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기억
강백현은 흐릿했던 기억이 점차 돌아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페이즈 2에서 페이즈 3. 거기에 동생과 함께 탈출했던 기억까지.
그러다 보니 과거 수면가스에 당했던 기억도 같이 떠올랐다.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그 기분. 일어났을 때 욕이 나올 정도로 두통이 밀려오는 그 기분.
오늘도 분명 그랬다.
그래도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자가치유 능력을 배우고 나서는 예전보다 빨리 고통에서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회복되는 것은 몸 상태뿐만이 아니었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
지워졌던 기억. 그리고 서서히 떠오르는 그가 겪었던 끔찍한 일들.
* * *
그날 저녁.
앨버트는 긴장한 얼굴로 연구원들을 소개했다.
『왕자님, 키메라 합성 준비 완료했습니다. 왼쪽부터 브라움, 칼리, 리븐 수석 연구원들입니다. 인사드려. 에반 왕자님. 다들 알지?』
『네. 영광입니다.』
『에반 왕자님, 살아계셨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겠습니다. 임무는 들었습니다. 꼭 성공시키겠습니다.』
『수십 번을 확인했습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브라움에서 칼리, 리븐에게로 이어지는 말에 에반이 묵묵히 세 명에게 악수를 건넸다.
『다들 믿을게요. 꼭 키메라 합성 성공시켜 줘요.』
『네. 알겠습니다.』
에반은 앨버트가 구해온 독수리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능이 높고 하늘을 나는 동물.
여기에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힘을 제어할 줄 아는 펫을 결합한다면 어떠한 상황이 와도 대처할 수 있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반드시 성공해야 해. 반드시! 반드시!’
그런 에반 왕자를 옆에서 바라보는 앨버트가 다시 한 번 왕자의 결심을 확인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만약 실패라도 하면…….』
『다른 방법이 없잖아. 진행해.』
『네. 알겠습니다.』
에반은 쓴웃음을 지으며 백현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강백현의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독수리는 커다란 비커에, 자고 있는 백현은 작은 비커에 담겨 있었다.
독수리는 아무 것도 모른 체 멀뚱멀뚱하다가 갑자기 위쪽에서 쏟아지는 특수용액에 묻혀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특수용액에 녹아드는 펫.
주인 없는 펫, 독수리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원래 형태를 잃기 시작했다.
앨버트는 징그러운 장면에 고개를 돌렸으나 에반은 진지한 눈으로 독수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응. 이 용액을 만들기 위해서 몇 명이 죽었지?』
『왕자님…….』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을 알려줘. 몇 명의 쓸개즙으로 이 용액을 만든 거지? 결코 적은 양이 아닐 텐데?』
『131명입니다. 왕자님.』
『그래. 그렇게 됐군. 그런데 빨리도 구했군.』
『영안소에서 45명을 확보해서 쓸개즙을 얻을 수 있었고, 나머지는 펫이 없는 부랑자들을 처리해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합성종을 만들기 위한 조건.
거인의 쓸개즙과 위액을 100:1 비율로 섞어 펫 중량의 2배를 붓는다.
위액은 얻는 데 크게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쓸개즙이 거인의 쓸개에서 상당히 적은 양만 채취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쓸개즙은 하루 이상 지나면 특수용액으로서의 효과가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앨버트는 사망자 45명으로 부족해 부랑자들을 처리해서 왕자가 키메라를 생산할 용액을 구한 것이다.
펫이 크면 클수록 거인이 더 많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앨버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슈트 제작 비법, 키메라 합성법, 두루마리 제작법.
모두 거인의 신체를 필요로 한다.
『웃기지? 이 세상에서 만물의 영장은 우리인데, 우리 신체가 있어야만 키메라를 만들 수 있고, 슈트를 만들 수 있다는 거.』
『네. 저도 그 비밀을 알게 된 후부터 지금까지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우리를 만든 창조주들은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요? 혹시 우리들은 단순히 도구가 아니었을까요?』
『그런 말 하지 마. 지금은 우리 국가를 되찾을 것만 생각해. 그거면 돼.』
『……네, 맞습니다. 독수리는 거의 다 녹아내린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왕자님 펫에 용액을 붓겠습니다.』
『그러지.』
에반이 잠들어있는 백현을 앨버트에게 넘겼다.
