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cm헌터-24화 (24/200)

24화. 안개

빛의 기둥 안.

주변에 안개가 펼쳐져 있었다.

그건 마취가스 같았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의식을 잃었다.

만물의 형상을 복원하는 장소답게, 강력한 소화액에 짓물렀던 피부가 점점 원상복구된다.

의식을 되찾은 백현은 안심했다.

자신의 팔이 멀쩡했으니까. 몸도 멀쩡했으니까.

한쪽 팔을 잃은 아람이에게도 희망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같이 통과했던 100여 명의 사람들은?

미나는?

김만철 아저씨는?

그러고 보니 정신을 잃었던 게 생각났다.

“미나야! 아저씨! 다들 어디에 있어요? 어디세요?”

백현의 부름에 응한 것은 뾰족한 귀, 짙은 녹색 피부.

돼지 코에 하마 같은 입을 가진 외모가 인상적이다.

더구나 크기가 엄청 크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보다 더 큰 다른 여성형 거인도 있었다.

그 둘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 얘 나한테 말 걸어. 만져봐도 돼?』

『지지야. 지지!』

백현은 자신의 상황을 파악했다.

절망적이었다.

자신은 유리사육장 안에 갇혀 있었다.

토끼풀과 깔려진 톱밥, 그리고 쳇바퀴처럼 돌릴 수 있는 물레방아 같은 놀이기구.

그걸 바라보는 거대한 종족.

그들이 말했다.

『귀여워! 엄마! 이걸로 살래. 이거 막 나온 애완종이래.』

『어머머, 쥬피터? 아직 이건 판매하는 상품이 아니야. 방송이 다 끝나면 그때 사줄게.』

『방송?』

『응. 버라이어티 방송 있잖아. 외딴 행성, 하급 종족을 선별해서 그들에게 지성과 초능력을 주고 생존시키는 방송. 그 방송이 끝나면 그때부터 판매할 제품이니까, 지금은 건들면 안 돼. 알았지? 아빠한테 여기 들어온 거 걸리면 너 큰일 나. 알았어?』

물론 강백현이 이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다.

하지만 강미나는 달랐다.

백현의 옆 유리사육장에 갇혀있던 강미나가 그들의 생각을 읽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두 여성형 거인의 눈길을 피해 톱밥 밑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꼬마 거인이 갑자기 유리사육장 천장을 열고 인간 하나를 꺼냈다.

『싫어! 가져갈래. 가져갈래.』

『쥬피터! 쥬피터!』

그런데 손에서 빠직 하고 터져버린 인간.

꼬마 거인의 손에는 인간의 피가 흥건해졌다.

『으앙…… 으앙.』

『쥬피터, 엄마가 말했잖니, 지지라고! 더럽다고, 얼른 나가서 손 씻자.』

『응.』

쥬피터라 불린 꼬마 거인이 자신이 죽인 인간을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그걸 보며 유리사육장에 갇힌 사람들은 다양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망연자실, 허망, 그리고 이제 감당이 안 되서 미쳐버린 사람들까지.

“꿈이야! 꿈이야! 꿈이라고!”

그리고 몇 분이 흘렀을까?

아마 빛의 기둥이 끝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100여 시간이 흐른 뒤 각자가 갇힌 유리사육장 안에는 놀랍게도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아까 본 여성형 거인과 외모가 흡사한 남성형 거인이었다.

녀석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홀로그램에서 들리는 음성은 분명 외계어였지만 자막은 한국어였다.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다.

“페이즈 1이 종료되었습니다. 지역 ROK. 생존자 수를 알아볼까요?”

짜잔!

콩그레츄레이션!

“ROK 지역의 생존자 수는 4,663,311네요. 생존율은 약 8%, 나쁘지 않은 성적입니다.”

‘나쁘지 않은 성적? 성적?!’

강백현은 화가 났다.

이 외계인 녀석들은 자신들을 마치 벌레 보듯 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92%가 죽었는데! 92%가 다 죽었는데 콩그레츄레이션이라고?

“어머어머? 왜 이렇게 좌절들 하세요? 저번 종족은 페이즈 1에서 무려 99%가 죽었다고요. 빛의 기둥이 뭔지도 몰랐다니까요? 그래도 휴먼들은 글자를 알잖아. 이렇게 높은 비율로 살아남은 것은 처음이에요! 축하 받을 일이라니까!”

백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울분이 가라앉질 않는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다.

방송 화면 같은 송출 화면.

녀석은 벌레 취급당하는 인간들에게 말하는 게 아니었다.

“역시 이 종족은 다양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군요. 그래서 즐겁습니다. 그들의 종말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화면은 바로 경기장면을 방송하듯 지구 곳곳을 비춘다.

“페이즈 1. 휴먼들을 3cm로 작아지게 한 후, 그들이 당황한 모습입니다. 물론 괜찮은 장면도 있어요. 잠깐 보실까요?”

화면에 김만철의 형수가 보인다.

만철의 형, 김진철을 흡수하며 몸을 회복하는 장면.

“클클, 이것 봐! 벌레 맞죠? 그런데 더 웃긴 건 요 장면이라니까요?”

김만철의 형수와 자폭하는 할아버지.

그 장면을 틀어주며 외계인이 말했다.

“자! 1000년에 한 번 실시되는 특급 방송! 올해는 태양계 어스 행성의 휴먼이라 불리는 종족이 그 대상입니다. 먼저 파라미터를 보겠습니다.”

4분면으로 나뉘어 있는 파라미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형상이 중앙에 있고, 가장 위에는 지능, 왼쪽에는 전투력, 오른쪽에는 수명, 아래쪽에는 폭력성이 표기되어 있다.

