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변화의 바람 (1)
“시장이 아니라 영화에 관심이 있 다고요?”
“‘부산행 열차’가 그 관심에 불을 지 폈죠.”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
그래서 이규한이 입으로 가져갔던 소주잔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 을 때, 데이비드 윤의 이야기가 이 어 졌다.
“혹시 파라마운트에서 제작한 ‘좀 비워’란 작품을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좀비워’는 할리우드 스타인 브래 든 핏이 주연으로 출연한 좀비 재난 블록버스터 작품이었다.
‘부산행 열차’를 제작하는 과정에 서 이규한도 참고하기 위해서 ‘좀비 워’를 직접 봤었다.
그래서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데 이비드 윤이 다시 물었다.
“그럼 ‘좀비워’의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는지 아십니까?”
“대략 천억 정도 들었나요?” “정확히 세 배입니다.”
“세 배라면… 3,000억이요?”
“맞습니다.”
이규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 다.
본격 좀비 재난 블록버스터답게 ‘좀비워’의 스케일은 컸다.
그렇지만 제작비가 3,000억이나 들 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자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행 열차’의 제작비는 200억 수준이죠?”
“더 적습니다. 150억에 조금 미치 지 못합니다.”
“엄청나네요.”
이규한만 놀란 게 아니었다.
‘부산행 열차’의 제작비가 150억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데 이비드 윤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왜 놀라지?’
이규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데이비드 윤이 다시 입을 뗐다.
“‘부산행 열차’와 ‘좀비 워’. 두 편 모두 좀비 소재의 작품이지만,개인 적으로 저는 ‘부산행 열차’를 더 흥 미롭게 봤습니다.”
“과찬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관적 인 평가도 아닙니다.”
" 우”
“위너 브라더스의 대표도 ‘부산행 열차’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고 작 제작비 200억짜리 좀비 소재 영 화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요.”
‘고작 200억이라.’
이규한이 쓰디쓴 웃음을 머금었다.
100억만 넘어가도 대작 취급을 받 는 것이 한국 영화계였다.
그런데 위너 브라더스의 대표는 고 작 200억의 제작비란 표현을 썼다.
그렇지만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 다.
‘좀비워’의 제작비가 무려 3,000억 이란 이야기를 들은 후였기 때문이 었다.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데 3,000 억을 쓰는 할리우드 제작사 입장에 서는 200억이 푼돈처럼 느껴질 수 도 있었다.
“그런데 ‘부산행 열차’의 제작비가 200억이 아니라 150억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표 님이 더 놀라시겠네요.”
데이비드 윤이 웃으며 덧붙였다.
“고작 150억의 제작비도 쓰지 않 고 제작한 ‘부산행 열차’는 할리우 드 제작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 겼습니다. 한국 영화의 수준이 대단 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만들었죠. 그래서 위너 브라더스에서 한국 지 사를 설립한 겁니다. 150억으로도 이 정도 수준의 영화를 만드는데, 1,000억 정도 제작비를 사용하면 얼 마나 대단한 작품을 만들겠느냐? 이 런 계산을 한 거죠.”
비로소 이규한이 한국 시장이 아니 라 한국 영화에 관심이 있다는 데이 비드 윤의 이야기를 이해했을 때였 다.
“그래서 저는 이규한 대표님과 오 랫동안 협업을 하고 싶습니다. ‘신 과 같이’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길 바라는 거죠.”
데이비드 윤이 덧붙인 이야기를 들 은 이규한이 소주잔을 들었다.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구나.’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그렇지만 영화계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살짝 비켜나 있었다.
실력보다 인맥이 중요한 곳.
양아치짓을 해야 버틸 수 있는 곳.
메이저 투자 배급사에서 투자를 받 아야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곳.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던 한국 영화 계였다.
그런데 이제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 오고 있었다.
인맥보다 실력이 중요한 곳으로, 작가의 등을 치는 양아치짓을 하는 제작자는 퇴출당하는 곳으로.
또 메이저 투자 배급사들에게서 투 자를 받지 못해도 해외투자사를 이 용해서 영화제작이 가능해지는 곳으 로.
새로운 영화계의 청사진을 그리던 이규한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떠 올랐다.
이규한의 눈앞에 떠오른 청사진 적어도 지금의 영화계보다는 더 낫 고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강남 씨제스 극장.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VIP 시사회 가 열리는 장소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대표님.”
초청을 받고 참석한 여배우 황이나 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참석해 줘서 고맙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지 만,김대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와 배급을 맡은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VIP 시사회였지만,김대환이 직접 참석하는 것은 이례적인 케이스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환이 직접 VIP 시사회에 참석한 이유는 위기 감을 느껴서였다.
‘기선 제압이 중요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맡 고,위너 브라더스 코리아가 투자와 배급을 맡은 ‘신과 같이’와 ‘어메이 징 히어로즈’는 각각 개봉일을 결정 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7월 16 일 개봉을 결정한 터라 극장 성수기 시장에서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건방진 놈.”
극장 밖으로 나온 김대환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뿌연 담배 연기를 허공에 길게 내 뿜은 김대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신과 같이’가 제작을 마치고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것부터가 김 대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 었다.
‘운은 타고났군.’
메이저 투자 배급사들에게서 투자 를 받기 어려워지면서 ‘신과 같이’ 의 제작이 무산될 거라고 김대환은 확신했다.
