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변수
사막도시 모로코에 도착한 에반이 백현을 깨웠다.
“일어나. 다 왔어.”
“아……. 응.”
모로코의 풍경은 낯설었다.
뜨겁고 메마른 기후.
거인이 살기 어려워 보이는 토양.
그럼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건물들.
거인들은 뜨거운 태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도심 주변을 걸어다녔다.
백현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건물 내부의 온도가 달라.’
건물 내부는 굉장히 시원했다.
“진짜 시원하네.”
“사막 도시라고 더울 줄 알았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멀었네. 인간들은 멀었어.”
에반이 걸어가며 건물 지하로 연결된 수로를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모로코 건물 거의 대부분의 지하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찬 공기와 뜨거운 공기가 있으면 뜨거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잖아? 그 정도는 알지?”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거든?”
“지구과학? 아무튼 물에 의해 생성된 찬 공기가 실내의 뜨거운 공기를 위로 밀어내. 그래서 건물 내부는 항상 시원할 수 있지. 봐! 건물 천장에는 저렇게 다 환풍구가 설치되어 있잖아.”
독특한 가옥 형태.
하지만 그렇기에 사막에서도 살아남는 거인들의 지혜가 엿보였다.
에반이 가장 먼저 간 곳은 장마당이었다.
백현은 이곳 거인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남성형 거인은 수염을 길렀다.
단정한 아르케 거인들과 달리 이곳은 지저분한 게 미덕인 듯, 중년 이상의 거인들은 대부분 수염이 있었다.
여성형 거인들은 거의 대부분 얼굴을 가렸는데, 이건 이슬람 문화의 히잡처럼 보였다.
에반이 남성형 거인에게 물었다.
『낙타를 처분하려고 하거든요. 얼마까지 가능할까요?』
『2,500?』
『잠시 둘러볼게요.』
『3,000!』
『네? 둘러보고 온다니까요.』
『4,000! 4,000!』
에반은 신기한 듯 한국어로 백현에게 말했다.
“어라?”
“팔지 마. 발품 팔아봐. 더 비쌀지도 몰라.”
“응. 그래야겠네.”
그리고 10분 뒤.
10,000제니에 낙타를 처분한 에반이 씩 웃었다.
낙타가 들고 있던 짐 중 일부를 챙긴 에반이 이제는 차량을 구하러 여행사로 이동했다.
에반이 건물에 들어가자, 얼굴을 전부 내민 여성이 그를 맞이했다.
『들어오세요. 어디 가실 곳은 정하셨나요?』
『네. 신디아에서 온 여행자인데요. 신디아로 다시 들어가려고요.』
『아! 그러시구나. 잠시만요. 일정 확인해볼게요. 앉아계세요.』
여성형 거인이 자리로 돌아가 일정을 확인하는 동안 백현이 물었다.
“두건 같은 건 왜 쓰는 거야?”
“두건?”
“응. 바깥에서 보니까 여성들은 다 두건을 쓰던데…….”
“아, 그거 햇빛 안 받으려고 쓴 거지. 얼굴 타니까.”
“아…….”
백현은 에반의 대답에 의문점이 풀렸다.
‘그거였구나. 거인들의 세계를 인간들의 세계에 너무 이입했네.’
여성들의 사회 지위가 너무 낮은 이슬람 문화.
운전이 허락되지 않거나 남들 앞에서 피부를 보여주면 안 되는 국가도 있다.
꾸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문화.
다행히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거인들은 생각보다 평등했다.
여성, 남성을 그리 구분하지 않았다.
여성형 거인이 남성형 거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줄랑 씨! 부탁해요.』
『아~ 네.』
그때 여행 도우미가 에반을 불렀다.
남성형 거인이었다.
『신디아로 가신다고요? 불의 대륙을 거쳐서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일정입니다. 출발은 오늘 점심이고요. 4인 출발에 7300제니입니다. 펫이 혹시 50cm 이상이시면 30% 추가요금 발생하시고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가야죠.』
『그럼 선불인데 지불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작은 구체를 통해 에반의 계좌를 확인하는 여행도우미.
그는 에반의 잔액을 보며 방긋 웃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출발 2시간 남았고요. 점심 포함 상품이라서 저희 건물 2층에서 식사하고 계시면 저희가 출발 시간 맞춰서 호출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혼자시네요. 보통 신혼여행 코스로 많이들 오시는데…….』
여행도우미의 쓸데없는 말을 에반이 끊었다.
『올라갈게요.』
『알겠습니다. 짐은 여기에 두고 올라가세요.』
『네.』
에반이 모든 짐을 놓고 2층으로 향했다.
2층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서로 통화를 하고, 음식을 먹으며 TV를 보거나 일행들과 대화를 했다.
