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cm헌터-99화 (99/200)

99화. 협상

여행가이드가 당황한 표정으로 원주민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본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법.

단순히 즐기러 온 관광이었는데 일이 커져버려 난처한 표정이 역력했다.

『저기 저분은 단순한 관광객입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진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황제의 명은 거둘 수 없습니다. 가시지요.』

왕자가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 것이지만, 이 또한 원주민들 간의 룰.

에반은 원주민들에게 둘러싸인 채,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에반은 골치아파하는 얼굴이었다.

“상황이 꽤 복잡하게 됐어.”

“뭐가?”

“네가 왕자의 펫을 죽였기 때문에 왕자는 성인이 될 수 없었어.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거야.”

“안 죽을 수도 있었잖아.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그래. 왕자는 죽음을 택하지 않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황족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노예로 전락하지. 그래서 왕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해 황족의 명예를 지킨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무슨 멍청한 소리야! 목숨보다 소중한 게 어디 있어?”

“너도 왕자라면 알 텐데?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웃기지 마. 생명이 우선이야. 넌 알면서도 그렇게 한 거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미리 말했으면? 네가 대신 죽을 생각이었어?”

“그건 아니었지만 무슨 방법이 있었을 거 아니야?”

“네가 죽는 방법 말고는 없었지. 그래서 나도 가만히 있었던 거고. 덕분에 나도 위험에 처했지만.”

* * *

의식행사가 끝나고 에반은 황제에 의해 압송되었다.

고대 벽화가 그려져 있는 사막의 도시.

그 중에서도 황제가 산다는 피라미드.

피라미드를 보며 백현은 깜짝 놀랐다.

지구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는 형태.

조금 다른 점이라면 벽돌의 색깔.

밝은 황색을 띄는 지구의 피라미드와 달리 이곳의 피라미드는 전부 흰색이다.

피라미드 입구.

바깥의 더운 날씨와 달리 피라미드 내부는 굉장히 시원했으며, 조그마한 공기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 덕분에 내부는 상당히 밝았다.

황제가 앉아있는 알현석.

그 옆에 서 있는 황비와 수십 명의 왕자, 왕세자비들.

수백의 무관 및 문관으로 보이는 거인들이 에반을 앞에 두고 황제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는 일단 성인식을 무사히 치른 왕자 둘을 치하했다.

『페르오네, 페르오르, 너희들은 오늘 나 페르세우스를 이을 황족으로서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 기뻐하라!』

『감사합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아버님!』

페르세우스 황제는 두 아들에게 보물을 하사했다.

보물은 다름 아닌 소생의 돌.

펫을 살릴 수 있는, 50개를 모으면 거인도 살릴 수 있는 기적의 물건이었다.

그걸 보며 페르오네와 페르오르의 왕세자비들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한 여성 거인이 갑자기 쓰러졌다.

그녀는 젊었다. 아직 꽃도 피우지 못한 나이.

자신의 남편이 성인식을 통과하지 못한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은 그녀가 충격으로 졸도한 것이었다.

황제는 무관들을 시켜 그녀를 처소로 옮겼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배려하듯 선언했다.

명예롭게 죽은 페로테우스로 인해, 그녀 또한 앞으로 황족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황족의 일원으로서 가족같이 지내라고.

모든 식순이 끝나고 이제는 에반의 처분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그런데 에반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황제의 질문에도 크게 동요하는 것 없이 그가 입을 열었다.

『에반 슈트리거이옵니다. 에반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좋아. 에반. 자네는 페로테우스와의 전투에서 당당하게 승리했네. 그건 자네가 내 양자로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말하네. 알고 있었나?』

『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기대하고 있겠네.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 좋네.』

에반은 피라미드 안쪽에 임시로 마련된 거처로 안내되었다.

양탄자가 깔린 화려한 방.

화려하게 꾸며진 금침대.

이국적인 장식품들. 이 모든 것은 그를 왕자로 대우해준다는 것.

“에반, 양자로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뭐야?”

“음. 일이 꼬였어.”

“뭐가 꼬였는데?”

그때, 한 여성이 에반의 처소로 들어왔다.

그녀는 앞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여성이었다.

퀭한 눈, 슬픔에 잠겨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야윈 얼굴을 한 그녀가 에반에게 말을 꺼냈다.

『나타샤라고 하옵니다.』

『나타샤로군요. 에반입니다. 에반 슈트리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에반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로의 말을 건넬까도 했지만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쓸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위로의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페로테우스의 수련이 부족했던 결과니까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나타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대화 없는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나타샤는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뭐가 문제인지 계속 머뭇거렸다. 결국 에반이 먼저 물었다.

『찾아온 이유가 있으실 텐데요?』

『네. 사실 이런 말 하는 게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만약 양자로 들어오시게 되면, 저를 거두어주셨으면 해서요.』

『네? 거두어준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뭐긴 뭐야! 너랑 결혼하고 싶다는 거잖아.”

물론 이 말은 에반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타샤 입장에서는 작은 펫이 혼자 우는 소리로만 들렸을 터.

『설마…….』

『네. 저를 거두어주신다면, 제가 평생을 받들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에반은 나타샤와 밤새 대화를 계속했다.

