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혼자가 아니다 (1)
“그래 주시면 저야 좋죠.”
이규한이 자리를 권했다.
청월 빌딩으로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 사무실을 옮긴 후 이 선술집에는 자주 찾아왔다.
그래서 이미 주인아주머니와는 간 단한 안부 인사를 나눌 정도로 가까 워진 상황.
이규한의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 가 없었다.
“한 잔 받으시죠.”
쪼르륵.
이규한이 소주병을 들어 주인아주 머니의 잔을 채웠을 때였다.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평소와는 표정이 많이 달라서요.”
“제가요?”
“네. 표정이 많이 어둡네요. 하는 일이 잘 안 풀리나 보네요.”
주인아주머니는 우려 섞인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서 술친구를 하겠다고 나서신 거구나.’
이규한이 앞에 놓인 소주잔을 매만 지며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게……
“술값 낼 돈 있습니다.”
“술값 못 받을까 봐 걱정돼서 본 거 아냐.”
“그럼요?”
“죽지 마.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 라도 죽지 마. 이 악물고 버티다 보
면 분명히 다시 좋은 날이 올 거 야.”
영화 ‘만월’이 흥행에 참패하고 아 내가 내밀었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난 후,이규한은 혼자 포장마 차를 찾아갔었다.
당시 혼자서 술을 마시던 이규한에 게 포장마차의 주인아주머니가 건넸 던 말이었다.
아마 이규한의 표정이 금방 한강에 뛰어들 것처럼 어두웠기 때문에 그 런 말씀을 건넸으리라.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 이 들었다.
이규한의 표정이 워낙 어두워서 평 소 안면이 있던 선술집 주인아주머 니가 술친구를 해 주겠다며 나선 것 이리라.
“오늘이 무슨 요일인 줄 알아요?”
“오늘이요?”
‘갑자기 왜 무슨 요일인지 묻는 거 지?’
영문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이규한이 대답했다.
“토요일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맞아요. 토요일이에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신 겁니까?”
“원래 토요일은 일주일 중에 손님 이 가장 많은 날이에요.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목인 셈이죠. 그 래서 음식을 만들 재료도 미리 많이 납품을 받아 뒀어요. 그런데 오늘따 라 손님이 유독 없네요.”
주인아주머 니 의 말씀대로였다. 토요일 밤임에도 불구하고 선술집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이규한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 다.
“손님이 없어서 걱정이 많으시겠네
요.”
아까 음식 재료를 미리 많이 납품 을 받아 뒀다는 말이 떠을라서 이규 한이 말했지만,주인아주머니는 고
개를 흔들었다.
“장사를 하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법이죠.”
“하지만……
“늘 장사가 잘될 수는 없어요. 또 늘 내 욕심처럼 장사가 되진 않아 요. 이번 주엔 장사가 잘 안 되도 다음 주엔 잘될 수도 있으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요.”
주인아주머니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라면 가볍게 홀려들었을 이야 기.
했다.
주인아주머니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늘 좋을 수는 없다. 지금은 어렵 지만 다시 좋은 날이 올 수도 있 다.’ 이규한이 그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아까 내가 혼자 술을 마시 는 건 사장님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죠? 왜 그렇게 말씀드렸는 지 아세요?”
“…모르겠습니다.”
사장님과 함께 우리 가게에 찾아왔 던 손님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어 요.”
“어떤 공통점이 있었습니까?”
“사장님을 좋아했어요.”
“저를… 좋아했다고요?”
“눈빛에서 그게 보였어요. 만약 사 장님이 힘든 상황에 처하면 그 사람 들이 사장님을 돕기 위해서 분명히 나설 거예요.”
‘정말 그럴까?’
어쩌면 이규한을 위로하기 위해 꺼 낸 말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주인아주머니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이규한은 힘이 났다.
‘그때와 다른 점은… 내가 혼자가 아니란 점이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이규한이 소주병을 들었다.
“한 잔 더 받으세요.”
“아니요. 더 마시면 취해요. 일행분 들이 곧 도착하실 텐데 안주를 준비 하려면 취하면 안 되거든요.”
주인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떠 났다.
다시 혼자 남은 이규한이 앞에 놓 여 있던 잔을 들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신과 같이’의 제작을 포기하자. 그렇지만 ‘신과 같이’라는 작품을 포기하더라도 사 람은 잃지 말자. 사람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니까.”
이규한이 각오를 다진 후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갔을 때였다.
딸랑.
선술집의 문이 열렸다.
당연히 주태훈이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정후가 선술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이규한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왜 청승맞게 혼자 술을 드시고 계 신 겁니까?”
이규한이 앉아 있는 탁자 앞으로 다가오며 하정후가 물었다.
“정후 씨가 여긴 어떻게……?”
“혹시 이것도 필요한 겁니까?”
“네?”
“혼술을 하는 것도 좋은 영화제작 자가 되는 데 필요한 부분이냐는 뜻 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이규한이 대답하자 하정후가 안도 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란 겁니까?”
“혼자 술을 마시는 건 질색하는 편 이거든요.”
하정후가 자리에 앉자마자 술잔을 들었다.
“한 잔 주시죠.”
그렇지만 이규한은 소주병을 들어 술을 따라 주는 대신 질문을 던졌 다.
“정후 씨가 왜 여기 나타난 겁니 까?” “저한테 술을 사 주시는 게 아까우 십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태훈이한테 이 대표님이 여기 계 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까 주태훈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 줬었다. 주태훈이 위치를 알려 줬기 때문에 하정후가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태훈이가 먼저 도착할 줄 알았는 데,어쩌다 보니 제가 먼저 도착했 네요.”
