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마스터의 실체
장명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 들린 영혼의 돌.
겁에 질린 미나를 향해 장명훈이 물었다.
“아가씨, 이 돌은 아가씨가 가지고 있던 건가?”
미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 한마디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녀석의 생각이 들려온다.
[쓸모 있는 계집이군. 살려둬도 되겠어.]
살려둔다는 속마음을 들었음에도 미나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서 지인이 죽어버렸다.
나쁜 놈이긴 했지만, 저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스터. 가시죠. 모래시계의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응. 가지.”
아공간 능력은 이진기가 죽었음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었다.
시간이 되자, 공간과 공간이 겹쳐진다.
배경이 갈라지고, 그들의 앞에 실험실이 펼쳐진다.
이진기의 사체가 공중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공간에서 이미 널브러져 있던 사체는 바닥과 충돌하자 혈흔파편이 되어 주변을 적셨다.
“증거가 남겠는데요.”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수확은 있었어. 괜찮아.”
마스터는 강미나와 영혼의 돌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김건우의 물질투과 능력을 사용하여 이탈하는 두 사람.
강미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그들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죽으니까.
돌아가는 길.
마스터 장명훈이 강미나에게 말했다.
“제가 원망스럽습니까?”
“…….”
“저는 저를 배신하는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단, 내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끝까지 같이 가죠.”
그의 말에 강미나가 생각했다.
‘아니야! 저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해. 거짓말이야.’
하지만 표정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표정을 감추고 최대한 그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
“감사합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할 일을 한 것뿐이죠. 그런데 미나 씨? 혹시 영혼의 돌 말고 소생의 돌은 없으신가요?”
“네. 아쉽지만, 저한테 쓴 게 마지막이었어요.”
“그렇군요.”
장명훈은 강미나의 대답을 듣고 생각했다.
[영혼의 돌은 그다지 쓸모가 없어. 실망인데?]
미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옆에서 김건우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
“진기가 죽기 전에 말한 게 기억이 나네요. 강백현이라고, 그 사람이 소생의 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요. 맞죠? 미나 씨 오빠 맞죠?”
김건우의 말에 미나가 대답을 회피했다.
오빠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김건우의 말에 마스터가 흥미를 보인다.
[맞아. 이 여자의 오빠가 소생의 돌을 가지고 있다면, 좀 더 살려둬도 되겠지. 일단은 거주지로 데려가자. 나중에 심문해봐야겠어.]
미나는 타인의 생각이 들리는 게 저주스러웠다.
자신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그의 생각.
그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목숨이 날아간다.
장명훈은 걷다 말고 미나를 향해 말했다.
“미나 씨?”
“네.”
“오늘 진기가 죽은 것은 다른 사람한테는 일단 비밀로 합시다. 거주지를 지휘하는 마스터로서,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면 나도 조금은 곤란하거든.”
“…….”
“비밀 꼭 지켜주길 바랍니다. 못 지키면 알죠?”
미나의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 개죽음 당하긴 싫었으니까.
죽도록 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결심했다.
‘살아남자. 뭐든 해서 여기서 살아남는 거야.’
* * *
거주지에 처음 들어온 미나. 모든 게 낯설었다.
마스터가 말했다.
“선희 씨랑 형우 씨 불러와.”
“네. 마스터.”
김건우가 정선희와 최형우를 부르러 거주지 숙소로 이동했다.
강미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두려웠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그런데 잠시 후 김건우와 함께 나타난 정선희를 보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미나야. 살아있었구나.”
“언니! 선희 언니!”
“왜 울어! 바보 같이, 나도 눈물 나오잖아.”
“미안해요. 언니. 언니 정말 미안해요.”
하염없이 부등케 안고 울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마스터가 말했다.
“일단 숙소로 가서 안정시키시죠. 아람이가 나간 상태라 방은 비어있죠? 선희 씨는 앞으로 미나 씨랑 같은 방 쓰도록 해요.”
“네.”
정선희가 강미나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시원한 황토방.
그 안에 있는 낡은 침대 2개.
그리고 침대 한쪽에서 자고 있는 윤수.
미나가 눈물을 닦자 정선희가 안부를 물었다.
“괜찮지? 아픈 데는 없고?”
“네. 괜찮아요.”
“백현이는? 소식은 알아?”
“오빠랑 같이 있었는데, 실종됐어요. 오빠 찾으러 아르케 5지역까지 갔었는데 사람들이 전부……. 사람들이 전부…….”
미나는 차마 말을 못 꺼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차분히 말해. 괜찮아. 여기는 안전해.”