그럼 공중에 붕 뜬 하정후와 주태 훈을 ‘어메이징 히어로즈’에 캐스팅 하는 것이 김대환의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은 어긋나 버렸다.
할리우드 제작사인 위너 브라더스 가 설립한 한국 지사인 위너 브라더 스 코리아에서 ‘신과 같이’에 투자 를 했기 때문이다.
마침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한국 시 장 공략에 나선 것이 ‘신과 같이’가 제작 무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 던 원동력이었다.
물론 이규한이 할리우드 제작사인 위너 브라더스에서 ‘신과 같이’의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했던 ‘부산행 열차’가 한국 시장뿐만 아 니라 해외시장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덕분에 위너 브라더스 측에서 ‘신과 같이’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김대환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이규한이 운이 타고났다고 평가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대환의 심기가 불편한 이 유는 또 있었다.
“개봉일을 같은 날로 결정해?”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개봉일을 먼저 결정한 것은 씨제스 엔터테인 먼트였다. 그런데 ‘어메이징 히어로 즈’가 7월 16일에 개봉하겠다고 언 론에 공표하자마자,‘신과 같이’도 7 월 16일 개봉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경쟁작이 같은 날에 개봉하는 것이 범법은 아니었다.
것은 피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 다.
최소 일주일의 텀을 두고 개봉 일 자를 결정했었는데.
‘신과 같이’는 그 관례를 보란 둣 이 깨트린 셈이었다.
<716 대전 성사. ‘어메이징 히어로 즈’와 같은 날 개봉을 결정한 ‘신과 같이’,흥행에 자신감을 드러내다.〉
매스컴에서는 이를 두고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포장했다.
그러나 김대환의 눈에는 훤히 보였
이규한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것이.
“게다가 시사회 일정까지도 같은 날로 잡아?”
김대환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 VIP 시사회를 같은 날 잡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선전포고.’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김대환이 이례적으로 ‘어메 이징 히어로즈’의 VIP 시사회에 참 석한 이유도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VIP 시사회에 참석한 김대 환은 기세 싸움을 제압하겠다는 계 획도 무산됐음을 깨달은 후였다.
초청장을 보낸 인사들 가운데 A급 배우들은 거의 ‘어메이징 히어로즈’ 의 시사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VIP 시사회에 참석한 기자들의 수 도 김대환이 기대했던 것에 한참 미 치지 못했다.
그리고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VIP 시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배우들과 기자들의 행방은 불 보듯 뻔했다.
‘신과 같이’의 VIP 시사회에 참석 했으리라.
김대환이 답답한 마음을 밀어내듯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을 때였다.
“요새 누가 길에서 담배를 피운 대?”
“진짜 짜증나 죽겠네.”
“으으,숨 막혀.”
“딱 봐도 꼰대네.”
길을 걷던 사람들이 표정을 찌푸린 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불편한 시선을 깨달은 김대환이 서 둘러 담배를 꼈다.
“꼰대라.”
잠시 후,김대환이 자조 섞인 표정 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는 상제의 판결에 승복하지 못 하겠습니다. 무엇이 옳고,무엇이 그 른지를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습니 다.”
옥황상제를 향한 하정후의 선전포 고와 함께 영화가 끝이 났다.
- 2편에서 이어집니다.
한국 영화에서는 낯설게 느껴지는 자막이 떠올랐다. 그리고 미리 촬영
을 마친 2편 예고편이 이어졌다.
예고편이 나오는 사이,이규한이 객석의 반응을 살폈다.
‘최선을 다했다.’
데이비드 윤은 이규한에게 제작 전 권을 주고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규한은 최선을 다해서 ‘신과 같이’의 제작에 몰두할 수 있 었다.
“분명히 흥행할 겁니다.”
위너 브라더스와 함께 작업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
그리고 이규한은 ‘신과 같이’의 흥 행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에 VIP 시 사회 전 제작 시사회를 열었었다.
당시 제작 시사회에 참석했던 데이 비드 윤이 상기된 표정으로 내렸던 평가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아직 안심하지 못했다.
미래의 흥행작을 알 수 있는 능력 도, 감정 능력도 사라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와아,한국 영화에서 본 적 없는 정교한 CG다.”
“이걸 150억으로 만들었다고?”
“CG뿐만 아니라 배우들 연기도 죽인다.”
“웹툰 원작을 재해석한 시나리오도 기가 막히는데?”
“벌써 2편이 보고 싶다.”
잠시 후, 객석에서 감상평이 흘러 나왔다.
그 감상평들에 귀를 기울이던 이규 한이 두 손을 모았다.
‘신과 같이’라는 작품.
이규한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 다.
우선 투자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마 음고생이 심했다.
그리고 하나 더,감정 능력을 사용 할 수 없게 된 후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였다.
그래서 더욱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 데.
짝짝.
짝짝짝.
이규한이 했던 마음고생을 알기라 도 하는 것처럼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던 기자들과 관객들이 기립 박수 를 쳐 주기 시작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박수 소리를 들으 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던 이규한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 그런 이규한이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하정후였다.
“정후 씨.”
“이 대표님,지금 우시는 겁니까?”
“네,눈물이 나네요.”
“영화를 한두 편 만드신 것도 아니 시면서……
“나중에… 나중에 정후 씨가 진짜 제작자가 되고 나면 지금 제가 흘리 는 눈물의 의미를 아시게 될 겁니 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