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운명
미나가 죽은 줄 알고 한참을 걱정했다.
그런데 다행히 미니맵에 잡힌다.
정선희와 박윤수가 함께 있는 게 보인다.
다행이었다.
백현은 생각해보니 동생과 떨어진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낯선 환경, 낯선 공간에서 지금 당장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그때 에반이 물었다.
“괜찮아?”
“응. 살아 있나 봐.”
“관련 동영상 몇 개 떴네. 띄워볼게.”
“응.”
동영상 재생 중 죽은 줄만 알았던 미나의 몸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백현은 그게 무슨 현상인지 잘 알았다.
소생의 돌을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
그런데 에반도 그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소생의 돌? 지금 이거 소생의 돌 쓴 것 같은데? 아닌가?”
“뭐?”
“소생의 돌 맞아. 이 빛은 소생의 돌밖에 없어.”
에반의 질문이 강백현에게 이어졌다.
“어떻게 갖고 있어?”
“뭐?”
“소생의 돌을 어떻게 가지고 있냐고!”
강백현은 일단 얼버무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자 에반이 진지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진짜 몰라? 저 빛! 소생의 돌을 썼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야. 봐! 죽었다가 살아나잖아. 동영상 장면이 그렇잖아.”
“그게 문제 될 거 있어?”
“당연하지. 아마 거인들은 끝까지 찾아낼걸? 저 휴먼이 네 동생이 맞다면, 거인들은 네 동생을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내서 알아내려고 할걸?”
백현은 당황했다. 거인들이 동생을 죽일 거라는 에반.
“소생의 돌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당연하지. 죽은 생명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백현은 논리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했다.
“너희 방송에서 목숨을 걸라고 하면서 보상으로 준 거잖아. 페이즈를 진행하면서 영혼의 돌하고 소생의 돌을 얻는 기회를 줬잖아!”
“이런, 그런 거였어?”
“뭐라는 거야? 나도 이해하기 쉽게 말해!”
“그런 거였어. 그래. 그 이유였어. 우리 선조들이 항상 율리만 섬에 도전했던 것이 그 이유였어.”
“아!”
에반은 백현의 대답으로부터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에반은 인터넷을 검색하며 자신이 아는 정보를 취합했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역시 결론은 우승이야.”
“뭐?”
“대회에서 우승해서 황제가 될 거야. 그래야만 율리만 섬에 갈 수 있는 권한이 생기니까. 선조들이 맞았어.”
“혼자 이해하지 말고 나한테 좀 말하라고!”
“만약 네 말이 맞다면, 그 돌을 준 존재는 율리만이야. 구체를 관리하고, 소생의 돌이나 애완동물을 관리하는 존재 또한 율리만이지.”
“모든 원흉은 율리만이라는 거야?”
“그래. 이걸로 확실해졌어. 내가 황제가 되어야 해. 내가 황제가 돼서 율리만을 만나면, 네 동생은 물론 친구들도 전부 구해줄 수 있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고, 잘하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그분이 너희들을 이곳으로 데려왔으니까.”
에반의 그분이란 말에 백현이 움찔했다.
미나가 말하던 사람. 항상 그분이라고 칭했다.
백현 또한 생각에 잠겼다.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존재.
처음에는 신이라고만 생각했다.
작아지게 만들고, 능력을 주고, 시련을 주고.
그런데 이제는 달랐다.
에반의 말처럼 그분이라는 존재의 모든 방향표는 율리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거인이 소생의 돌과 영혼의 돌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에반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것은 율리만에 의해 계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현은 생각했다.
에반이 말하는 율리만 섬에는 분명 자신을 이렇게 만든 존재가 있다고.
한 명도 살아돌아오지 못했다는 그곳에는 분명 해결책이 있다고.
그런 백현의 표정을 보며 에반이 말했다.
“잘하면 너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너희가 가장 원하는 게 그거일 테고.”