“언니. 오빠랑 같이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안락사 당했어요.”
“뭐?!”
“장복남 아저씨도 그중 한 명이었어요. 30여 명 정도가 웃음 지으면서 자고 있길래 처음에는 몰랐는데, 허벅지에 주사바늘 자국이 있고, 다 피를 흘리고 있어서…….”
미나의 말에 정선희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같이 울어주었다.
끔찍한 인간들의 삶.
죽은 사람도 고통스러웠겠지만, 살아남은 자도 고통스러웠다.
“괜찮아. 여긴 괜찮아. 마스터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거야. 그러니까 안전해.”
정선희의 말에 미나가 되물었다.
“마스터는 우릴 지켜주지 않아요. 언니를 지킬 생각이 없어요.”
그런데 정선희는 이미 마스터에게 세뇌되어 있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를 거두어주고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 말 하면 못 써! 다른 사람한테 절대 그런 말 내뱉지도 마.”
“하지만! 그 사람이 이진기 오빠를 죽였어요.”
강미나는 이 말로 확실히 정선희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마스터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야.”
“언니…….”
“마스터는 우리 윤수를 소생의 돌로 살렸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해? 내 앞에서 장명훈 씨 욕하지 마.”
어색해진 분위기에 미나가 정선희로부터 떨어졌다.
미나는 생각했다.
여기는 또 다른 지옥이라고.
선희 언니도, 진기 오빠도.
자신이 알던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지만 버텨야 했다.
일단은 어디 갈 곳이 없으니까.
“언니, 정말 미안해요. 내가 조금 흥분했나 봐요.”
“아니야. 나도 너한테 너무했던 것 같아.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네. 언니.”
* * *
한편, 김아람은 중단된 경기 때문에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초조해졌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김만철은 부쩍 친해진 김아람에게 농담을 건넸다.
“긴장돼?”
“네?”
“아니, 긴장하는 것 같아서.”
김만철의 말에 김아람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신경 꺼요. 반칙왕.”
“반칙?”
“슈트 사용법 혼자 알면서 반칙 썼잖아요.”
“그거야 내가 노력해서 안 건데?”
김만철과 김아람이 서로를 째려보았다.
“아! 진짜 사람이 못돼먹었어. 여자 때리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알았어요?”
“이런 세상에서 여자, 남자가 어디 있냐? 강한 놈과 약한 놈. 그렇게 구분 되는 거지.”
“그러니까 아저씨가 지금까지 결혼을 못한 거예요! 배려심이 없으니까!”
“뭐?!”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두 사람.
그걸 본 바키, 버키 형제.
『쟤네 또 싸운다.』
『음……. 안 좋아. 안 좋아. 떨어트려.』
그리고 곧이어 경기가 속행되었다.
김아람은 자신의 상대방으로 나온 펫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자신과 비슷한 외형에 비슷한 체형.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었다.
그녀가 김아람을 향해 물었다.
“韓国人ですか?” / (한국인이십니까?)
김아람은 일본어를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어로 말했다.
“韓国人ですが、日本語は与える知っている.” / (한국인입니다만, 일본어는 할 줄 압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부저가 울리고.
상대는 싸우기 전에 김아람과 대화를 시도했다.
“일본어가 유창하시네요.”
“저희 아버지가 일본분이세요.”
“저는 미츠키 소라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까 만감이 교차하네요. 서로 죽여야 하는 싸움인데.”
“미츠키 상, 서로 후회 없이 가요.”
“네.”
미츠키 소라.
그녀는 입고 있던 기모노를 벗었다.
김아람은 깜짝 놀랐다.
알몸 내지는 속옷이 드러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에 슈트를 입고 있다.
“미츠키 상, 당신도 슈트를 가지고 있네요.”
“네. 저도 생존자니까요. 전 당신이 누군지 기억났어요. 엑스트라 페이즈에서 혼자 날뛰던 당신을 보았죠.”
슈트를 입은 미츠키 소라가 거리를 벌렸다.
김아람과 붙는다는 것을 알고 철저하게 준비한 그녀였다.
슈웅!
그녀가 던진 무언가가 김아람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왔다.
김아람은 자신의 염력으로 그것을 멈췄다.
표창이었다.
날카롭게 연마된 표창을 던지는 미츠키.
“제 능력은 투척 Lv3. 멀리서도 정확히 조준해서 던질 수 있어요. 당신의 약점은 이미 알고 있어요. 거리가 멀어질수록 당신의 무지막지한 파괴력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죠.”
