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cm헌터-121화 (121/200)

121화. 각자의 길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르케 지역의 본선이 얼마 안 남은 가운데, 버키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어? 왜 국제전화가 왔지?』

버키의 말에 바키가 물었다.

『형! 어디에서 전화 왔는데?』

『신디아. 신디아에는 아는 친구도 없는데…….』

『팬인가 보지. 일단 받아봐.』

『응.』

버키가 스마트폰을 켜고 처음 보는 번호의 주인을 향해 물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디아 앨버트 황제님의 직속비서, 나타샤 블랙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네?!』

『다름이 아니라 버키님의 펫인 김아람이란 분과 통화를 하고 싶어서요.』

황당한 상황. 그런데 URL 주소와 함께 황제의 친서가 도착했다.

『친애하는 아르케의 버키 님, 저는 이번에 새로 부임한 앨버트 황제라고 합니다. 저의 펫이 버키 님의 펫과 오랜 친우이기에, 직접 만나 볼 수는 없으나 통화하는 자리라도 마련해주고 싶어서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푸셔서 휴먼종의 유대감을 돈독히 하는 자리를 만들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실은 앨버트가 아닌 나타샤가 쓴 문서였지만 어쨌든 황제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친서였기에, 버키는 황송함을 뒤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김아람은 말도 통하지 않는 버키가 갑자기 자신을 양손으로 잡고 함부로 들어올리자 신경질을 냈다.

그러나 스마트폰 화면에 강백현이 나타나자 발버둥을 멈추고 시선을 고정했다.

거인의 세계에 온 후 약 넉 달 만의 만남.

그동안 강백현은 많이 거뭇거뭇해져 있었다.

사막의 거친 기후에 노출되어 갖은 고생을 다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것.

한편 강백현이 보기에도 김아람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린 피부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앙상한 뼈 위에 이제는 전문 운동선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탄탄한 근육이 잡혀 있었고, 긴 머리는 고무줄로 묶어 단정하면서도 수수한 얼굴이었다.

“아람아. 잘 지냈어?”

스마트폰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두 사람. 하지만 너무 많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인지라 표정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응. 너는? 아! 미나는 살아 있어. 미나는 우리 거주지에 살고 있어.”

“알아. 나 미니맵 능력 있잖아.”

백현의 말에 김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구나. 내 번호는 용케 알아서 전화했네.”

“당연하지. 내 주인은 황제잖아.”

“대단하네, 대단해.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김아람의 질문에 화면 건너에 있는 강백현의 대답이 들려왔다.

“내일 우리 신디아 대륙의 거인들은 율리만 섬을 향해 떠날 거야.”

“율리만 섬?”

“응. 이 세계의 모든 비밀, 거기에 우리가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비밀까지도 데이터 아일랜드에 있어.”

“데이터 섬? 정보의 섬? 정보가 있는 섬?”

“그래. 신기하지? 이름이 영어야. 여기 거인들은 율리만 섬이라고 부르고 있어.”

“처음 들어.”

그녀의 말에 강백현이 핀잔을 늘어놓았다.

“너 거인 말 아직도 못하지?”

그러자 김아람이 목소리를 올리며 언짢은 감정을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그게 뭐!”

“너 한국말 제대로 하는데도 10년 넘게 걸렸잖아. 아무래도 언어 쪽 감성은 내가 우위인 것 같아서.”

“됐거든요? 그래서 핵심이 뭔데?”

김아람은 강백현이 전화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강백현이 갑자기 익살스러운 얼굴을 하며 대꾸했다.

“너 보고 싶어서?”

그러자 김아람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농담하지 말고.”

그런데 강백현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섬으로 떠날 거야.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미나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그리고 고맙다고 전해주고.”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하는데? 직접 하면 되잖아. 네가 여기 와서 해!”

“안 돼. 시간이 없어. 공략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

“왜?”

“바보냐? 왜 죽을 것 같이 말하는데?”

김아람은 강백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절대 저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든 아등바등 살기 위해 노력할 애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강백현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위대한 지도자의 길이 열렸습니다.”

“…….”

“황제에게 뜬 시련의 메시지. 위대한 지도자의 길이 열렸습니다. 난 이렇게 생각해.”

“뭘?”

강백현은 차마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다.

거인들도 시련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자신들이 이곳에 오기 전에 그랬듯이 죽음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선물 하나 보냈어. 아람아.”

“선물?”

“응.”

그때 버키의 집 창문을 넘어 검은 구체가 들어왔다.

“약속 꼭 지켜. 알았지?”

검은 구체가 강백현이 보낸 선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구체가 토해낸 것들을 보며 김아람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진정 원하던 것.

목숨을 걸고 얻으려 했던 것.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결과물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강백현! 강백현! 너 이거 너한테 중요한 거 아니야?”

“응. 아니야.”

“강백현! 강백현!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소생의 돌을 왜 나한테 주는데?”

“너만 주는 거 아니야. 너만 클론은 아니잖아.”

통화가 끊어졌다.

김아람은 소생의 돌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또 하나의 구체가 버키의 동생 바키에게 다가온다.

『어?』

검은 구체가 내뱉은 것은 또 다른 소생의 돌.

그리고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유창한 거인어.

『그 소생의 돌은 바키 씨의 펫, 김만철 씨를 위한 것입니다. 초면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통화가 끊긴 후, 앨버트가 강백현에게 물었다.