정답.
지구. 지금 당장 지구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100명 중 100명은 돌아가길 원할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
사람을 존중하는 세계.
우리들의 쉼터.
“좋아. 알았어. 지금은 동생의 안위보다 널 황제로 만드는 것을 최우선으로 할게. 네가 말한 대로 지구에 갈 수 있다면 나도 널 도와야 할 것 같으니까.”
한편, 에반은 어릴 적 부모님이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율리만 섬에 우리들의 미래가 있을 거라고 항상 말씀하시던 부모님.
그곳을 정복하지 않는 한, 거인들은 이 좁은 대륙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할 거라고 하시던 말씀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율리만 섬에 갔던 자는 단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에반은 가야만 했다.
거기에서 소생의 돌을 얻을 수 있다면, 무조건 가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을 되살려야만 했다.
에반이 되물었다.
“정말 거기서 얻은 것 맞지? 페이즈를 진행하면서 얻은 거 맞지?”
“그래. 거짓말할 리가 없지. 내가 소생의 돌을 가지고 있으니까.”
백현이 자신의 몸에서 이질적인 돌을 꺼냈다.
소생의 돌과 영혼의 돌이었다.
에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도 가지고 있었어?”
“그래. 일단은 나도 꽤 힘든 상황을 헤쳐왔거든. 그거에 대한 보상이었다고나 할까?”
* * *
다음 날. 일행은 붉은 계곡의 막바지에 들어섰다.
암반 지역이 끝나자 앞에는 계곡이 보였다.
엄청난 수의 거인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원래는 폭포가 흐르고 있었다는 계곡.
하지만 이제는 폭포 대신 말라버린 풀과 물웅덩이 몇 개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여행가이드는 그러한 환경 앞에서 가이드 역할을 시작했다.
『지금 앞에 있는 장소가 불의 계곡의 절경. 생명의 폭포입니다.』
『생명의 폭포요? 왜 그렇게 불리나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건기와 우기의 개념을 잘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어, 지금처럼 계곡이 말라버렸을 때는 의식행사를 치르곤 했죠.』
『의식행사라면 설마…….』
『네. 우천제입니다. 하늘을 향해 비를 내려달라는 염원을 담은 의식행사죠. 그런데 요즘에는 우천제 대신 다른 행사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운이 좋네요. 때마침 저희 황실에서 의식행사를 준비 중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많은 관광객들이 모인 거고요.』
파란 염료로 물들인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거인들.
녹색 염료로 물들인 옷을 입고 악기를 연주하는 거인들.
흰 염료로 물들인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는 거인들.
붉은 염료로 물들인 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는 거인들까지.
이곳의 원주민인 거인들이 서로 화합하여 축제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악기를 연주하는 거인들의 장단에 맞춰 모두 같은 춤을 추고 같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곳 문명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었다.
행사는 격앙되기 시작했다.
에반은 일행과 함께 의식행사를 지켜보았다.
확실히 잃어버린 대륙 신디아와는 많이 달랐다.
전통의 문화를 잊지 않고 체계를 갖추어 옛 것을 지키려는 저들의 문화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때 웃통을 벗은 남성 3명이 행사장에 나타났다.
붉은 피를 몸에 바른 3명의 남성형 거인이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거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합! 합! 합! 합!』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거인어를 계속해서 내뱉는 원주민들.
그들이 소지한 검들이 일정간격으로 바닥을 내리찍었고.
북과 나팔이 검의 간격에 맞추어 중저음의 음색을 퍼트렸다.
그로인해 웅장한 중저음의 파형이 주변에 울려퍼졌다.
그걸 들으며 여행가이드는 방긋 웃었다.
『역시 왕자님들의 성인식이 오늘이었군요. 여러분들은 정말 운이 좋습니다. 황족의 성인식을 이렇게 앞에서 볼 수 있다니요!』
성인식.