메마른 사막 도르시안에서는 배우자를 잃은 미망인은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재혼하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는 성비 때문에.

가임기 때의 체온에 따라 자녀의 성이 결정되는 거인들의 특성상 도르시안에는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무려 1 : 2.

따라서 나타샤는 오늘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평생 홀로 살아야 할 처지에 이른 것이다.

에반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대답을 전했다.

『제가 시험에 합격하면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의 말을 들은 강백현이 깜짝 놀랐다.

“뭐?! 미쳤어?”

자신의 혼사를 1분 만에 결정하는 에반.

그런 결정을 들은 나타샤는 안도하며 에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건 제가 알고 있는 정보들입니다. 이 문제들을 보시고 무관과 문관들의 시험에서 꼭 합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걱정 마시고, 들어가 보세요.』

『네.』

나타샤가 에반의 방에서 나간 후, 강백현이 에반을 나무랐다.

“뭐하는 거야? 결혼을 한다고?”

“그래. 어차피 이판사판이잖아.”

“이판사판이라니? 양자 시험을 못 붙으면 더 좋은 거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못 붙으면 황제가 날 죽이잖아.”

“뭐?”

“이 시험은 그런 시험이라고. 위대한 전사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이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관례야. 자기 아들의 펫을 죽여서 전투력을 증명했으니, 이제는 총명함과 영특함을 시험해보겠지.”

나타샤가 건네준 파피루스의 종이에는 여러 가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에반은 곤란한 표정으로 백현에게 물었다.

“너 이게 뭔지 알아?”

“몰라. 그림이 에반데?”

“뭐? 나라고?”

“아니, 그림을 알아볼 수 없겠다고. 너무 못 그려서.”

그랬다. 나타샤는 그림에 소질이 없었다.

* * *

다음 날.

시험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 5명이 나와 있다.

이 거인들은 서로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연기자라도 된 것처럼 날계란을 먹으며 목을 다듬는 거인도 있었고, 물을 마시며 초조함을 달래는 거인도 있었다.

에반은 고개를 저으며 어떤 시험이 시작될지 마음을 졸였다.

잠시 후, 황제가 도착했다.

『바로 시작하라!』

『네!』

황제의 명령에 5명이 에반의 앞에 섰다.

에반은 책상에 앉아 5명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때 진행자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영특함을 측정할 수 있는 추리 문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자는 자신을 제외한 4명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약 세 시간 전, 황제께서는 알현실에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가 황비와의 결혼반지를 잃어버리셨습니다. 황제께서는 알현실 앞에 근무를 서고 있는 근무자에게 오늘 출입한 인원을 확인하셨으며 다음의 4명이 용의자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세 시간 전 4명이 무엇을 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진행자는 첫 번째 젊은 남성을 지목했다.

『저는 청소근무자로서 그때 화장실 청소시간이었습니다. 항상 같은 시간에 청소를 하기 때문에 전 범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중년 남성이었다.

『저는 그 시간에 출입 기록을 작성하는 근무를 하고 있었어요.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으니까 기록에도 남아있을 거예요.』

다음 세 번째는 젊은 여성이었다.

『검은 구체를 이용해 물품 배송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었어요. 첨단도시 아르케에서 아이 용품을 구입했었거든요. 때마침 배송시간이었죠.』

그리고 네 번째는 할머니.

『나야 뭐, 빨래하고 있었지 뭐. 난 범인 아니야.』

4명의 거인들이 대답하자, 진행자가 에반을 향해 물었다.

『4명의 알리바이를 들어보았습니다. 여기서 알리바이가 맞지 않는 1명이 바로 범인입니다. 범인은 누구일까요?』

백현은 4명의 알리바이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1. 화장실 청소시간이었다는 청년.

2. 출입기록을 작성하고 있었다는 중년 남성.

3. 아이물품을 배송 받고 있었다는 여성.

4. 빨래를 하고 있었다는 장년 여성.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이 없어보였다.

황제도 고개를 저으며 진행자에게 물었다.

『정말 이걸로 정답을 풀 수 있는 거야?』

『네. 1분 안에 풀어야 합니다. 30초 남았습니다.』

황제는 시험문제를 만들어낸 문관들에게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문제.

백현은 고개를 저었다.

‘난 못 풀어. 이건 못 풀겠어. 이럴 때 미나가 있었으면 바로 정답이 나왔을 텐데.’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점.

그 이점이 여기서는 너무나 부러웠다.

백현은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 문제를 풀지 못했다.

『제한시간 다 됐습니다. 에반 슈트리거! 정답은요?』

에반은 씩 웃으며 한 명을 가리켰다.

그러자 지켜보던 거인들이 웅성거렸다.

『그 이유는요?』

에반은 아이물품을 배송받고 있었다는 거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 물품은 검은 구체로는 배송 받지 못합니다. 검은 구체는 펫 전용이거든요. 따라서 붉은 구체를 이용해야만 하죠. 그러므로 범인은 저 젊은 여성입니다!』

거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

에반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케에서 살지 않았다면, 내가 황족이 아니었다면 쉽게 풀 수 없는 문제였어. 붉은 구체는 신디아나 도르시안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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