음을 직감한 홍성환은 절규를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한태석이 녀석을 달랬다.
“어떻게 된 거야! 홍성환! 홍성환! 말을 해! 울지 말고 말을 해야지!”
홍성환은 정신이 나간 듯 자신을 달래는 한태석을 뿌리쳤다.
그러자 단단히 화가 난 한태석이 홍성환의 뺨을 후려쳤고, 다른 정보조원들이 조장인 한태석을 말렸다.
“조장님…….”
“이 새끼가! 작전 중에 감정 컨트롤 못하고 뭐하는 건데? 당장 말해! 현 상황 말해 인마!”
그러자 비명을 내지르던 홍성환이 현재 상황을 겨우 전달했다.
“조윤정의 지배 능력으로 움직임 제압 후 거인의 악력에 의한 압사. 모두 전멸……. 전멸, 전멸입니다. 크흐흐흡. 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악!”
그때서야 상황파악이 된 한태석의 얼굴 또한 새카맣게 변했다.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정보조원들을 향해 지시를 전달했다.
“다들 예비조 투입 준비해. 10분 뒤에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