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에반
에반은 거인의 룰에 대해 잘 알았다.
분쟁조정.
말은 좋지만, 사실은 합법적인 살인허가나 다름없었다.
제이스가 그렇게 죽었으니까.
이들 또한 그랬다.
다수가 뭉쳐 다니며 상대방의 펫을 제압하고, 펫이 없는 거인의 재물을 협박하여 빼앗는다.
거인끼리는 싸울 수 없지만, 펫으로는 상대 거인을 죽일 수 있는 비정상적인 룰을 이용한 것.
이들은 처음부터 이를 노렸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거인의 룰은 노골적으로 펫을 강하게 키우도록 만들어졌다.
에반은 지난날, 잃어버린 대륙 신디아에서 같은 수법으로 패배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절대 다수가 한 명을 노리는 방법. 완벽하기만 한 방법에도 허점이 있었지.’』
두목만 노리면 된다.
두목만 노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모든 상대와 싸울 여력은 안 되니까.
그래서 에반이 두목에게 분쟁조정을 신청한 것.
두목이라 불린 간디가 쌍봉낙타 위에 걸쳐져 있는 보자기 천을 걷었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박스.
펫이 들어 있는 박스다.
박스 안.
안에는 흐물흐물 거리는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백현은 깜짝 놀랐다.
보호색으로 무장한 적.
크기 약 20cm.
자세히 보니 카멜레온이었다.
‘사막에 카멜레온이 있었다고?’
분명 카멜레온 중에는 사막에서 사는 종류도 있었다.
이 카멜레온은 사막에서 사는 종류답게 몸을 모래색으로 바꿀 줄 알았다.
변신의 귀재.
보호색으로 자신의 몸을 숨긴다.
『놀랐나? 겨우 이것 가지고 놀라기엔 이를 텐데?』
주변 풍경과 똑같아진 카멜레온이 움직인다.
이글이글 거리는 이질적인 공기의 흐름으로 카멜레온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카멜레온이 주인의 다음 명령을 이행하는 순간 상황이 바뀌었다.
『모래 파기!』
사막의 모래가 솟구치며 카멜레온 주변을 덮었다.
정확히는 카멜레온이 자신의 다리로 모래를 파는 것이었다.
모래가 주변의 시야를 가렸다.
간디는 카멜레온에게 명령했다.
단순한 명령어.
『혀 늘리기!』
그리고 갑자기 날아오는 무언가.
모래 사이로 휘리릭 하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파닥!
백현의 몸이 무언가와 부딪쳐 순식간에 뒤로 날아간다.
카멜레온은 자신의 신장보다 수배는 긴 혓바닥을 가지고 있었다.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기에 강백현은 대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의 몸에서 출혈이 생겼다.
단 한 번의 공격이었지만,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는 혓바닥 공격.
강백현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간디는 비웃었다.
『뭐야! 라울! 겨우 이거에 당한 거야?』
앞서 패배한 부하 1호 라울이 고개를 숙이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역시 두목님이 최고십니다.』
부하 1호의 칭찬에 부하 2호부터 10호까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뱉었다.
『두목님이 최고시지 말입니다.』
『뭣도 모르고 두목님한테 덤비다니! 진짜 저승행을 자처하는구나!』
『역시 우리 카멜레온이 짱!』
뒤로 물러선 백현은 모래 먼지 때문에 기침이 나왔다.
콜록콜록.
그걸 목격한 간디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모래먼지의 부가효과가 드디어 발동하는구만! 사막먼지는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지. 승부는 결정났군. 하하하하!』
간디는 에반을 쉬운 상대로 생각했다.
모습을 가린 상대는 이길 수 없다.
즉, 저쪽에서 공격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웃었다.
역시나, 상대방은 펫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그건 이미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기 때문.
『클클클, 쫄았군.』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에반은 여유만만이었다.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왜 웃지?』
『그냥, 불쌍해서.』
『뭐? 불쌍?』
에반은 강백현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다.
지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에반, 자신의 IQ는 125.
그런 자신보다 똑똑했던 수철이.
그리고 그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인 강백현.
