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실험실
이진기가 백현을 향해 구해달라고 애원했다.
거인이 검지와 새끼 손가락으로 이진기의 옷을 붙잡고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미나와 진기 사이.
백현의 선택은?
‘미안해요. 형! 미나 먼저 구하고 형 구해드릴게요.’
보호막으로 세운 기둥을 사용, 미나가 들어간 봉투를 향해 움직이는 강백현.
이진기가 그 뒷모습을 독기 품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주인공 강백현에 대한 이진기의 적개심이 포착되었습니다.]
백현이 눈 앞에 뜬 메시지를 보며 절망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여기서 동생과 떨어질 순 없었다.
어떻게 만났는데! 어떻게 살아왔는데!
가족이 제일 우선이다.
미나를 구한 다음 진기 형을 구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강백현의 전신이 봉투의 입구로 향했다.
거인의 빠른 움직임을 쫒기 위해 백현은 온 힘을 다 했다.
슈트에서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왔지만, 무리해서라도 봉투 안으로 가기 위해 보호막을 밟고 밟아 도약했다.
겨우 봉투 안에 들어간 강백현이 경악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널브러져 비명을 지르고 있다.
“미나야! 미나야!”
“오빠, 오빠!”
사람들 틈에서 미나의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빼곡빼곡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미나를 잡을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다.
거인이 몸을 숙이거나 걷는 동작만으로 봉투 안의 사람들이 서로 엉켜붙어 비명을 내지른다.
아비규환.
백현은 일단 자신의 몸 주변에 보호막을 쳤다.
다른 사람과 부딪혀도 통증이 없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하지만 미나에게 보호막을 칠 수는 없었다.
“미나야. 참아! 참아!”
봉투 안에는 계속 사람들이 담겨졌다.
그리고 암전.
봉투의 윗 부분 출구가 닫혀 어둠이 깔린 가운데, 봉투가 360도 회전하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백현이 깨달았다.
봉투를 묶고 있다고.
인간들이 빠져나갈 수 없게.
* * *
같은 시각, 최형우는 몸을 거대화시킨 후 거인에게 저항하며 소리쳤다. 0
“아람아, 도망쳐.”
“아저씨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최대한 막아보마.”
30cm까지 커진 최형우라고 해서 거인의 움직임을 막아설 순 없었다.
다만 이목을 끌 순 있었다.
거인들은 최형우의 능력을 신기해하며, 서로 잡으려고 애썼다.
마치 애완동물을 누가 먼저 차지하나 싸움이라도 난 듯, 서로 외계어를 외치며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 거인이 최형우를 발로 뻥하고 찼다.
거인의 발길질에 30cm로 커진 최형우가 벽에 부딪히더니,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김아람은 그걸 보며 죽은 아빠를 떠올렸다.
계기판 앞 아크릴판에 달라붙어 돌아가신 아빠.
그것과 같이 최형우도 벽에 부딪힌 채, 피를 흘리며 스르륵 떨어지고 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도망쳐야 한다고.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고.
그때, 김만철이 아람이를 불렀다.
“아람아, 이리 와! 저쪽에 탈출구가 있어.”
김만철은 양 손으로 윤수를 안은 채, 김아람에게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정선희가 김만철을 따라가고 있다.
김만철이 가리킨 곳은 실험실 바닥에 연결된 공조공간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통기구.
그곳을 포착한 김만철이 김아람을 향해 길을 안내해 준 것이다.
그런데 김아람을 포착한 거인이 순식간에 접근했다.
고개를 숙이고, 커다란 손으로 김아람을 낚아채려 했다.
김아람은 염력을 이용해 거인을 뿌리쳐 보지만, 염력 레벨 1 따위의 힘으로 거인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거인에게 붙잡히려는 찰나.
김만철이 순식간에 접근하더니 거인의 손등을 타격하며 김아람을 지켜냈다.
“아저씨, 저 무서워요.”