황족 출신 중 남성형 거인들이 진정한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
합! 합! 합! 합!
합! 합! 합! 합!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3명의 왕자들이 관광객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에반이 여행가이드에게 물었다.
『성인식이라고 하면 외지인과의 대결을 뜻하는 거죠?』
『네. 맞습니다. 지나가는 외지인 중 하나를 붙잡아 결투를 신청하여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죠.』
『펫과의 전투를 말하는 거죠?』
『네. 맞습니다. 저희 도르시안의 왕자들은 10살이 되면 맹수의 새끼와 함께 지내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함께 먹고 함께 자라며 펫과 유대감을 갖게 되죠. 그리고 20살이 된 도르시안의 왕자들은 자신과 10년 이상 같이 지낸 맹수들을 데리고 외지인 중 하나를 지목해 성인식을 치르게 됩니다.』
왕자 중 하나가 관광객 하나를 지목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몰려가 그 관광객을 행사의 중앙으로 데려간다.
관광객은 왕자와의 대결을 시작했다.
관광객은 웃었다.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펫을 내놓았다.
왕자의 펫은 치타.
관광객의 펫은 청솔모.
당연히 승리는 왕자의 몫.
『이곳만의 암묵적인 룰이 있습니다.』
『룰이요?』
『네. 황자의 성인식이 무사히 통과되도록 약한 펫을 가지고 오는 거죠. 성인식에 실패한 왕자는 두 번 다시 성인이 될 수 없으니까요.』
두 번째 왕자의 펫은 하이에나였다.
그가 선택한 관광객의 펫은 사막여우.
두 번째 왕자는 조금 고전했지만 승리는 역시 하이에나였다.
『위험했군요. 사막여우는 생각보다 포악해요. 왕자님이 10년 동안 기른 하이에나가 다칠 뻔했습니다. 이런 행사를 망치면 안 되죠.』
그런데 세 번째가 문제였다.
마지막 왕자가 에반을 가리켰다.
『저요?』
『응. 당신.』
왕자의 선택을 본 여행가이드가 에반에게 말했다.
『정말 영광이네요. 축하드려요! 아! 내가 선택되었어야 했는데!』
『축하라뇨? 내 펫이 죽잖아요.』
『애완동물은 걱정하지 마세요. 왕자가 선택한 외지인에게는 황실에서 5년 이상 직접 기른 맹수를 펫으로 쓰라며 선물로 주니까요. 그러니까 얼른 이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하세요!』
백현과 에반은 당황했다.
세 번째 왕자의 펫은 놀랍게도 표범.
잔혹하기 짝이 없는 맹수임에 틀림없다.
검은 구체가 전장을 열고 있었다.
분쟁 조정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때 왕관을 쓴 황제가 손을 들었다.
『성인식을 집행하라!』
『네!』
거창한 북소리가 울리고.
검은 구체 4개가 메마른 초원에서 전장을 만들어낸다.
이제 빠져나갈 길은 없다.
백현과 표범이 대결을 시작했다.
물론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모두가 예상했듯 표범의 승리로 끝나야만 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표범의 입에 삼켜진 백현.
‘여기서 죽을 순 없어.’
반투명한 가시 수십 개가 표범의 입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뻗쳤다.
표범이 고통을 느낀 것은 잠시뿐이었다.
단 3초.
3초 만에 푹 쓰러지는 왕자의 펫. 표범.
왕자가 성인식에 실패하자,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페로테우스는 성인이 될 수 없다.』
『아버지!』
『스스로 집행하라!』
『아버지…… 아버지!』
황제의 말에 눈물을 흘리는 세 번째 왕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붉은 옷을 입은 원주민의 검을 뺏어들어 스스로의 배를 찌르고 쓰러졌다.
북소리가 멈추고, 춤추던 거인들도 움직임을 멈춘다.
원주민들이 에반과 백현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윽고 황제가 명령했다.
『포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