앨버트는 왕자에게서 넘겨받은 펫을 비커에 넣고, 연구원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연구원들이 거인들의 쓸개즙과 위액을 섞은 특수용액을 백현이 담긴 비커에 부었다.
몸이 녹아내리고, 녹색의 혼합용액이 인간의 피와 섞여 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3cm라는 작은 신장 때문에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강백현의 몸.
이를 확인한 연구원이 백현의 몸이 녹아있는 보라색 용액을 독수리가 녹아있는 용액에 부었다.
그렇게 합쳐진 용액을 쇠로 된 막대 기둥이 회전하며 섞어대자, 용액은 점점 굳어지며 점성이 생겨났다.
시간이 지나자 거품이 나오기 시작한 용액은 점점 휘핑크림처럼 말려 올라갔다.
공작기계는 계속 돌아갔다.
막대 기둥의 회전력으로 인해 말려올라간 용액은 더욱 굳어져 반고체가 되었다.
이를 목격한 연구원들은 신기해하는 얼굴로 국가의 사상 첫 키메라 제작 현장을 두 눈에 담았다.
15분간 돌던 공작기계가 멈추고 두 개의 생명체가 녹아든 반고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합성이 시작됐나 봅니다.』
거인의 위액과 쓸개즙, 두 개의 생명체가 합쳐진 반고체.
그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고체 표면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고체의 표면은 젤라틴 막처럼 변했기 때문에 발로 찰 때마다 울퉁불퉁하게 솟아올랐다.
그걸 본 앨버트가 에반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왕자님! 성공인 것 같습니다.』
『그래. 성공이겠지. 성공할 줄 알았어.』
거대한 막 안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독수리의 머리와 인간의 몸체를 가진 키메라의 모습.
에반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녀석이 막을 뚫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불쑥, 불쑥.
막을 뚫으려는 움직임. 하지만 금방이라도 뚫고 나올 것만 같던 내부 합성 생명체의 움직임이 점차 둔화되기 시작되었다.
『왜지? 왜 그러는 거야?』
『확인해보겠습니다.』
재료 오케이, 쓸개즙과 위액의 혼합비율 오케이, 금속 막대로 저어주는 시간도 오케이.
모든 것이 제조법 그대로다.
그런데 합성 생명체의 둔화된 움직임이 이제는 완전히 멈춰서더니, 그대로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비상사태! 빨리 빨리 나와!』
『네!』
연구원들이 날카로운 수술용 메스를 가져오더니 젤라틴 막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에반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안절부절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왕자가 그러니 앨버트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 잘될 거라고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막을 잘라내고 내부의 생명체를 확인한 연구원들, 그들의 고개가 절로 떨궈졌다.
독수리와 인간의 합성생명체는 깃털과 피부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합성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
『실패한 건가?』
『죄송합니다. 왕자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세 명의 연구원들이 할 말은 그것 밖에 없었다.
제조법을 그대로 따랐는데 실패.
밖에서 지켜보던 나타샤가 비통한 듯 눈물을 흘렸다.
비록 부랑자라고는 하지만, 이번 실험을 위해 많은 거인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앨버트의 펫에 의한 살인은 거인들의 룰에 위반되지 않는 교살법이었다.
하지만 결코 죽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에반 왕자의 확신을 자신도 믿었기 때문에 생긴 일.
그때 에반의 힘없는 질문이 들려왔다.
『앨버트.』
『네. 왕자님.』
『죽은 거야? 내 펫이 죽은 거야?』
에반의 말에 앨버트가 말없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도 죽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에반 왕자가 이 실험을 위해 몇 년을 숨어 살았는지 모른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니 모두가 왕자가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에반이었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앨버트! 내 펫이 죽은 거냐고 묻잖아! 왜 대답을 못해! 어?』
『…….』
신하의 충정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수석 연구원인 브라움, 칼리, 리븐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인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알아보겠습니다. 왕자님.』
『빨리 찾아내! 당장 찾아내!』
에반은 절망 속에서도 다시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강백현이 죽기 전, 아니 기억을 잃기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말. 아르케로 가자는 말.
