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cm헌터-126화 (126/200)

126화. 밝혀지는 흑막

조윤정이 검은 구체를 박살냈을 때, 멀리 떨어진 강미나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홀로그램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메인 페이즈 2-A 율리만과의 접촉]

현재의 상황으로는 《왕좌의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다. 율리만과 접촉하여 비밀 무기를 획득하라. 단, 동료들에게는 비밀로 할 것.

《Tip : 35층 전산실》

“미나야. 왜 그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나는 표정을 감추고, 현재 홀로그램에 나온 내용을 유추했다.

율리만과의 접촉.

확실히 접촉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지구에서 항상 말을 걸어오던 율리만 박사였다. 귓가에 퍼지는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바로 앞에 들려오는 것처럼 선했다.

미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50층에 도착했다.

50층의 트윈룸, 5023호.

이 방문만 나가면 바로 경기장을 바라볼 수 있다.

강미나는 그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율리만 박사, 무슨 생각일까? 날 이제 와서 보자고?’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정답은 없었다. 지금 미나가 여기 온 목적은 율리만 섬에 가서 율리만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먼저 대화할 기회가 있다?

문이 열리고, 이제는 마스터인 김건우가 제일 앞장서며 모두에게 말했다.

“나가자!”

“네!”

김건우와 동료가 나가는 동안 강미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남들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숨어 문이 저절로 닫히기만을 기다렸다.

김건우는 화물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인원 파악을 했다.

그런데 수가 현저히 적었다.

“왜 이렇게 적어? 누가 안 내린 거야?”

“강미나가 없습니다.”

“뭐? 강미나가 없어? 강미나! 강미나!”

“마스터…… 아니, 장명훈 대원도 없습니다.”

“뭐?!”

김건우가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장명훈이 남아있었다.

“거기서 뭐하십니까! 빨리 나오세요. 빨리 나오세요!”

“먼저들 가.”

“네?”

“나는 개별행동할 테니.”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강미나는 35층 버튼을 누른 후, 장명훈에게 말했다.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홀로그램 떴지?”

“네.”

“나에게도 나타났다. 뭐, 놀랄 일은 아니야. 넌 4성. 율리만이 특별히 말을 건다고 해서 이상할 일도 아니지.”

“…….”

35층으로 가는 길.

장명훈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율리만을 알아요?”

“그래. 강미나, 이미 내 생각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온 건 25년 전, 1993년이야.”

“읽진 않았어요. 타인의 생각을 보는 건 저한테는 곤욕이니까요.”

“그럼 잠깐 들어줄 수 있겠니?”

“네.”

1993년, 88올림픽 이후 역동의 시기를 겪던 대한민국이 이야기의 배경이었다.

“난 1988년 서울올림픽 체조 종목의 금메달을 따고 금의환향했지. 전 국민이 나를 우러러봤어. 그때의 영광은 지금도 잊을 수 없지.”

“전 태어나지도 않아서 잘 모르지만, 금메달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미나의 말에 장명훈은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체조선수 대표선발전이 있었어. 올림픽 개최 3달 전이었지. 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했어. 그런데 평행봉의 공중회전 동작에서 착지를 잘못하고 말았지.”

“그럼 대표선발전은 어떻게 됐어요?”

“후배 녀석이 선발됐지. 뭐 올림픽 예선에서 떨어졌지만……. 아무튼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거야. 그때 이후 시름에 빠져 있던 날 구해준 게 조윤정이야.”

“아…….”

“그 친구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어. 아무리 지나도 애가 생기지 않았지. 그것 때문에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애도 못 갖는다고 얼마나 아내를 구박했는지 몰라.”

“…….”

미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생각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마스터였군요.”

“그래. 내가 무정자증이었던 거지. 난 그걸 알고도 아내에게 말하지 못했어. 그걸 말하는 순간 아내가 떠날 것 같았거든.”

“그래서 아내분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전국을 돌아다니며 해결책을 찾으셨고요.”