“그래. 빨리 도망쳐! 저쪽으로 가!”
“네!”
클론.
얼마 살지 못하는 생명체.
그러나 여기서 잡히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짧은 생명이라도 끝까지 살아보고 싶다.
그게 김아람과 김만철의 공통사항.
그런데 거인이 한번 놓친 김아람을 포기하지 않는다.
기괴한 비명을 내며, 거인의 손이 김아람을 향해 다시금 날아온다.
김아람이 비명을 내질렀다.
자신의 모든 염력을 사용해 거인의 손가락을 비틀었다.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염력을 한 점에 집중해 손가락을 비틀자, 거인은 통증을 참지 못하고 빠르게 손을 뺐다.
하지만 이번에는 잠자리채를 꺼내든 거인.
그걸 보며 김만철이 경악했다.
“뛰어! 다들 뛰어!”
윤수를 데리고 있던 정선희가 아들과 함께 바닥의 통기구를 통해 내려갔다.
최후의 저항을 하던 김아람은 김만철이 들쳐메고 뛰기 시작했다.
잠자리채가 접근한다.
하지만 김만철은 빨랐다.
왜?
증폭 되었으니까.
신체강화 레벨 3까지 올렸으니까.
정선희의 능력으로 파워업한 그가 김아람을 데리고 통기구를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거인은 의외로 집착적이었다.
김아람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바닥에 설치된 빗살무늬 통기구를 열더니, 커다란 손을 넣어 김아람을 잡으려고 헤집어댔다.
정선희가 비명을 질렀다.
김아람이 거인의 손가락을 향해 또 한번 염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거인은 손가락이 꺾여도 잡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김아람은 자신이 잡힐 것을 알고 눈을 꾹 감았다.
그런데 김만철이 김아람을 밀치고는 자신이 대신 잡히는 것이 아닌가.
“아저씨! 아저씨!”
바등바등. 빠져나오려는 김만철.
하지만 거인의 힘이 얼마나 센지 움켜진 손바닥을 펼 수가 없다.
정선희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만철 씨! 안 돼! 안 돼! 안 돼!”
그러자 김아람이 정선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말하지 않아도 정선희는 김아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증폭 능력.
염력을 증폭시키면 막을 수도 있다는 희망.
증폭된 염력의 힘이 거인의 움켜쥔 손을 펴기 시작한다.
김만철도 거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뿌리치기 힘든 거인의 힘.
김아람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온다.
“안……돼! 안 돼! 안 돼!”
그때 윤수가 아람의 옆에서 초록색의 빛을 흘려보내며, 치료를 시작했다.
박윤수의 기적적인 능력.
그리고 김아람의 초월적인 염동력.
거기에 초인이나 다름 없는 김만철의 힘이 모이자, 거인이 버티지 못하고 자신의 포획물을 놓치고 말았다
김만철은 빠져나오자마자, 안쪽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일행들도 구석을 향해 도망쳤다.
쑥쑥-쑥쑥.
거인의 손이 포기하지 않고 김만철 일행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 또한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탈출구를 찾아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 * *
봉투 안.
흔들리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 봉투를 들고 있던 거인1이 동료 거인2에게 말했다.
『너무 시끄러운데?』
『한번 흔들어줘. 기절시켜버리면 되잖아.』
『아~ 그런 간단한 방법이 있었군.』
거인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었다.
지적 능력이 있었다.
인간들이 쫑알쫑알 거리는 게 싫었던 거인이 동료 거인의 조언에 따라 손목에 스냅을 주어 봉투를 좌우, 상하로 흔들었다.
피부와 피부가 부딪히며 고통스러운 통증이 밀려왔다.
“으아아아아악!”
그러나 거인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봉투가 롤러코스터를 타듯, 여러 번 흔들리고 나서야 비로소 멈춘다.
사람들의 얼굴은 눈물, 콧물 등으로 범벅이 되었다.