최고 점수는 10점, 최하 점수는 1점.

지능 : 5

전투력 : 2

적응력 : 6

폭력성 : 7

Total Point = 20점

“자! 본방은 내일부터! 다들 본방 사수! 잊지 마세요! 알러뷰!”

홀로그램이 끝났다.

허무했다.

인간은 정말 실험체였다.

신들을 믿고 있던 사람들도, 미나도, 백현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야. 살아남아야 해. 포기해선 안 돼!’

아포칼립스.

절망의 세계.

이게 현실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아까와는 달리 평범한 인간이 나타났다.

서양인.

금발, 블론드. 녀석이 외계어로 대화를 시작하자, 밑에 한국어로 자막이 뜬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의 서포터를 맡은 찰스라고 합니다. 선택받은 인간이죠.”

외계인이 아닌 인간의 모습에 모두가 홀로그램에 집중했다.

뭔가 좋은 소식이 들려오진 않을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그런 기대 섞인 얼굴.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빛의 기둥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 제거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것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립니다만, 곧 처리될 겁니다. 일단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은 페이즈 1, 생존 서바이벌에서 당당히 살아남으셨습니다.”

허탈한 웃음.

그리고 이어지는 야유.

그러나 전체 방송을 하는 그는 진지했다.

“저를 소개하기 전에 여러분들의 생존을 위한 능력과 점수들을 소개해드려야겠군요. 여러분들은 페이즈 1에서의 활약에 따라 점수를 획득하셨을 겁니다. 그 점수는 지금 아래 하단에 나온 숫자와 같죠.”

강백현이 자신의 점수를 확인했다.

165점.

킬 포인트 100점.

생존 포인트 65점.

아마도 저 포인트는 악어 괴물을 잡아서 얻은 포인트일 것이다.

“각자 능력을 가지고 계실 텐데요. 여기 이곳에서는 그 점수를 이용하여 능력을 강화하거나, 새로운 능력을 배우실 수 있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옆에 홀로그램 하나가 더 떴다.

<사용자 정보 User information>

○ 직업 : 왕자 (Prince) / ★★★★

○ 고유스킬

1. 보호막 Lv 1.

2. 아직 배우지 않았습니다.

3. 아직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4. 아직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직업 옆에 있는 별의 개수가 여러분이 배울 수 있는 스킬의 개수를 뜻합니다. 이것을 저희는 등급이라고 하죠. 현재 1성급부터 4성급까지 분포되어 있을 겁니다. 그 개수는 결국 성장을 통해 강함으로 귀결되겠지요. 세상에는 천민과 귀족이 있듯, 이 별의 수치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초기 수치에서 변동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금방 이해했다.

게임과 같았다.

4성급과 1성급이 절대 같을 순 없다.

압도적인 성능 차이.

스킬 4개를 배운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

그런데 평범한 방법이라는 단서가 걸린다.

그리고…….

“단, 높은 등급을 가진 자를 죽인다면, 그 등급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1성급이 4성급을 죽인다면 4개의 스킬을 배울 수도 있단 말이 되겠지요.”

충격과 공포 그 자체.

이건 시작부터 잘못 되었다.

능력을 준 게 생존하라고 준 게 아니고, 서로 싸우게끔 만든 장치였다고?

그러나 충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숫자가 보일 겁니다.”

그러고 보니 숫자가 보인다.

백현의 머리 위에는 165.

그리고 미나의 머리 위에는 65.

그건 바로 잔여 포인트.

“이제 페이즈 2부터는 생명체를 죽이면 포인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휴먼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라는 거야?”

“미쳤어! 미쳤어! 이건 미쳤다고!”

“사람을 죽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협력하여 생명체를 죽여 포인트를 모아 강해지든지, 동료를 죽여 포인트를 모아 강해지든지 그건 자율입니다. 저희는 거기까지 통제하진 않으니까요.”

백현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역시나 사람을 죽이는 장치가 가득하다.

이건 그들 입장에서는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잔인했다.

말로만 안 했지, 죽이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외계인들은 인간들을 한낱 오락거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인간은 정말 나약했다.

유리사육장을 뚫을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저들에 대한 정보도 없다.

‘젠장!’

찰스는 말을 이어갔다.

“포인트가 많아지면 같은 종족에게 타겟이 될 수도 있겠죠? 그래서 포인트는 지금 미리 사용해두시는 게 좋습니다. 그럼 포인트 사용 방법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홀로그램에 글씨가 새겨진다.

1. 포인트로 자신의 능력을 강화하거나, 개방하거나, 새로운 능력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초보자용 슈트가 지급됩니다.

3. 슈트는 포인트를 사용하여 더 강력하게 강화할 수 있습니다. 슈트를 강화하여, 부족한 전투능력을 향상시키세요.

“앞으로 5분 뒤에 페이즈 2에 진입합니다. 능력을 업그레이드하는데 100Point, 슈츠는 기본 50Point가 차감됩니다. 그럼 홀로그램을 통해 즐거운 쇼핑 시간 되십시오.”

백현은 알았다.

이제는 정말 장난 아니라는 것을.

지옥이 펼쳐질 것이란 것을.

“페이즈 2가 시작되겠습니다.”

찰스의 말과 동시에 유리사육장 안에 흰 연기가 퍼지기 시작한다.

그건 마취가스.

대피소라 여겨졌던 빛의 기둥은 사실 인간을 가두기 위한 사육장.

그곳을 빠져나간 사람들은 이제 또 다시 생존을 위한 전장으로 내던져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