“그래. 다 내 잘못이지. 아무튼 시간이 흘러보니 아내는 미쳐있었어. 나는 매일 후배들을 양성하기 위해 일을 나가 있었으니까 아내가 낮에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어. 그런데 어느 순간 아내가 변했다는 것을 깨달은 거야. 무언가에 의해 홀린 듯 하루 종일 혼잣말을 해댔으니까.”

미나와 상황이 같았다.

“율리만 박사의 대화를 들은 거네요.”

“그래. 맞아. 율리만, 율리만이 원인이었지. 1993년 11월, 아내는 바닷가로 가고 싶다고 했어. 그곳에 가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그래서 바닷가로 향했지. 사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을 알고 있었으니까 크게 기대한 것은 없었어. 다만 아내가 슬픔에 빠진 것을 지켜보기 힘들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증상이 완화될까 싶어 갔던 건데, 그날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내려왔지.”

빛의 기둥.

패턴이 똑같다.

“그 후 이곳에 오시게 됐군요.”

“그래. 하지만 너희랑은 조금 달라. 우리는 시험 같은 건 없었어. 죽음의 게임도 없었고, 분위기도 좋았지. 인간의 지성을 알고 싶어 하는 생명체가 있었을 뿐이야.”

“생명체요?”

35층,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슈트를 입은 두 남녀가 전산실로 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잠입한 전산실 앞에는 빨간 색 띠로 『관계자 외 접근금지』라는 표식이 붙어 있었다.

전산실 내부라면 보통은 기계음이 들리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출렁이는 파도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장명훈은 커다란 수조 안, 파도처럼 출렁이는 액체를 보며 말했다.

“저게 율리만이야.”

“네?”

“저 액체가 율리만이라고.”

녹조가 낀 물처럼 녹색을 띈 액체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더니, 사람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걸 본 장명훈이 쓴 웃음을 지었다.

“율리만, 오랜만이군.”

“명훈, 오랜만이야. 이제 결심이 섰나?”

사람의 형태가 된 녹색의 액체가 미나와 명훈에게 말을 걸었다.

강미나는 율리만의 정체가 슬라임 같은 액체라는 것을 목격하고 경악했다.

자신에게 말을 걸고, 의식을 통제하고 가끔은 조종하기까지 하던 그가 슬라임이라고?

하지만 일단 입을 다문 채, 둘이 나누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래. 이제 죽일 결심이 섰지. 그런데 자네가 줄 무기란 게 뭐지? 내가 어떻게 하면 무적이나 다름없는 조윤정을 죽일 수 있지?”

아내를 죽이기로 결심한 남편의 말에 율리만이 대답했다.

“걔를 죽여.”

“?!”

“강미나를 죽여서 4성이 되면 돼. 알고 있었잖아.”

“못 죽인다면?”

“네가 죽게 되겠지. 어떻게 할 거지? 당연히 결과는 정해져 있지 않나?”

강미나는 황당한 나머지 율리만에게 소리쳤다.

“날 죽이라고 말한 건가요? 율리만 박사님! 율리만 박사님!”

그러자 액체 상태인 율리만이 강미나에게 말했다.

“너한테도 기회야. 같은 조건이지. 살아남고 싶으면 장명훈을 죽이면 돼.”

“박사님! 율리만 박사님! 당신은 대체!”

수조 안의 액체가 기화되기 시작했다.

그 액체가 뿌연 연기와 함께 미나와 장명훈의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강미나! 뭐해?! 빨리 탈출해!”

“네!”

장명훈은 뿌연 연기로 몸을 던지며 신속하게 움직였다.

연기를 뚫고 나가는 장명훈, 하지만 그는 콜록거리며 다시 연기가 퍼지지 않은 원래 장소로 돌아왔다.

그의 피부 표면은 보랏빛으로 변해있었다.

슈트를 입었음에도 안쪽까지 파고든 독성 물질.

장명훈은 한심한 얼굴로 강미나를 바라보았다.

“함정에 빠졌네. 나도 참 한심하군.”

“마스터…….”

강미나는 안개가 독성 연기라는 것을 알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만의 함정에 빠진 장명훈과 강미나.

그 둘은 점점 자신들을 에워싸는 안개를 보며 서로의 운명을 직감했다.