염력의 약점을 제대로 알고 있는 미츠키.
그녀는 계속해서 거리를 유지한 채, 표창을 날려댔다.
“미츠키 상, 내가 원거리가 약점인 것은 맞아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원거리 공격을 근거리에서 모두 막아낼 수 있어요. 이게 과연 약점일까요? 당신의 표창 개수에는 한계가 있을 텐데?”
그런데 미츠키는 쉴 새 없이 표창을 날렸다.
자존심이 상한 김아람은 모든 표창을 염력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곧 당황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던지는 거야? 도대체 표창이 몇 개야?’
미츠키는 웃었다.
“당신의 또 다른 약점. 저질 체력. 능력의 소모값이 너무 커서 체력을 많이 소모할 수밖에 없지. 즉 시간 싸움은 내가 유리하다는 것.”
미츠키가 자신의 능력을 공개한다.
그녀는 투척 능력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던 가슴골 사이에서 표창을 꺼내든다.
“설마!”
“나의 또 다른 능력은 표창 소환 Lv3. 표창의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기초적인 표창만 소환한다면 500개도 만들 수 있어.”
미츠키가 이번에는 표창이 아니라 기폭찰을 만들었다.
김아람이 날아오는 기폭찰을 염력으로 정지시키자, 기폭찰이 큰 폭발을 일으키며 먼지바람을 일으킨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십 개의 표창이 앞뒤 가릴 것 없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먼지바람 속에 가려진 아람이를 향해 뿌려지는 수십 개의 표창. 그리고 펑펑 터지는 기폭찰.
미츠키는 닌자처럼 움직였다.
재빠르게, 그리고 날렵하게.
그리고 승리를 점쳤다.
“이겼어. 이긴 거야!”
그런데 먼지바람 안에서는 수십 개의 표창이 김아람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김아람은 생각했다.
‘백현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어. 나도 다 할 수 있는 거야!’
상대방이 던진 표창을 주변에 유지시켰다.
김아람은 강백현이 보호막 파편을 주위에 두른 채 방어막으로 사용하듯 상대가 던진 표창을 자신의 주변에 띄워놓고 뛰기 시작했다.
미츠키가 당황했다.
“괴물! 괴물! 괴물!”
김아람은 제법 빨리 달리고 있었다.
미츠키와 비교해도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그녀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이렇게 쓰는 거야. 땀을 흘리면 슈트가 그걸 흡수해. 먹이처럼 먹는 거야.’
슈트가 몸에 꽉 끼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조르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움직임은 더 날렵해졌다.
김아람은 지금까지 받아낸 표창과 아직 터지지 않은 기폭찰을 몸 주위에 띄운 채 미츠키에게 달려갔다.
미츠키가 빠르게 표창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표창들이 전부 김아람이 통제할 수 있게 되어버린다.
김아람이 말했다.
“그거 알아? 난 예전의 내가 아니야. 내 염력 레벨은 3. 절대 당신에게 지지 않아! 미츠키 상, 미안. 날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김아람은 미츠키와 가까워지자 왼손을 위로 올렸다.
부유하는 표창과 기폭찰들을 공중으로 띄운다.
그걸 던지려는 김아람.
던지면 이 일본인은 100프로 죽게 된다.
그런데 상대방 거인이 소리질렀다.
『기권! 기권!』
흰색 수건이 던져지고.
김아람이 상공으로 띄워올린 표창과 기폭찰들이 반대방향으로 떨어져서 거대한 섬광과 폭풍을 만들어낸다.
미츠키 소라는 울고 있었다.
김아람이 그녀를 향해 걸어가서 손을 건넸다.
“괜찮아. 괜찮아.”
“응. 무서웠어.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미안, 좋은 승부였지?”
“응.”
미츠키가 김아람이 건넨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 장면을 신기한 듯 중계하는 거인들.
『저 조그마한 생명에게도 마음이 있는 걸까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비심을 베풀 줄 아는 걸까요?』
미츠키는 아람이의 도움을 받고 일어나며 말했다.
“내 이름은 소라. 앞으로 미츠키 상 말고 소라라고 불러줘.”
일본인들은 친해지고 싶은 상대에게는 성이나 이름 뒤에 붙이는 ‘상’이라는 높임말을 빼고 이름으로 부르라고 한다.
김아람은 아빠가 일본인이라 그런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응. 난 아람. 아람이라고 부르면 돼.”
“응!”
두 여성이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그리고 헤어짐.
김아람은 자기 또래의 여성이 거인에게 안겨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생각했다.
잘못됐다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