맞다. 아르케에는 휴먼종이 있다. 거기에 강백현의 동생이 있었다.
에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4성짜리 휴먼종, 똑똑해서 자기 능력을 100% 이상 발휘할 수 있는 녀석으로 구해야 한다.
자신의 남은 포인트를 모두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녀석으로 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반의 정신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이 강백현을 믿고 투자했던 포인트가 허무하게 날아가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실성한 에반 왕자의 웃음을 들은 앨버트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제가 왕자님을 말렸어야 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그런데 그때 밖에 있던 나타샤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왔다.
『왕자님의 펫은 살아있어요.』
『뭐?』
『죽지 않았어요. 죽었다면 제가 왕자님께 분쟁조정 신청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나타샤의 옆에 검은 구체가 떠 있었다.
이를 이용해 나타샤는 상대방이 펫을 소유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포인트를 사용해서 상대방의 소유 펫을 알아보는 방법도 있지만, 분쟁조정 신청을 해서 상대방이 펫을 소유했는지 간접적으로 알아내는 방법도 있었던 것이다.
≪사용자 나타샤 블랙, 사용자 에반 슈트리거와의 분쟁 조정을 신청했습니다.≫
≪상대방의 소유 펫이 탐색 범위 안에 존재하지 않아 분쟁 조정을 취소합니다.≫
검은 구체가 띄우는 메시지를 에반에게 보여주는 나타샤.
그리고 갑자기 에반의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기운.
‘분신?! 분신 능력으로 빠져나간 거야?’
생각해 보니 실험은 완벽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합성생명체 제조법이 실패할 리가 없었다. 자신이 몇 년간에 걸쳐 확인한 후 빼돌렸던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미 아르케 연구소에서는 비밀 아닌 비밀일 만큼 너무나 많은 합성생명체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연구원 칼리가 CCTV를 확인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왕자님, 여기를 보십시오.』
영상에는 강백현이 분신을 만들어낸 후 유유자적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분신을 향해 수면가스를 사용하는 에반의 모습도.
『강백현! 이 자식! 이 자식!』
강백현은 빠져나가기 직전까지 거인들의 행동을 엿보고 있었다.
에반과 앨버트, 연구원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모습이 CCTV의 확대된 화면에 잡혀 있었다.
에반은 강백현의 표정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에반은 앨버트를 나무랐다.
『앨버트! 기억 지웠다며! 정확히 지웠다며!』
그런데 여기서 나타샤가 끼어들었다.
『왕자님, 왕자님의 펫은 자가치유 능력이 있지 않았나요?』
『뭐?』
『아무래도 그 능력이 지워진 기억까지 치유한 것 같아요. 앨버트 검문조장은 확실한 사람을 구해왔습니다. 그를 나무라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에반은 나타샤의 말에 고개를 떨궜다.
오만한 마음가짐. 조심조심한다고 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요소인 펫의 능력조차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완전히 자신의 패배임에 틀림없었다.
자신을 따르는 앨버트와 그 외 연구원들은 자신이 요구한 대로 정확하게 일을 해주었다. 그런데 자신이 간과한 펫의 능력, 분신과 자가치유로 인해 강백현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말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생각하면, 자신이 강백현을 펫으로 계약한 것이 얼마나 잘한 행동이었는지 강백현 스스로 증명해준 것이었다.
3cm짜리 조그마한 인간이 거인의 지혜를 뛰어넘어, 완벽하다고 생각한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니까.
에반이 소리쳐서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멀리 못 갔을 거야. 반드시 잡아! 걔는 특별해. 강백현은 특별해! 특별하다고!』
에반 왕자의 고함에 산개하여 사라지는 부하들.
그들은 작은 인간 강백현을 찾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