“방법 있어?”

“아니요. 안개에 노출되면 5분도 안 되어서 죽고 말 거예요. 마스터는 탈출 방법 생각해두신 것 있어요?”

안개는 마치 의식이라도 있는 듯 미나와 장명훈이 놓인 공간을 조금씩 좁혀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탈출방법을 강구했다.

하지만 독성 안개를 뚫고 나갈 힘이 그들에겐 없었다.

강백현처럼 보호막 능력이 있거나 김건우처럼 물질투과 능력이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그런 동료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이유로 율리만은 미나와 장명훈만 오도록 유도한 것이니까.

한참의 고민 끝에 장명훈이 입을 열었다.

“강미나.”

“네.”

“아무래도 둘 다 죽는 건 아닌 것 같다.”

“네?”

“미안하다. 여기서 너와의 인연은 끝인 것 같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둘 중 하나만 살아남으라는 율리만의 목적.

그것만 해결되면 독성 안개는 걷힐 것이다.

강미나는 죽음의 순간, 살아남기 위해 장명훈의 생각을 읽었다.

마인드리딩을 통해 상대의 공격을 예측하고 방어하려는 미나의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이다.

그러나 미나는 곧 손을 놓았다.

장명훈의 팔이 스스로의 목을 찌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스터! 왜 그랬어요? 날 죽이고 싶어 했잖아요. 복수하고 싶어 했잖아요!”

장명훈은 차마 미나를 죽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냉정해지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면 자신 또한 아내와 같은 부류가 되니까.

자신들과 함께했던, 가족이라 생각했던 김건우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을 다시는 떳떳하게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머릿속에 생각을 떠올렸다.

《들리지?》

미나가 장명훈의 생각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명훈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율리만이 만든 독성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장명훈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미나에게 계속해서 전달했다.

《내 아내는 인간 중 최강의 병기였어.》

“…….”

《IQ 162, 멘사 회원 중에서도 독보적이었어. 생명공학 분야에서 세계최초로 줄기세포를 연구한 것도 내 아내였어. 그때 DNA 편집 기술을 연구하던 아내를 율리만은 주목하고 있었던 거야.》

《아마 율리만은 그것 때문에 아내를 이곳 세상으로 불러온 걸 거야. 그 덕분에 거인의 신체를 융합해 키메라를 만들 수 있었고, 슈트를 만들 수 있었고, 능력이 담긴 두루마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

미나의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 죽어야만 할까?

《아내는 율리만이 직접 뭔가를 만들 수 없게 율리만의 생체코드를 조작해놓았어. 그 이후 율리만은 키메라나 슈트, 그리고 두루마리를 직접 제작할 수 없게 되었지. 그 다음은 네가 아는 것과 같을 거야.》

미나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장명훈을 무릎 위에 올리며 소리쳤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살 수 있을 거예요. 윤수! 윤수 불러올게요. 그럼 되잖아요! 네?”

《후후, 늦었어. 함정에 빠진 내 잘못이지. 누굴 탓하겠어. 강미나!》

“네.”

《내 아내를 죽여줘. 그래서 율리만이 절대 거인들을 학살하지 못하게, 그리고 우리 인간들을 학살하지 못하게 이 전쟁을 끝내는 거야. 더 이상 율리만이 장난치지 못하도록! 크읍…….》

“마스터! 마스터! 마스터!”

미나가 절규했다. 장명훈의 생각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장명훈의 죽음.

“마스터…….”

그리고 홀로그램 메시지가 떠오른다.

《[공주] 강미나가 [버림받은 왕] 장명훈을 무찔렀습니다. 보상으로 12,347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왕비] 조윤아를 무찌르고, 아르케 지역의 왕좌를 탈환하세요. 단, 탈환하려면 조윤아의 기억을 빼앗아야 합니다.》

눈물을 쏟아내던 강미나는, 이내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서 낄낄대며 웃었다.

정신이 나간 듯 미친 듯이 웃었다.

“율리만 박사, 네가 원한 게 이거였어?! 이 모든 게 네가 꾸민 일이야? 그러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