『만나보지 않아도 되겠어? 정말 후회 안 해?』

『응. 후회 안 해. 그나저나 넌 후회 안 해?』

앨버트의 방 옆에는 수십 개의 소생의 돌이 쌓여 있었다.

황제들의 보물창고에서 얻은 30여 개의 소생의 돌.

『어차피 내 것도 아니었으니까 상관없어.』

거인을 살리기에는 부족하지만, 죽은 펫을 살리기에는 충분한 양.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그리고 더 이상 우리의 목숨을 희생해서는 안 되지. 음. 안 되고말고.』

앨버트가 폐쇄되어 있는 공장형 연구실 내부를 씁쓸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거인들의 뇌에서 적출한 뇌수가 담겨 있는 수조가 있다.

5년 전 폐쇄되었던 신디아의 비밀 연구소.

앨버트는 기존의 황족을 경멸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긴 역사 동안 거인들의 뇌수를 뽑아냈다. 그리고 그걸 두부처럼 만들어 능력을 담는 두루마리의 재료로 만들었다.

앨버트는 그 뇌수가 담긴 수조를 흐르는 강에 뿌리며,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마지막 제례를 올렸다.

그 제례를 보기 위해 모인 수많은 국민들은 죽은 자들의 일부가 바닷물에 녹아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때, 실종된 이들의 가족이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국민들도 그들의 감정에 동조해서 그 자리의 모든 거인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거인들의 아픔의 역사가 이제 막 청산되고, 신디아 대륙의 신 황제 앨버트는 이 모든 장면을 생중계로 내보내고 있었다.

제례가 끝나자, 나타샤가 씁쓸한 미소로 앨버트에게 말했다.

『모든 국가에서 우리 행사의 송출을 차단했습니다.』

『그렇겠지. 힘을 가진 자들이 그동안 펫을 키우거나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동족을 죽여왔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을테니까.』

모든 국가는 똑같다.

힘을 기르기 위해 거인들을 희생시킨다.

그게 어느 국가는 능력이 담긴 두루마리, 어느 국가는 슈트, 어느 국가는 키메라일 뿐이다.

『율리만 섬에 가겠다는 지원자는?』

『도합 700명이 넘습니다.』

『좋아. 탑승하지.』

제례를 끝낸 앨버트가 엄청나게 큰 화물선을 바라보았다.

나라가 부강하지 못해 여객선 대신 화물선에 오르는 백성들.

그들 모두가 새로운 황제와 함께 ‘위대한 지도자에 이르는 길’에 도전하고자 떠난다.

정박을 위해 내려놓았던 닻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멈추었던 선박용 엔진이 벙커씨유를 머금으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본래 화물은 선적하는 곳에는 거인들이 대륙에서 공수해 온 식량들을 채워넣고 있다.

한편에서는 각종 펫들이 머나먼 항해를 견딜 수 있도록 방한 물품과 애완동물 전용 먹이를 꼼꼼히 체크하는 중이었다.

《거인의 룰 6》각 대륙의 황제는 『율리만』과 만나 대화할 수 있다.

단, 만나기 위해서는 데이터 아일랜드에서 시련을 통과하여야 한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에 한 번씩 이뤄지는 여정.

이제는 기억되지도 않는 과거의 역사가 다시 쓰이고 있었다.

닻이 모두 올라가고, 엔진과 연결된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모든 선적이 실린 것을 확인하고 선원이 깃발을 흔들었다. 선장은 빵빵 하는 경적을 내며 출발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리고 앨버트의 전화기가 울렸다.

『응.』

『앨버트님, 제이미 함장입니다. 출항 준비 완료했습니다.』

『그래. 갑시다.』

『네. 새로운 황제님과 여정을 함께하게 되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사고 없이 모시겠습니다. 도착까지는 앞으로 46일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그래요. 갑시다! 출발합시다. 제이미 함장!』

앨버트의 지시가 떨어지자, 다시 한 번 화물선 전체에 경적이 울려퍼졌다.

도선사의 지시에 맞춰 배를 돌리는 제이미 함장.

그리고 배의 가장 높은 곳에서 신디아 대륙, 그리고 신디아 대륙과 연결된 도르시안을 바라보는 앨버트. 그가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보며 강백현에게 물었다.

『정말 네가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자 강백현이 오히려 앨버트에게 되물었다.

『도전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그나저나 너는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냐? 너도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는 거 아니야?』

『나야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원한 자리도 아니었으니까.』

앨버트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과는 다른 가치관, 이 자리에 에반이 함께 있었으면 과연 이런 결과가 있었을까? 강백현은 잠시 에반과 함께했을 자신을 상상하니 온몸에서 두드러기가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상하지 말자.’

독수리와 합성된 키메라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인간도 무엇도 아닌 불쌍한 생명체의 모습. 죽어도 그런 모습은 싫었다.

‘그래. 후회하지 말자. 앞을 보며 나아가는 거야. 우리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자고!’

강백현은 앨버트의 어깨 위에서 거대한 여정의 시작을 함께했다.

앞으로 46일.

46일이 지나면 데이터 아일랜드, 율리만 섬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

그때, 화물선의 선장이 방송으로 변동사항을 알렸다.

『앞으로 5분 뒤면 중계지역 이탈로 스마트 기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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