거인들은 모른다.
인간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그들의 언어가 얼마나 복잡한지.
그들의 사고방식, 대처방식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래. 단순히 명령과 본능에만 따르는 저 카멜레온 따위로 이긴다고 생각했던 거지?』
에반의 말에 간디가 비웃었다.
『단단히 미쳤군. 실성했어.』
간디의 말에 부하들이 아첨을 떨었다.
『두목님, 돈도 없는 놈이 말이 많습니다. 승부 끝나면 바로 제 펫으로 죽여버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죽이겠습니다. 제가 죽일 기회를 주십시오.』
부하들이 서로 품에서 펫을 꺼냈다.
스탠바이.
상대방의 펫이 죽으면 자신들의 펫으로 그 주인을 공격할 생각이다.
카멜레온은 뛰어난 동체시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긴 혀의 감각을 이용해 뱀처럼 주변 온도의 변화를 감지한다.
그래서 공격은 항상 100%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모래먼지에 의해 시야가 가려진 상황에서 카멜레온의 혀가 백현을 노렸다.
그런데 카멜레온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간디는 카멜레온이 공격을 계속 퍼붓자 의구심이 들었다.
이쯤 되면 끝나야 정상인데, 자신의 펫이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당신 펫, 머리가 나쁜데? 멈출 줄 모르나 봐?』
에반의 말에 간디가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방의 펫.
고작 3cm밖에 안 되는 작은 생물.
사막 모래가 걷히자, 상대방의 펫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생물 주변에 반투명한 무언가가 보인다.
그 무언가는 카멜레온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카멜레온의 혀는 변화무쌍하다.
위에서도 공격할 수 있고, 아래에서, 옆에서, 심지어 뒤에서도 공격할 수 있다.
혀의 긴 길이를 이용한 변칙적인 공격.
하지만 그게 통하질 않는다.
강백현이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이! 에반! 걱정한 건 아니지?”
강백현의 말에 에반이 웃었다.
“당연하지!”
“처음에 내가 실수했어. 보호막을 너무 가깝게 깔아두니까 밀려나더라구. 그래서 구체형으로 바꿨지. 조금만 기다려! 좀만 더 갖고 놀게.”
“어? 어!”
강백현이 양손을 모아 보호막 앞에 보호막 하나를 더 펼쳤다.
그런데 그 보호막은 거울이었다.
카멜레온은 자신과 똑같은 생물이 앞에 나타나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혓바닥 공격을 보호막의 거울에 집중하는 카멜레온.
카멜레온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며 생각했다.
《경쟁 수컷이 내 구역에 들어왔군. 용서 못해! 용서 못해!》
지능이 낮은 카멜레온.
거울보호막에 비친 자신과 끝나지 않는 싸움을 지속한다.
그걸 보며 옆으로 돌아서 접근하는 백현.
간디는 당황해하며 카멜레온에게 소리쳤다.
『야! 이 멍청한 새끼야! 그걸 왜 공격해! 넌 네 얼굴도 못 알아보냐?』
안타깝지만 카멜레온은 자기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다.
단순한 명령이라면 몰라도 주인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럴 지능이 없기 때문이다.
강백현은 에반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싹둑!
보호막 파편으로 카멜레온의 혀를 잘라내고, 눈을 찢어내고, 몸통에 파편을 박아버린다.
《분쟁 조정이 끝났습니다. 결과 : 에반 슈트리거의 승리》
《전리품으로 442Point를 얻었습니다.》
검은 구체가 결계를 없애자 백현이 보호막을 발판삼아 뛰어올랐다.
두목 간디의 눈높이까지 스스로 올라간 백현이 파편을 회전시키며 에반에게 물었다.
“죽여?”
“아니, 일단 얻을 것 좀 얻고.”
에반은 간디와 그의 부하들에게 쏘아붙였다.
『또 덤빌 거니? 거인 잘못 봤지? 어?』
에반의 말에 엎드린 채 고개를 조아리는 두목.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자 부하들 또한 몸을 수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에반은 그들에게서 물주머니를 뺏었다.