인간들과 별다를 게 없는 거인들.
에반은 백현을 위해 창가 1인석에 앉아 주문을 했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주문한 요리는 샌드위치.
그가 점원에게 말했다.
『소형 펫용 접시도 따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에반이 백현을 위해 샌드위치를 잘게 잘랐다.
소형 접시에 옮겨 담자 백현이 잘게 잘린 음식을 먹으며 물었다.
“에반, 넌 왜 스마트폰 안 써?”
“맞네. 나 이제 돈 많지.”
“뭐야? 돈 없어서 그동안 안 썼던 거야?”
“응.”
거인 세계의 화폐는 2가지가 있다.
펫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포인트와 일상생활에서 금전적 가치로 쓰이는 제니라는 화폐였다.
그러나 포인트는 거래가 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홍채를 암호로 하는 암호화폐 제니를 사용했다.
“여행 가기 전에 개통해야겠네.”
“연락할 데는 있고?”
“아마 신하들 중 몇 명은 연락되지 않을까?”
백현은 배를 채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때마침 거인들이 TV주변으로 몰려들었다.
TV에서는 거인 진행자가 흥분한 듯 새로운 프로그램의 진행을 알렸다.
『아르케 1-8 지역 예선이 시작되었습니다. 최강의 애완동물은 누가 될까요?』
『저는 솔직히 두 명의 참가자가 눈에 띄어요. 바키, 버키 형제요.』
두 명의 진행자가 참가자 둘을 나란히 화면에 띄웠다.
『바키, 버키 형제? 바키 선수는 유명하죠. 3년 전 대륙 본선까지 올라가기도 했고요. 그런데 형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네. 버키 선수는 이번이 첫 참가예요. 두 형제에게 물어본 바에 의하면 그들의 펫은 휴먼종이라고 합니다. 기존에 있었던 종이지만, 이 두 형제가 소유한 펫은 최근 방송에 나와 화제가 된, 새로 유입된 신품이라고 합니다. 어떤 능력이 있는지 먼저 알아볼까요?』
이때까지만 해도 백현은 그저 흥미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그가 아는 2명의 얼굴이 나왔다.
『이 암컷은 합성종이 아님에도 염력이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려 4성. 4성 펫이라네요.』
『오! 그럼 고유 권능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그렇죠. 아직까지는 비공개지만, 오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김아람과 김만철. 그들이 펫으로서 모두의 화면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때 두 사람의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 아저씨! 내가 소생의 돌 가질 테니까 함부로 나서지 마요! 네?
- 아람아, 상식적으로 네가 날 이기겠니?
그러나 그걸 알아듣지 못하는 거인들은 그저 울음소리로만 알아들었다.
두 명의 진행자가 김아람과 김만철의 다툼을 보며 말했다.
『펫들이 서로 싸우네요.』
『사랑 싸움인가 보죠. 암컷과 수컷이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휴먼종은 따로 발정기가 없다네요. 성체가 되면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번식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설마 대회 도중에 발정을 하진 않겠죠?』
『하하하, 주인들이 그렇게 놔두겠습니까? 그럼 다음 참가자들을 지켜보죠.』
그러나 에반과 백현은 달랐다.
에반이 먼저 백현에게 물었다.
“너랑 아는 친구야? 같은 말을 쓰는데?”
“응. 잘 알아. 아주 잘.”
* * *
같은 시각.
김아람과 김만철은 하루 종일 싸우고 있었다.
“김아람! 예선에서 우리 한편이라니까.”
“결국엔 적이잖아요. 소생의 돌은 우승자만 얻는다면서요.”
“그것도 본선에 올라가야 얻지. 왜 나한테 각을 세우는데? 설마 저번에 때린 것 때문에 그런 거야?”
“그것보다 아저씨의 그 위선이 싫어요. 이제 나도 슈트의 비밀을 알았으니까 절대 안 져.”
둘의 싸움을 지켜본 버키 바키 형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둘 왜 이렇게 싸우지? 형! 둘이 붙여놓질 못하겠어.』
『그러게. 난 또 번식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라.』
두 형제는 팀워크를 짜려 했다.
하지만 두 펫의 상성이 너무 안 좋았다.
서로 만나기만 하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
그러니 두 형제들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지역 예선은 토너먼트 방식이었다.
총 32명의 참가자.
그중 버키는 1번, 바키는 18번.
《1번, 2번 참가자. 경기 시작 5분 전입니다. 입장해주세요.》
진행자의 말에 버키가 동생인 바키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응. 이기고 와.』
첫 예선전.
버키는 2번 참가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첫 상대부터 가장 만나기 싫은 상대를 만났어.’』
버키는 2번 참가자를 알고 있었다.
그가 버키를 알아보고 말했다.