“그럼 혹시 태훈 씨가 저를 만나려 는 이유도 아십니까?”
“대충은 압니다.”
“무엇입니까?”
“그건 직접 들으시죠.”
“하지만……
“이 녀석도 양반은 못 되거든요. 마침 도착했네요.”
하정후의 말대로였다.
주태훈이 선술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형,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내가 빨리 온 게 아니라 네가 늦 게 도착한 거거든.”
“성격 급한 건 여전하시네.”
“됐고. 뛰어왔더니 목이 마르네요. 대표님,저도 한 잔 주시죠.”
주태훈이 탁자 앞에 앉으며 술잔을 내밀었다.
“받으시죠.”
쪼르륵.
이규한이 소주병을 들어 주태훈이 내밀고 있는 잔을 채웠을 때였다.
“서운합니다.”
주태훈이 불쑥 서운함을 토로했다.
‘똑같네.’
을 머금었다.
얼마 전 하정후도 주태훈과 마찬가 지로 서운함을 토로했었기 때문이 다.
“제가 미리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서 죄송합니다.”
이규한이 사과하자 주태훈이 소주 잔을 비운 후 입을 뗐다.
“제가 진짜 서운한 게 뭔지 아십니 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이야기를 이 대표님이 아니라 형에게 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의리 있는 모습을 보여 줄 기회를 놓쳤다는 게 서운한 겁니 다.”
주태훈이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뜻이지?’
이규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 주태훈이 덧붙엿다.
“만약 ‘신과 같이’의 촬영이 뒤로 미뤄지더라도 저는 기다릴 겁니다.”
“진심… 이십니까?”
“물론 진심입니다.”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겁니 까?”
“이 대표님도 기다려 주셨으니까 요.”
“네?”
“액터스 길드와의 전속 계약이 끝 날 때까지 이 대표님도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고 기다려 주시지 않 았습니까?”
주태훈의 말대로였다.
그의 소속사였던 액터스 길드 조진 석 대표는 주태훈이 ‘신과 같이’가 아니라 ‘어메이징 히어로즈’에 출연 하길 바랐다.
조진석 대표를 이길 수 없다고 판 단한 주태훈은 ‘신과 같이’에 출연 하기 위해서 전속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사를 밝혔 다. 그리고 이규한은 주태훈을 캐스 팅하기 위해서 그의 전속 계약이 만 료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다릅니다.”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태훈 씨를 기다릴 때는 두 달이란 기간이 명확했습니다. 그렇지만 현 재 ‘신과 같이’는 투자 유치에 어려 움을 겪고 있습니다. 언제 투자를 유치해서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니, 과연 ‘신과 같이’라는 작품이 크랭 크인이 들어갈 수 있을지 여부조차 도 확실치 않습니다.”
이규한이 차이점에 대해서 설명한 후 덧붙였다.
“태훈 씨는 ‘어메이징 히어로즈’에 출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주태훈이란 배우에 대한 애정이 없 어서 꺼낸 말이 아니었다.
이규한은 여전히 주태훈이 ‘신과 같이’의 주연을 맡을 적임자라고 판 단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욕심만 내세울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배우 주태훈의 앞날도 생각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숙 기간이 길었던 만큼 서둘러 복귀하는 것이 필요한 주태훈에게는 ‘어메이징 히 어로즈’에 출연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꺼낸 말이었다.
“듣던 대로네요.”
“네?”
“이 대표님이 오지람이 넓다는 소 문을 들었거든요. 절 걱정해 주시는 마음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렇지 만 이미 저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인생은 길고,저는 이 대표님과의 인연을 이어 가고 싶습니다.”
주태훈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
‘정말 이래도 될까?’
이규한이 확신 없는 표정으로 고민 할 때였다.
“그리고 정후 형과 연기할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으니까요.”
주태훈이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하정후 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태훈이의 이야기대로입니다.”
“그럼……?”
“저도 ‘신과 같이’에 참여하기 위해 서 스케줄을 비워 두기로 했습니다.”
이규한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정후는 충무로 캐스팅 후보 1순 위인 배우.
그를 캐스팅하기 위해서 수많은 시 나리오가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 작품들 중 하나를 골라서 출연 한다면 하정후는 수억대의 개런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과연 크랭크인이 가능 할지 여부도 확실치 않은 ‘신과 같 이’에 출연하기 위해서 다른 작품 출연을 거절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 이다.
겁니까?”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이런 선택을 내 린 겁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한가 보군요.”
하정후가 씨익 웃으며 다시 말했 다.
“만약 제가 제작을 해 보지 않았다 면 ‘신과 같이’의 출연을 깔끔하게 포기했을 겁니다. 그런데 제작자로 서 작품을 제작해 보고 나니 ‘신과 같이’ 출연을 포기하지 못하겠습니 다. 이 대표님이 ‘신과 같이’라는 작 품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또 이 작품을 제 작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알고 있고요.”
“그렇지만……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 다.”
“무엇입니까?”
“아직 대한민국 최고의 제작자인 이규한 대표님의 제작 노하우를 다 배우지 못했습니다. 과연 이 대표님 이 위기 상황에서 찾아낸 최후의 방 법이 무엇인지 궁금해서라도 ‘신과 같이’에 출연하기로 했습니다.”
1억 관객 제작자