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cm헌터-101화 (101/200)

101화. 나타샤

나타샤의 말에 두 왕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네 정인을 죽인 자다. 원수와 결혼한다는 게냐?』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이는 자신의 명예를 지켰을 뿐입니다. 두 왕자님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자결로서 명예를 지키셨을 것이 아니신지요?』

『…….』

『그리고 아시다시피 전 미망인의 몸입니다. 여기 머무르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치욕이지요. 왕자님들도 저를 보실 때마다 그이가 생각나실 거고요.』

두 왕자가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고민하다 얼버무리듯 말했다.

『흠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두 왕자가 떠나고 에반이 게슴츠레한 눈을 뜨며 나타샤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무슨 경우라니요?』

『제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이러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에반의 말에 나타샤가 되물었다.

『제 제안이 싫으셨다면 이미 그 자리에서 말씀을 하셨어야죠. 그리고 저보다 더 떠나고 싶어 하시는 분이 에반 님 아니신가요?』

『그게 무슨…….』

『에반 슈트리거, 본명 에반 가브리엘, 신디아 대륙의 전 황족. 그걸 제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나타샤의 말에 에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 뭐하자는 거죠?』

『뭘 하자는 게 아닙니다. 전 미망인으로서 살고 싶지 않을 뿐이고, 에반 님은 한시라도 빨리 신디아 대륙으로 가고 싶어 하시니 서로 윈윈인 상황이지요.』

나타샤의 말에 에반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내 방으로 가시지요. 중요한 이야기는 거기에서 하리다.』

『네. 서방님.』

『서방님?』

『아직은 좀 이르려나요?』

『이르지. 한참 이르지!』

* * *

똑딱똑딱.

듣기 싫은 미묘한 기계음이 자꾸 강백현의 귀를 강타했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반복적인 소리가 계속 신경 쓰였다.

‘뭐지? 시계 소리인가?’

강백현은 유리병 안에서 편히 누운 자세였다. 미묘한 기계음 소리의 원인을 찾으려고 주변을 둘러보는 찰나, 나타샤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 또한 잃어버린 대륙 신디아 출신이에요. 에반 왕자님이나 그 형제들과 결혼을 꿈꾸던 왕국의 소녀들 중 하나였죠.』

『그런데?』

『황제께서 서거하신 후, 신디아는 점점 몰락해갔어요. 광물과 곡식은 헐값에 처분되었고, 공산품들은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죠. 들어오더라도 너무 비싸서 서민들은 살 수가 없었고요.』

『그랬나?』

『처음에는 새로 온 황제에 대한 기대감으로 활기를 띄었지만, 이내 절망적인 상황이란 것을 깨달았어요. 새로 즉위한 황제는 그저 아르케의 꼭두각시였을 뿐이었으니까요.』

새로 즉위한 황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에반의 얼굴에 침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에반을 보며 나타샤가 말했다.

『만약 에반 님께서 황제가 되실 생각으로 오신 거라면 전 힘이 되어드릴 수 있어요.』

『뭐?』

나타샤의 얼굴에 홍조가 걸렸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제가 여기로 시집 온 것은 도르시안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였어요. 어째서 아르케 녀석들도 도르시안만은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직접 보여드리는 게 빠르겠죠. 따라오세요.』

나타샤가 손을 내밀자, 에반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백현도 나타샤의 말이 궁금했다. 곧바로 도약하여 에반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피라미드의 3층.

온통 황금으로 치장된 방에는 수십 명의 근로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백현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옷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옷은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었다.

나타샤는 눈앞의 옷들을 가리키며 에반에게 설명해주었다.

『슈트라는 부르는 이 직물들이 도르시안이 번영할 수 있는 이유였어요. 이것을 착용하면 평소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어요.』

『그래? 내 펫도 착용하고 있는데…….』

『네. 일부 소형 펫을 대상으로 판매하고는 있어요. 하지만 50cm 이상 대형 펫을 위한 슈트는 절대 유통하고 있지 않죠.』

비밀 하나가 더 밝혀졌다.

에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슈트로 번영한 도르시안과 합성종으로 대륙을 제패한 아르케.