심지어…… 분비물을 싼 경우도 있었다.
공기가 통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너무 고역이어서일까?
밀봉된 봉투 안의 사람들은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거인의 발걸음에 따라 주기적으로 전해지는 진동에 익숙해지자, 꼭 차량에 탄 것처럼 잠이 밀려온다.
분명 봉투 내 이산화탄소 농도의 증가.
그로 인해 졸음이 쏟아지는 것이다.
백현은 미나가 걱정되었다.
아까부터 말이 없는 미나. 지금 어떤 상황일까.
그래서 속으로 말했다.
미나의 능력이라면 들릴 테니까.
내 마음이 들릴 테니까.
‘미나야. 조금만 참아. 오빠가 구해줄게. 정신 잃지 말고.’
쿵쿵쿵쿵.
진동은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혔지만 이미 저항할 힘을 잃은 사람들은 그저 힘없는 비명만 내지를 뿐이었다.
백현 또한 보호막을 펼치며 최후까지 의식을 잃지 않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리적 충격과 압박.
거기에 이후 벌어질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두려움.
거인은 걷기를 계속했다.
미니맵을 통해 보고 싶어도 흔들리는 탓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갑자기 진동이 멈췄을 때, 사람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하는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묶여있던 봉투가 열렸다.
사람들이 숨쉬기 좋은 상쾌한 산소가 봉투 안으로 밀려왔다.
그런데 그것도 한 순간이었다.
봉투가 갑자기 180도 뒤집어졌다.
중력의 방향이 반대가 되자, 사람들이 바닥으로 하나, 둘 낙하하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게 무서웠던 백현은 봉투를 잡으며 최대한 버티려 했다.
미나도 봉투를 붙들고 이를 악물며 살아남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미나야!”
“오빠…….”
애처로운 두 남매의 목소리.
하지만 둘은 버틸 수 없었다.
봉투를 털털 터는 거인의 손 동작 때문.
추의 진동처럼 좌우로 흔들려 힘의 균형이 수시로 바뀌는 탓에 손의 힘이 순식간에 풀려버린다.
백현이 보호막을 펼치며 미나와 자신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다행히 바닥은 딱딱한 평지가 아니었다.
물이 깔려 있었다.
사람들이 물가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다.
백현과 미나도 바닥을 딛고 서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스테인리스로 된 벽이 보인다.
너무나 말끔하고 부드럽게 가공된 금속의 벽.
상처입고, 분비물로 지저분해진 사람들의 행동은 양분되었다.
일단 씻고 보는 사람들과 금속의 벽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
그런데 벽 위쪽에서 갑자기 엄청난 빗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백현과 미나는 빗물이 쏟아지는 상공을 바라보았다.
상공 위.
거대한 원형의 분무기가 물을 쏟아내고 있다.
그걸 본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백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싱크대! 싱크대야!”
그들이 위치한 장소.
그들은 알았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가정의 주방 싱크대라는 것을.
그제서야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커다란 도마와 식칼.
국자와 포크, 나이프에 심지어 젓가락까지 보인다.
“도망쳐! 다들 도망쳐!”
사람들은 스테인리스 벽을 오르고 또 올랐다.
하지만 매끄러운 단면 때문에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진다.
“으아아아아!”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서로 올려줍시다. 도망칩시다!”
사람들은 절망했다.
이곳에서 먼저 탈출하기 위해 사람들을 밟고 또 밟아 위쪽으로 향했다.
백현은 그 와중에 미나를 챙겼다.
“다친 데는 없어?”
“없어. 괜찮아. 오빠는?”
“나도 다친 곳은 없어.”
“다행이다.”
“응.”
여기서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
백현이 자신의 체력적 한계를 실감하며, 보호막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땅거미가 졌다.
주변이 어두워진다.
사람들에게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는 남성형 거인의 얼굴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가 무서운 얼굴로 한 손을 올렸고, 그 손에는 포크가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