물주머니는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미세하게 물이 새어나오는 가죽.
물이 기화되며 열을 빼앗기 때문에 사막의 높은 온도에서도 물주머니 안의 물은 시원하게 유지된다.
에반은 물은 마신 후 길을 물었다.
『야! 내가 신디아에 가려고 하는데, 여기서 어디로 가야 빠르냐?』
에반의 질문에 이제 새로운 서열에 적응한 간디가 공손하게 답했다.
『아, 잃어버린 대륙 신디아 말씀이십니까?』
『그럼 신디아가 거기밖에 더 있어?』
『일단 형님께서 북쪽으로 한 24km 정도 걸어가시면 사막도시 모로코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캐러밴을 타고 불의 계곡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친절한 간디의 말. 에반이 되물었다.
『불의 계곡?』
『네. 불의 계곡이라고, 여기 사막보다 더 뜨거워서 불의 계곡이라고 합니다. 다만, 땅 자체가 암석지형이다 보니 걸어서 가는 사람은 없는데, 차량을 타고 가는 건 문제가 없습니다. 여행수요가 항상 있기 때문에 캐러밴을 구하는 건 크게 문제가 없으실 겁니다.』
『얼만데?』
『네?』
『그거 빌리려면 돈이 필요할 거 아니야.』
『아~ 저희는 돈 지불하지 않고 그냥 타는데요? 저희한테는 돈 안 받습니다.』
간디의 말에 에반이 화를 냈다.
『야! 내가 너랑 같냐? 같냐고!』
『아…… 아닙니다.』
『그럼 이 형님이 그거 타려면 돈을 내야겠지? 그런데 나는 돈이 없는 거 너희도 알지?』
에반의 말에 간디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네.』
『그럼 너희가 그 돈을 보태줘야겠네?』
『네?』
『너희가 내가 갈 길을 막았잖아. 그 시간이면 내가 돈도 충분히 벌 수 있었는데 너희가 그 기회를 막은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에반의 말.
금방 맥락을 눈치챈 강백현이 간디의 눈앞에 보호막 파편을 띄워올렸다.
날카로운 파편이 자신을 찌를까봐 기겁한 간디가 뒷걸음질쳤다.
『드려야죠. 드려야죠.』
간디의 말에 부하 1이 소형구체 하나를 가져왔다.
간디의 눈을 스캔해서 그의 보유금액을 보여준다.
《간디 포메리안 님의 현재 잔액은 136,410제니입니다.》
그걸 본 에반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와! 너 엄청 부자구나!』
『네. 이 구역에서는 좀 잘 나갑니다.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뭐? 얼마?』
『아……. 생각하신 금액이…….』
『백현아, 얘 뭐래는 거야? 그냥 죽여버릴까?』
에반의 말에 강백현이 보호막 파편을 간디의 안구 바로 앞에까지 서서히 밀어넣었다.
『아~ 다 드려야죠! 다 드려야죠!』
소형 구체를 통해 간디의 보유 제니가 에반에게 입금됐다.
그런데 에반은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부하들 너희들은 뭐해? 두목이 주는데 너희들은 가만히 있을 거야?』
『네?』
『너희들 두목이라며! 두목 살리려면 돈이라도 바쳐야지. 아니면 내 펫이랑 싸워보든가.』
『아…….』
상대방의 돈과 물을 빼앗은 에반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낙타도 가져갈게.』
『네! 그러셔야죠. 네.』
『고맙다!』
『아닙니다. 살펴가십시오.』
낙타에 탄 에반은 씩 웃으며 물주머니를 허리춤에 찼다.
출렁출렁.
낙타의 탑승감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에반은 익숙한 듯했다.
에반이 강백현에게 말했다.
『괜찮아? 멀미 안 해?』
『응. 근데 에반! 너 좀 의외다?』
『뭐가?』
『아니, 성격이 내가 아는 에반하고 좀 달라서.』
『당연하지. 내가 말했잖아. 난 한 나라의 왕자였어. 지금은 4성인 펫이 있고. 그러니까 자신감 가져도 되는 거 아니야?』
에반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왕자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