『그런데 저 직물의 원천 재료가 뭐야? 너무 소량생산만 하는 것 아니야?』

『맞아요. 잘 보셨어요. 기본적으로 슈트는 많이 생산할 수가 없어요. 직물 의 원천 재료는 저희 세포니까요.』

『세포?』

『네. 거인의 생식세포, 알타이어액에 7일간 담가둔 생식세포는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뭉치게 되죠. 이때 세포벽이 단단하고 매끈하게 만들어져요. 외부의 충격에서 내부 내핵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죠.』

나타샤의 설명에 백현은 그동안 느꼈던 슈트의 이질감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은 거짓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슈트의 복원력도 이제 이해가 됐다.

설마, 거인의 생식세포가 재료였다니.

생식세포는 모든 세포의 초기형태.

어떠한 세포로도 변할 수 있다.

『생식세포라면 많은 거인들이 필요하겠네.』

『네. 얼마 전 완성한 황제의 펫 전용 슈트에 2만 명의 생식세포가 투입되었죠.』

2만 명의 생식세포가 투입된 옷.

날개 달린 사자, 그 녀석이 입을 슈트가 아래에 보였다.

검은 색 직물에 보석이 여기저기 박혀있는 형형색색의 호화스러운 옷.

『보석을 박아 불과 얼음, 전기에 대한 저항력을 높였어요. 아마 아르케에서 어떠한 펫을 데려오더라도 황제를 이길 순 없을 거예요. 저 슈트만 입히면 절대무적이니까.』

* * *

대화를 끝내고 둘은 황제를 알현하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백현이 에반을 말렸다.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왜?”

“지금 네 방문 앞에 무관들이 쫙 깔렸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방문 앞에 왜?”

에반의 한국말에 나타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혹시 펫하고 대화하시는 거예요?』

『잠깐만요. 중요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라서.』

강백현은 에반을 향해 거인어로 말했다. 나타샤와의 대화에서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에반! 거인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총 다섯이야.』

『뭐? 여기로 오고 있다고?』

백현의 거인어에 신기한 듯 바라보는 나타샤.

『지금 펫이 우리말을 한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강백현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것보다 나타샤 아줌마! 갑자기 거인들이 왜 에반의 방 앞에 몰려 있으며 우리를 잡으러 오는 거죠?』

『나도 모르겠어.』

그때, 기분 나쁜 기계음 소리가 다시 귀를 강타했다.

백현은 에반에게 말했다.

『주머니 안쪽을 봐. 이상한 소리가 나.』

『소리? 난 안 들리는데……』

『일단 찾아봐.』

에반이 백현의 말에 자신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기계음의 정체는 조그마한 기계.

강백현은 물론 에반 또한 깜짝 놀라 나타샤에게 물었다.

『이게 뭐죠?』

『도청기예요.』

『도청기?』

『네. 두 왕자님께서 결혼 후 첫날밤에 저 도청기를 몰래 집어넣은 적이 있어서 알고 있어요.』

백현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위험해.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나타샤 아줌마도 위험할 거예요. 아줌마가 한 이야기를 두 왕자가 다 들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빠져나갈 생각을 하니 숨이 막혔다.

여긴 적의 본거지.

도대체 몇 번의 싸움을 해야 할까?

무관 하나하나가 분쟁조정을 통해 전투를 유도할 것이다.

결국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하겠지.

아무래도 에반과 백현은 여기서 죽을 운명 같았다.

그런데 나타샤가 에반에게 말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면 지금 당장 도망가야 해요.』

『어떻게요? 어디로?』

『일단 전 제 방에 다녀올게요. 중요한 것을 챙겨야 해요.』

『이봐요! 지금 여기서 어딜 도망가!』

나타샤는 갑자기 발걸음을 옮겼다.

에반은 당황했다. 갑자기 사라진 나타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무관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페르오네, 페르오르 왕자.

『역시 꿍꿍이가 있었네.』

『맞아. 우리의 기술을 빼가려고 동생을 죽였어. 거기에 스파이까지 심어놔?』

『도청기를 심어놓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버지는 또 깜박하고 속아넘어갔겠지?』

『그러게. 그래서 우리가 항상 말했잖아. 양자로 받아들이는 룰은 최악이라고.』

『그랬지.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수련을 게을리할 거라고 하셨고.』

페르오네 왕자가 먼저 에반에게 분쟁조정을 신청했다.