『버키! 많이 컸다?』
『코치님도 참가하셨어요?』
축구팀 코치이자 고등학교 10년 선배.
그는 처음부터 경고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우리 축구부는 내 허락 없이 한 명도 참가하면 안 된다고.』
『그러셨죠. 그런데 전 지금 축구부 그만뒀으니까.』
축구팀 코치가 버키의 말에 눈을 치켜올렸다.
『버키, 많이 컸네. 말대답도 하고.』
『그렇죠. 코치님은 괜찮으시겠어요? 코치님 펫은 이제 수명 다 되지 않았나요? 곧 죽을 때가 됐던 것 같은데…….』
축구팀 코치의 펫을 관리하는 것은 항상 선수들의 몫이었다.
그의 펫은 용맹하고 비쌌다.
그리고 강했다.
그래서일까? 품도 많이 들었다.
좋아하는 먹이는 곤충류. 설치류.
조그마한 먹이는 닥치는 대로 먹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도망도 잘 갔다.
그럴 때면 검은 구체와 함께 하루 종일 동네를 돌아다녀야 했다.
어릴 적에 버키는 코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매일 데리고 다니던 펫은 어떻게 보면 무적이었다.
별명은 하늘의 왕자.
날렵한 부리와 화려한 깃털.
날카로운 눈매.
거기에 시속 180km까지 낼 수 있는 엄청난 비행속도.
경기장에 입장한 두 사람.
경기 시작을 알리는 부저가 올렸다.
코치가 버키를 향해 말했다.
『솔개는 인생을 두 번 산다고 하지. 자신의 수명인 40년을 살면 부리가 안쪽으로 굽어지고, 발톱은 살을 파고든다고. 이때 솔개는 선택해. 1년만 더 살지, 아니면 발톱과 부리를 뽑아내고 다시 자라나서 30년을 더 살지.』
『그랬죠. 매번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래서 솔개가 마음에 든다고. 코치님 솔개는 환골탈태해서 코치님과 평생을 살아갈 거라고 말씀하셨죠.』
『지금이 그 시기야. 내 솔개는 스스로 부리를 깎아내고 발톱을 뽑아내며 인고의 세월을 버텼어. 환골탈태한 거지.』
코치가 명령했다.
『날아!』
그의 명령에 솔개가 하늘로 치솟았다.
공중에서 목표를 바라보는 솔개.
김만철은 솔개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키가 김만철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투태세!』
거인어를 모르는 김만철이지만 반복훈련을 통해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코치가 말했다.
『전광석화!』
전광석화.
매우 빠른 움직임을 뜻하는 말.
솔개가 상공에서 하강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솔개가 지면 부분에서 방향을 틀었다.
김만철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축구팀 코치가 비웃었다.
『뭐야! 바키! 시작부터 도망치는 거야? 이거 너무하잖아?』
날카로운 발톱을 앞으로 내밀며 날아오는 솔개.
김만철이 솔개의 발톱을 확인하고 방향전환으로 회피를 시도했다.
그러나 솔개의 발톱에 닿지도 않았는데 김만철의 몸에서 출혈이 생겼다.
슈트마저 찢어버리는 상대의 공격.
‘바람이야. 발톱이 공기를 가른 거야.’
공기를 가르는 솔개의 발톱.
그걸 보며 코치가 버키를 압박했다.
『내 펫의 공격은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버키, 너도 알 텐데?』
버키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칼에 그인 것 같은 흉터.
집 나간 코치의 솔개를 잡으려다가 생긴 흉터.
버키와 같은 지역 축구팀에서 활동하던 친구들이라면 하나씩 다 있는 흉터였다.
그래서 모를 리 없었다.
『강하죠. 충분히 강해요. 코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직접 경험해봐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코치님의 펫은 결정적인 약점이 있죠.』
솔개가 김만철을 다시 한 번 노렸다.
그런데 이번엔 김만철이 피하지 않았다.
그의 슈트가 부글부글 거린다.
김만철이 도망친 이유는 간단했다.
슈트를 땀으로 적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 힘으로 돌덩이를 던지기 위해서.
『하강해서 비행할 때, 솔개는 방향 전환을 하지 못해요. 그래서 원거리 공격에 취약하죠.』
김만철이 던진 돌덩이가 솔개의 부리를 정확히 맞췄다.
- 꽥!
부리가 부러진 솔개가 낯선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그걸 본 버키가 웃으며 말했다.
『코치님 그거 아세요? 솔개가 환골탈태해서 2번 산다는 이야기가 개소리인 거. 조류는 애시당초 부리가 부러지면 먹이를 먹지 못한다고요. 경영자들이 조직에 충성하라고 부하들에게 하는 개소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어쩌자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