페르오네 왕자의 펫은 치타.

에반은 당황함을 뒤로 한 채, 페르오네 왕자를 달랬다.

『대화로 하시죠.』

『대화는 무슨 대화? 기밀 빼가는 스파이가!』

『제가 양자로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잖아요. 저는 단지 지나가던 관광객일 뿐입니다.』

『관광객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대화가 입에서 나와? 너나 나타샤나 둘 다 죽었어.』

백현은 으르렁거리는 치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다행이라고 느꼈다.

이제는 별로 무섭지 않았으니까.

페르오네가 에반에게 소리쳤다.

『네 녀석의 능력은 이미 다 파악했어. 가시 능력! 물지만 않으면 이길 수 있지.』

치타가 날카로운 이빨 대신 발톱으로 공격한다.

그런데 녀석의 발톱은 남달랐다.

잘 다듬어진 발톱. 조금만 스쳐도 피부가 찢어질 듯한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백현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고양이류와는 많이 싸워봤다.

백현의 보호막이 펼쳐졌다.

우둘투둘한 단면의 보호막을 긁자 치타의 발톱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뭐야!』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본 거죠. 제 펫의 능력은 가시가 아닙니다. 보호막이죠.』

『뭐?』

하지만 보호막을 계속 유지할 순 없었다.

백현의 주위에서 보호막이 사라지자 치타가 발톱으로 백현의 몸을 갈랐다.

『크크크크, 보호막이 어쨌는데? 이렇게 쉽게 이기는데? 지상에서 가장 빠른 펫이 내 치타라고! 어? 벗어날 수 있겠어?』

하지만 에반은 방긋 웃었다.

『능력이 보호막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제 펫은 자신과 똑같은 분신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방금 당신이 죽인 건 분신인 것 같은데요?』

그때, 백현이 보호막 발판을 만들어 비행을 시작했다.

하늘 위로 솟구친 백현이 조종하는 날카로운 보호막 파편이 치타의 목을 노렸다.

치타는 피부가 얇았다.

맹수 중에서도 가장 약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일까?

치타의 목에서 검붉은 혈흔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치타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분쟁조정의 결과는 에반의 승리.

그런데 결투가 끝나자마자 다른 무관들이 차례차례로 에반에게 분쟁조정을 걸어왔다.

에반은 당황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

여기 모인 무관들 모두를 이겨야만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강백현은 체력이 고갈되는 것을 느꼈다.

특히 분신은 체력소모가 굉장히 컸다.

자가치유 능력이 있지만 크게 고갈된 체력을 당장 회복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백현이 입 밖으로 피를 내뱉었다.

계속된 전투로 인한 내부 장기의 손상.

한계까지 힘을 끌어낸 전투로 인한 것이었다.

5명의 무관을 상대로 승리한 에반을 보며 페르오르 왕자가 썩소를 지었다.

『확실히 강해. 그랬으니까 침투했을 거고. 하지만 이제는 한계겠지.』

페르오르 왕자 뒤로 십여 명의 무관들이 펫을 들고 몰려들었다.

강백현은 앞으로 11번의 전투를 더 이겨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에반과 같이 여기서 죽어야만 할 테니까.

그런데 그때 중요한 것을 가지고 오겠다던 나타샤가 드디어 나타나더니, 페르오르 왕자에게 제안했다.

『페르오르 왕자님,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무슨 소리야? 저 녀석을 죽인 다음은 네년 차례다!』

대화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타샤가 자신의 펫을 꺼내들었다.

『뭐야? 너도 같이 싸우려고?』

『아니요. 싸울 생각은 없어요. 에반, 눈을 감아요.』

나타샤는 자신의 눈을 감은 채, 한 손으로 에반의 눈을 가렸다.

그때, 섬광이 펼쳐졌다.

엄청나게 밝은 빛에 사람들은 눈을 뜨지 못했고, 나타샤는 그 틈을 타서 에반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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